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감화서
w.규닝
09.
이미 봄은 다 가신지 오래였지만 성규의 좁은 방 안에는 초봄의 그것과 같은 향이 그득히 들이찼다. 끓고 있는 약탕기 안으로 새로운 향 조각을 두어개 집어넣자 한 층 짙어진 향이 멀쩡했던 맨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성규가 하염없이 넋을 빼다가도 약연(약제를 가는 도구)을 붙잡으며 정신을 차렸다. 한동안을 드륵, 드륵 약연 가는 소리만 방 안을 울렸다. 눈 앞 어딘가를 향한 시선이 약연으로 떨어졌다가, 제가 빻고 있는 약재에게로 떨어졌다가 위태롭게 어른거리는 호롱불을 향해 떨어지기도 했다.
약방 수복에게서 전해들은, 저를 다시 호출했다는 우현의 말에도 응답하고 있지 않았다. 자신조차 모르겠는 마음을 정리도 채 못한 상태로 얼굴을 마주하기란 힘이 부쳤기 때문에. 약연의 막대를 잡았던 손에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아 손부채질을 시작한 성규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절반 정도밖에 갈리지 않은 압척초 잎이 내는 향이 쓰게도 풍겼다. 성규가 코끝을 찡긋했다. 결국은 만들고 있던 약제고 뭐고 손에서 놓기로 한 후 방바닥에 드러누워 멀거니 천장만 향해 보았다. 아주 느리게 눈을 깜빡여보기도 했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어보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래도, 지워지지는 않았다. 다 무너져가는 천장 사이사이로 보고 싶은 얼굴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것이. 손을 번쩍 들어 그 괴이한 환영을 휘휘 저어보기도 했고, 없어져라 없어져라 입으로 외우며 후, 불어버리기도 해봤으나 소용없었다. 그러다 택한 것은 눈을 감는 것이었다. 약초의 쓴 향이 코끝을 찔러와 제 팔으로 얼굴을 가려 누운 성규가 휴, 하며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부로 성규의 귓가에 너울거리며 들려오던 기악 소리가 끊이질 않고 있었다.
몸에 한기가 들어버린 탓에 며칠간을 고열로 푹 앓았을 때엔, 일어나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와 있을 것이라 여겼다. 또 평소처럼 대감 댁에 드나들며 작문이며 침법을 익히겠지. 혜민서와 활인서를 오가며 의술을 익히느라 바쁜 날들을 보내게 되겠지. 그런 것이 내가 가졌던 자리였지. 그러나 개운하게 열을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어도 마음은 하나도 개운치 못했다. 앓아눕기 전의 마음 그대로를 여태껏 주욱 끌어 온 것이었다. 아무래도,
열병이 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신(身)이 아닌 심(心)의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성규가 저의 얼굴을 덮고 있던 팔을 슥 내렸다.
심적인 문제라는 것을 또 한 번 인정하고 있었다. 어쩐지 점점 무언가에 저 자신이 잠식되어가는 기분을 느껴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었다. 벌써 며칠 째, 같은 자리를 맴돌며. 성규가 제 입술을 물었다. 분명 같은 상황, 같은 관계에 놓여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저 혼자만 이러니저러니 하는 일들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아 공연히 화가 난 성규가 두 눈을 힘주어 감았다. 상관하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보아도 손해를 내는 것은 오직 저뿐인 것 같았으니까. 허나 그리 생각했던 것도 잠시,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반궁에서의 밤이 불현듯 떠올라버렸다.
성규가 퍼득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해보니 또 그런 일도 있었더랬다. 눈, 눈에. 내 눈에…
“고,고,고마울 때 하는 인사….”
잠시 동안 정적에 빠진 눈이 어둠을 켜는 호롱불 위로 옮겨갔다. 성규가 얼이 빠진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정말이지 아주 느린 속도로 열이 올라오고 있는 것을 느끼자 성규의 손이 더듬거리며 바닥을 짚었다. 급기야는 덜덜 떨리기 시작한 손끝이 한참동안을 더듬거리며 구들장을 헤매다가 쌓아 두었던 대황 잎을 덥석 움켰다. 성규가 소리 나게 꿀꺽, 침을 삼켰다.
“아니야, 아닐 거야….”
바싹 마른 대황 잎을 제 눈두덩이 위로 넙덕 붙인 성규가 여전히 초점을 잃은 눈을 힘주어 감았다 떴다. 꾹 눌린 약초 잎이 눈썹 어귀에서 달랑거렸다. 마침 찧고 있던 압척초와 대황 잎은 분명 화상에 이로운 약재이니 제 눈썹에도 분명 효과를 발해줄 거라 여겼다. 열아, 내려가라. 얼른 내려가라… 넋두리처럼 외는 주문이 단칸 방 구석을 아득히 채워갔다. 불에 덴 듯 화끈거리는 눈가가 딱 미칠 만큼 미웠다. 중얼중얼 주문을 외던 성규가 빈손으로 바닥을 되짚어 다시금 대황 잎을 제 눈가에 치덕치덕 바르기 시작했다.
