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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연애 안 할 거야?"
"야...."
연애를 시작한 지 한 달쯤 되었나.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 누가 그러던데. 그게 사실이었는지 한 달 만에, 보는 나도 놀라울 정도로 미모에 물이 오른 한 친구가 내게 물었다. 그럼 오히려 나보다 더욱 놀라며 조금 더 오래 나를 봐왔던, 다른 한 친구가 대신 그녀를 말렸다. 정작 난 멋쩍게 웃으며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홀짝일 뿐이었다. 고등학생 때도 많긴 했지만 정말 느끼는 게, 대학에 가고 주위 거의 모든 친구들이 하나둘 제 짝을 만들어 왔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누가 보면 민짜가 풀릴 때까지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대학을 졸업한 지금은 그때보다 더해졌다면 더해졌지 덜해지진 않았다. 사회에 나가 더 많은 사람들과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다들 한 사람씩은 꼭 데리고 왔다. 내 주위에 나 말고 연애 한번 해보지 못 한 사람은 손에 꼽기도 어려울 정도로. 난 절대 연애 안 해! 난 독신주의자야! 라고 외쳤던 아이들 마저도 그 말이 무색하게 옆에 누군가를 끼고 왔다.
하지만 그건 나와 무관한 일이었다. 주위 상황이 그렇다한들 전혀 부럽지도, 아쉽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사랑을 믿지 않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내겐 아직도 어색한 그 단어는 신비롭고 놀랍고 아름다운 것임은 확실했다. 단지 난.
전혀 날 놀리거나 비꼬는 물음이 아니었음에 그렇게 멋쩍게라도 웃어넘길 수 있었다. 눈에 띄게 웃음이 많아졌고 성격마저 밝아지고. 단지 친구로서 걱정되고 좋은 것은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었겠지. 그러니 그녀들이 내 눈치를 볼 필요는 전혀 없었다. 내가 뭐라고. 대답을 못 하고 그렇게 넘길 수밖에 없었던 내가 오히려 미안해했으면 했지. 나로 인해 순식간에 어색해진 분위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왜 나 때문에 분위기가 이렇게 처져야 해.
"일은, 할만 해?"
정적만이 낮게 깔리며 아무 죄도 없는 나머지 두 친구가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 나름은 분위기를 풀어보자, 입을 열었던 것이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내 물음에 어, 어? 하며 잠시 당황을 하는 듯했지만 다행히도 금방 딱딱했던 분위기는 쨍- 깨지고 다시 수다의 장이 열렸다. 상사가 어쨌느니 새로 들어온 인턴이 어쨌느니.
상처를 치료해줄 사람 어디 없나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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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려운 취업길에 뛰어들어 멀다면 다른 지역까지, 꽤 떨어진 곳으로 다들 취직을 한 터라 바쁘기도 바쁘고 어쩌다 시간이 나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오랜만에 본 익숙한 얼굴들과 수다도 떨고, 기분이 참 좋았다. 그렇게 해가 지고 이 밤을 즐기려는 하이에나들이 슬슬 기어 나올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또 다음 출근을 위해 우린 학생 때와 다르게 다시 흩어져야 했다. 대학생 때는 기본이 12시, 기분 좀 내면 새벽까지 놀고 그랬는데. 그때가 정말 좋았지. 괜한 옛 생각이 끌어 올랐다. 취했나. 이제는 익숙해진 힐을 또각거리며 조금은 가파른 언덕을 걸었다. 간만에 신나게 놀고 왔는데 내일을 생각하니 한숨이 푹푹 나오는 걸 어떻게든 막아가면서.
