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꽃 나리는 / 그 여자네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면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 살까지 살던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가
있던 집
그
여자네
집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각을 하면.
이름이는 아들 넷이나 둔 집의 막내딸이자 외딸이었다. 부지런한 농사꾼 아버지와 착실한 그의 자식들은 가을이면 마을에서 제일 먼저 지붕을 이었다. 다섯 장정들이 후딱 해치울 일이었건만, 제일 먼저 이름네 지붕에 올라가 부산을 떠는 건 정국이었다. 이름네가 일손이 모자라는 집도 아닌데.
마을 사람들은 정국이가 이름이에 관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고 싶어 하는 게 단지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게 아닌 이름집이기 때문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곧 정국이가 이름이의 신랑이 되리라는 걸 온 동네가 공공연하게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둘의 사이는 마을 사람들뿐만 아닌 어린아이들 사이에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들 사이에 연애를 건다고 말하며 야릇하게 마음이 설레고 그들이 짝이 된다면 얼마나 보기 좋은 한 쌍이 될까 상상하는 것만으로 즐거워하는 마을 사람들 이였다.
이름이는 시골 아이답지 않게 살갗이 희고, 맑은 눈에 속눈썹이 길었다. 함박눈이 녹아 이슬방울이 되고 촉촉이 젖은 눈썹이 그녀의 눈동자에 그늘을 드리우면, 목석의 애간장이라도 녹일 듯 애틋한 표정이 되곤 했다. 정국이는 총명하여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았고, 생긴 것 또한 관옥 같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이 장차 신랑 각시가 되면 얼마나 어여쁜 한 쌍이 될까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고 한다.
이름이가 정국이만 보면 유난이 부끄럼을 타기 시작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름이가 정국이 때문에 물동이를 깨트린 일은 마을 사람들의 입초시에 오르내렸다. 이름이는 귀한 딸이고 올케가 두 명씩이나 있어 물동이 같은 것은 안 이어도 됐건만 동무들이 하는 건 다 하고 싶은 나이였다. 그렇게 물동이를 이고 길을 걸어가는데 저 만치서 정국이가 오는 게 보였다. 정국이는 물동이를 들어주려 급히 달려오고 그걸 본 이름이는 오지 말라며 소리치며 흘러내린 저고리를 추켜올리려고 급히 물동이의 손잡이를 놓아 버린 것이다. 그때 이름이가 열 너덧 살 가슴이 살구씨만큼 부풀어 올랐을 무렵이었다. 저고리를 짧게 입고 치맛말기로 가슴을 동일 때라 물을 기를 때면 겨드랑이와 가슴이 드러나게 돼 있었다. 그때 우리 고장의 풍습으로는 가슴에 대한 수치심이 별로 없었다. 물동이를 깨트리면서까지 가슴을 가리고 싶어 했던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 마을에서 정국이가 제일 먼저 읍내 학교로 진학하자 이름이는 아버지를 졸라 중학교에 입학했다. 학교는 우리 마을에서 고개를 두 번 넘고 시냇물을 한번 건너야 했다. 정국이와 이름이가 등하굣길을 자연스럽게 같이 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들을 적시는 개울물이 도처에 그물망처럼 퍼져 있는 긴냇골의 시냇물은 유난히 아름다운 강이었다. 그 시냇물에는 흙다리가 놓여있었는데 비가 오면 흙다리 곳곳에 구멍이 뚫리기도 하고 미끈거리기도 했다. 특히 계집애들은 구멍 난 흙다리를 건너길 무서워해서 차라리 둔덕을 내려가 신발 벗고 강물로 점벙점벙 들어가는 게 안심스러웠다. 그럴 때 앞서서 계집애들을 인도하는 게 남학생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정국이는 이름이가 사내 녀석들과 치마를 배꼽 위까지 걷어올려 속살이 보이고 속바지를 적셔 가며 시냇물을 건너는 것을 참을 수 없어했다. 등굣길은 물론 하굣길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맞춰 기다리고 있다 꼭 같이 가려고 하며 흙다리를 건너면서 이름이가 얼마나 무서움을 타고 그러면 그걸 다 받아 주며 다독거리느라 길지도 않은 흙다리 위에서 둘이 몇 번씩이나 서로 얼싸안는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지곤 했다. 그러나 구닥다리 노인들도 그런 소문을 망신스러워하지 않고 귀엽게 여겼다.
둘은 어차피 혼인할 테고, 서로 좋아하는 것은 예쁘게만 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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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봄에도 마을에 살구꽃이 화아 안 하게 피고, 꽈리 꽃, 자운영이 피었을까.
그럴 리 없겠지만 괜히 안 피고 말았을 것 같다. 그 꽃들이 환하게 피어나기 정국이와 이름이의 사랑도 끝나고 말았을까.
만학이었던 정국이는 사 년제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본 징병으로 끌려나갔다. 며칠간에 여유는 있었고, 양가에서는 서둘러 둘의 혼사를 치르려고 했지만 전정국은 한사코 혼사 치르기를 거부했다. 그건 이름이를 과부로 만들지 않으려는 그만의 사랑법이었을 것이다. 남들이 다 안 알아줘도 이름이 에게만큼은 그의 사랑법을 이해시키려고 어둠이 남아있는 봄의 새벽닭이 울 때까지 이름이를 밤새 끌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끌려다니지 않고 어디 방앗간 같은 데서 단둘이 밤을 지냈다고 해도 정국이의 손길은 이름이의 젖가슴도 범하지 못하였으리라는 걸 양가의 부모님도, 마을 사람들도 믿었다.
