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이 선물해준 예쁜 표지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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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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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그래프꼭짓점 12화 |
*
"아, 피곤하다…."
벤츠 뒷좌석에 벌렁 누운 호원이 숨을 쉬는듯하더니 바로 곯아떨어졌다. 아침에도 못 일어나는 걸 우현이 간신히 걷어차서 깨웠었는데 참 잠 많다. 반면에 우현은 피곤한 기색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옷까지 단정하게 입은 채 묵묵히 운전을 하고 있었다.
"팀장님 안 피곤하세요?"
맞는 말이다. 새벽에 그 난리를 폈는데 안 피곤할리가 없었다. 하품을 연달아 하던 성규가 몇 번 눈을 꿈벅거리더니 이내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다. 안 그래도 작은 눈이 펑펑 울어댄 탓에 더 작아졌다. 잠든 성규를 위해 우현이 라디오 볼륨을 줄였다.
*
아침 일찍 일어나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갠 뒤 기지개를 켜며 마당으로 나온 순재, 여리 꽃밭에 피어있는 꽃 한 송이를 보더니 환히 웃으며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성열아!"
늦잠자는 줄만 알았던 성열의 방엔 차가운 냉기만 흘렀다. 책상위에 핸드폰과 지갑도 그대로인걸 보면 아직 집안에….
"…아!"
방문을 닫은 순재, 서둘러 다락방으로 향한다. 문을 열자 피아노 건반에 기대 연필을 쥔 채 잠이 든 성열의 모습이 보인다.
"…Want to see… MS?"
지우개 가루가 가득한 악보를 든 순재가 곤히 잠든 성열을 깨우는 것도 잊은채 음표들을 눈으로 읽어내려갔다. MS……. 성열이 MS를 보고 싶어한다? MS? 서둘러 성열을 흔들어 깨웠다.
"성열아. 성열아."
뽀얀 얼굴에 건반 자국이 빨갛게 남아있다.
"너 여기서 잠들었어."
순재의 말에 성열이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봤다. 새벽까지 정신없이 곡을 쓰다 깜빡 잠이 들은 모양이다.
"근데 성열아."
순재의 손에 들린 악보를 빼앗은 성열이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씻어야겠다며 다락방을 나갔다.
"…MS?"
도대체 MS가 누구야?
*
인생그래프꼭짓점
12.
야유회가 있은지 일주일 후. 기계적인 사무실의 모습도 어느정도 이젠 익숙해졌다. 우현과는 여전히 티격태격이다. 둘 다 자존심이라면 하늘을 뚫고 옥황상제 똥꼬도 훑을 자존심이라, 자그마한 시비도 지지않으려고 서로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변한게 있다면, 우현이 성규와의 말싸움에 조금 재미를 붙혔단 점이다. 한참 일하던 우현이 기지개를 켜며 빈 커피잔을 들고 휴게실로 향했다.
"……."
우현, 휴게실에 들어서자마자 인상을 찌푸린다. 바닥에 떨어져있는 커피 믹스 꼭지와 테이블에 묻은 커피자국, 가득찬 쓰레기통, 널부러진 A4포장용지,그리고 온갖 사무용품….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우현이 휴게실에서 나와 일을 하고 있는 성규에게 다가가 등을 톡톡 두드렸다.
"네?"
그러더니 먼저 휙 휴게실로 들어가버린다. 저 인간이 또 왜 저러지. 껄끄러운 표정으로 휴게실을 따라 들어갔다.
"깨끗합니까?"
성규가 자기 와이셔츠 냄새를 킁킁 맡는다.
"김성규씨 옷 말고 이 휴게실 말이에요. 보기에 깨끗하냐구요."
나도 나름 할 일이 있고 바쁜 사람인데 이 정돈 자기가 좀 하면 덧나나? 쭈그려앉아 쓰레기를 줍는데 우현이 나가지않고 팔짱을 낀 채 청소하는 모습을 감시라도 하려는듯이 의자에 앉아있다.