별 일 아닐 것이다. 곧 열은 내려갈 거고, 아무렇지도 않아질 거야. 이미 갈고 있던 약연은 저만치 밀어 둔 성규가 이불 속으로 몸을 숨기며 이불보 위에 엎드렸다. 더 깊게 생각하기는 싫어 여러 번 도리질도 쳐봤음이라. 한 움큼 새로 집어 든 대황 잎을 이번에는 이마 위로 붙인 성규가 구들장 위에 그대로 머리를 박았다. 이번에는 먼젓번과 달리 새로운 주문이, 바닥에 붙은 고개 아래서 흘러나왔다.
아닐 거다, 그래 아닐 거야.
좋아하는 게 아닐 거야.
*
주역(周易) 책을 들여다보던 우현의 인상이 팩 그어졌다.
무슨 필사가 이따위야! 벌렁거리던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 앉은 것이 일 촌각도 채 지나지 않아 상으로부터 돌아앉은 우현이 냅다 소리를 쳤다.
“명필이 한자 한자 목판으로 새겨 넣어도 못 알아 처먹을 판국에, 저딴 지렁이 지나간 흔적이나 읽고 있어야 한다고? 웃기고들 있네.”
“어이, 도헌.”
“허 박사 대학(大學) 강의보다 못 들어주겠다고! 자네들은 저딴 지렁이 글자를 어찌 잘도 알아먹는 건가? 내 지금까지 봐 온 서책들 중에서 저것만큼 형편없는 글자는 본 적이 없네. 책 속 이무기가 당장이라도 하늘로 승천할 판이야. 눈 버렸다.”
“책 읽기 싫은 이유를 다른 데서 찾으려 들지 말게.”
그의 방우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우현이 돌아앉았던 어깨에 잔뜩 힘을 주었다. 지금 내가 핑계를 대고 있다 이건가? 하며 당장이라도 따져 묻고 싶은 것을 눌러 담은 우현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죽이고 있었다. 사실 그리 따져 묻기에는 영 찔리는 구석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핑계랄 것 까지는 없었지만, 사실 난장판으로 쓰여 있는 글자보다도 더욱 우현의 머릿속을 괴롭히고 앉아있는 것은 빙글빙글 원으로 돌아가는 애먼 얼굴이었다. 우현이 성난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같은 줄을 저도 모르게 몇 번이나 되새겨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우현이 받는 이 없는 화를 제 답답한 속 안으로 풀어놓고 있었다. 어지러운 글자를 하나하나 읽고나서 다음 줄로 눈을 옮기면 어느새 같은 구절을 되뇌이며 익히고 있는 것이었다. 우현이 환각처럼 제 눈앞에 살아났다 없어지는 얼굴과, 제 어지러운 정신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쥐꼬리같이 얇은 눈매가 주역신강 위로 자꾸만 어른거리는 것을 발견했었다. 그 탓에 계속해서 탕, 탕. 상을 쳐대는 것만 반복했다. 그 때마다 불만스럽게 저를 향해 쏟아지는 동방생들의 시선조차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급기야는 소리 나게 책을 덮어버린 우현이 어지러운 글씨가 자아내는 환각에 홀릴 일이 없는 벽을 보고 돌아앉은 것이었다. 우현이 여지없이 씩씩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 따로 상을 펴 두고 주역신강을 훑던 방우가 우현의 성난 등짝을 보며 끌끌 혀를 찼다.
“어이, 도헌.”
“뭐. 왜.”
“내일이면 구휼 전담 의관이 반궁에 들르는 날이네.”
짐짓 진지해진 방우의 목소리에 우현의 고개가 홱 돌아왔다.
“그것을 내게 일러주는 저의가 무언가?”
“내 자네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하는 말이니 새겨듣게. 내 비록 궁궐의 내의원은 아니나 감히 자네의 상태를 얼추 걸러 짐작해주자면…”
방우가 우현더러 가까이 와 보라는 시늉을 했다. 잔뜩 성이 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던 우현의 표정이 샐쭉하게 바뀌어 갔다. 우현이 꾸물꾸물 엉덩이만 움직여 그의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방우가 우현의 귀를 제 쪽으로 가져다 대며 목소리를 죽였다.
“자네는 상사병에 걸렸네.”
속삭이듯 귓가로 들어온 목소리에 단박에 소름이 올랐다.
“뭐야? 그 개호로같은 말은!”
우현이 튕겨나가듯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도헌, 앉게. 이런 반응따위야 진작에 예상 했었다는 듯 우현의 팔을 끌어 자리에 앉힌 방우가 마음을 가라앉히라는 듯 차분하게 손짓했다. 그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주저앉은 우현이 그를 쏘아보았다. 그게 도대체 무슨 돌팔이 같은 진단이란 말인가? 우현의 삐딱한 말투에 그의 방우가 사뭇 진지하게 팔짱을 꼈다.
“자네는 모를지 몰라도 나와 이 진사는 알고 있지. 하긴, 꿈결에 애타게 찾는 이름을 자네가 어찌 알겠는가? 자느라 한창 바쁜 이가.”
“꿈결에? …찾아?
신경질적으로 찢어졌던 우현의 눈이 천천히 동그랗게 떠졌다. 금방 또 귀를 기울인 우현이 설마하는 목소리로 묻자 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암, 찾고 말고.
