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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편 보고 오세요!
감정이 사람을 지배하는 순간 그 사람의 시각은 온통 그 감정으로 뒤덮여진다. 그리고 지금 내가 보는 것들은 필터를 씌운 듯 모든 게 환하고 아름답게만 보인다. 세상에. 단 한 사람 때문에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다니. 순간 이런 내 모습이 낯설어 당황하지만 그 감정도 바로 지워내버린다. 그런 작은 감정으로 휘둘리기엔 내 눈앞에 있는 것들이 너무 아름다우니까. 향긋한 봄내음이 나는 듯하다. 이른 봄.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할 봄이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내게 다가왔다.
"형, 혹시 7반에 머리 길고 예쁜 누나 알아요?"
그 누나를 본 후 내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형들이 있는 반으로 달려가 그 누나에 대한 정보를 캐내는 짓이었다. 마음만 같아선 그대로 누나 앞에 달려가 이름이라도 알아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난 그렇게 숫기 있는 남자가 아니라 불가능했다. 평소엔 얼굴도 잘 안 비추던 놈이 갑자기 흥분한 얼굴로 달려와 저 말부터 뱉어서 그런가. 형은 꽤나 놀란 눈치였다.
"7반에 머리 긴 애가 한 둘이야. 그건 갑자기 왜?"
형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형의 예상치 못 한 질문이 당황스러워서. 그리고 하나는
"머리 긴데 예쁜 누나가 한 둘이에요? 왜, 있잖아요. 존나 예쁜 누나."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는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형을 이해할 수 없어서. 내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묘해진 형은 내 얼굴을 탐색하듯이 빤히 쳐다봤다. 너 김탄소봤지? 다 알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형의 얼굴에 측은함이 섞여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형의 말은 꽤, 아니 정말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너 설마, 걔 보고 첫눈에 반했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지?
"아, 무슨 그런 말을 해요. 첫눈에 반한다는 게 그렇게 쉬운 건가.
그냥 나는 그 누나가 예전에 알던 누나인 것 같고 그냥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냥 물어본 건데."
형의 말을 들은 순간 퍼뜩 생각난 건 형에게 사실을 들켜봤자 놀림만 당하고 별 도움은 될 것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초등학생 때의 일이었다. 나는 그때 옆반 여자애를 좋아했었는데 그 사실을 형에게 들켜버렸었다. 그리고 그 후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형에게 놀림만 더럽게 당하고 전교에 소문이 쫙 퍼져서 그 여자애한테 다가가긴 커녕 피해 다녀야했었다. 그때 내가 얼마나 마음고생했는데.. 형에게 다시 들킬 순 없었다. 그런 일념 하나로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긴 했으나, 어째 형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듯하다.
"그래 그래. 너 마음 다 이해해. 내가 너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근데 말이야. 내가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빨리 접는 게 좋을걸."
아, 왜 이제 막 자라나려는 새싹을 밟으려고 해요. 형의 말을 듣자마자 돋아나는 짜증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형은 맨날 저래. 도움은 안 주고 겁만 주고 놀리기만 하고. 확 그냥 연락 끊고 피해 다닐까 보다. 끓어오르는 짜증을 겨우 참고 나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려 반을 벗어났다. 야! 어디가! 뒤에서 들려오는 형의 외침은 가볍게 무시했다.
왜 그때의 난 알지 못했던걸까.
인생에 도움이라곤 되지 못 할 것 같은 형이 내게 도움을 줄 몇 안되는 기회 중 하나가 저것이었다는 것을.
김탄소. 김탄소. 입안에서 부드럽게 발음되는 누나의 이름을 계속해서 읊조렸다. 아무리 읊조리고 읊조려도 질리긴 커녕 엔도르핀이 상승하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는 새 올라가 있는 입꼬리는 덤이었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 온 누나 때문에 나는 2교시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온갖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누나는 어디에 살까. 좋아하는 건 뭘까. 싫어하는 건? 점점 많아져가는 질문만큼 누나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몇 배씩 커져갔다.
"야, 너 누나 있지?"
결국 난 깊어져가는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고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자고 있는 짝꿍을 깨웠다. 갑작스러운 내 부름에 소스라치게 놀란 짝꿍이 커헉 하는 추한 소리를 내며 깨어났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가볍게 무시하기로 마음 먹었다.
"어? 어, 어.. 누나.. 있지."
잠에서 덜 깬 몽롱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는 짝꿍의 잠을 달아나게 하기 위해 나는 힘껏 그 애의 어깨를 흔들었다. 아 씨 갑자기 왜 그래. 왜 그러냐고오. 결국 나의 방해를 참지 못 한 짝꿍이 전보다 멀쩡해진 모습으로 내게 말했다.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너, 누나 취향 아냐?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 짝꿍이 대답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하긴 나도 내 형 취향을 모르는데 쟤가 제 누나 취향을 어떻게 알겠어.
"아, 근데 역시 남자 하면 마초 아니겠냐."
