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국이 이상하다.
붉은 여왕 효과
; 이상하다.
"그러니까 도와줄 때 넘기지 그랬어요."
"다 제가 잘못이네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팔을 다쳤다. 심지어 팔에 기부스가 둘러져있다. 무려 2주동안이나 이 묵직한 느낌을 달고 다녀야 한다고 했다. 옆에서 훈계를 하는건지 궁시렁거리는 그의 행동에 이를 악 물고 대답을 했다. 물론 내 팔이 다친 이유는 내 탓이 100%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래도 괜찮냐는 물음 한 번 없었기에 잔뜩 비아냥거렸다.
어제 일이었다. 정리해야할 서류들을 한꺼번에 들고선 평소보다 조금 느린 걸음으로 걸어갈 쯤이었다. 박스의 부피가 크다보니 앞이 안 보이기도 헀고 더군다나 구두를 신어서 계단의 넓이를 가늠하지 못한 내 실수였다. 또 이 쪽 회사가 유독 계단이 많은 회사였던 것을 간과했다. 차분히 계단을 내려오다 하필 발을 헛디뎌서, 또 나는 하필 서류를 집어던졌고, 하필 넘어지면서 단단한 쇠뭉치에 팔을 박은 것인지.
"그래도 다행이네요. 살짝 금만 갔다고 하니까."
"아. 네. 다행이네요."
차라리 오른손이 다쳤다면 병가라도 마음 편히 낼텐데 왼손을 다치는 바람에 꼬박 회사에 나오게 생겼다. 물론 워드작업도 워드작업이지만 미팅에 손실이 생겨서 문제였다. 해외 바이어를 만나야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팔을 다쳐버렸으니 참석을 잠시 미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문제에 대해서 팀장님도 꽤나 너그러운 편이였다.
"그러면 점심먹고 저기 앞 카페에서 보죠."
"그러죠."
내 어깨를 툭툭 치고선 먼저 떠나버린 민윤기씨는 점심시간에 칼같이 나갔더랬다. 키보드 위에서 맴돌던 손가락을 거두고 책상 위에 놓인 지갑을 챙겨들고선 회사를 떠났다.
근처 인적이 많이 없는 식당으로 들어가 식사를 주문하고 약간 뻑뻑해진 눈가를 매만졌다. 최근들어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진 탓인지 눈에 피로감이 더욱 심해진 것 같았다. 피곤한 눈을 감고선 가만히 앉아있던 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여보세요?"
오늘 끝나고 나 좀 볼래요?
"네, 제가 그 쪽으로 갈게요."
네 그럼 이따가 봐요.
남준씨였다. 그와의 통화가 끝나자 식사가 나왔다. 평소보다 조금 급하게 밥을 먹던 나는 순간 숟가락을 멈추고선 핸드폰을 들어보였다.
'저 퇴원했어요.'
이름대신 적혀있는 전화번호였지만 누군지 알아내는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녀석의 문자에 괜히 실소를 터뜨리다 다시 숟가락을 쥐었다. 실장님의 말로는 나름대로 잘 풀려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해선 딱히 궁금해하지 않았다. 알고싶지 않았다. 혹여나 알게 된다면 그 녀석과 친하게 지내야 할 것 같아 내가 먼저 연결고리를 끊어버렸다.
***
"그러면 일단은 승희씨가 잠시 도와주실 것 같아요. 그러니까 걱정하지는 마시고."
"오늘 저녁에 미팅 장소 열쇠예요. 오후 7시에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시는 분 계실거라고 그 쪽에서 연락왔어요."
그에게 파일과 대략적인 미팅에 대해 알려주고 나니 아슬아슬하게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오후에는 자신의 회사로 돌아가는 민윤기씨 덕분에 시간이 더 촉박한 편이었던 것 같다. 먼저 회사로 떠나야하는 그가 먼저 일어나고 나는 흩어져있던 자료들을 모아 정리를 하고 있었다.
"아이씨."