“어찌나 애달프게 서생원을 찾아대던지. 이쯤에서 불어나 보게. 자네 요즘 외출이 잦더니만 추마각에 새로 들인 기생을 잡은 겐가?”
“그건 또 뭔 헛소리야, 기생?”
“하루에 골백번은 더 자네 눈이 신삼문 바깥을 향하고 있으니 하는 말일세. 자네는 모르겠지만 동방생들이 뒤에서 입을 모아 하는 소리가 바로 그거라네. 자네가 기방에 숨겨 둔 계집년이 하나 있다고…아닌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투로 구구절절 뒷말을 늘어놓던 방우가 슬쩍 말꼬리를 바꾸어 물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난 우현이 방바닥이 꺼지도록 같은 자리를 빠르게 돌고 있는 탓이었다. 아오! 미치겠네! 이따금씩 화까지 내어가며 구들장이 나가도록 발을 구르는 우현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을 하게.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남은 방우가 거들었다. 우현이 어지롭도록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맴돌다 다시 멀찍이 떨어진 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꿈결에서조차 보고싶은 얼굴을 그려내고 있었더랜다. 우현이 애꿎은 제 머리를 벽 위로 쿵쿵 찧었다.
맨정신에 그리했던 것도 모자라, 의식이 없는 와중에마저 그 놈을 그렸었다. 우현이 자꾸만 쿵쿵 찧던 제 머리를 뚝 멈추고는 바닥을 짚었다.
무섭다. 무서우리만치 제 무의식을 치고 들어오는 감정의 싹이 불현듯 그 본뜻을 깨우쳐버리게 할까봐 무섭다. 우현이 세게 쥔 제 주먹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벽에 처박힌 그의 머리 아래로 한껏 낮아진 목소리가 중얼중얼 새어나왔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계집에게나 품어야 할 마음이 왜 굳이.
*
의약동참청(議藥同參廳)을 거쳐가는 걸음들이 분주했다.
달여 놓았던 약재가 새로운 탕기로 옮겨지기도 전에 사발로 뜨여 본청 앞마당을 지나는 의관들의 손에 들렸다. 수라를 올릴 때마다 달여 올려야 하는 약제에 온갖 심혈을 기울여도 모자랄 판국이었다. 어환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임금의 입은 매 시마다 다른 종류의 약제를 취해야 했다. 수라상이 올려지기가 무섭게 뒤따르는 내의원의 약제에 삼의사(三醫司)의 관심이 쏠렸다. 본청을 뛰어나가는 의관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다.
강녕전에 올렸던 약제들 중 가장 효과가 탁월한 약제의 본초만을 골라 새로운 탕약을 제조하는 데에 열을 올렸던 의약동참청 내의 명망 높은 이들조차 기력을 잃고 지쳐 떨어져가고 있었다. 수의 대감의 얼굴에 근심이 스쳤다. 하루에도 수십개는 받아 놓은 명자가 상 위에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그 때 아래 앉아 속기를 하던 당하관의 목소리가 대감의 넋을 붙잡았다. 대감, 대사헌 대감께서 납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대답을 뱉기도 전에 동참청의 문이 열렸다. 기별 없이 찾아 든 대사헌이 예의상의 목례를 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수의 대감도 간단한 목례를 올렸다.
“대사헌께서는 이리 기별도 없이 의약동참청엔 어쩐 일이시오?”
“그리 경계해 물을 것 없소. 제주 대감. 내 영의정 대감을 뵈러 왔다가 대감이 이곳에 있다는 소릴 듣고 찾아 와 본 게니까.”
대사헌의 답에 수의 대감의 표정이 알 듯 하게 굳었다. 대감께서 앉으라는 말이 없으시니 내 알아서 앉으려 하는데, 그래도 되겠소? 묘하게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답을 구했다. 이미 수의 대감의 입에서 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자리를 잡고 앉은 대사헌이 묵묵히 수의의 행동 반경을 좇았다. 느린 걸음으로 그 앞까지 걸어온 수의 대감이 대사헌의 앞에 자리하고 앉았다. 수의 대감이 화로 위에서 끓던 찻주전자를 내어 왔다.
“이곳은 내의원이오. 영의정께서 비록 겸직을 맡으셨다고는 하나 이곳에서는 내의원 도제조 대감이라고 불러야 마땅하오. 대사헌께서는 다시는 이런 실언 없길 바라는 바오.”
“아, 그랬군. 나의 실언이었소. 허나…”
“…….”
“너무 경계하는 것 아니오? 먼젓번에도 이른 말이지만 경계심을 늦추시오. 받는 이는 자리가 불편해 앉은 곳이 가시방석 같소.”
대사헌의 묘하게 거들먹거리는 목소리가 수의의 찻주전자를 거만하게 받아 냈다. 그대로 입매가 굳은 수의 대감이 대사헌의 찻잔에 절반 정도 차를 따라 두었다. 고맙소. 예의는 차린 목소리가 감사를 표했다. 찻잎을 띄운 대사헌이 잠시 동안 입맛을 다시며 운을 띄웠다. 헌데…,
“수의 대감께서 내게 애먼 감정을 갖고 있는 건 아닐지 근심이오.”
“무슨 뜻으로 묻는 거요?”