엄마와 떨어져 나와 혼자 살게 된 지도 꽤 되었다. 입사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할 일은 넘쳐났고 내 체력은 그걸 버텨주지 못 했다. 원래 살던 집과 새로 들어간 직장은 거리가 꽤 있었기에 출근이 9시까지라해도 나로선 일어나기 힘든 이른 시간에 눈을 떠야 했다. 그래서였는지 어떻게 쉬어도 피로가 떨어지긴커녕 점점 쌓여 목구멍을 뚫고 나와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해댔기에 평생을 살았던 편한 우리 집을 포기하고 운 좋게 얻은 첫 직장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해 여자 혼자 어렵고 위험한 자취 생활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덕분에 더 잘 수는 있었지만 혼자 살아서인지 외로움은 내 피로가 떨어지는 속도보다 더욱 빠르게 날로 쭉쭉 늘어갔다. 그렇다고 내가 사교성이 있는 성격도 아니고 주위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들과 친해지지도 못 했다. 사실 한번 마주친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직장에 누구 하나 친한 사람이 있어, 아님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떨 수 있어. 이젠 사람 냄새가 고파 피곤함보다는 외로움을 더 풀어주어야 할 때였다, 지금은. 그래서 왜 연애는 안 하냐고. 그건 별개였으니까. 외롭다고 연애를 할 내가 아니다. '못' 일수도 있고 '안' 일수도 있고.
이런 나를 엄마가 걱정하시는 것도 당연했다. 몸이 피곤하면 가까운 곳으로 직장을 옮기는 건 어떠냐고. 자취라니, 그 위험한 곳에 날 혼자 떼어놓을 수 없다며 말리셨지만 지금 얻은 직장도 어떻게 얻은 건데. 다른 곳으로 옮기는 건 다시 며칠, 몇 달간의 백조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했으니 못 이기는 척 포기해줄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내 독립에 대해 엄마를 설득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엄마의 걱정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라서. 실은 나도 무섭기는 했다. 이미 겪었던 것들도 있고. 위험하지. 하지만 이겨내야 할 부분이었다. 언제까지 엄마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 수도 없는 거고 마냥 겁을 먹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끝내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걱정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니. 결국은 오랜 설득 끝에 집을 나왔고 어쨌거나 이렇게 잘 살고 있지 않은가. 외로움에 사무쳐 가끔 정말 쓸쓸하긴 하지만. 엄마와 통화를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울컥울컥 올라오는 걸 숨기려 해도 엄마는 곧잘 눈치채셨다. 그래서 난 거짓말을 해야 했다. 회사 사람들과 정말 잘 지내고 있다고, 서로 나와 함께 어울리려고 그렇게 난리라고. 외롭지 않다고 난 괜찮다고. 잘 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이런 선의의 거짓말로 효녀가 될 수 있다면 나는 당장 그렇게 하겠다.
와, 나 진짜 취했나. 왜 이렇게 깊게 들어가지. 취했다, 취했나 보다.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이러는 걸 보면 몸이 피곤하긴 한가 보네. 이제쯤 긴장이 풀어져 살살 아파오는 종아리와 허벅지를 톡톡 쳐가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그만 좀 해!"
자취방이 가까워질 즘.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누가 싸우나. 꽤 늦은 시간인데. 여자 목소리였는데 잔뜩 흥분했는지 멀어서 잘 들리진 않았지만 웅웅 혼자만 지껄여댔다. 어디서 들리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집 앞에서 싸우는 건 아니었으면 좋겠다.
"진짜 질린다, 이제. 사람이 왜 그래, 대체? 너 이거 병이야, 병. 알아?"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하필 우리 집 앞이었다. 발길을 옮길수록 목소리가 뚜렷해지더니 결국 시발점은 내 자취방이 있는 건물 앞이었다. 헤어지는 중인가 보네. 왜 우리 건물 현관 앞에 서서 저러는지. 무슨 사연인지야 내 상관이 아니고, 저들을 뚫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가 가장 걱정이었다.
"무서워서 못 살겠어! 이건 집착이라고! 너란 애 이제... 진짜 보지 말자, 우리."
"가지마."