망할. 자료를 겨우 집어들어 책상에 대고선 탁탁 두들겨 정리를 하던 중에 바닥으로 흩어진 자료들을 보며 탄식이 터져나왔다. 허리를 숙여 자료를 하나하나씩 집어들며 책상위로 올려놓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 장의 종이를 집어들었을 때 내 앞에 검은 구두가 보였다. 고개를 들어 그 인물을 확인하니 오랜만에 보는 그가 서 있었다.
"팔이 아프면 회사를 쉬던가."
"… …."
"아니면 주변 사람한테 도와달라고 하던가."
건너편에 앉아 내 자료를 뺏어든 전정국은 하나씩 정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서 자료를 가져오려하자 내 오른손을 잡아들고선 자료에서 멀리 떼어낸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거 참 못해."
"… …."
"어떻게 매번 먼저 알아주기를 바라는거냐고. 그 때 말했으면 이렇게까지는 아니었을텐데."
"줘. 들어가야 돼."
"날 그렇게 떠봐야 되는거였어? 아니면 아니다, 맞으면 맞다. 왜 그걸 말을 못하는건데."
두 눈이 마주쳤다. 화가 난 듯한 전정국은 곧 내 가방 안에 자료를 몽땅 넣고 나서야 내 손에 자료를 쥐어주었다. 서운한 것 같은 감정을 담은 한숨을 쉬던 전정국은 곧 울어버릴 것 같이 눈에 물을 가득 담고 있었다.
"지금까지 오해를 한 내가 뭐가 돼. 괜찮다고 한 내가 뭐가 돼. 잊어버리겠다고 한 내가 뭐가 되는건데."
"… …."
"호텔을 갔냐고 의심하면 회사 미팅때문에 갔던 거라고, 네가 없던 2년이라는 시간동안 힘든 일이 있었다고, 너 잘 지낸다고 해서 그런 줄 알고 있었던 내가 뭐가 되는건데."
그의 말투에는 서운함만 담겨있었다. 나에 대한 원망은 딱히 보이지 않았고 오직 나에 대한 서운함만 표현하고 있었다. 그의 말은 곧 사람들의 말소리에 묻혀버렸고 그의 말의 흔적이 사라질 쯤 카페를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미팅 하나 빠졌다고 퇴근이 이렇게 빨라질 줄이야. 조금 이르게 병원에 찾아왔다. 카운터에 앉아있던 분에게 '김남준'의 이름을 말하니 아직 진료 중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기실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대략 30분정도가 지났을까 문이 열리고 환자라고 추정되는 분과 남준씨가 나왔다. 환자를 떠나보낸 그는 꽤 피곤한 듯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고개를 흔들어보이던 그는 이내 나를 발견하곤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그리고 팔은 또 왜그래요?"
"팔은 계단에서 넘어져서 이렇게 됐고, 팔이 이렇게 돼서 의도치 않게 칼퇴를 하게 되서 빨리 왔죠."
"아… 오늘 저녁 같이 먹자고 불렀는데 오늘은 힘들겠네요."
깁스에서 시선을 못 떼던 그는 아쉽다는 듯 입을 쭈뼛거렸다.
"잠시 앉아있어요. 오늘 데려가줄게요."
그 말과 함께 진료실로 쏙 들어가버린 남준씨는 얼마되지 않아 모습을 보였다. 주차장으로 내려간 그는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끝으로 차를 몰고 다시 나타났다. 도로로 나온 그는 불편하지 않냐고 물어왔고 나는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불편할 것 같은데…."
"오른손잡이라서 괜찮더라고요."
"그럼 다행이지만."
주차를 하던 남준씨는 두 눈을 깜박이다 무엇인가 아쉽다는 듯 다시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선 조심히 가라는 말과 함께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 손짓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는 길에 잠시 뒤를 돌자 아쉬워하는 남준씨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내 시선을 알아챈 그는 깜짝 놀라며 다시 내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9층에 도착한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고 익숙한 실루엣이 모습을 비추었다. 복도를 비추는 밝은 불에 비춰진 얼굴은 어느새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의 앞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그럼에도 그는 내 뒤를 쫓아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밥 먹었어?"
