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E & SEEK
5.
“What kind of food do you like the most?”(선배는 어떤 음식 좋아해요?)
“Do you jury think he is guilty?”(배심원들은 그가 유죄라고 생각합니까?)
“Are you free at lunch today? I'd like to have a lunch with you. If you don't mind.”(오늘 시간 괜찮으세요? 점심 같이 먹고 싶은데.)
읽으라는 본문은 안 읽고 계속해서 말을 건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왜 이렇게 밥 타령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김종인이랑 점심을 먹을 바에는 차라리 오세훈 밥을 사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실실 웃으며 사담을 건네 오는 녀석과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교재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영혼 없이 읽어내려 갈 뿐이었다. A파트를 다 읽었는데도 B파트를 읽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녀석을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려 혼자 대화를 이어 나갔다.
“Yes, they do.”(네, 그렇습니다.)
네가 안 읽으면 나 혼자 A, B 다 하면 돼. 녀석 대신 B파트를 읽어내고 다시 A파트를 읽으려는데 문득 녀석이 한국어로 말을 걸어온다.
“와, 선배 발음 좋으시네요.”
회화 시간엔 한국어 사용 금지인 거 몰라? 다들 본문 내용을 읽어내기 바빠서 내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거슬리는 건 거슬리는 거였다. 인상을 찌푸린 채 기분 나쁜 티를 내며 녀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친하진 않았어도, 한 학기동안 학교를 같이 다니면서 이름 하나 모른다는 건 그만큼 무관심의 대상이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있는 듯 없는 듯 공기 같은 존재도 아니고, 영문과 종교라는 김종교한테 이름을 물어봤는데. 그런 나 때문에 아침에 꽤 무안했을 텐데 녀석은 속이 없는 건지, 기억력이 나쁜 건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냥 웃는 얼굴로 나를 빤히 보고 있다.
그저 선배와 친하게 지내고자 하는 선한 후배의 얼굴을 한 김종인과 마주하자 퍽 기분이 나쁜 거다. 하라는 대화는 안하고 쓸데없는 말이나 툭툭 던지는 것도 거슬렸는데 이젠 한국어로 내 발음 칭찬까지.
영어 잘한다 이거야? 외국물 좀 먹었다고 나한테 유세떠는 거냐고, 지금.
“Don't overlook me.”(평가하지 마. 기분 나쁘니까.)
그래서 일부러 직설적으로 말했다.
내 말에 녀석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한다. 웃는 얼굴은 어디로 집어 던지고서 당황한 빛을 띄며 나를 바라본다.
“칭찬이에요.”
그러니까 네가 왜 내 칭찬을 하는 거냐고.
“기분 나쁘셨음 죄송해요. 오해는 하지 마세요, 선배.”
그러면서 또 난감한 웃음. 기분 나쁜 티를 내니, 금방 숙이고 들어오는 그 웃는 얼굴에다대고 쏴대면 또 나만 이상한 인간이 될 것 같아서 일부러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그만하자.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지. 아, 오늘 진짜 왜 이래? 별 일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일상이었으면 좋겠는데 어디서부턴가 틀어진 느낌이다. 짜증은 나는데 표현은 못하고 애꿎은 교재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참자. 이 시간만 버티면 집에 가서 잘 수 있어.
“He was sentenced to 5 years in prison.”(그는 5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태연한 척, 동요하지 않는 척. 관심 없는 척. 척이란 척은 다 하며 본문을 읽어 내리는데 얼굴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옆자리에 턱 하니 앉아서 보라는 교재는 안 보고 나를 관찰하는 김종인의 것이다.
첫 시간부터 이런 식이면 앞으로는 대체 얼마나 귀찮게 할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런데 녀석도 참 희한하지. 지금껏 수업시간에 딴 짓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오늘 따라 유난이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저번 학기 보다 부딪히는 일이 잦아졌다고는 하지만 등굣길에 불쑥 나타나 우유를 쥐어준다던가, 내 관심을 끌고자 수업 시간에 집중도 하지 않으며 쓸데없는 사담을 던지고.
