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일기
W.타페
: 영하의 혹한 속에서 젊음의 행복을 누리다.
엥, 윤기선배가 갑자기 왜? 어리둥절한 채로 잠금을 풀었다.
당황해서 보낸 나의 ‘네?’하는 톡에 대한 답은 한참 후에 왔다. 편의점으로 출근한 뒤에도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면서 핑계거리를 찾는데, 진동이 울렸다. 윤기선배께서 말씀하시길, ‘왜. 내일 일요일이야.’라신다. 헐. 불러내서 한 대 치려고 그러는 건가. 도망칠 핑계는 없었다. 게다가 나는 잘못까지 한 사람이다. 젠장, 평화로운 방학기간에 선배에게 맞아 뒤진 멍청이로 신문 1면에 실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네…내일 봬요.’ 나는 눈물을 삼키고 얌전히 답장을 보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윤기선배는 그리 친한 사람도 아니었다. 같은 과이기는 하지만 우리 과는 인원이 많은지라 무언가 공통분모가 있어야 친분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런 점에서 윤기선배와 나는 동아리라는 공통분모가 있긴 해도, 1학년인 주제에 동아리 활동을 잘 하지 않은 나로서는 윤기선배와 친하지 않은 게 당연했다. 번호를 교환한 것도 내 가입서를 보고 그 자리에서 윤기선배가 바로 전화를 때린 거라서 그 이후로 서로 연락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다. ‘동아리엔 내가 말 잘 해줄게~집행부 일에만 집중해’라고 웃으며 말하던 지민선배가 문득 떠올랐다. 활동을 잘 하지 않는 부원은 회장이 연락을 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나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지민선배가 대처를 잘 해주셨기 때문이리라. 술만 조금 덜 마시면 정말 좋으신 분인데…. 집행부 다이다이남의 업적은 나에 대한 모든 선행들을 덮어버릴 정도로 대단했다.
10시가 조금 덜 된 시간에 다음 타임 알바생이 들어왔다. 유니폼 조끼를 벗어놓고 인계를 한 다음 편의점을 나왔다. 너무 춥다….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씻은 뒤 얼른 침대에 누웠다. 아침에 일어나기 위해 핸드폰 알람을 맞추다가 뭔가 우울해졌다. 금 같은 휴일을 반납하고서 어색한 선배를 만난다니! 하지만 이제 와서 약속을 깨기엔 윤기선배의 무표정한 얼굴이 두려웠다. 그 얼굴로 춤을 추는 것 자체가 상상이 가질 않는다. 윤기선배가 입학하고 오티 때 장기자랑 무대에 섰는데, 춤을 그렇게 잘 춰서 한 때 연예인 지망생이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무뚝뚝한 성격이라 그나마 쫓아다니는 여자들이 적었다나 뭐라나…. 여하튼 뜬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 거라 난 그냥 농담으로 치부하고 말았다. 으, 얼음장 같은 얼굴로 춤을 추는 윤기선배를 상상했다가 괜히 팔뚝에 소름만 돋았다. 꿈에 나올 새라 얼른 핸드폰 화면을 끄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날이 밝았다. 핸드폰 알람은 제 기능을 충실히 이행했다. 고막을 찢기라도 할 듯 시끄럽게 울려 나를 깨웠다. 분명 일찍 잠들었는데도 몸이 찌뿌둥하다. 일어나기 싫은 마음에 조금 더 뒤척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헝클어진 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방을 나와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칫솔을 물고 거실로 나오니 부모님은 같이 TV를 시청중이시다.
“너 어디 나가? 오늘 알바 쉬는 날 아냐?”
“약속 생겼어. 요 앞이라 금방 들어올 거야.”