그 둘에게 다가갈수록 목소리는 더욱 앙칼지게 내 귀를 뚫었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자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기까지 했다. 꼭 들으려는 건 아니었지만 이 동네에서 드물게 들리는 큰소리였고 귀가 저절로 기울여졌다. 꼭 그렇게 집중을 하지 않아도 귀를 잘 울리는 목소리기도 했고. 하지만 내게는 잘 없는 일이라 호기심이 생기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집착이라니. 꽤나 심하게 싸우네. 할 말을 다 끝낸 것인지 이제 그만 자리를 뜨려는 여자를 앞에 서있던 남자가 붙잡았다. 나 지금 공짜로 드라마를 보고 있는 건가. 그 모습이 헛웃음 나올 만큼 살짝 우스웠다. 저 둘을 비웃는 것은 아니지만 난 처음 보는 장면이었으니까. 항상 드라마에서만 보던 극적인 장면이었으니까. 근데 내가 정말 저 둘을 뚫고 집으로 안전히 들어갈 수 있을까.
"이거 놔!"
"너 이대로 가면,"
"...."
"난 죽어버릴지도 몰라."
와. 저 남자 진짜 극단적이네. 사랑 때문에 목숨까지 버려. 남자의 입에선 잠시 심장을 쿵- 하게 만드는 말이 터져 나왔다. 남자의 말에 여자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듯 비틀거렸다. 순간 나도 살짝 무서웠는데 당사자인 저 여자는 어떨까. 내가 도와줘야 하는 건가, 잠깐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잠깐. 하지만 난 오지랖이 넓은 타입도 아니고. 무엇보다 저 둘 일에 아무 상관도 없는 내가 왜 끼어들어. 괜히 건드렸다가 나까지 봉변을 당할까 무섭기도 했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게다가 내 코가 석자인데 누가 누굴 도와줘.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저 남자의 말은 진심인 듯 표정마저 소름 끼쳤다. 아까 여자의 입에서 집착이란 단어도 나오고 괜히 내가 껴서 좋을 게 전혀 없었다. 안 좋으면 안 좋았지. 뭐, 끼어들 생각도 없긴 하지만. 저 둘을 보고 있자니 내 발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지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저 둘의 대화에, 행동에 집중하고 있었고 언제부터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걷고 있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저 둘이 어딘가로 사라지기 전까진 집으로 들어가긴 그른 것 같은데 어디로 숨어 있어야 하는 건가.
"너... 너...,"
"내가 좋다며. 나 사랑한다고 했잖아. 근데 어떻게 사랑이 변해? 그게 그렇게 쉽게 변해? 이게 어떻게 집착이야. 난 사랑이야, 사랑."
"...."
"내가 그 새끼 만나지 말랬지? 내가 싫다고, 너랑 있는 거 싫다고."
"하... 제발.... 그 사람 우리 오빠야.... 너 진짜 제정신이야?"
"니네 오빤 남자 아니야? 남잔 다 똑같아."
좀 심각하네. 저 정도면 정말 병이다. 문제가 있다 싶었다. 이건 보통 드라마가 아니고 극단적 싸이코 로맨스구나. 오고 가는 대화들이 심상치가 않았다. 집에 얌전히 들어가긴 정말 글렀고, 잠깐 피해있다가 둘이 없는 틈에 들어가는 게 지금 나온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내가 왜 쟤네 때문에 아까운 휴식시간을 버리는 것이며 다리도 아파죽겠는데 계속 걸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안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는 아니더라도 조금 봐줘서 그렇게 하겠다.
착-.
몸을 돌려 다시 내려가려는 그때 내 뒤에선 꽤나 큰 마찰음이 들렸고 나도 모르게 고개가 뒤로 향했다. 여자가 남자의 뺨을 때린 듯 남자의 고개는 돌아가 있었고 여자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 남자를 밀쳐내고 몇 걸음 뒷걸음질 치더니 다행히 나와는 반대쪽으로 마구 달아났다.
그리고 더 소름 돋는 건.