1학기 땐 그저 지나다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 꾸벅이며 인사를 하고 지나치는 게 다였는데. 왜 어째서. 개강 파티에서 내가 했던 그 말 때문에? 그게 신경이 쓰여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기분 나쁜 티를 내고, 무안을 주는 데도.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엄청난 놈인가. 입으로는 영어 대화를 줄줄 읽어내려 가면서도 머릿속엔 온통 잡생각뿐이었다. 주제는 김종인은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가.
이 와중에도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내게 닿아 있는 게 느껴져 왔다. 신경 쓰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속은 시끄러운데 겉으로는 티내지 않으려 애썼다. 네가 그러든 말든 난 관심 없어. 이렇게 보여 지도록.
“I think….”(내 생각엔….)
“Is it because of her?”(혹시 세희 누나 때문이에요?)
말을 자르며 녀석이 치고 들어온다. 다른 사람 입에서 수없이 오르내렸지만 녀석에게서 듣는 건 처음이었다. 그 이름이 괜히 낯설게 느껴져 조금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녀석이 좋아져서 내게 이별통보를 한 여자였다. 내가 군대에서 삽질이나 하고 있을 때, 과내의 종교로 군림한 김종인이 좋아져서 편지 한통 보내는 걸로 나를 뻥, 차버렸지. 김종인 때문에 도경수 차였대, 하는 소문도 돌았을 거라고 짐작한다. 나를 배려한 백현이가 전하진 않았지만 분명히 그랬을 거다. 그렇지만 김종인이 원인제공을 했다고 해도 녀석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을 거다. 녀석은 나를 두고 돌아선 그 아이를 거절했으니까. 꼭 녀석 때문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어떤 이유로라도 끝났을 인연이었다. 그래서 나는 널 미워하지 않아. 김종인. 네가 거슬리는 이유가 그 여자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구린걸까. 왜, 어째서.
조금은 멍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No, It's not.”(그런 거 아니야.)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아이 때문이 아니라고.
“Then why do you hate me so much?”(그럼 절 왜 그렇게 싫어하세요?)
기다렸다는 듯 녀석이 물어온다. 그래, 그랬구나. 혼자 쓸데없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거였다. 녀석이 내게 이러는 이유는 한가지였다. 저를 싫다고 말한 내가 신경이 쓰였기 때문에. 그런데 어쩌지.
“I have never said that I hate you.”(난 싫어한다고 한 적 없는데.)
회화 시간을 빙자한 녀석과의 대화만이 오갈뿐, 본문 속 내용은 뒷전이 된지 오래였다.
두 눈을 똑바로 보며 전한 내 말에 녀석이 아침의 그, 멍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이름을 물어봤을 때와 같은 그런 얼굴.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무언가 생각에 빠진 듯 잠시간 말이 없다.
“…….”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Thank god. ok that's good . Then I'll see you around in class.”(다행이다. 좋아요. 그럼 선배 앞으로 수업 시간마다 보겠네요.)
궁금했던 것도 잠시, 혼자 생각정리를 끝마친 녀석이 예의 그 환한 웃음으로 돌아와 나를 향해 손을 뻗는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선배.”
내밀어진 녀석의 손을 빤히 바라만 보았다.
오늘 따라 인기 폭발이었다. 점심 같이 먹자는 그 모든 손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 같았음 치사하게 먼저 내빼냐고 투덜거렸을 변백현도 선약이 있었는지 집에 가보겠다는 내 말에 기다렸다는 듯 얼른 고개를 끄덕이더라. 세훈이 놈은 문자까지 보내며 징하게 들러붙었지만 다음에 먹자는 답장을 보내니 알겠다며 금방 사라졌고.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벗어던지고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둘러썼다. 자려고 했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아침도 거른 터라 배가 고픈 게 분명한데도 밥 생각이 나질 않았다. 정신없던 회화시간이 끝나자마자 병든 닭 마냥 비실거리며 자취방으로 기어왔다. 기력이 다 한 거지, 뭐. 배터리가 방전 됐으니 충전이 필요했다.
교수님이 강의실을 나서자마자 교재를 챙겨드는 내게 녀석이 웃는 얼굴로 한 번 더 물어왔다. 선배, 점심 약속 있으세요? 네가 싫다고는 한 적 없다는 내 말 때문인지 한결 편안한 모습으로 나를 대하는 듯 보였다. 악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선함이 가득한 얼굴로 점심식사를 제안하던 녀석을 빤히 보다가 선약이 있다는 말로 거절하며 강의실을 빠져나오긴 했는데 왜 그게 지금까지 생각이 나느냔 말이다.
