윤기는 굳은 얼굴로 한참이나 정국을 응시했다. 정국의 손에 들린 총구, 그의 귀에 꽂혀있는 까만 이어폰. 총을 쥔 자세까지. 찰나의 순간 정국을 스캔한 윤기가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하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국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정국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집요하게 윤기를 살폈다. 혹시나 싶었지만 윤기의 정장 안으로 살짝 보이는 검은 방탄조끼가 단 번에 모든 것을 설명했다.
윤기가 무슨 말을 꺼내려는 순간, 정국이 이어폰과 연결된 무전의 신호를 꺼버렸다.
“뭐냐 전정국.”
“뭡니까 민팀장님.”
정국이 허탈한 듯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그 때 로비에서부터 희미하게 울리는 발걸음 소리에 윤기가 조용하라는 듯 검지를 올렸다. 눈을 굴리며 동태를 살피던 윤기는 곧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정국에게로 다가갔다.
“우리 팀 사람들은.”
“영리한 사람들은 15층에 남아있겠죠.”
“전정국. 다시 올라 가. 우리 팀 살펴.”
정국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지금은 회사 소속 아니고 정보원 신분이라서 그 명령 못 따르겠는데요.”
“그럼 부탁이라고 치자. 딱 봐도 내가 너보다 윗기수지만, 어차피 너나 나나 보안상 어디 국인지 소속은 못 밝힐 테고.”
“부탁이라……. 팀 때문입니까. 아니면 김대리님 때문입니까.”
정국의 물음에 윤기의 얼굴이 금세 굳었다.
“내 뒤도 캐고 다녔냐?”
“그렇게 표정관리 안 되면 요원으로서 자격 박탈감인데요.”
그 때 정국의 눈에 맞은 편 계단으로 올라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낯선 남자의 모습에 정국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럼 올라가겠습니다. 팀장님이 이렇게 부탁하시니까."
윤기가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로 어이가 없는 듯 웃었다. 정국이 다급하게 계단을 올라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 마주칠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오늘 저 못 본 걸로 해주십시오.”
THE TERROR LIVE
전정국이 홀연히 사라진 뒤 사무실에는 잠깐 침묵이 흘렀다. 모든 것을 책임질 것처럼 말하고 떠난 정국의 모습에 모두 할 말을 잃어서였다. 근무한지 1년도 채 안 된 막내 사원이 거대 기업을 상대로 한 테러를 제 손으로 해결 할 것처럼 구는 게 다소 이상하기는 했다. 사무실 사람들은 곧 너나 할 것 없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비웃음에 가까운 조소였다. 특히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운 박 차장은 검은 가죽의자에 앉아 비웃다 못해 막내 사원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걸걸한 그의 음성이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요즘 어린 것들은 겁이 없어. 지가 뭐 영웅이라도 될 것처럼. 다들 걔 말만 듣고 이러고 있을 거야? 내가 걔보다 이 회사를 20년은 더 다녔어. 눈 감고도 비상 엘리베이터를 찾아. 난 간다.”
열 둘, 열 셋, 열 넷.
박차장이 서류가방을 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마케팅B팀 사람들이 그를 따라 문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마케팅 A팀은 안 움직여? 아주 무사태평하시네.”
사무실 문을 열던 박차장이 힐끔 우리 쪽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당연히 사무실 사원들 모두가 자신을 따라 나설 거라 생각한 것 같았다.
스물 여섯, 스물 일곱, 스물 여덟.
“전 안되겠어요. 갈래요.”
우리 팀 사람들도 하나 둘 동요하기 시작했다. 따라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긴장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양손으로 눈썹 부근을 꾹꾹 누르고 있을 무렵, 지민이 내 앞에 쭈그려 앉아 물었다.
"선배 우리 여기 있어도 괜찮을까요?"
"가고 싶어?"
"다들 움직이니까 불안해서요. 어떻게 할까요? 선배."
박차장과 마케팅B팀 무리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마흔 하나, 마흔 둘. 마흔 셋. 마흔 넷.
석진 선배와 나, 박지민 딱 세 사람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흘끗 선배를 쳐다봤다. 석진 선배가 내 답을 기다리려는 듯 팔짱을 낀 채로 두 눈을 감았다. 순간 민윤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지금껏 이 자리에 나를 붙들어놨던 건 전정국의 마지막 말이었다. 딱 100까지 세고 있으라는 확신에 찬 그 녀석의 얼굴. 그리고 가장 흔들리는 지금 나를 붙잡는 건, 귓가에 선명하게 남은 민윤기의 마지막 말이다.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
쉰일곱, 쉰여덟, 쉰아홉.