일요일인데도 일찍 일어나 양치를 하는 게 신기했는지 엄마가 물었다. 대충 대답하고서 잠깐 나도 TV를 보다 화장실로 가 양칫물을 뱉었다. 그래, 일찍 들어올 거다. 그렇고말고. 입을 헹구면서 나는 다짐을 하고 또 했다. 친하지도 않은 두 학번 위의 선배와 오래 있어봤자 내 손해다. 한 학번도 아니고 두 학번은 약간만 실수해도 가루가 되게 까이는 경우를 많이 봤다.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김탄소. 나 자신을 세뇌시키고 전쟁터에 나가는 것 마냥 비장하게 준비를 마쳤다. 선배가 말한 교보문고는 버스를 타고 나가야 했다.
간만에 패딩이 아닌 코트를 꺼냈다. 한동안 폐인으로 지내느라 입을 일이 없었던 흰색 바지와 니트도 꺼내 입었다. 다행히 날도 어제보다 따뜻하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기다린 지 5분도 안 돼서 버스가 왔다. 마치 하늘이, ‘너는 오늘 민윤기한테 맞아 뒤질 운명이니 마지막으로 잘 해주마’하고 인심을 베푸는 느낌이다. 길도 뻥뻥 뚫려서 평소보다 일찍 도착하기까지 했다. 버스에서 내려 도살장에 끌려가듯 느린 걸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교보문고 입구에 도착해 핸드폰을 보니 10시45분이다. 어느새 윤기선배의 카톡이 하나 와있다. ‘안에 있을게.’ 10시30분에 온 카톡이었다. 지하로 내려가 매장 안을 살펴보는데, 저쪽에 딱 봐도 민윤기다 싶은 샛노란 머리카락이 보인다. 그는 만화 구역에서 이어폰을 낀 채 만화책 하나를 들고 정독 중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내가 온 줄도 모르고 몰입하고 있다. 아주 책 안으로 빠져들 기세로 읽는 모습이… 평소 윤기선배의 이미지와 어울리지가 않는다. 저걸 어떻게 부르지. 방해했다고 바로 죽빵이 날아오지만 않아도 다행이다. 본능적으로 이곳에 CCTV가 있는지 확인했다. 윤기선배가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기 때문에, 선배의 머리 바로 위에 작은 CCTV가 하나 있었다. 그에 나는 안도했다.
“…안녕하세여.”
조심스럽게 선배의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인사했다. 옷자락을 당김과 동시에 선배의 무심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인걸 확인한 선배가 가만히 책을 덮고서 양쪽 귀에 꽂은 이어폰을 뺀다. ‘어.’ 그답게 아무 감흥 없는 대답이었다. 책을 제자리에 꽂고 이어폰 줄을 갈무리해 메고 있던 크로스백에 넣은 선배가 턱짓으로 입구를 가리켰다. ‘나가자.’ 난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점퍼 주머니에 양 손을 넣은 선배가 먼저 휙 걸어 나갔다. 그러니 어쩌겠나. 그 뒤를 쪼르르 따라갈 수밖에. 내가 따라오든 말든 선배는 개썅마이웨이로 저 혼자 빠르게 걸었다. 저건 네 얼굴을 보고 기분 잡쳤으니 나보고 그냥 집에 가라는 무언의 압박인 걸까.
거의 뛰다시피 해서 따라가는데, 선배가 잘 가다가 갑자기 우뚝 멈췄다. 그가 멈춰 선 곳은 작은 카페 앞이었다. 크게 가게를 낸 프렌차이즈점이 아닌 개인 카페로 보였다. 거리가 벌어졌던 탓에 얼른 달려와서 선배의 앞에 섰다. 나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본 선배가 못마땅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입으면 안 추워?”
“네, 오늘 날 풀려서 괜찮아요!”
“11월에도 맨날 패딩만 입고 다니더니.”
맨날 패딩이길래 추위 많이 타는 줄 알았지, 나는. 윤기선배가 스치듯 말을 내뱉고 카페 계단을 올라갔다. 선배가 문을 열자 카페 문에 달린 종이 가볍게 딸랑거린다. 헐, 지금 뭐라고요? 난 윤기 선배를 동아리방 말고는 캠퍼스에서 본 적이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선배는 나를 도대체 어디서 봤단 말인가. 따라갈 생각도 못하고 카페 계단 밑에서 벙쪄있자 윤기선배가 일부러 문을 한 번 더 흔들어 종소리를 내었다. 선배는 내가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잡아주고 있었다.