추워서 올라오는 게 아닌 정말 소름이 끼쳐서 올라오는 닭살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손바닥이 닿은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며 하하- 하늘을 보고 웃어댔다. 간만에 무서웠다. 혼자 집에서 공포영화를 볼 때보다 더. 그건 영화지만 이건 진짜니까. 진정 싸이코가 아닌가 걱정이 되었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발이 아픈 것도 잊고 나 또한 왔던 길을 다시 내달렸다. 정말 우다다다 뛰쳐내려왔다. 힐을 신어 속도는 더욱 잘 붙었고 그 김에 얼른 뛰었다. 여기서 넘어지면 무릎이 아스팔트에 갈리겠지만 저 남자에게 걸리면 내 온몸이 바닥에 갈릴지도 모른다, 나 혼자 공포영화를 찍으면서.
그리고 또한 생각했다. 역시 남자란 동물은.
-
얼마쯤 동네를 돌았을까. 이제쯤 그 남자는 가고 없겠지, 다시 조심조심 자취방이 있는 언덕을 올랐다. 내가 오늘 여길 몇 번이나 오르는 건지. 힐을 벗고 걷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발이 무척이나 아팠다. 그렇게 걸어 다니고 심지어 팔팔 뛰어다녔으니 멀쩡한 게 이상하지. 나 힐 신고 뛰기도 했다.
그 커플, 아 이젠 아닌가. 그 남자와 여자가 있던 우리 빌라 앞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안한 마음에 주위를 휙휙 둘러보며 내가 무슨 도둑이라도 된 것처럼 살금살금 현관으로 들어갔다. 잔뜩 겁을 먹어 숨까지 꽉 참고 또각또각 계단을 올랐다. 엘리베이터가 있는데도 탈수가 없었다. 아까 그 남자를 생각하니 괜히 전에 보았던 무서운 장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가장 무서운 건 아직도 혹시 이 근처에 그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가끔 이런 나를 보면 독립해 자취를 한다고 당차게 뱉은 게 참 신기하기도 했다. 매사에 하도 극단적으로 생각해서 모든 일에 나 자신을 주인공으로 세워 가장 무서운 시나리오를 써재끼니. 내 스스로 무서움과 두려움을 만드는 능력이 전문가 뺨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왜 무서운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건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어떻게 우리 옆집 문 앞에 아까 그 남자가 쭈그리고 앉아있을까. 두 무릎에 자신의 머리를 묻고 있어 얼굴은 안 보였지만, 실은 아까도 남자의 얼굴은 보지 못 했지만. 얼핏 생각나는 그 옷이, 아까 내게 오랜만에 소름을 안겨주었던 그 남자의 옷이 맞았다. 설마하니 그 남자가 옆집 남자였다니. 아니다, 그 여자 집인가. 뭐든 이 소름 끼치고 싸이코스러운 남자와 연관된 집임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둘이 왜 우리 집 앞에서 싸웠으며 이 남자가 왜 여기에 이러고 있겠는가. 머지않아 이 집을 떠야겠다.
하필 구두는 왜 이렇게 크게 또각거리는지 그 남자를 발견하고 잠시 멈췄다가 얼른 들어가야지 싶어 발을 떼면 그렇게 크게 복도를 울렸다. 다시 계단을 내려가 이 남자가 사라질 때까지 또 동네를 돌자니 내 발이 버텨줄까 싶었고. 제일 중요한 건 내려가는 내 구두 소리를 듣고 날 해치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물론 그런 생각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여자의 말대로 집착도 했던 것 같고 아까 여자와 헤어져 기분도 몹시 시궁창일 텐데 가능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발 그 남자가 고개를 들지 않기를 바라며 허공 위를 걷는 듯 사뿐사뿐 한 계단씩 올랐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와, 번호키 누르면 또 소리 날 텐데. 손에선 땀까지 나고 있었다. 어렵게 우리 집 문 앞에 섰고 여전히 그 남자가 미동조차 하지 않는 모습을 힐끗거리며 도어락을 천천히 열어 하나하나 번호를 눌렀다. 내가 번호를 다 누르고 문 손잡이를 잡을 때까지 빌고 빌었던 내 마음을 알아준 듯 그 남자는 고개 한번 들지 않고 그 자세 그대로 그렇게 있었다. 계속 그렇게 있어 주세요.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잖아. 얌전히 집으로 들어갈게. 난 아까 아무것도 보지 않았어. 입 꾹 다물게요.