"응."
"뭐 먹었는데."
"… 볶음밥."
"거짓말."
도어락이 열리자마자 문을 닫던 내 속도보다 전정국이 막는 속도가 조금 더 빨랐다. 전정국의 발에 막힌 문은 곧 활짝 열리고 그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를 무슨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모두 까먹기라도 한 듯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다가와 낑낑거리는 사랑이에게 잠시 시선을 돌린 틈을 타 집 안으로 들어온 전정국은 태연하게 식탁의자에 앉는다.
"너 뭐하냐."
"난 밥 안 먹었거든."
"너네 집가서 먹어. 난 밥 먹고 왔으니까."
"거짓말."
내 말투에도 가만히 나를 쳐다보던 그는 입꼬리만 싸악 올리고선 사랑이를 품에 안았다.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던 그는 사랑이를 내려놓고 부엌으로 걸어갔고 곧 우당탕거리는 소음이 잔뜩 들려왔다. 가방을 바닥으로 내팽겨치고 부엌 쪽으로 걸어가니 냄비는 바닥에 떨어져있었고 바닥은 물로 가득 차 있었다. 전정국의 손에 들린 그릇을 빼앗아들고선 그를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그릇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잔뜩 신이 난 듯한 전정국의 모습이 보였다.
반찬이나 밥을 꺼내놓자 미소를 짓는 전정국이었다. 그런 그를 피해 안방으로 들어가려했던 나를 붙잡은 전정국은 아무런 말없이 고개짓을 해온다. 반대쪽에 앉으라는 신호였던 것 같다.
"밥 먹었다고."
"먹는거 보라고."
"내가 너 먹는 걸 왜 봐야하는건데."
"그냥."
한숨을 푹 내쉬고선 전정국 반대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나서야 숟가락을 들던 너는 반찬을 한 번 빙 둘러보고선 또 다시 미소를 띠운다.
"아."
내 앞에 밥이 담긴 숟가락을 내밀던 전정국은 곧 팔을 조금 더 길게 뺀다. 가만히 그를 쳐다보는 내 모습에 잠시 '흠'소리를 내던 그는 젓가락을 들고선 반찬을 밥 위에 얹고선 다시 내 앞으로 내밀었다.
"밥 먹었다고."
"아."
"남준씨랑 같이 밥 먹었다고."
"아."
"그러니까 그만 하라고."
내 말에 표정을 굳힌 그는 숟가락을 이내 거두고선 고개를 살짝 내렸다가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래서. 운을 띄운 전정국은 다시 숟가락을 들고선 내 앞으로 다시 내밀었다. 전정국은 뭐가 그렇게 태연한건지 다시 '아'라며 말을 꺼낸다.
"내가 먹어. 내가 먹는다고."
"손 다쳤잖아."
"왼손 다쳤어. 오른손 다친거 아니고. 네가 더 잘 알잖아."
"몰라."
그는 여전히 단호했다. 내 생각을 읽지 못하는 그는 여전히 나에게만 단호했다. 분명히 나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 행동이 나를 얼마나 민망하게 만들고 있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그리고 이 이후로도 그는 모를 것이다. 내가 지금 얼마나 화가 났는지, 얼마나 민망한지, 얼마나 안쓰러워보이는지.
"내가 너한테 이렇게 했니?"
"아니."
"아니."
"이런 기분이었니?"
"아니."
고개를 떨구던 너는 미세하게 떨려왔다. 시계 울림소리가 조금씩 커져갈 때쯤 네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너는 또 다시 입을 열었다. 한숨이 터져나오던 너는 나에게 진실을 말한다.
"내가 어떻게 너를 미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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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전정국 가오나시설.
아....아....아.....
아마 정국이가 뭔가를 깨달은 것 같은데
이건 아마 번외로 다루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