“요사이 사헌부의 감찰이 정도가 심해진 탓에, 궐내각사며 궐외각사 할 것 없이 다들 신경이 이만큼씩 날카로워져 있기에 하는 말이오. 혹, 그대가 내의원에서 어전에 탕약을 올릴 적마다 사헌부에서 거치는 감찰에 마음상해 할까 걱정이란 말이었소. 대감께서는 부디 그런 일로 사헌부에 너무 서운케 생각하지 마셨으면 하는 바람이오.”
“서운이라니 당치도 않는 소리요.”
“…….”
“응당 그래야 하는 것을.”
대사헌에 맞먹을 정도로 묘하게 웃은 수의 대감의 입꼬리도 그만큼이나 굳어져 있었다. 그것을 잡아 낸 대사헌의 눈에 날이 섰다. 허나 수의 대감과 눈이 다시금 마주치기가 무섭게 갈았던 날을 숨긴 대사헌이 제 앞의 찻잔을 들었다. 수의 대감의 눈이 대사헌의 행동거지를 하나하나 훑고 있었다. 잠시 동안 흘렀던 둘 사이의 정적을 먼저 깨트린 것은 수의의 쪽이었다. 손끝으로 상을 두드리던 소리가 끊겼다.
“헌데 아쉽게도 대사헌께서는 자리를 물러 주셔야겠소. 곧 탕약을 올릴 시간이 다가오기에 그 전까지 들러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오. 사헌부에서도 이미 알고 있다시피 침의청(鍼醫廳)에서도 매 해시마다 들여야 할 침술에 혈을 기울이고 있잖소. 그곳에도 들렀다 곧바로 본청에 가 보아야 할 것 같소.”
“아, 괘념치 마시오.”
대사헌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사이 내의원을 일컬어 궐 중 가장 바쁜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을 알고 있소. 대사헌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의 대감도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문 쪽으로 돌아 선 대사헌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헌데, 요사이 들어오는 탕약이 말미의 효과를 벌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시오?”
대사헌의 의미심장한 말에 수의 대감의 고개가 한참만에 끄덕여졌다.
“근래에 올리는 탕약을 취하신 금상의 어환이 한 결 개운해 지셨다는 것은 풍문으로 들은 바 있소.”
“다행이라고 생각하오. 역시 대감께서 있는 내의원은 걱정할 거리도 없는 듯합니다.”
“요사이 올리고 있는 탕약의 공은, 내의원의 권지를 겸하고 있는 혜민서의 의관 녀석에게로 돌려야 마땅하오.”
“혜민서 의관이라.”
“비록 한낱 권지라고 할지언정 실력은 어느 당상관 못지않게 갖추고 있는 아이오.”
확신하듯 단호해진 수의 대감의 목소리에 대사헌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대감께서 그리 단언하시는 걸 보아하니, 상당히 아끼는 아이인가 봅니다?”
“내 제자요.”
대사헌의 고개가 한참만에 끄덕여졌다.
“수의 대감께서는 슬하에 둔 제자가 꽤 여럿이라고 들었소.”
“…….”
“어깨가 무겁겠소이다.”
대사헌이 짧게 목례를 하고 문을 나섰다. 그러자 대사헌의 말에 주술이라도 탄 듯 관복에 입혀진 무게가 천근만근으로 불려진 느낌이었다. 대사헌이 먼저 나간 문이 훤하게도 열려 있었다. 그 사이로는 내의원 당하관들이 본청이며 예문관으로 바삐 오가는 모습들이 느리게도 눈앞에 그려졌다. 뒷짐을 지고 섰던 대감의 손이 허공으로 떨어졌다.
대감, 침의청 수의 대감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곧이어 문 앞의 당하관이 이르는 말에 정신을 차려 동참청을 나섰다. 뒤로 하고 나온 전각이 덥석 제 어깨 위로 올라앉은 것만 같은 무거운 기분이었다.
*
당분간 활인서의 일은 접어두라는 기별이 들었다. 예문관 앞을 지나다 본 조보를 급히 뒤주머니 안으로 구겨 넣으며 달려 온 본청에서 들은 소식에 성규가 제 눈을 멀뚱멀뚱히 뜨고 앉았다.
서촌이고 뭐고 일단 강녕전에 온 의술이 총동원되어도 모자라다는 것이 이유였다. 성규는 밤낮을 뜬 눈으로 지새워 지었던 약제를 본청에 가져다 내고 나오는 길에, 저의 발걸음이 들어올 때보다 좀 더 무거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무엇보다 어환에 있어서 내의원이 갖는 역할이 가장 크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서촌에 널렸던 등창 환자들이 못내 눈앞에 걸리었던 탓이었다. 두어번을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치료조차 받지 못한 이들이 차고 넘쳐났을 게 분명하다. 성규가 길게 늘어섰던 줄을 미처 기다려주지 못하고 병막을 걷어냈던 전일을 되돌아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본청을 나서는 걸음이 찬찬히 느려지고 있었다.
새벽 내내 우현의 생각으로 지새웠던 양 눈에 충혈이 올랐기에 따끔한 눈가를 비비며 궐을 나서는 발걸음에 근심이 더해졌다. 제 어지러운 마음도 문제긴 문제였으나 차도가 없는 금상의 어환도 그 못지않은 근심거리였다. 그 덕에 제 스승의 안색이 나날이 좋지 않아뵈는 것을 모른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한 걱정거리들로 잔뜩 찡그려져있던 성규의 표정이 일 다경 즘 후에는 의아하게 펴졌다.