그러다
턱- 하고 내 손목이 그 남자에 의해 잡혔고 난 반사적으로 손목을 빼고 소리를 빽- 질렀다.
"아!"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우선 내 손을 남자가 잡았다는 것과 그것도 지금 내게 가장 무서운 존재인 저 남자가 잡았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나갔다. 얼른 집으로 들어가 숨어버리고 싶었지만 문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은 움직이질 못 했고 다리에 힘마저 풀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쿵쾅 무척이나 빠르게 뛰어 내 귀를 두드렸다.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얼굴은 상기되어 곧 터져도 뭐라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어떡하지. 몸을 잔뜩 움츠리고 그 남자의 다음 행동을 머릿속에 마구 그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때리든가 아니면 나를 더 구석으로 데려가 마구 때리든가. 눈물이 나올 듯 눈이 꾸물꾸물 거렸다. 참자 참자. 눈물이 나면 눈앞이 흐려져 도망갈 때 힘들다. 경찰에게 전화라도 하고 싶었지만 평소엔 손에 잘만 들고 다니던 핸드폰을 왜 하필 이때 가방에 넣어놨는지 속으로 백 번이고 내 뺨을 때렸다. 하긴 손에 들고 있었어도 이 남자의 바로 앞에서 당당히 전화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하. 제발 살려만 주세요. 나 진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뭘 그렇게 놀라요. 내가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내가 온갖 걱정을 하고 있을 때도 착하게 숙여져 있던 고개가 드디어 들리고 그 남자는 나와 마주했다. 남자의 행동을 주시하려다 돌연 맞닿은 시선을 더 참지 못 하고 얼른 고개를 앞으로 돌려 애석하게도 꽁꽁 얼어붙어 열지 못 하는 문 손잡이를 바라보았다. 정말 잡아먹힐지도 모르겠다 생각하고 있을 찰나 남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고 난 믿지 못 했지만 믿고 싶었다. 내 손목을 잡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단지 심심해서, 그냥 그런 거라고. 제발 내가 집에 들어갈 때까지 내게 아무 짓도 하지 말아 달라고. 속으로 수 백 번이고 외쳤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저기요."
"...."
침이 꼴깍 넘어갔다. 나 이렇게 저 남자에게 죽는 건가. 홧김에, 아까 그 여자에게 차여서 기분 안 좋은 김에 날 충동적으로 죽이거나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날 부르는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답할 정도의 여유가 내겐 없었다. 만약 돈을 달라고 하면 당장 내 지갑을 탈탈 털어줄 수 있으니 날 해치지만 말아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도 딱딱하게 굳어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얼른 집으로 들어가는 게 답이라고. 건물 밖으로 뛰쳐 나갈 정신도 몸도 아니니, 여전히 떨리는 손과 다리를 위해서라도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나랑 사귈래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어떻게든 손에 힘을 주고 문을 열어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쾅! 하고 문이 닫히자마자 내 마음을 조금은 안심시켜줄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우리 집 문을 두드리진 않겠지. 이 문을 열고 들어오진 않겠지. 문에 기대서서 방금까지 꽉 막혀 못 쉬었던 숨을 후후 내쉬며 치마에 아무렇게나 이미 축축해진 손바닥을 문질렀다. 땀이 이렇게 흥건하게 묻어있다니. 극도로 흥분과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도 손이 벌벌 떨리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불안한 다리는 힐을 신고 있어 더욱 날 힘들게 만들었다. 지금도 저 문밖에 있을지 모르는 남자와 더욱 멀리 떨어지자, 벌벌 떨려 잘 벗겨지지도 않는 힐을 마구 던져 놓고 안으로 들어가 침대 앞에 기대앉아 몸을 웅크렸다. 불안한 마음에 손톱을 딱딱 물어뜯었다. 곱씹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머릿속에 플레이 되는 상황들이 끔찍했다. 몸이 덜덜 떨리고 등허리에선 식은땀이 마구 흘렀다. 다신 겪고 싶지 않았다.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리라.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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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봐. 너 진짜 좋아하냐?"