"청소하는거 처음봐요? 구경났어요?"
물티슈를 뽑아서 커피자국이 남은 테이블을 벅벅 닦아내고 쓰레기통도 새로 비웠다.
"휴우, 됐죠?"
우현이 빈 커피잔에 커피를 따르고 휙 휴게실을 나가버린다. 저런 우라질. 어째 요즘 들어 시비거는 횟수가 더 늘어난 것같다. 빈 종이컵을 꺼내 커피를 따르고 각설탕을 잔뜩 넣은 성규가 우현을 속으로 씹어대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
[진짜진짜 꼭! 꼭 와야한다? 너 온다고 하니깐 안 오겠다던 애들도 다 온다고 했단 말야]
명수가 혀를 차며 전화를 끊는다. 고등학교 때 가장 친했던 선우의 전화였다. 생일 겸 고등학교 동창회 식으로 고등학교때 친구들 다 부르는데 너가 없으면 되겠냐고. 청남고등학교의 전설, 김명수가 빠져서 되겠냐고 안달복달을 하며 징징 짜대는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응해버렸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레디락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정류장에 멈춘 버스에서 성열이 내린다. 명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휙 들자, 성열도 어색하게 웃어주며 뻣뻣하게 손을 들어 흔들어준다.
"안녕. 오랜만이네?"
명수딴에는 자주 오던 성열이 요새 들어 안 오길래 인사치레로 한 말이었지만 성열의 얼굴은 순식간에 원숭이 엉덩이처럼 빨게졌다.
"좀…바,바빠서요. 아니 바빠서.." 성열, 습관적으로 고개를 꾸벅하고 레디락안으로 들어간다. 일주일 만에 보는 명수의 얼굴은 여전히 잘 생겼고 여전히 반짝반짝 빛이 났다. 빨간 볼을 가리며 자리에 앉은 성열에게 명수가 메뉴판을 건넨다.
"전, 아니 난 레몬에이드."
미소를 지은 명수가 커피와 티를 만드는 바(Bar)로 향했다. 성열이 초조하게 다리를 떨며 가방 지퍼를 만지작거렸다. 무슨 정신으로 이걸 전해주려고 왔는지 모르겠다. 저번에 피아노 치는 걸로 보아 악보를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악보만 들고왔는데 만약 못 읽으면 어떡하지? 이런 저런 고민을 하던 성열, 결국 명수를 위해 쓴 악보를 꺼내지 못한 채 한숨을 쉬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래. 아직은, 조금 무리다.
*
사고 이후, 정말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순재, 들뜬 표정으로 베이커리안으로 들어간다.
"순재야!"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두 명의 여자가 순재를 보고는 놀란 표정으로 반갑게 손을 흔든다. 서로 얼싸안고 방방 뛰더니 순재의 몸을 살핀다.
"정말… 괜찮은거야?"
미리 주문해 놓은 디저트와 케잌, 초콜릿들이 줄줄이 들어온다. 커피를 한모금 마신 순재가 먼저 안부를 묻는다.
"아, 맞다. 민정이 너 결혼했다면서?"
민정의 말에 순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으로 입을 가린다. 그럼 저 뱃속에….
"진짜야? 어머! 언제?"
민정이 부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하긴. 다들 서른에서 한 살 빠진 스물아홉들이니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민정의 옆에 앉아있던 단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성열인, 잘 지내니?"
순재, 대답없이 그저 잔잔히 웃는다.
"너랑 성열이, 둘 다 하얗고 길쭉길쭉해서 둘이 피아노 치는 모습보면 정말 소설 속 주인공들 같았는데…."
성열이 곡을 쓰고, 그 곡을 순재가 연주하고. 하얗고 키도 크고 비주얼까지 완벽한 순재와 피아니스트 사이에서 '피아노 요정 남매'로 유명했다. 하지만 사고로 순재가 손을 크게 다치면서 성열도 자연스레 피아노를 멀리하게 됐다. 피아노를 계속 치고 싶고 작곡도 계속 하고 싶지만 누나를 위해서, 누나도 피아노를 치고 싶어하지만 손이 불편해서 못 치는 걸 아니까.