“이것이 무엇이야?”
성규가 제 얼굴 앞에 드리워진 꽃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궐내각사들을 지나 금천교를 마악 지나려고 했을 때였다. 시각이 쓰여진 작은 목각 판을 품에 안은 주시동이 상서원으로 돌아가려다 말고 성규를 발견하자 한달음에 뛰어와 그를 불러 세웠었다. 의관 선비님! 악소리로 성규를 불러 세운 주시동이 그가 뒤를 돌아보기 무섭게 제 뒷짐 너머 숨기고 있던 꽃을 휙 하며 내밀었다.
“꽃이어요.”
“상사화…?”
붉은 꽃잎이 조막만한 주먹 위에 아름드리 꺾여 있었다. 주시동의 키와 맞게끔 허리를 굽혀 앉은 성규가 그것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고맙구나. 헌데 웬 꽃이느냐?”
“소인이 방금 이문원에서 대유재로 돌아 나오는 길에 예쁜 꽃을 보았길래 꺾은 것이어요. 그러다 선비님이 소인 눈에 뵌 것이었고…,”
주시동이 머뭇거리며 제 몸을 비비 꼬았다.
“의관 선비님께서 저번에 소인에게 주신 약제가 아주 잘 들어 고뿔이 싹 가셨어요.”
간간히 제 코를 훌쩍이며 하는 소리가 퍽이나 어른스럽게 꾸민 목소리였다. 꽃을 받아 든 성규가 순하게 눈을 접어 웃는 주시동의 머리를 두세번 쓰다듬었다. 다행이구나. 그 말에헤헤 웃은 아이가 금방 뒤를 돌아 금천교 끄트머리로 달음박질하였다.
해시! 해시! 곧이어 목각 판을 목에 찬 아이가 목청이 터져라 현재 시각을 알리며 홍문관 샛길로 몸을 들였다. 주시동의 가는 뒷모습에 시선을 두고 있던 성규가 제 손에 들린 상사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색이 곱다. 성규의 표정도 꼭 그것과 같이 해사하게 물들었다.
*
그러나 해시의 끝자락. 한아름 손에 들었던 붉은 꽃잎이 땅바닥 우에 흩뿌려졌다. 느닷없는 만남에 당황한 탓에 떨어트렸던 꽃을 주섬주섬 주워 든 성규가 방금까지 제 시선이 닿았던 곳을 쳐다보다가 꿀꺽, 침을 삼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걸음한 김에 가까운 푸줏간엘 들러볼까 하여 찾은 반촌 어귀에서 맞닥뜨린 이는 몇날 며칠을 제 머릿속에서 열병을 돋구어내던 사람이었다. 어스름히 떨어진 땅거미 위로, 장사치들의 검은 상투에 가려져 자칫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던 것을 기어이 발견해고야 만 것이 미치도록 후회스러웠다. 성규가 제 옆을 속속들이 지나치는 장사치들 속에서도 저만치 멀리에 서서 제 쪽을 노려보고 있는 우현에 겁을 집어먹고 우뚝 서게 되었다.
허나 갑작스럽기는 우현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어인 이유로 반촌엘 나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보다 한발 늦게 이 쪽을 발견한 우현의 눈빛도 처음엔 당황감으로 물들어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심술이 가득하게 오른 것이ㅡ 금방이라도 내달려 와 사사건건 시비를 틀 것만 같은 눈이 성규를 뻔히 노려다보고 있었다. 성규가 제 입술을 꾹 물었다. 잠시 후에는, 역시나 우현의 손이 높이 들려 제게 오라 손짓하고 있었다.
저만치 멀리에 선 우현의 손이 까딱까딱, 무언의 명을 내리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졌던 꽃을 주워 든 성규가 그것의 줄기를 괜스레 매만지며 다가가기를 망설였다. 실은 아직, 마주하고 설 용기가 나지 않는 탓이었다. 아, 거 비켜 보시오! 짜증스러운 장사치들의 목소리에, 길 한복판에 있던 몸을 바깥으로 비킨 성규가 여적지 이 쪽을 보고 선 우현의 시선을 힐끔이고 있었다.
“오라니까 뭐하고 섰는 거야, 저 쥐새끼 같은 게…,”
반면, 제 손짓에도 불구하고 멀뚱히 서있기만 하는 성규를 보는 우현의 눈빛에 점점 짜증기가 오르고 있었다. 멀찍이 서서 아무것도 안 하고 제 눈치만 보고 있는 성규는 제 손짓마저 들어먹지를 않고 있었다. 우현이 짜증스럽게 표정을 구겼다.
얼굴 좀 보자는데 비싸게 구네. 답답한 마음에 급기야는 먼저 걸음을 뗀 우현이 제 옆을 시끄럽게 지나가는 장사치들의 사이사이로 몸을 비켜가며 앞 쪽으로 다가섰다. 그 때, 가만히 서있기만 하던 성규가 급히 몸을 움직인 것은 순식간이었다.