덤덤히 나를 보는 눈에서, 들어오라고 친히 문까지 잡아줬는데 안 오고 뭐하냐는 뜻이 읽히는 것 같았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계단을 올라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문이 닫히면서 종소리가 한 번 더 났다. 메뉴판 앞으로 가서 뭐가 있나 보고 있으니, 윤기선배가 내 뒤로 와서 선 채 느긋하게 메뉴판을 들여다본다. ‘뭐 마실래.’ 머리 위에서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뒤로 돌렸을 때, 선배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아! 깜짝…이 아니라, 전 카페라떼요. 찬 걸로.”
“그래.”
놀라서 소리를 지르려다가 급히 말을 바꿨다. 누가 봐도 놀란 게 티가 났지만 선배는 뭐라고 따져 묻지는 않았다. 그냥 고개를 주억거리고 계산대로 향했을 뿐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창가 쪽 자리에 가 앉았다. 선배는 주문을 하고서 진동벨을 들고 내가 앉아 있는 자리로 와 내 앞에 앉았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결 좋은 샛노란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선배가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린 채 두 손으로 진동벨을 감싸 잡고, 왜인지 그걸 돌려가면서 관찰하고 있다. 잔잔하게 깔리는 카페의 음악소리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음악마저 없었을 때 이 정적을 내가 버틸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내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였다. 전정국과는 미묘하게 다른 어색함이 우리 둘 사이에 존재했다. 어색한 정적을 깨고 선배가 먼저 말을 꺼냈다.
“집행부 엄청 바빴다면서?”
“2학년 선배들이 재작년보다 바빴다고 하시던데요.”
나는 최대한의 변명을 했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였으니 나로서는 나름 절박한 마음으로 변명을 한 것이다. 선배는 나를 책망하려고 말을 꺼낸 게 아닌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문득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반응하고 있는 내가 안쓰러웠다. 진짜 무슨 사자 앞에 덜렁 놓인 얼룩말이 된 기분…. 한숨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억눌렀다. 진동벨은 금방 울렸고 선배는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벌떡 일어났다. 엉거주춤 일어났던 자세였는데 다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선배가 빨대까지 챙겨 온 트레이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눈치를 보다가 얼음이 동동 떠있는 잔을 집어 들었다. 선배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킨 듯 했다.
그가 자기도 잔을 들더니 트레이를 옆으로 밀어 치운다.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크로스백에서 웬 노트와 펜 하나를 꺼낸다.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데, ‘왜. 곡 작업 좀 하려고.’ 하신다. 무슨 카페 데이트하는 CC마냥 당연하다는 듯 펜을 잡는다. 저기… 이러실 거면 저는 왜 불러다 앉혀 놓으신 건가여, 선배님? 선배는 한동안 막힘없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다가 펜 끝을 멍하게 보고 있는 나를 슥 쳐다봤다.
“…차가운 거라 먹기 싫어졌어?”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내 손에 들려 있는 머그잔을 쳐다본 거였다. 그 말이 ‘내 돈으로 산 그걸 당장 쳐 마시지 않으면 너는 뒤질게 될 거야’로 들렸기에 난 황급히 두어 모금을 마셨다. 그러자 그걸 가만히 보다가 무심하게 다시 노트로 고개를 돌리신다. 후,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다. 그때 선배가 자기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손등으로 조금 밀었다.
“이것도 마셔. 따뜻한 거.”
“네?”
“갑자기 마시기 싫어졌어.”