"나 사실 많이 못 되게 굴었었어, 성열이한테. 사고나서 엄마아빠 잃고 손도 다치면서 제정신이 아니었나봐. 나한텐 믿을게 피아노 뿐이었는데…. 그래서 성열이 피아노 치는 거, 내가 많이 시샘하고 질투했다? 내가 더 잘치는데, 내가 더 잘 칠 수 있는데하구…. 근데 그걸 성열이도 느꼈었나봐. 어느날부터 말도 안 하고 피아노도 안 치더라. 마치 아무것도 못하는 나랑 똑같아지려는 것처럼…." 단희가 묻자, 옆에 앉은 민정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눈치를 줬다. 그 모습에 순재가 씁쓸하게 웃으며 딸기 타르트를 잘게 잘라 입에 넣는다. 달달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지만, 이상하게 입과 마음이 씁쓸했다. 우현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일까. 예전엔 서로 마음을 나눈 연인사이었지만 지금은? 사고 후, 둘 다 서로에 대한 마음을 자연스레 접었다. 이제 사랑이 아닌 우정을 바탕으로 지내는 두 사람은, 사랑의 애틋함같은 건 과거에 묻기로 했다. 암묵적으로. 언젠가 우현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기꺼이 축복하고 그 사랑의 영원을 기도하며 흔적없이 사라지고 싶다. 그냥 잠시동안 우현의 맘속에 '이순재'라는 사람이 머물었었다,하고.
인생그래프꼭짓점
어느덧 퇴근 시간. 엘리베이터 앞. 어깨가 뭉친 우현이 어깨를 휙휙 돌리다 실수로 옆에 서있던 성규의 팔뚝을 툭 쳤다.
"실수."
짧게 내뱉는 말에 성규가 입을 씰룩거린다. 분명 일부러 했을거야, 재수없는 인간. 신경끄는게 상책이라 생각하며 호원과 얼른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내려가는가싶더니 바로 밑층인 3층에서 멈춘다. 문이 열리고 직원들이 우루루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
어쩔 수 없이 구석으로 밀리게 된 성규와 우현, 하필 자세가 성규가 구석에 서있고 그 앞에 우현이 성규를 보며 서있는 자세다. 좁아터진 엘리베이터에서 저리 꺼지라고 할 수도 없고 차마 밀쳐내지도 못하겠는 성규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성규의 동그란 머리통에서 은은한 샴푸냄새가 났고 우현의 가슴팍에선 알싸한 향수냄새가 콧속으로 훅 끼쳐들어왔다. 서로 생각한다. 그리 나쁜 냄새는 아니군. 호원은 반대쪽 구석에서 애니팡만 두들기고 있다. 1층에 도착하자 직원들이 우루루 몰려나가고 우현도 휙 뒤돌아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내일 봐요! 내일 보자!"
성규와 우현에게 한번씩 손을 흔들어준 호원이 차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먼저 빠져나갔다. 운전석에 타려던 우현이 앞 유리에 끈적하게 흐르고 있는 새똥을 보고는 오만상을 지으며 성규를 부른다.
"김성규씨. 나와봐요."
조수석에 앉아 벨트를 매려던 성규가 고개만 쑥 내밀고 대답했다. 새똥 좀 치우세요. 우현이 손가락으로 새똥을 가리키며 휴지를 꺼내 성규에게 내민다. 아니, 지 차면서 왜 나보고 닦으래?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왜 내가 닦아요, 팀장님 차인데? 그리고 내가 무슨 청소부에요?"
휴지를 북북 뜯어내 유리창에 묻은 새똥을 닦아냈다.
"이것도 못해요, 이것도?"
휴지를 들이밀며 말하는 성규를 더럽다는 듯이 쳐다본 우현이 얼른 운전석에 올라탔다.
"이건 어떡하구요?"