갑자기 씩 웃음을 지은 짝꿍이 내게 엄지손가락을 차켜올리며 대답했다. 마초? 내가 아는 마초는 정형돈의 순정마초의 그 마초밖에 모르는데. 잘 모르겠다는 내 표정을 읽은 건지 짝꿍은 비웃음을 띤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 뭘 모르네. 마초를 모르다니. 마초, 남자다움 아니겠냐. 근육 있는 멋있는 형아들! 잔뜩 흥분해 주절주절 내뱉는 짝꿍의 말을 대충 요약하자면 그랬다. 당당하고 남자답고 힘세고 뭐, 그런 남자.
"좋아하는 여자가 있으면 한 번에 다가갈 수 있는 남자가 바로 마초지."
음.. 그거 뭔진 잘 몰라도 나랑 꽤 거리가 먼 것 같은데. 나는 말없이 짝꿍을 바라보다 책상에 고개를 파묻었다. 아무래도 내 인생에 연애는 안되는 건가봐...
누나를 좋아한 지 이제 거의 3일째다. 그리고 슬프지만 나는 아직 그 누나와 대화 한 번 나눈 적 없다. 항상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뿐 누나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다. 누나를 처음 본 그날, 온갖 SNS란 SNS는 다 뒤졌지만 누나 계정은 찾을 수 없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누나는 카톡조차 하지 않는 문외한이었다. 요즘 시대에 SNS를 안하다니. 그 아날로그함까지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나는 답이 없는 걸까.
어쨌든 이렇게 바라만 보다 짝사랑으로 끝나버릴 수 있다는 초조함으로 나는 이리저리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누나와 한 마디라도 나눌 수 있을까. 그때 내 눈에 띈 것이 있었으니. 도서부 부원을 추가 모집한다는 포스터였다. 나는 그때 또 한 번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보컬부냐, 도서부냐. 미래냐, 사랑이냐.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묻고 따질 것도 없이 보컬부였으나 나는 지금 이성 따위 버린지 오래였다.
내 고민은 채 1분도 되지 않아 끝나버렸다. 내 손은 이미 도서부 신청서를 쓰고 있었다.
동아리야, 2학년 때부터 열심히 하면 되니까.
말도 안 되는 억지 합리화까지 해가며 나는 부지런히 글을 썼다. 정말 열심히, 또박또박.
그날 밤 내겐 두 개의 연락이 왔다. 하나는 도서부 부원이 되었다는 소식. 하나는 보컬부를 그만둔 나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형들의 무시무시한 협박이었다.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도서부라도 들지 않으면 누나랑 친해질 기회가 없단 말이야. 상설 동아리는 하나만 들어야 하는데 그럼 어떡해. 보컬부를 그만 둬야지.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동아리 수업이 든 날이다. 난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부지런히 했다. 옷장에 있는 여러개의 아우터를 하나씩 다 걸쳐보며 무엇이 더 내게 잘 어울리는지 진지하게 엄선했다. 결국 입은 건 평소에 자주 입던 회색 후드집업이었다. 결국 평소랑 다를 게 없지만 마음만은 평소와 달랐다. 학교로 가는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드디어 멀리서만 지켜보던 누나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바보 같은 웃음이 실실 나왔다. 내 머릿속엔 벌써부터 누나와 내가 대화하는 모습을 시뮬레이션으로 세워보는 중이었다.
등교하는 길, 어느새 활짝 핀 벚꽃이 꼭 나를 응원해주는 것 같았다. 예감이 좋다. 지금 누나를 보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고백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솟구쳤다. 아, 나 도대체 왜 이래. 쑥스러운 웃음이 마구 튀어나왔다. 나는 괜히 붕 뜬 기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손으로 머리를 넘기며 크게 숨을 쉬었다. 흥분하지 말자. 속으로 몇 번을 되내며 땅바닥을 쳐다보던 고개를 쓱 들었을 때, 정말 거짓말처럼 누나가 보였다.
그리고 누나 옆에 나란히 등교를 하고 있는 어떤 남자도 보았다. 다른 학교 교복을 입고 정말 자연스럽게 누나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남자.
'근데 말이야. 내가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빨리 접는 게 좋을걸.'
스치듯이 말해준 형의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치듯 울렁였다.
정말 거짓말처럼 나타난 누나는 정말 거짓말 같은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아니 차라리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나름 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모아 보니 생각보다 적네요;ㅅ:
다음엔 더 길게 써올게요!
사실 저는 제 글이 조용히 묻힐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셔서 깜짝 놀랐어요.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뼈대를 정해두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게 아니라
그때 그때 쓰고싶은 장면을 쓰는 타입이어서
복선이라든가 반전같은 건 없을거에요. 아마도..?
그냥 심심할 때 머리 식힐 겸 가볍게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글에는 표현하지 못했지만 보컬부 부장과 차장은 태형이와 지민이입니다.
그리고.. 이 말을 해야할지 정말 많이 고민했는데요. 안하는 것 보단 미리 알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올립니다..
이런 말 하는 거 정말 죄송하지만 이제 시험기간이어서 자주 오지 못 할 것 같아요ㅠㅠ
겨우 2편 올려놓고 이런 말을 하다니ㅠㅠㅠㅠ하ㅠㅠㅠㅠㅠ미안해요ㅠㅠㅠ
그래도 최대한 자주 올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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