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설사 폭발하고 있음
배아파 디지겠음
살려줏메....
할말이 많으나, 내일 하겠음. 설사 쌀...것....가......타......
인생그래프꼭짓점 13화 |
*
서류를 덮은 우현이 순재를 따라 거실로 나왔다.
"나…성열이 데리고 다시 호주로 갈까?"
찻잔을 마시던 손을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의 순재를 살폈다. 무슨 일 있었나?
"갑자기 무슨 소리야?"
우현의 말에 순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락방에서 내려오려던 성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이야기를 엿듣다가 다시 다락방 안으로 들어간다. 소리안나게 방문을 닫은 성열, 문앞에 주저앉아 악보만 만지작거린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정말 순재 말대로 다시 호주로 돌아가게 된다면? 호주로 돌아가 학교도 다시 다니고 피아노도 다시 치고 곡도 다시 배우는 건 정말 즐겁고 설레는 일이다. 또 바라던 일이기도 했고. 하지만, 하지만….
"하아…."
한숨을 내쉰 성열이 불을 켜지 않은채 다락방 창문을 활짝 연다. 며칠전만해도 댕글댕글하던 달이 어느새 반쪽이 되어있었다. 별도 없고 반달만 덩그러니 떠있는 쓸쓸한 밤하늘이다.
"아, 진짜 싫다고."
어디선가 명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명수의 목소리라면 100m에서도 캐치해낼 성열이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레임으로 가득차던 성열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게 식었다.
"야. 여자가 좀 도도해져봐. 구차하게 이러고 싶냐?"
명수가 어떤 여자와 함께 서있었다.
"나 너한테 상처주기 정말 싫거든? 친구라서 참고 또 참고 있는거니깐 그만하고 가라."
악보를 쥐고 있는 성열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악보 귀퉁이가 꼬깃꼬깃 접히기 시작한다.
"나 들어간다. 잘 가라. 그리고 선우한테 미리 말해놨어. 내 번호 가르쳐주지말라고."
머리를 벅벅 긁은 명수가 짜증을 내며 대문을 쾅 닫았다. 입꼬리를 올려 피식 웃은 미희의 모습에 성열의 눈이 화르르 불탄다. 감히 너같은 난쟁이 똥자루가 명수를?
"…아야!"
뒤돌아가려던 미희, 무언가에 머리통을 맞고 인상을 찌푸린다.
"…아씨, 뭐야!"
잠자리 지우개? 바닥에 떨어져있던 지우개를 집어든 미희가 욕을 뱉으며 주위를 두리번두리번거렸다.
"어떤 새끼가 던진 거야!" 다락방 창문 밑으로 고개를 숙인 성열,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오려고 한다. 욕을 씨부렁거린 미희가 구둣소리를 내며 오르막길을 지나 사라지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나저나 명수가 그 난쟁이 똥자루같은 여자한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어보여 다행이다. 성열이 실실 웃으며 창문을 닫았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13.
바쁜 저녁과는 달리 점심시간의 장동牛 고깃집은 꽤 한가했다. 카운터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의자를 흔들흔들거리던 동우에게 여자 한 명이 다가오더니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동우오빠! 오랜만이다!"
미애가 가방안에서 티켓 두 장을 꺼내 동우에게 건넸다.
"…보라돌이의 습격?"
휙휙 손을 흔들어준 동우가 다시 의자에 앉아 티켓을 만지작거렸다. 나 애인없는데 누구랑 보러가지? 아, 성규. 성규가 있었구나. 가게 전화기를 든 동우가 성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뚝 끊긴 전화를 보며 인중을 실룩거린 동우가 영화제목을 중얼거렸다. 보라돌이의습격…. 보라돌이? 문득 보라색을 좋아하는 호원이 떠올랐다. 같이 볼 사람도 없고 혼자 볼 마음도 없었기에 두 장 다 호원에게 줄 심산으로 성규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야, 꺼져. 안 본다고.]
동우의 전화를 받은 성규가 의아한 표정으로 호원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호 대리님. 여기 전화요."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은 호원이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동우씨." 멍하니 전화를 끊은 호원이 비실비실 웃기 시작한다. "동우가 뭐래요?" 이건…이건 분명 데이트 신청이 아닌가!
"…휴우."