성규가 자신의 손에 들린 휴지를 보며 물었다.
"주머니에 넣었다가 집가서 버려요."
우현과 몇 마디만 더했다면 미친듯이 울부짖으며 앞 유리를 모조리 깨버릴 것 같다. 결국 쓰레기통에 휴지를 버리고 온 성규가 조수석에 올라타며 우현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혼잣말을 했다.
"스물여섯이나 먹은 사람이 자기 차에 묻은 새똥도 못 닦아? 어휴."
그러더니 휙 후진을 한다. 뻔뻔하고 재수없는건 기네스북에 올라도 될 감이다.
"팀장님 생리하세요?"
평소라면 왜 반말하냐고 인상을 굳혀야할 우현이 오늘은 똑같이 받아친다. 어버버버거리며 당황하자 우현이 당해보란 식으로 연이어 반말을 뱉는다.
"불렀으면 말해. 어벙한 표정만 짓지말고."
무어라 더 말하기도 전에 성규의 가방에서 벨소리가 울린다. 성규, 우현을 노려보며 전화를 받는다.
"어, 엄마. 왜."
성규, 전화를 끊고 퉁명스러운 말투로,
"저기 앞에 편의점 좀 들려요."
우현, 바로 앞에 보이는 편의점 앞에 차를 세운다. 지갑을 들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 성규가 집에서 쓰는 세제와 미용 코너에 있는 팩을 대충 집어들고 계산대로 향한다.
"저… 핫바 하나 얼마에요?"
보온기 안에 들어있는 핫바를 두 개 집으려던 성규,
"그냥 하나만 계산할게요."
우현이 괘씸해 하나만 계산대에 올려놨다. 입에 핫바를 물고 차에 탄 성규가 유치하긴 하지만 일부러 쩝쩝소리를 내며 핫바를 먹기 시작한다. 그 모습에 우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혼자 먹으니깐 맛있어요?"
성규의 손을 힘주어 잡은 우현이 앙,하고 덥석 핫바를 물었다. 핫바의 반절이 순식간에 우현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성규, 말을 잇지못한채 손만 부들부들떤다. 내 핫바가…!
"아, 맛있다."
우물우물거리는 우현의 입속에 나머지 핫바를 구겨넣었다. 편의점 앞에 세워진 우현의 벤츠가 좌우로 흔들흔들거린다.
"호원씨 맞죠!"
하늘색 후드티를 입은 동우의 모습에 호원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지금 퇴근하시나봐요?"
호원의 카트에 담긴 것들을 보며 동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집에 혼자 사세요?"
인스턴트가 가득한 호원의 카트와 달리, 동우의 카트안엔 형형색색의 채소들로 가득했다.
"동우씨 요리 잘 하세요?"
동우가 헤헤헤하며 웃는다. 꼭 채소같은 사람이다. 비타민이 마구마구 넘치는 채소같은 사람.
"나중에 놀러가야겠네요. 맛있는거 얻어먹으러."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도중,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몇 살 안되어 보이는 꼬마아이가 엄마를 목놓아부르며 엉엉 울고 있었다. 혼자인 걸 보니, 아마 엄마가 한 눈 판 사이에 잠시 떨어져나온 것 같았다. 카트를 동우에게 맡긴 호원이 쪼르르 아이에게 달려간다.
"꼬마야. 왜 울어?"
엄지 손가락으로 다정하게 눈물을 닦아준 호원이 근처에 서있던 직원을 불러 아이가 엄마를 잃어버린 것 같으니 부탁한다며 아이를 맡겼다. 직원이 무전기로 몇 번 무전을 나누더니 곧 아이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허겁지겁 달려와 아이를 끌어안고 간다.
"와…. 호원씨 방금 되게 자상하고 멋있었어요."
호원, 칭찬 참 좋아한다. 더 살 게 있다는 동우와 헤어져 계산대로 향하면서 입으로 계속 뭐라 중얼중얼거린다.
"…되게 자상하고…되게 멋있는…남자 이호원. 하학학학학학."