……저기요? 황당해져서 입을 벌린 내가 쳐다봐도 그는 다시 고개를 들지 않았다. 까라면 까야지 뭐 어쩌겠는가. 그간 동아리 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은 1학년에게 내리는 벌 치고는 그래도 참을 만 했다. 난 결국 커피 두 잔을 힘겹게 다 마셨다. 조금 출출하던 차였는데 물배가 차서 배가 부르다. 테이블 밑으로 몰래 핸드폰을 보니 벌써 1시가 다 됐다. 선배는 거의 2시간을 노트만 보면서 집중하고 있었다. 멈추지 않고 휘갈기던 펜도 어느 순간 움직이지 않았다. 탁탁, 선배가 신경질적으로 펜 끝으로 노트를 쳤다. 무표정하던 얼굴도 미간이 구겨져있다.
한숨과 함께 드디어 선배의 고개가 들렸다. 방해가 되지 않게끔 조용히 숨을 죽이고 보고 있던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잔뜩 구겨졌던 선배의 미간이 언제 그랬냐는 듯 펴져 처음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선배가 트레이에 잔 두 개를 올려서 들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네? 어디를요?”
“나는 내 집, 너는 네 집.”
선배의 말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화색이 도는 얼굴로 선배를 따라 일어났다. ‘왜, 밥 먹고 들어갈래?’ 어쩐지 장난기가 묻은 말이었다. ‘아, 아니에요! 괜히 돈 쓰시지 마세요.’ 다급하게 대답하자 그가 피식 웃었다. 내가 자신을 어려워하는 걸 그도 눈치를 챈 듯 했다. 하긴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다. 선배는 버스정류장까지 따라와서 버스가 올 때까지 같이 기다려줬다. 겨우 3시간 조금 덜 되는 시간이었지만 긴장한 탓에 진이 쭉 빠졌다.
선배는 이 정도 괴롭히는 것으로 충분했다고 만족했는지 그날 헤어진 이후로 개강까지 연락을 하지 않았다. 선배와 만났던 게 꿈을 꾼 것 같다. 놀라울 만큼 빠르게 남은 2주의 시간이 흘러가 2017년 3월 2일이 되었다. 나는 2학년이 되었다.
#
개강을 한지 벌써 1주일이 지났다. 부국장이라고 해봤자 어차피 국장 뒤치다꺼리다. 2학년이 되자 전정국은 온갖 잡다한 총무국 업무를 떠맡은 데다, 나와 다른 분반에 배정되기까지 했다. 분반이 다르니 시간표가 달랐고, 안 그래도 바쁜 전정국 탓에 당연하게도 서로를 보는 건 집행부 회의 때 뿐이었다. 어라, 파우치에 넣어둔 아끼는 립스틱 하나가 사라졌다. 집에 가서 찾아보고 그래도 없으면… 다시 하나 사야겠다. 어쨌든 전정국의 얼굴을 보지 못한지 일주일은 된 것 같았다. 지나가다 한 번 쯤은 볼 법도 한데 어지간히 시달리는 모양이다. 아마 총무국장님과 열심히 일하고 있을 전정국을 향해 애도를 표하고 나는 동아리실로 향했다.
동아리실―즉 동방에는 윤기선배와 호석선배가 있었다. 막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두 분은 신입생 면접에 대해 얘기하는 중이었다. ‘안녕~! 영 얼굴보기 힘든 친구가 왔네.’ 호석선배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반갑게 맞아준다. 윤기선배는 앉은 채로 그저 나를 향해 무심하게 손을 흔들어보였을 뿐이다. 그들이 앉아 있는 중앙 탁자로 가자마자 호석선배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건넸다.
“드디어 동아리 활동 시작하는 거야?”
“음…, 아무래도 학기 초라… 좀 바쁘긴 해서요. 아마 다음 달 쯤?”
“아우 이 비싼 여자.”
호석선배가 장난스레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비난했다.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윤기선배의 무심한 말이 날아들었다. ‘왜 애를 치냐.’ 고저 없이 평이하지만 어쩐지 날이 선 느낌. 호석선배는 호탕하게 웃고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뭐 난 농담도 못하냐?’ 웃음과는 다르게 불만 가득한 투덜거림도 함께였다. 나라면 찍소리도 못했을 만큼 살벌했는데… 선배는 동기라 그런지 아무렇지도 않나보다. 윤기선배도 딱히 더 뭐라 하지는 않고 다시 시선을 탁자 위로 돌렸다. 탁자에는 빼곡히 누군가의 신상정보가 적힌 가입서 몇 장이 있었다.