지금껏 민윤기의 선택이 잘못되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내가 믿는 건, 늘 우리 팀을 승승장구하게 했던 민팀장의 기가 막힌 촉, 아니 그의 현명함이다.
“전 여기 있겠습니다.”
문을 열어놓고 망설이던 마케팅B팀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지체할 시간 없어, 서둘러.”
예순 둘, 예순 셋.
내 답을 들은 박차장이 혀를 끌끌 차고는 직원들과 함께 문을 닫고 나섰다. 정말 이제는 지민이, 석진 선배, 나. 우리 셋뿐이었다.
YTN에서는 여전히 파란 색 굵은 자막이 속보를 달고 나왔다. ‘몇 발의 총성, 내부 사정 파악에 어려움 겪어’, ‘무장괴한 북한 소행 추정’, ‘기업 내 전산망 끊겨 소식 수집에 난항’과 같은 무시무시한 단어들이 브라운관을 가득 채웠다. 방송사들은 앞 다투어 소위 테러전문가라는 사람들과 전화 연결을 시도했다. 어디를 틀어도 화면에는 이 건물 뿐이었다.
“선배, 저 화장실이...”
지민이 울상이 되었다. 다녀오라는 내 말에 지민이 잠시 망설이더니 석진 선배를 흘끗 쳐다봤다. 선배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겁먹은 지민을 다독이며 자리를 뜨려던 석진 선배가 나를 보며 씩 웃었다.
“김대리도 같이 갈래?”
“아무리 위기 상황이라도 존엄성은 지켜주시죠?”
“딱 삼십만 세.”
선배가 비장한 표정으로 전정국을 따라하다가 민망한지 픽 웃어버렸다. ‘테러’, ‘총성’ 같은 화면 속 문구가 지금 이 상황과는 꽤나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김대리 너무 긴장한 것 같아서.”
선배가 지민이를 데리고 나서자 마자였다. 와장창 유리 깨지는 소리가 건물 안을 울렸다. 화들짝 놀라 밖으로 따라 나가려다가 걸음을 멈췄다. 긴장하지 말자. 괜찮다. 괜찮아. 애써 나를 다독이려 해도 심장은 쉴 새 없이 쿵쾅거렸다.
온 신경이 대형 스크린 속 여자 앵커의 목소리로 향했다. 자꾸 불길한 단어들만 내뱉는 화면 속 태평한 얼굴들에 짜증이 나서 모니터 앞으로 다가가 신경질 적으로 리모컨을 눌렀다. 화면이 뚝 끊기고 적막이 이어지자 괜히 더 긴장감은 더 심해졌다. 손바닥 가득 땀이 배어났다. 심호흡을 하며 내 자리로 돌아가 앉으려다가 내 자리 대각선으로 보이는 민윤기의 책상으로 향했다. 부서 내 가장 안쪽에 위치한 그의 책상 밑에 숨어 있는 게 그나마 제일 안전할 것 같아서였다.
여든 다섯. 여든 여섯. 여든 일곱.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주재원 발령 공고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언제 봐도 짜증나는 서류였다. 민윤기 이름 석 자 옆에 적힌 입사 동기의 이름에 확 열이 올랐다. 그리고 그 서류를 집어 올린 순간 책상 밑으로 툭 떨어진 종이에 내 심장도 바닥으로 곤두박칠 쳐버렸다.
“뭐야 다 버렸다며.”
바닥에 놓인 폴라로이드 한 장. 나와 민윤기의 첫 데이트 때였다. 죽어도 이건 못하겠다고 얼굴을 흔들던 그에게 억지로 씌운 사자 모양 머리띠와 웃을 때 드러나는 입동굴에 시선이 멈췄다. 씁쓸한 웃음이 배어나왔다.
한참이나 예전 기억에 젖어있을 즈음, 낯선 발자국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점점 커지는 소리에 재빠르게 민윤기의 책상 밑으로 주저앉았다.
누군가 문을 열어 재낀 듯 했다. 그러나 거친 숨소리 외에 어떤 말도 없었다. 지민이나 석진 선배였다면, 분명 내 이름을 불렀을 텐데. 나도 모르게 눈을 꽉 감았다. 제발. 살려주세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제발.
아흔 여덟. 아흔 아홉.
“이대리님.”
익숙한 목소리. 전정국이었다. 온 몸에 힘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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