카트를 씽씽 구르며 계산대에 도착한 호원이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며 인스턴트 식품을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칠칠맞기는."
성규의 핸드폰을 집어들고 폴더를 열었다. 구시대적인 디자인에, '항상 웃자^^성규 화이팅!'이라고 쓰여진 바탕화면 문구도 어지간히 촌스럽다. 피식 웃은 우현이 좀 더 폰을 구경할 심산으로 사진첩을 열었다. 꽤 오랫동안 쓴 핸드폰인지, 사진 저장 갯수가 357개나 된다. 명수와 같이 찍은 셀카부터 봉신 씨와 함께 찍은 사진, 바다에서 찍은 사진, 그리고 주변 풍경을 찍은 사진까지. 쓸데없는 사진들도 많았다. 우중충한 하늘을 찍었다거나, 길가에 꼬질꼬질한 고양이를 찍었다거나. 그리고 한가득 찍은 엽사까지. 성규와 명수의 끔직할 정도로 골때린 엽사에 우현이 웃음을 빵 터트렸다. 콧구멍에 동전을 넣고 찍은 사진, 입에 새우깡을 꽂아넣고 드라큘라처럼 찍은 사진, 올빽한 명수 사진….
"핸드폰에 카메라 기능 없었으면 큰일날 뻔했네."
사진첩에 있는 모든 사진을 관람한 우현, 이번엔 전화번호부를 열어본다. 많은 연락처 중에, 과연 자신은 어떤 이름으로 저장되어있을까.
"…밴댕이…소갈딱지?"
이게 무슨 뜻이지? 왠지 좋은 어감은 아닌데. 찜찜한 표정을 지은 우현이 편집버튼을 눌러 '멋진 남팀장님'으로 이름을 바꿔놓는다. 흡족한 표정으로 전화번호부를 닫고 알림창이 떠있는 달력 버튼을 눌렀다. [D-7][D-8]. 화면 상단에 나란히 숫자가 떠있다. 꾹꾹 버튼을 움직여 디데이 문구를 누르자 팝업창이 화면에 뜬다. [내 생일 D-6][사랑하는 울 아부지 보러가는 날 D-7]
"……."
성규 생일 바로 다음날이 아버지 기일인 것 같았다. 참 슬픈 우연이다. 생일 바로 다음날이 아버지 기일이라니. 왠지 성규가 측은해진 우현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간다. 먼저 돌려주기귀찮았다. 뭐, 없어진 줄 알면 찾아오겠지.
전신 거울앞에 선 명수, 머리까지 왁스로 만져가며 꽃단장을 하고 있다. 정장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둔 성규가 봉신 씨에게 세제와 팩을 내민다.
"이게 뭐야. 오미자 아니면 알로에 사오랬더니 레몬이잖아. 어휴, 귀찮아도 내가 가서 사는 건데."
레몬 팩을 꺼내든 봉신 씨가 오미자와 알로에가 아니라며 잔소리를 해댄다.
"그냥 아무거나 하셔. 밥 줘. 배고파."
봉신 씨, 팩들을 냉장고 제일 아랫칸에 넣고 반찬들을 꺼낸다.
"나 오늘 늦게 올지도 모르니까 대문 잠그지마."
멋드러지게 차려입은 명수가 휙휙 손을 흔들며 집을 나간다. 밥과 국을 퍼 성규의 앞에 내려놓은 봉신 씨가 달력을 보며 중얼거렸다.
"다음주 금요일, 너 생일이네."
성규 생일은 금요일, 아버지 기일은 토요일. 주말에 걸쳐진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봉수 아저씨 핸드폰 번호, 너한테 있지?"
수저를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간 성규가 가방을 뒤적뒤적거렸다.
"…어?"
가방안의 내용물을 침대위에 탈탈 털어도 없다. 정장 주머니를 뒤져봐도 없다.
"어디갔지?!"