뭐하는 거야, 저게…? 제 쪽에서 다가가려다 말고 우뚝 멈춘 우현이 눈썹을 구기며 성규의 뒤꽁무니를 눈으로 좇았다.
방금까지도 멀뚱히 서있던 성규가, 제 쪽에서 걸음을 옮기자 기다렸다는 듯이 반대편으로 등을 보이며 달아나고 있었다. 우현이 허, 하며 헛웃음을 뱉었다.
“야! 서생원!”
장사치들의 검은 상투꼭지들 위로 성규의 갓머리가 보일 듯 말듯 오르내리며 바삐 멀어져가고 있었다. 순간 우현의 속에서 울컥 하고 무언가가 치밀었다.
짜증나게! 인파를 비켜가며 걷던 우현이 급기야는 그들을 헤쳐가며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성규는 두 걸음을 내딛기가 무섭게 한 번을 뒤돌아보고, 다시 앞을 보다가도 뒤쪽을 돌아보았다. 우현이 자꾸만 제 쪽을 살펴가며 달음박질을 하고 있는 성규를 보며 이를 갈았다. 저 여우 쭉쟁이 같은 게, 왜 다짜고짜 도망가고 야단이야? 우현이 성규 못지 않은 속도로 인파를 헤치며 그에게로 가까워져갔다.
허나 애가 닳기로는 성규 쪽도 지지 않았다.
아니, 왜 따라오시는 거야? 당장 어쩌지도 못하고 마음이 또 어지러워지는 것만 같아 그대로 뒤를 돌아 달아나려고 했던 것이지만, 우현은 무서운 속도로 제 뒤를 좇아오고 있었다. 급하게 달아나려던 성규가 거의 울 듯 말듯 한 심정으로 자꾸만 뒤를 내다보며 달아나고 있었다. 세네걸음을 도망치다 뒤를 돌아보면 저보다 두 배는 빨리 따라붙어 있는 우현이 장사치들의 큼지막한 봇짐 사이사이로 얼굴을 보였다. 제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달아나던 발걸음이 서툴러지기 시작했다. 성규가 제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장사치들의 보따리에 채여 자꾸만 휘청였다. 우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야! 서생원! 앞에!”
열심히 뒤를 좇던 걸음을 뚝 멈춰 선 우현이 크게 소리쳤다. 제 경황을 살피느라 앞도 채 보지 못하고 달음박질하던 성규가 맞은편에서 나오는 상인들의 봇짐에 어깨가 채여 이리 휘청, 저리 휘청이고 있었다. 우현이 짜증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너 귀머거리냐? 앞엘 보라고! 염병!”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달아나려던 성규가 또다시 제 쪽을 돌아보느라 앞에 오던 술독 수레에 채여 사라졌다. 욕지거리를 뱉던 우현의 표정이 굳었다. 분명 땅바닥 위로 넘어진 게 틀림없었다. 우현의 입이 딱 다물리기가 무섭게 다시금 벌떡 일어난 성규가 멀리서도 보일만큼 등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낼 새도 없이 다시 도망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우현 쪽에서 이를 악물고 그 뒤를 좇았다. 저 병신 같은 게, 앞도 안 보고. 그러나 다시 달아나던 성규가 맞은편에서 걸어 나오는 장사치들에 채여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두어번은 어깨를 채이며 달아나고 있는 것을 보자 우현의 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성규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필사적으로 저를 피하려 달아나는 중이었다. 그 뒷모습을 보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죄송합니다, 죄송…”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통에, 장사치들의 짐에 채여 자꾸만 갓길로 밀려나던 성규가 꾸벅꾸벅 머리를 숙여가며 정신없이 도망길에 올랐다. 이미 다섯 번은 족히 넘어졌던 탓에 허름한 도포자락이 온통 흙자욱으로 번잡해져 있었다. 그 와중에 뒤주머니에 매달아놓은 향낭이 떨어져나갈까 손에 쥔 성규가 눈앞에 즐비한 수레를 이리저리 비켜가며 앞뒤 가릴 것 없이 내달렸다. 조금만 더,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동촌이 나오니까…, 성규가 제 부르튼 입술을 꽉 깨물며 흙먼지 속을 내달렸다. 이미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내려앉은 어둠이 자꾸만 제 도망을 방해하고 있었다. 중간 중간 등불이 오른 곳을 제외하면 이미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어두워져 있었다. 성규가 저만치서 보이는 주막에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커다란 봇짐을 비켜 갓길로 물러섰을 때였다. 갓길로 밀려난 것을 넘어 서, 어물전 사이의 어두운 샛길로 별안간 몸이 밀려들어갔다. 정신없이 내달리다ㅡ 제 오른손에 느껴지는 악력을 알아챈 것은 이미 그 후의 일이었다.
“김성규.”
얼마나 뛰어온 것인지 숨에 받힌 목소리가 바로 제 앞에 뱉어졌다. 어두운 샛길 안으로 밀어진 성규가, 제 앞을 막아선 이의 얼굴을 비록 분간할 수 없을지언정 세게 뛰어오는 가슴께를 남은 손으로 꾹 눌렀다. 제 앞을 막아 선 이가 어물전 깊숙이 제 몸을 밀어넣고 있는 것을 느꼈다. 성규가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입을 반쯤 벌렸다. 그러자 답답해 마지 않는 목소리가 성규보다 먼저 터져 나왔다. 너, 내가…
“어찌하면 좋겠느냐?”