"야야, 애 울겠다-."
"얼굴 좀 봐."
"작작해라. 이러면 우리가 나쁜 애들 같잖아."
자리에 얌전히 앉아있던 어느 평범한 여학생에게 날벼락은 한순간에 찾아왔다. 오늘 급식으로 나온 스파게티를 싹싹 긁어 맛있게 해치우고 신나게 반으로 돌아와 다음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곧 복도에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기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궁금했지만 별일 아니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조용히 제 일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그 웅성거림의 주인공이 자신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시끄러운 소리들이 자신을 향하고 있을 때에도 여학생은 눈만 깜빡이며 애써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평소 자주 보았던 그의 친구들이었다.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는 여학생을 둘러싼 여러 명의 남학생들은 서로들 킥킥 비웃음을 날리며 여학생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금세 얼굴은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숨기고 싶었는데. 누구든 그럴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들킨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게다가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입에 비웃음거리로 올려진다면 그 수치스러움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 한 채 여자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만 꽉 물었다. 원래 내 일보다 남 일 구경하는 게 더 재미있는 법.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다른 반 아이들까지 구경하러 와서는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무슨 일이야? 있잖아 쟤가. 헐? 진짜? 와, 꼴에? 지가 티 내고 다녔대!
자기 일이 아니라고 아무렇게나 떠들어댔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지금 자신들의 눈과 귀만 즐거우면 그뿐.
"왜 말을 못하실까-."
"진짠가 보지."
"근데 이 새낀 어디 갔어?"
"걔 아까 한 대 피고 온다고 소각장."
"어?"
더 이상 참지 못 하고 부들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수치. 부끄러움. 창피함. 속에선 분노까지 하나 더 올라오고 있어 꾹 참으며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다른 사람들에겐 그저 구경거리, 재밌는 간식거리가 될 수도 있구나. 그렇게 우스운 게 될 수도 있구나.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 말려주는 사람,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다. 방금까지 함께 떠들던 친구들도 그저 멀리 떨어져 지켜만 볼 뿐. 사실임에도 맞다고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부정을 하든 인정을 하든 지금 자신은 이 남자 애들에게 웃음거리가 된 마당인데 입을 벌리면 더한 웃음거리가 될게 뻔했으니. 마치 동물원의 코끼리가 된 듯싶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슬쩍 둘러본 상황이란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서로들 입을 모아 수군거리는 꼴이라니. 더럽고 재수가 없었다.
"얘 일어났다."
"어디 갈라고? 얘 토낄라나 봐! 대답은 하고 가지."
"야, 우리가 지금 존나 만만하냐? 대답 좀 해보시라구요."
내내 교실 바닥에 찍찍- 남들 눈 한번 의식하지 않고 침을 뱉어대던 한 남학생이 또한 몸을 일으키며 여자아이의 손목을 잡아챘다. 지금 내 간식거리가 도망을 가려 한다, 이 재미있는 걸 놓칠 순 없지. 세게도 쥐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 눈과 입술이 움찔거렸다. 참으려 해도 분함과 억울함이 끝끝내 터져 올라올 것만 같았다. 여기서 울면 더 우스운 꼴이 되리라.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는 판단이 섰고 꽉 잡혀있는 손목을 거세게 쳐내며 뭐가 부딪히는 지도 모른 채 마구 내달렸다. 여전히 와글와글한 복도를 미친 듯이 내달렸다. 사람이 없는 곳까지. 그렇게 내달리고 있으면 참지 못 하고 차오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고 마음 또한 흘러내렸다.
그렇게 내달렸다. 계속.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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