성규,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가 다시 나온다. 거실에도, 식탁에도 핸드폰은 없었다. 망했다! 잘 까먹는 성격이라서 모든 중요한 건 메모장에 적어놨는데! 게다가 그 많은 엽사들!
"아, 어떡하지!"
아! 성규가 손가락을 부딪혀 딱 소리를 내더니 급히 현관문을 열고 뛰쳐나간다.
"차 안에 두고 내린 것 같은데…."
우현의 벤츠 유리창에 찰싹 달라붙은 성규가 차 안 여기저기를 살폈다. 만약 그 재수없는 인간이 들고 내렸으면 분명히 안에 있는 망할 엽사들을 다 봤을텐데! 혹시나 문이 열려있을까싶어 조수석 손잡이를 홱 잡아당겼다. 그러자 갑자기 차 불빛이 번쩍 하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삐용삐용거리기 시작한다. 온동네를 울리는 경보음 소리에 성규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헉! 어떡해!"
벤츠 본네트를 팡팡 내려친 성규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할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누구에요?"
울타리에 선 우현이 위에서 성규를 내려다보며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낸다. 성규의 오래된 핸드폰이다.
"혹시 이거 찾아요?"
울타리로 달려온 성규가 우현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홱 채간다. "호,혹시 봤어요?"
성규의 어깨가 흠칫, 떨린다. 아, 젠장. 봤구나.
"봐,봤어요!? 왜 봐요, 왜! 남의 핸드폰을 왜 뒤지냐구요! 왜! 왜!"
하여튼 얄미운 말만 골라서 한다니깐. 아우, 쪽팔려. 우현을 흘긴 성규가 쾅! 소리를 내며 대문을 닫았다. 피식 웃은 우현도 집안으로 들어간다.
명수가 호프집안으로 들어서자 길게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던 친구들이 반갑게 웃어주며 명수를 맞이한다. 거의 연예인 급이다.
"봤지? 봤지? 내 말이 맞지? 진짜 명수 온댔잖아, 이 시키들아! 인누와, 명수얌. 요기요기 앉어."
명수를 끌어당겨 자신의 옆자리에 앉힌 선우가 싱글벙글웃으며 잔을 가져와 맥주를 따라준다.
"애들 진짜 거의 다 모였네."
선우의 바로 앞자리에 앉아있던 미희가 묘한 웃음을 띄며 명수에게 인사를 건넨다. 고등학교 때 자기 입으로 자기가 명수 애인이라고 소문내며 다녔을 정도로 명수에게 집착했던 미희. 아직도 그 마음이 남은 건지 명수를 보는 눈빛이 사뭇 음산하기까지하다.
"너 코했냐?"
명수의 말에 미희가 헛기침을 하며 코를 매만졌다.
"무,무슨 소리야."
선우가 명수의 말을 막으며 건배를 제안했다. 친구들이 하나같이 잔을 들고 서로 쨍쨍 부딪히며 시원하게 잔을 비운다.
"명수는 애인있니?"
미희의 물음. 명수가 땅콩 껍질을 벗기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안 키워."
미희의 꼴 사나운 추파를 보며 친구들마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친구사이만 아니였다면 완전 스토커 수준이다. 하지만 명수는 크게 신경쓰지않고 간간히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맥주만 홀짝홀짝 들이켰다. 문득, 선우 앞에 잔뜩 쌓여있는 선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선물 못 사와서 미안하다."
선우가 능글맞게 웃으며 명수의 어깨에 노란 머리를 부비적거린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애들과 대학 졸업을 앞둔 여자애들 모두 취업을 준비하는 듯 보였다.
"명수, 넌 진짜 모델해야된다니깐. 아님 배우도 괜찮고. 너 같은 비주얼은 공동체 사회에서 썩기 아까운 얼굴이야."
쏟아지는 칭찬에 명수가 그저 심드렁한 얼굴로 땅콩만 하나씩 톡톡 입안에 넣었다. 재수없을지몰라도 이젠 하도 들어서 질릴 정도였다.