“이번에는 지원자가 꽤 되나 봐요?”
“죄다 사내새끼지. 우리 과에 이렇게 남자가 많을 줄이야.”
“……좀 닥쳐, 정호석.”
내 질문에 호석선배가 한숨을 쉬며 대답하자 그런 선배에게로 윤기선배의 날카로운 욕설이 내리꽂혔다. 윤기선배는 어느새 고개를 약간 들어, 긴 앞머리 사이로 호석선배를 노려보고 계셨다. 동아리실 안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두 분 다 동아리라곤 이거 하나밖에 하지 않기 때문에, 동아리 부원이 아닌 이상 우리 학번이 이들을 알 리가 없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우리 학번 사이에서 유명했다. 그 유명세가, 마주치기만 하면 싸운다는 것으로 생겼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그렇게 자주 싸워도 금방 또 친한 관계로 돌아오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하하, 둘 사이에 낀 나만 어색해졌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긴장된 분위기를 비집고 덜컥 동방 문이 열렸다. ‘예쁜아!!!! 여기 있다면서!!!!’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외쳤다. 아, 이 익숙한 호칭과 목소리. 나를 부르는 외침이라는 걸 아주 잘 알지만 차마 고개를 돌릴 수가 없다. 호석선배가 나를 대신해 문을 쳐다보았다. 어쩌면 저를 노려보는 윤기선배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그랬을지도. 아무튼 내가 반응하지 않으니 심술이 났는지, 지민선배는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문을 닫았다.
“난 우리 예쁜이 불렀거든요? 왜 형이 날 봐요, 재수 없게?”
“……씨발, 양쪽에서 시비네, 아주!”
“또 윤기 형이랑 싸웠어요?”
지민선배가 한심하다는 듯 힘 빠진 어투로 물었다. 호석선배는 그 물음에 답을 하지 않았다. 선배는 대답을 하는 대신,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탁자를 쿵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지 날린다.’ 역시나 곧바로 윤기선배의 날 선 지적이 날아왔다.
“먼지 실컷 처먹고 뒈져라!”
“저급하긴. 이거 먹는다고 죽겠냐?”
“아아악! 진짜 이 개새끼랑은 상성이 안 맞아!”
“너랑 맞는 놈도 있어? 어디 있냐, 그 질 낮은 놈이?”
말하는 족족 시비를 거는데, 저것도 능력이다. 가입서를 훑어보며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는 말들임에도 호석선배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는 모양이다. 열이 받아서 벌게진 얼굴로 호석선배가 동방을 나갔다. 방금 전의 지민선배처럼 문을 소리 나게 닫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지민선배의 눈과 나의 눈이 마주쳤고, 선배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하루 이틀이 아니라.’ 둘의 사이가 별로 걱정이 되지도 않는다는 말투였다. 조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 정작 윤기선배도 평온하고, 지민선배까지 저런 반응이니 내가 오버하는 건가 싶었다. 난 호석선배가 앉아 있던 의자로 가 앉았다.
윤기선배는 내가 자기 맞은편에 앉든 말든 다시 가입서들을 보느라 여념이 없다. 지민선배가 콧노래를 흥얼대며 능글맞게 내 옆으로 와서, 탁자에 엉덩이를 올리고 걸터앉았다. ‘뭐가 그렇게 바빠서 불러도 안 쳐다보셨을까~?’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묻는 말에 오한이 들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하는 말 치고는 숨은 뜻이 상당하다. 집행부 뒷풀이 때 지민선배 테이블에 앉지 않기를 천지신명께 비는 수밖에…. ‘더 예뻐해 달라는 작은 반항으로 봐도 될까?’ 그럴 리가 없지요. 난 다급히 고개를 휘저었다. 그 순간 탁,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윤기선배가 손에 든 펜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박지민.”