아, 미치겠다.
잠이 부족해서 정신이 없는 거겠지. 그래, 그런 게 분명하다.
시간이 남아도는데 정작 잠은 오지 않는다. 환장 하겠네 진짜. 눈은 시린데, 억지로 눈을 감고 잠들려고 노력해 봐도 정신은 또렷하기만 하다.
으아,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이게 지금 뭐하는 짓거린지 모르겠다. 나 김종인한테 열등감 있나. 그래서 유치하게 구는 건가. 누가 봐도 잘난. 한 살 어린 후배한테 유치하게 뭐하는 짓이야, 진짜?
솔직히 녀석을 백퍼센트 이해하는 건 아니었다. 나 싫다는 사람 신경 쓰이는 게 당연한데 나는 그 녀석처럼 잘 보이려고 애쓰는 타입이 아니어서. 그래, 확실히 주위에 사람이 득실거리는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김종인하는 것만 봐도 저 싫다는 나한테 비위 맞춰주며 살랑살랑 예쁨 떠는데 하물며 저 좋다는 사람한텐 얼마나 잘할지 안 봐도 뻔했다. 보살이야 뭐야? 그리고 걘 뭔데 자꾸 나한테 잘 부탁한대?
“..시발.”
잠은 부족하지, 배는 고프지, 정신은 저 안드로메다로 떠나고 있지….
한쪽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자자, 도경수. 쓸데없는 생각일랑 집어치우고 그냥 자는 거야. 자고 일어나면 아무렇지도 않을 거야. 그래, 그럴 거야.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엉켜드는 생각들을 잘라버리고 싶었다. 코드를 뽑아버리면 전기가 끊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눈을 뜨니 오후 여섯시 남짓한 시간이었다. 빌어먹을. 어중한간 시간에 깼으니 오늘 잠은 다 잤다. 부족한 잠을 보충한 것인데도 개운하기는커녕 온몸에 피로만 가득했다. 오히려 안 자느니만 못한 것 같은 그런 찝찝함. 피로가 내리누르는 것처럼 사정없이 늘어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이래서 생활패턴이 꼬이면 안 되는 거구나. 뻐근한 어깨를 주먹 쥔 손으로 툭툭 내리치며 핸드폰부터 찾았다. 외투 주머니에 넣어둔 걸 깜빡하고 애꿎은 바지만 뒤적이다가 겨우 찾았다. 액정을 확인하니 여러 개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김종대 아니면 변백현 일거라고 확신했다.
아니나 다를까, 심심한지 시비를 거는 종대의 문자를 확인하고 가볍게 넘겼다. 공부나 해, 인마.
[도콩 자냐? 일어나면 전화해.]
[나 할 말 있으니까 저녁 먹지 말고!]
[빨리 일어나라 좀!]
[도콩!도콩도콩도콩!!]
왜 자꾸 찾고 지랄이야. 문자에서 변백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심코 통화버튼을 누르려다가 아직 상단바에 남아있는 메시지 창이 눈에 띈다. 확인하지 않은 문자가 남았나보다 하며 백현의 메시지를 넘기자,
[선배, 식사 맛있게 하세요!]
PM 1:48 김종인에게서 도착한 문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뭔데.”
자다 일어나서 확인한 문자 때문에 찝찝함이 가득한 얼굴로 삽겹살 집에 도착하면, 미리 자리를 맡아놓고 앉아 나를 기다리던 백현이가 보인다. 녀석에게 다가가 의자를 빼내어 앉으며 툭 물음을 내던지자, 녀석이 왔어? 하며 웃는다.
“저녁 안 먹었지?”
“어.”
“그럴 줄 알고 내가 미리 주문해 놨다.”
고개를 끄덕이며 맞은편의 변백현을 슥 쳐다보면 내내 싱글벙글. 뭐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입 꼬리가 귀에 걸려서 내려올 생각을 않는다. 그걸 빤히 쳐다보자 계속 그 얼굴을 하고는 뭘 보냐고 말하는데 그 반응이 평소의 녀석과는 달라서 아, 진짜 무슨 일이 있긴 있나보다. 확신했다.