정국이네 대문에 일본 깃대와 출정 군인의 집이라는 깃발이 만장처럼 처량히 휘날리고 그렇게 이름이는 정국이와 자신의 집 대문에서 따로 만나 둘은 아무 말 없이 오랜 시간 정적 속에 있었다고 한다.
그때의 정적을 깬 건 이름이의 "꼭 건강히 돌아오실 거지요?" 라는 잔뜩 떨리는 한마디였고 정국이는 이름이의 물음에 숙인 고개를 들고 재회를 약속했다고 한다.
둘의 통탄한 마음과 표정은 서로만 알고 있으리라.
정국이가 징병으로 떠난 후에도 마을 청년들은 뒤따라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가 마을에 남은 남자라곤 중늙은이 이상만 남게 되었다. 이름이 오빠들도 도시로 나가 공장에 취직한 셋째 오빠와 부모님을 모시는 큰 오빠 빼고 두 오빠가 징용으로 나가 아들 부잣집이 허룩해졌다. 징병과 징용만 하는 것이 아닌 농사지은 곡식의 공출도 극악해져,
그 풍요롭고 아름답던 마을도 보릿고개 넘길 걱정이 태산 같았다.
하지만 이것보다 아주 나쁜 소식이 어떤한 병보다 더 흉흉하고 걷잡을 수 없이 온 동네를 휩쓸었다.
일본 본토나 공장에 가 일하고 싶은 처녀들을 데려가 일을 시키고 나중에 집에 돈도 보낼 수 있다는 면사무소의 공문이 한바탕 돈 후였지만 딸을 내놓을 집은 한 집도 없었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문은 일본 순사들이 딸 가진 집을 위협해 다짜고짜 끌어가는 일까지 있다고 했다.
설마설마하는 사이 더 나쁜 일이 생겼다.
동구 밖에서 감춰 놓은 곡식을 뒤지려고 나타난 일본 순사를 보고 딸을 잡으러 오는 줄 짐작을 한 부모가 딸애를 헛간 짚더미 속에 숨겼다고 했다. 곡식을 공출하려는 순사는 날카로운 창이 달린 장대로 곡식을 숨겨 둘 만한 곳을 모조리 찔러보았고 헛간의 짚더미로 창을 찔러 넣는 것과 그의 부모들이 안 된다며 비명을 지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창끝에 처녀의 살점이 묻어 나왔다고도 하고, 찢어진 창자가 묻어 나왔다고도 하고. 급히 읍내 병원으로 실려 갔는데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 흉흉한 소문은 딸 가진 집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도시에서 군수 공장에 다니는 이름이의 오빠가 종아리에 각반을 차고 징 달린 구두를 신은 중년 남자를 데리고 왔다. 이름이의 부모로부터 그 흉흉한 소문을 듣고 급하게 구해온 이름이의 신랑감이었다. 그는 이름이의 별로 크지 않은 몸집만 유심히 보면서 글쎄, 아이를 잘 낳을 수 있을까, 연방 고개를 갸우뚱, 그닥 탐탁지 않아 했다고 한다. 그 늙은 신랑감이 하고 있는 일은 군사적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징용은 절로 면제된다고 한다.
이름이의 집은 그 고운 딸을 그의 자리로 보내 버렸다.
이름이가 어떤 심정으로 그 혼사에 응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름이는 정국이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딴 데로 시집을 가느니 차라리 죽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제 목숨을 끊을 만큼 모질지는 못했나 보다. 주변 사람들 말로는 이름이는 섬뜩하니 감정 없이 표정이라곤 없었다고 했다.
그녀가 멀고 먼 신의주로 시집을 가 처음으로 친정부모님을 뵈는 근친이 오기도 전 해방이 되었다. 그녀는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떠난 살구꽃이 아름답게 피어있는 노란 지붕집에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 마을은 아슬아슬하게 38선 이남이 되어 북조선의 신의주와는 길이 막히고 말았다.
정국이는 살아서 돌아왔다. 살아서 돌아와 사랑하는 연인을 한순간 잃은 정국이의 참담한 심정을 누가 가늠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날 밤 정국이는 혼자 이름과 갔던 시냇물의 흙다리로 갔다고 한다. 이름과 함께 왔던 날처럼 눈부시게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둘만의 추억을 회상하기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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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혼자 돌아왔는데 살구꽃 같은 그대는 어디 있나이까.
그대가 없는 이 아름다운 시냇물엔 무엇이 눈에 띄겠나이까.
그대 외딴집 처마 밑에 홀로 외로이 눈물을 떨구고 있는 건 아닐까.
사랑하는 그대 곁에 가지 못해 나 외로이 이곳에 홀로 서있을 뿐이오.
그대와 이루어지지 못해 애닳은 약속들은 어찌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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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면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 살까지 살던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가
있던 집
그
여자네
집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각을 하면.
*원작소설을 리메이크하며 지어진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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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방탄 찐팬이 올린 위버스 글인데 읽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