“네, 형.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심까.”
“꺼져.”
“그건 싫슴돠.”
“많이 컸네?”
윤기선배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어쩐지 사악해 보이는… 그런…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다. 지민선배는 내 팔뚝을 치면서 배꼽이 빠져라 웃는 중이었다. 윤기선배의 차가운 시선이 나를 때리는 지민선배의 손을 향했다. ‘아무리 봐도 뒤지고 싶은 것 같아서.’ 드르륵, 윤기선배가 앉은 채 발로 의자를 뒤로 밀어 탁자에서 멀어졌다. 그가 조그맣게 내뱉은 말이 사람 하나 죽일 듯 살벌하다. 지민선배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얼른 탁자에서 내려왔다. 그런 지민선배는 신경도 쓰지 않고서 자기 앞머리를 정리한 윤기선배가 의자에서 일어난다. 그리고……앉아 있었던 의자를 머리 위로 천천히 들어올린다.
“그게 소원이라면―”
“혀, 형님. 제 실책이었습니다, 사랑합니다, 형님.”
“―그냥 뒤져, 이 새끼야.”
쿠당탕! 윤기선배가 들어 올린 의자를 그대로 지민선배를 향해 내던졌다. 지민선배는 아슬아슬하게 그 의자를 피해 몸을 던졌다. ‘미쳤어!!’라는 외마디 비명을 남기고, 선배는 동방 밖으로 도망쳤다. 윤기선배가 의자를 던지느라 몸을 굽힌 덕에 헝클어진 자신의 앞머리 끄트머리를 붙잡아 살핀다. 그 모습은 마치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태연하다. 지민선배와 호석선배 때문에 활기찼던 동방이 금세 침묵으로 가득 찼다.
“저도, 먼저, 가볼게요. 좀 있음 강의라서.”
“그래.”
윤기선배는 자기가 던진 의자를 일으킬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흐트러졌던 호흡을 바로 한 선배는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겨 풀썩 주저앉았다. 내 말에 나른한 어조로 대답한 뒤 아무렇지 않게 다시 가입서를 본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후다닥 방을 나왔다. 문 옆에 지민선배가 등을 기대고 서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와! 저 형이랑 있고 싶어? 완전 또라인데?!”
지민선배가 머리 옆으로 검지를 빙빙 돌리는 시늉을 했다. 이 말을 윤기선배가 들으면 완전 재밌겠지만, 아쉽게도 방에서 나오실 기미가 없다. 그냥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데 저 멀리에서 이쪽으로 누군가가 가까워진다. 얼핏 보니 품에 종이다발을 한가득 안고 오고 있다. 아마 동방 옆에 있는 인쇄실에 가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가까이 왔을 때 확인한 얼굴은, 전혀 예상 못한 반가운 얼굴이었다.
“전정국!”
“김탄소?”
“야, 너 얼굴보기도 어렵다.”
턱 밑까지 올라오도록 한가득 종이가 쌓인 탓에, 전정국은 옆으로 몸을 틀은 뒤에야 나를 볼 수 있었다. 간만에 본 녀석의 얼굴은 어쩐지 많이 수척해져있다. 내 반가운 인사에도 고개만 슬쩍 끄덕인 전정국이, 옆의 지민선배에게 인사하고 인쇄실 안으로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내가 보기에도 전정국이 들고 있던 종이다발이 좀 위태롭긴 했다. ‘예쁜이, 이번 주 회의 때 보자!’ 지민선배는 잠시 나를 보러 왔던 거라며 강의를 듣기 위해 2층 강의실로 올라갔다. 아…. 뭐 한 것도 없는데 벌써부터 피곤하다.