“삼겹살 3인분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짧게 말하며 집게를 쥐고 불판 위에 고기를 얹는 와중에도 웃음이 떠나질 않는 구나, 변백현. 뭐야, 뭔데. 애태우던 그 여자랑 잘 된 건가. 그래서 그거 자랑하려고 날 불렀나.
“도콩, 많이 먹어라.”
“..어.”
수저를 꺼내들며 불판 위에 익어가는 고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려 죽으려는 변백현을 보는 것 보다 훨씬 나은 일인 것 같아서. 그러고 보니 아침, 점심도 다 거르고 오늘 첫 끼였다. 아침에 김종인이 억지로 쥐어준 우유로 하루를 연명했네. 고마워해야하는 건가.
“네가 사는 거냐?”
“...어? 어!”
기분이 좋긴 좋은지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하는 녀석을 슬쩍 보다가 메뉴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밥도 같이 먹어야겠다. 배고프니까. 정신없이 지나다니는 알바생 한 명을 붙잡고 된장찌개와 공기 밥을 주문했다. 백현이에게 너도 먹을래? 물으니 자긴 안 먹는단다.
“공기 밥은 하나만 주세요.”
안 먹어도 배가 부른가보지? 자랑하고 싶어 죽겠지? 근데 난 안 물어 보련다. 일단 네 자랑질을 들어주는 것보다 내 배를 채우는 게 우선이거든.
어느새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어들었다. 변백현은 먹을 생각이 없는지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 이 표정은 또 뭐야. 내내 싱글벙글이던 주제에.
“넌 안 먹어?”
“응? 먹어야지.”
“…….”
“도콩, 물 마실래?”
“내가 알아서 마실게.”
젓가락을 입에 물고 슬슬 눈치만 살피는 게 영 수상했지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바람에 식사에 집중하기로 했다. 금세 나온 공기 밥을 퍼먹고, 고기 몇 점을 꼭꼭 씹어 먹으며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녀석에게서 집게를 받아들어 내가 굽겠다고 하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도 여전히 고기는 입에도 안 댄 상태.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이래? 자꾸 눈치를 보는 것 같아 못이기는 척 먼저 물었다.
그냥 들어주고 치우는 게 낫겠다.
“뭐. 왜. 왜 그러는데?”
내 말에 백현이 눈에 띄게 놀라며 응? 왜? 왜긴 왜야, 너 할 말 있다며.
“어? 어.. 할 말 있지. 있어, 할 말.”
“해.”
“..해야지.”
“하라니까?”
“할 거야.”
녀석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고기를 뒤집는데 열중하다가, 멍석을 깔아줬는데도 조용하기에 슬쩍 고개를 들어보면 어딘가 멍한 얼굴로 눈만 깜빡깜빡. 때 되면 알아서 하겠지 싶어, 불을 약 불로 줄이고 집게를 내려놓았다. 콩나물이랑 마늘도 구워야겠다 싶어 젓가락으로 콩나물을 집어 불판의 가장자리에 올려놓으면, 내내 조용하던 변백현이 불쑥 냉수를 따른 컵을 내 쪽으로 내민다.
“놀라지 말고 들어.”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작게 속삭이는데 주위가 워낙 시끄러워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놓쳤을지도 모른다. 뭐야, 안 어울리게. 원래 큰 소리로 자랑해야 되잖아, 너. 시끌벅적한 고기집 특유의 분위기와 상반되게 무거운 분위기를 잡는 게 좀 우습다. 무슨 중대 발표를 하려고 이러는 거야? 갑자기 결혼이라도 한다는 건 아니겠지?
“..뭔데.”
말을 꺼내놓고 쉽게 이어가지 못하는 녀석에게 심드렁하게 물으면, 변백현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며 나더러 따라하란다. 왜 이래 진짜.
“심호흡. 심호흡 하자.”
지랄한다. 어? 결국 내 입에서 욕이 나오게 만드는 구나, 너.
“...나 잘 돼가는 사람 있다고 했잖아.”
“어.”
“..우리 오늘부터 사귀기로 했어.”
“어. 축하한다.”