"누가 들으면 내 생일인 줄 알겠네. 차선우 칭찬이나 해."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고 얼추 술기운이 슬슬 올라올때, 자리에서 일어난 명수가 화장실로 향하는 걸 미희가 조용히 뒤따랐다.
"김명수."
손을 씻고 나오던 명수가 문앞에 서있는 미희를 보고는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너 정말 여자친구 없어?"
휙 지나쳐 가는 명수를 보며 미희가 중얼거렸다.
"저게 매력이라니깐…. 튕기긴."
*
서류를 덮은 우현이 순재를 따라 거실로 나왔다.
"나…성열이 데리고 다시 호주로 갈까?"
찻잔을 마시던 손을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의 순재를 살폈다. 무슨 일 있었나?
"갑자기 무슨 소리야?"
우현의 말에 순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락방에서 내려오려던 성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이야기를 엿듣다가 다시 다락방 안으로 들어간다. 소리안나게 방문을 닫은 성열, 문앞에 주저앉아 악보만 만지작거린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정말 순재 말대로 다시 호주로 돌아가게 된다면? 호주로 돌아가 학교도 다시 다니고 피아노도 다시 치고 곡도 다시 배우는 건 정말 즐겁고 설레는 일이다. 또 바라던 일이기도 했고. 하지만, 하지만….
"하아…."
한숨을 내쉰 성열이 불을 켜지 않은채 다락방 창문을 활짝 연다. 며칠전만해도 댕글댕글하던 달이 어느새 반쪽이 되어있었다. 별도 없고 반달만 덩그러니 떠있는 쓸쓸한 밤하늘이다.
"아, 진짜 싫다고."
어디선가 명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명수의 목소리라면 100m에서도 캐치해낼 성열이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레임으로 가득차던 성열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게 식었다.
"야. 여자가 좀 도도해져봐. 구차하게 이러고 싶냐?"
명수가 어떤 여자와 함께 서있었다.
"나 너한테 상처주기 정말 싫거든? 친구라서 참고 또 참고 있는거니깐 그만하고 가라."
악보를 쥐고 있는 성열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악보 귀퉁이가 꼬깃꼬깃 접히기 시작한다.
"나 들어간다. 잘 가라. 그리고 선우한테 미리 말해놨어. 내 번호 가르쳐주지말라고."
머리를 벅벅 긁은 명수가 짜증을 내며 대문을 쾅 닫았다. 입꼬리를 올려 피식 웃은 미희의 모습에 성열의 눈이 화르르 불탄다. 감히 너같은 난쟁이 똥자루가 명수를?
"…아야!"
뒤돌아가려던 미희, 무언가에 머리통을 맞고 인상을 찌푸린다.
"…아씨, 뭐야!"
잠자리 지우개? 바닥에 떨어져있던 지우개를 집어든 미희가 욕을 뱉으며 주위를 두리번두리번거렸다.
"어떤 새끼가 던진 거야!" 다락방 창문 밑으로 고개를 숙인 성열,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오려고 한다. 욕을 씨부렁거린 미희가 구둣소리를 내며 오르막길을 지나 사라지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나저나 명수가 그 난쟁이 똥자루같은 여자한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어보여 다행이다. 성열이 실실 웃으며 창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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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슬아슬하게 10시!!!!!!!!!!!!
하악하악하악하악 ㅠㅠㅠ
인생그래프꼭지점은 매주 주말 , 토요일~일요일에 걸쳐 두 편이 연재됩니다!
연재되는 시간은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였는데
다음주부터 오후8시부터 12시까지입니다!~
댓글 달아주신 분들 ㅠㅠ너무 감사드려요 ㅠㅠ
사랑합니다 , 정말로. 진심으로. 스. 릉. 흡. 느. 드.
암호닉 모두 저장했어요!
그리고 제가 분량채우느라 댓글에 답글 못 달아줘서 너무 죄송해요ㅠㅠ
진짜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읽어보는데 ㅠㅠㅠㅠㅠㅠㅠ
앞으로 꼬박꼬박달게요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