핸드폰을 확인하자 강의 시간까지는 2시간 정도가 남았다. 수강신청을 실패한 탓에 자리가 빈 교양에 대충 끼어든 거라, 오늘은 공강만 4시간이다. 젠장, 어디 가기도 애매한 시간이라 꼼짝없이 동방이나 집행부실에서 썩어야 한다. 여자선배들이 계실 걸 기대하고 갔던 동방은 윤기선배가 차지하고 계시고, 남은 건 집행부실이다. 아마 전정국도 저걸 들고 집행부실로 가겠지. 할 일도 없는데 저놈 일이나 좀 도와줘볼까. 나는 인쇄실 문 앞에서 10분가량을 서성였다. 전정국은 종이 몇 장을 들고 인쇄실에서 나왔다. 옆쪽에 있던 나를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치려는 전정국의 앞을 막아섰다. 그제야 전정국이 조금 커진 눈으로 날 내려다본다.
“뭐해, 여기서?”
“너 기다렸지.”
“…할 짓 없어?”
“……많이 티나?”
“어, 존나.”
전정국이 무심히 대답했다. 그리고 왜 기다렸느냐고 묻지도 않은 채 나를 지나쳐 먼저 걸어간다. 나는 얼른 전정국의 뒤를 쫓았다. 예상대로 녀석은 곧장 집행부실로 향했다. 전정국은 손에 든 종이를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걸었는데, 3층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다가 헛발을 디뎌 넘어질 뻔 했다. 그 모습을 보고서 킥킥대는 나를 한번 노려보고 쫓기기라도 하듯 빠르게 계단을 오른다. ‘안 웃을게! 같이 가!’ 웃음기 가득한 내 외침에도 전정국은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언뜻 보이는 전정국의 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녀석이 계단을 오르는 보폭이 너무 컸기 때문에 나는 계단 중간에서 한 번 쉬었다 갈 수밖에 없었다. 무슨 걸음이 저렇게 빠른지 내가 뛰어 오르는 속도보다 빠르다. 뒤에서 내가 헉헉대든 말든 전정국은 벌써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 썩을 놈, 진짜…. 난간을 붙잡고 숨을 골랐다. 1층에서 3층까지 다이렉트로 뛰었더니 숨이 차 죽을 것 같다. 그때, 허리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는 내 어깨를 누군가가 톡톡 두드렸다.
“탄소?”
“아. 안녕하세요, 선배.”
“뛰었어?”
“네…, 전정국 때문에.”
“정국이 내가 심부름 시켰는데.”
그 심부름 도중에 만난 거랍니다…. 크게 떴다가 이내 느릿느릿 깜빡이는 태형선배의 눈이 순수한 호기심을 담았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태형선배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선배가 나를 물끄러미 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덕분에 챙이 뒤로 가게끔 돌려 쓴 모자 조임끈 사이로 삐쭉 머리카락들이 튀어나왔다. ‘지민이는 강의 들어갔나 보네.’ 누가 콤비 아니랄까봐 방금까지 붙어 있었던 모양이다. 지민선배가 나를 보러 간다고 외치며 집행부실을 나오는 모습이 절로 상상되었다. 태형선배는 고개를 조금 삐딱하게 틀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지금 어디 가던 중?”
“집행부실이요.”
“응? 넌 요즘은 일 없지 않아?”
“그렇긴 한데, 공강이라 정국이나 좀 도와주려고요.”
“그렇구나. 같이 가면 되겠다.”