“예,예?”
“내가 널 도대체 어찌하면 좋겠냐는 말이다!”
제 화를 이기지 못해 터진 목소리가 성규를 덮쳤다.
“수복청 뒤뜰에서도, 그리 속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말만 늘어놓고 간 주제에 어찌하면 이렇게 사람 속을 뒤집어놓고 도망갈 수 있는 것이냐? 내가 너를 도대체 어찌 받아들여야 마땅한 거냐고!”
계속해서 쳐지던 뒷걸음질에, 급기야는 술독 위로 등을 부딪친 성규가 맨바닥 위로 그대로 주저앉았다. 제 앞을 막아 선 이는 아직까지도 제 팔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성규가 꽃을 쥔 손으로 더듬거리며 술독을 짚었다.
“허,헌데 도헌께서 어찌, 소인의 이름을…”
“내가 네게 그리 무서운 사람이었느냐?”
여전히 화를 못이긴 목소리가 그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우현이 술독 아래로 주저앉은 성규를 잡아끌어 일으켰다.
“대답해. 그렇게 보자마자 정신없이 내빼기부터 할 정도로…”
“…….”
“내가 네게 못된 사람이었는지를 묻는 거다.”
먼젓번보다 한 풀 꺾인 목소리가 물었다. 어중간하게 몸을 일으켰던 성규가 다시금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그 덕에 이번에는 꽉 잡혔던 오른쪽 팔목이 훤하게 놓아졌다. 성규가 지끈거리는 제 팔목을 다급히 잡으며 제 앞에 선 이를 올려다보았다. 어둠에 가려 우현의 표정이 쉬이 보이지 않았다. 허나, 제 앞에 선 인영이 아까와는 달리 움직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성규가 제 입술을 세게 물었다.
어물전 사이의 샛길은 바깥쪽 너른 길과는 달리 인적 하나 없이 고요했다. 바깥쪽에서 바삐 오가는 걸음소리가 그들의 침묵 속에 끼어들었다. 샛길로 들기 직전에 걸려있던 등불의 빛이 술독 위를 비추고 있었다. 허나 역으로 등을 지고 선 우현의 표정은 단 한 길 속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어둡게 꺼져 있었다. 표정이 보이지 않기에 더욱 무서웠던 것도 같았다. 성규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달싹였다. 소인은 그저…,
“모르겠습니다.”
“…….”
“어인 이유로 소인의 발이 도망하였는지, 도헌께서 정말 제게 무서운 사람인지도 소인은 아무것도…”
성규가 애먼 저의 갓을 당겨 썼다.
“도헌께서 도대체, 소인에게 얼마나 무서운 존재이기에 이토록…”
“…….”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놀란 심장이 쿵쿵 뛰는지.”
“…….”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도헌께서 도대체 제게 얼마나,”
느려지던 말끝이 끝내 이렇다할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잘려졌다. 속에서부터 무엇인가가 울컥 차오르려는 것을 느낀 탓에 말을 자른 성규가 보이지도 않는 어둠 속에서 고개를 숙였다. 정확히는, 저조차도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또한 무엇을 말했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대신해서 답을 내려줄 수 없는 난해한 문제가 아직까지 풀리지 못한 채 앙금처럼 마음속에 눌러 앉아 있던 탓이리라. 제 허술한 대답을 듣던 우현 쪽에서도 답은 없었다. 성규가 제 왼손에 들린 꽃의 줄기를 만지작거렸다. 헤진 짚신이 술독에 닿아 나는 인기척만 샛길의 공기 우로 덮어졌다.
우현이 어스름히 보이는 미운 갓머리 위를 처참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다할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이도 저도 아닌 답을 얻게 되자 이상하게 제 가슴께가 뭉근하게 짓이겨졌다는 것을 알았다. 우현이 꿈쩍도 않는 갓머리를 내려다보다 입술을 물었다.
“나는 네게 오늘 못되게 굴려 한 게 아니었다.”
여전히 미동도 없는 갓머리가 미웠다. 생각보다 많이.
“네가 고쳐야 할 게 있기에 부른 것이었다. 너는 의관이고, 내가 일전에 고용한 적이 있지 않았느냐. 나의 약제를 책임지라고.”
“…….”
“치료해라. 나의 방우들이 나를 가리켜 병에 걸렸다 일렀으니.”
우현의 낮아진 목소리가 적적히 내려앉았다. 뜨거워졌던 머리가 금세 차갑게 식어버린 탓이었다. 그러자 잠시 후에는 미동 없이 바닥을 향해 내려가 있던 갓머리가 서서히 들렸다. 우현의 입에서 떨어진 병이라는 말에, 성규의 눈이 우현의 얼굴을 찬찬히 올려다보았다.
“네가 약방에 들르지 않는 날에도 내 눈이 경전에보다 많이 그 곳을 다녀갔다. 이것을 일컬어 반궁의 동방생들이 모두 이상행동이라 일렀으며 그것을 깨닫고 나니 멀쩡했던 내 눈에 환각까지 보이는데다가 느닷없는 환청이 들리기도 했다.”