영혼없는 대답에 쓴소리를 할 줄 알았더니,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입을 달싹인다.
“왜? 할 말 남았냐?”
큼지막한 김치를 가위로 잘라내며 물었다.
“…남자야.”
사각사각, 움직이던 가위질이 멈췄다.
“뭐?”
“..남자라고.”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어이가 없어서 눈동자만 굴려 변백현을 보면, 입 안이 바싹 마라는지 자꾸 혀로 입술을 축인다.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초조한 모습.
“..너 믿고 말하는 거니까. 아, 어... 당황스럽겠지만, 경수야. 혹시나 나랑 친구하기 싫으면모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변백현의 고개가 위로 딸려온다.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거란 생각은 못했는지 크게 당황해서는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한다. 그리고는 다급하게 내 팔을 잡으며 일단 앉아봐.
“누구세요? 이거 좀 놔주실래요?”
“도콩! 도콩 진정해. 난 너 믿어. 믿는다 친구야. 내가 2년동안 봐온 너는 이까짓 일로 친구를 버릴 놈이 아니야.”
“사람 잘 못 봤어. 난 버릴 거야.”
아…. 아침부터 재수가 없다 했는데 저녁까지 난리난리 개 난리가 따로 없구나. 시발 지금 내가 무슨 소릴 들은 거야. 어이가 없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하다. 가만히 서서 변백현을 내려다보면, 말하는 것과는 달리 어딘가 상처받은 표정으로 입술만 꾹 깨물고 있다.
“야, 나도 쉽게 말 꺼낸 거 아니야.”
“…….”
“내가 진짜 얼마나….”
…아, 아. 아!!! 짧은 한숨을 내쉬며 짜증스런 목소리를 냈다. 목을 뒤로 젖혔다가 한 손으로 목을 받치며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아, 뭐야 진짜. 돌겠네, 시발.
“…경수야.”
그래, 남자. 남자랑 사귀신다고.
뜬금없이 커밍아웃을 하는 친구 놈에게 나는 무슨 반응을 보여야하는 걸까. 답지 않게 풀이 죽어서 고개를 푹 숙이며 내 이름을 불러오는 녀석을, 그 뒤통수를 내려다보다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목이 탄다. 너 이 새끼 이럴려고 나한테 물 줬구나. 냉수 먹고 정신 차리라고. 앞에 놓인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키자 목구멍 뒤로 넘어가는 차가운 느낌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진다. 순식간에 물 한 컵을 비우고,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죄인처럼 앉아있는 변백현을 보았다.
“..너 게이야? 일학년 때 여자 친구 있었잖아.”
그 와중에 이 새끼의 안위를 생각해서 낮은 목소리로 묻는 나도, 참.
“…바이야.”
슬그머니 고개를 든 변백현이 수줍게 대답한다.
“시발.. 내 살다 살다... 사귀는 거 맞아? 사귀기로 한 거 맞냐고.”
고개를 끄덕끄덕.
“혼자 좋아하는 거 아니고?”
이번에도 끄덕끄덕.
“걔도 게이냐?”
“...어.”
작은 소리로 묻는 내 말에 변백현도 개미만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걸 어떻게 확신해.”
이 새끼가 또 감정에 눈이 멀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라도 할까봐 걱정부터 앞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분명히 좋다고 했는데, 상대는 그게 아니라면.
일반적인, 흔한 일이 아니니까 그땐 너만 좆되는 거야, 병신아.
골이 아파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으면, 변백현이 꾸물거리며 대답한다.
“…게이 바에서 만났거든.”
답도 없는 대답에 쿵 소리를 내며 테이블로 머리를 박아버렸다.
아, 진짜…. 이 새끼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
그분이 그분일거에욬ㅋㅋㅋㅋㅋㅋㅋㅋ아마!
아 앞으로는 매일매일 못 올 것 같아요TT 써놓은거 바닥났습니드....
홈에서는 6편까지 연재되었어여
그래도 뭔가, 차별화를 둬야 될 것 같아서 부득이하게^^;
예쁘게 봐주세요!
카디의 숨바꼭질. 연애 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지만...;;;;;;;;
감사합니다!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인스티즈앱
ㄹㅇ 영롱하다는 갤럭시 신규 컬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