선배도 집행부실로 가던 참이었는지, 그렇게 말하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선배는 나보다 계단 세 칸 정도 위에 있었다. 내가 계단 한 칸을 올라서기 무섭게 선배가 손을 내밀어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대로 나를 끌어당기는 힘이 생각보다 강해서 조금 비틀거렸다. 앞에서 계속 당겨주는 힘 덕에 한결 손쉽게 3층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3층으로 올라와 코너를 돌면 바로 집행부실이 있다. 선배가 먼저 집행부실 문을 열고 들어갔고 나도 선배의 뒤를 따라 부실 안으로 들어갔다. 중앙에 있는 긴 탁자에 노트북 4대와 온갖 서류들이 널브러졌다. 태형선배는 곧장 노트북 하나의 앞으로 가 의자를 빼서 앉았다. 옆자리에는 총무국장 선배가 편의점 김밥을 드시고 계셨다. 조용히 선배에게 인사하고 부실 안을 둘려보는데 전정국이 보였다. 전정국은 구석의 작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분명 전정국도 나를 보았다. 집행부실 문이 열리자마자 문으로 향하는 전정국의 시선을 태형선배 등 너머로 봤기에 확신했다. 하지만 전정국은 나를 보지 못한 것 마냥 눈까지 감았다. 자기를 기다렸다고 말한 사람에게 할 만한 대우가 아니다. 젠장, 역시 저 놈은 재수가 없다. 예전 오티 때 느꼈지만 전정국은 한 번 잠들면 정말 깨우기가 힘들다. 전정국이 저러다 잠들기라도 했다간, 남은 2시간은 꼼짝없이 나 혼자만의 업무 시간이 되어버린다. 이미 태형선배에게 전정국 일을 도와줄 거라고 말한 탓에 빼도 박도 못한다. 그럴 수는 없지. 나는 주먹을 꽉 쥐고서 전정국이 앉아 있는 소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전정국은 내가 일부러 인기척을 냈음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이 자식 봐라? 뒤에서 태형선배가 작게 키득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 묘한 대치를 구경하고 계신 듯하다. 일도 많을 텐데 일이나 하시지, 참…. 속으로 투덜대다가 내 앞의 뻔뻔한 샛기를 어떻게 조져야 잘 조졌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야.’ 팔짱을 끼고 부르는 말에 당연하게도 녀석은 대답하지 않는다.
“전정국.”
“…….”
“안 자는 거 다 알어, 이 새끼야.”
“…기집애가 입만 더러워가지고.”
전정국은 못마땅하다는 듯 말하며 슬쩍 눈을 떴다. 다 큰 사내놈이 눈은 무슨 사춘기 소녀처럼 맑다. 불만 가득한 다갈색 눈이 내 눈을 마주보다가 다시 감겼다. 가까이서 보니 전보다 확실히 살이 빠진 게 딱 느껴진다. 것보다 다시 눈을 감아? 이게 진짜!
“정국아, 심부름 하나만 더.”
“네, 형.”
태형선배의 조그만 목소리에 전정국은 번쩍 눈을 뜨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막 전정국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기려던 내 손이 민망해졌다. 어색하게 손을 회수하니 태형선배가 풋 억눌린 웃음을 터뜨렸다. 전정국은 태형선배에게서 종이 몇 장을 건네받아 내용을 훑어보고 부실을 나갔다. 전정국을 쫓아 부실을 뛰쳐나왔는데, 놈은 벌써 저만치 멀어져있다. 나는 복도를 내달렸다. 그러고 보니 [선배]만 고집하던 전정국이 2학년 됐다고 맘을 편히 먹은 건지 뭔지 태형선배를 형이라고 불렀다. 지민선배도 형이라고 부르려나? 1학년 첫 번째 뒷풀이 때 형을 강요했던 지민선배를 상기한 나는, 내 발소리를 듣고 뒤를 돈 상태로 멈춰 선 전정국을 인식하고 그 생각을 뒤로 미뤘다. 전정국은 왠지 무언가를 고민하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
결국 제목에 붙은 /전정국 을 뗐답니다...☆ 역하렘물 같아서욬ㅋㅋㅋㅋ
어제오늘 열심히 써서 데려와봤습니다'-' 티켓팅 광탈로 인해 좀 늦었네요... 내일 일예까지 못하면ㅋ...
휴 부디 즐감하셨기를 바라면서 자까는 물러갑니당 총총 =3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 ![[방탄소년단] 청춘일기 -04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6/01/20/0/9f5732cbf70a5cc8ee0ea1775ef19fc1.gif)
![[방탄소년단] 청춘일기 -04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6/03/27/12/e4d06bce10199ab83a90e7eb4d575d40.jpg)
![[방탄소년단] 청춘일기 -04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6/03/27/12/879eaf14dec0187b22e9c7ae59e0a05c.jpg)
이거 방탄 찐팬이 올린 위버스 글인데 읽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