“…….”
“상사병이라는 것에는 처음 걸려보았다. 네놈은 이것을…,”
“…….”
“어찌 치료할 테냐?”
결국에는 그의 목소리가 무너지듯 낮아졌다. 바로 떴던 성규의 눈이 크게 일렁였다.
그리고는 익숙한 듯 침묵이 찾아들었다. 샛길 저편에서 쉼 없이 들려오는 발소리가 성규의 귓가를 덮치다시피 달려들었다. 무언가가 우수수수 제 귓가에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가슴팍을 울리던 심장의 박동수가 귓가로 옮겨가 시끄럽게 쿵쿵대고 있었다. 자꾸만 저도 모르게 떨리는 손끝이 흙 묻은 옷자락 위로 떨어졌다. 쉬이 대답을 할 수가 없어 마른 입이 갈수록 타들어갔다. 지독하리만치, 앞에 선 이의 인기척은 없었다.
어물전에 난 창 안으로 막 켜진 등불의 빛이 샛길 위로 쏟아졌다. 덕분에 앞선 등불을 등지고 섰던 우현의 얼굴빛이 비쳐 보이기 시작했다. 성규가 제 눈 앞을 드리운 흑목화가 노란 빛으로 재워지는 것을 내려보다가 눈을 지르감았다. 사기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어물전 안에서 새어나왔다. 둘 사이엔 여전히 침묵만이 내려앉은 반면에.
우현은 끝까지 성규의 답을 들어 낼 생각인 것 같았다. 결국은 한참만에, 고개를 숙여 앉은 성규의 마른 입이 열렸다. 혹…
“결례일지도 모르나, 소인 도헌께 묻고 싶습니다.”
“뭐든 물어라.”
“좋아하십니까?”
“…….”
“도련님의 환각을.”
솔직한 물음을 덥석 뱉은 것은 제 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덜컥 숨이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성규가 답답하게 차오른 제 숨을 삼켰다.
그러나 앞섰던 침묵과는 달리 우현의 답은 생각보다 빨랐다.
“아니다.”
“…….”
“좋아하는 게 아니라, 혹 내가 미친 것이라면 이해가 가느냐?”
우현의 낮게 떨어진 목소리가 가까이로 내려왔다. 성규의 예민해진 귀가 그의 인기척을 잡아내었다. 가까이로 내려앉은 몸이 제 뒤쪽의 술독과도 가까워졌다.
“반평생을 병 한번 걸려본 적 없는 나를 가리켜, 나의 방우들이 상사병에 걸린 것이라 내게 훈수를 두었는데.”
“…….”
“그게 미친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꼭 저만큼이나 답답해 뵈는 숨이 덜컥 코앞까지 와 닿았다. 하염없이 바닥만을 향해 있던 성규의 고개가 번쩍이며 들렸다. 제가 쓴 갓 끝이 앞에 와 닿은 이의 갓과 만나 맞닿아 있었다.
“틀렸다. 너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미친 거다. 성규의 머리에 쓰여 있던 갓이 별안간 목 뒤로 훤히 넘어갔다.
서로의 거리를 떨어트리고 있던 갓이 뒷통수로 넘겨짐과 동시에 가까이 안긴 다른 이의 갓이 성규의 머리 위로 닿았다. 까슬한 옷감이 성규의 어깨를 덮어 안았다. 성규가 놀랍도록 커진 눈을 차마 깜빡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굳었다.
제 허름해 빠진 옷과는 달리 말끔한 도포자락이 제 숨을 움키고 있었다. 허릿께를 감싸안은 한쪽 팔의 느낌이 선연해, 훤히 드러난 뒷목에 찌르르한 무엇인가가 올라오자 성규가 당황한 눈을 힘주어 감았다. 제 어깨를 세게 감싸 안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혹은 그…”
“…….”
“반대이거나.”
성규의 왼손에 잡혀 있던 상사화가 힘을 잃고 바닥 위에 떨구어졌다. 하얀 옷자락이 자꾸만 성규의 눈앞에 어른거리며 얼은 뺨을 감아왔다. 우현의 갓머리 위로 재워진 노란 등불이 성규의 캄캄했던 눈을 밝혀왔다. 그러니 더욱 확연해지는 기분이었다. 저를 안은 품이 꼭 저만큼이나 답답함에 성화였다는 것도, 힘을 주어 안은 어깨가 걷잡을 수 없이 아려와 또 그만큼이나 같이 슬퍼졌다는 것도. 성규가 저의 허리를 감은 손에 울컥하고 치민 감정을 채 가릴 것도 없이 비어있는 왼 손을 들었다.
갈 곳 몰라 허공에 놓여있던 성규의 왼손이 우현의 옷자락을 움켰다. 그러자 그의 갓머리가 성규의 머리 위로 더욱 가까이 붙었다. 목을 감아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상사병이 걷히고, 상사화가 꺾였다.
*
대사헌[ 大司憲 ]
조선시대 사헌부의 장관
주시동
궐내를 돌아다니며 시각을 알리던 어린 하인
사헌부[ 司憲府 ]
시정(時政)을 논의하고, 관리를 규찰하며, 기강과 풍속을 바로잡는 일 등을 맡아본 관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