자꾸 그 미희라는 여자가 머리속에 맴돈다. 다행히 명수가 끔찍히도 싫어하는게 한눈에 봐도 티가 났지만 그렇다고 배제할 수 없는 인물이다. 만약, 정말 만약에 명수의 마음이 미희에게 돌아서 둘이 사귀게 된다면? 따지고 보면 자신과 미희는 똑같은 위치에 서있지않은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호스를 수돗가에 걸어두고 발을 탁탁 털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킁킁."
달달하면서도 쾌쾌한 탄 냄새에 킁킁거리며 들어선 성열이 거실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순재를 보고는 서둘러 주방으로 쪼르르 달려간다. 오븐에서 회색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다.
"아,앗 뜨거!"
겁도 없이 뜨거운 손잡이를 덥석 잡더니 깜짝 놀라 손을 뗀다. 손을 호호 불며 울상을 짓던 성열이 벽에 걸린 주방장갑을 끼고 오븐을 열어 팬을 꺼냈다.
"…다 탔다."
순재가 만들어주겠다던 쿠키는 노릇노릇을 뛰어넘어 거뭇거뭇하게 다 타버렸다. 바스락거리는 쿠키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거실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순재를 깨웠다.
"누나."
탄 냄새를 맡은 순재,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달려간다.
"어떡해. 다 탔네, 진짜."
여전히 졸린 눈의 순재가 쿠키를 모두 쓰레기통에 넣고 다시 재료들을 꺼내 반죽을 하기 시작했다.
"더 많이 만들어서 성규씨도 줘야겠다." 싱크대에서 박박 손을 씻은 성열이 식탁에 앉아 순재가 미리 만들어놓은 반죽을 건네받았다.
"하트모양이네?"
별 모양을 만들던 순재가 하트모양을 여러개 만들고 있는 성열을 보며 물었다. 장난치다 들킨 아이처럼 흠칫한 성열, '그냥 하트가 예뻐서'하고 얼버무리며 고개를 숙이고 초코칩을 하트에 콕콕 박아넣는다.
*
"저…성규씨."
여직원의 표정은 지독하게 애처로웠다. 하지만 집에 가서 샤워하고 따뜻한 방바닥에 드러누워 TV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던 성규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가방끈만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린다. 옆자리에 호원은 벌써 퇴근했는지 자리에 없었다. 여직원이 한번 더 애절하게 부탁하려고 할때, 마이를 걸치며 다가온 우현이 불쑥 사이가 끼어들었다.
"자기가 맡은 일은 끝까지 책임져야죠."
우현의 말에 얼굴이 빨게진 여직원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후다닥 자리로 돌아갔다.
"안 가요? 안 가면 나 혼자 가고."
먼저 휙 나가버리는 우현을 서둘러 따라나갔다. 조수석에 탄 성규가 우현에게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남자친구랑 3주년이라는데……."
성규가 그 말에 혀를 내둘렀다.
"팀장님 연애 안 해봤어요?"
하도 안 해봐서 난리라는 건 비밀. 하지만 우현의 의미심장한 비웃음에 성규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창틀을 만지작거렸다.
"…나 궁금한게 하나있어요."
괜히 물어보라고 했나. 우현이 대답은 않고 묵묵히 운전만 한다.
"아니, 같이 사는데 연인 같지는 않고…또 연인이 아닌데 같이 사는 것도 이상해서…."
묵묵부답. 긍정도, 부정도 하지않는다.
"…그냥."
사람과 사람 사이? 의미모를 대답에 더 궁금해졌다.
"팀장님이랑 나랑도 사람과 사람사이잖아요. 너무 광범위한 대답이었어요." "그 정도로 만족해요. 신경써서 대답한 거니까."
사람과 사람사이라는게 도대체 무얼 뜻하는지 감이 안 온다.
"그러는 팀장님이야말로 연애 해봤어요?"
어느새 집앞이다. 입을 삐죽거리며 차에서 내린 성규, 조수석으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고 제 할말을 한다.
"그래도 사람이 사랑을 해가면서 살아야 사람다운거에요. 팀장님은 내가 보기엔 너무 감정이 메말랐어요."
대문이 열리고 집안으로 들어가려던 성규가 다시 쪼르르 나오더니 벤츠 앞바퀴를 발로 콩! 차고는 다시 휙 들어가버린다.
"되게 일찍 왔네요?"
어라? 티켓 두 장을 받아든 호원의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가 천천히 내려간다.
"아는 동생이 줬는데 그냥 호원씨 주려구요. 재밌게 보세요! 우하하하."
같이 영화보자는 뜻이 아니라 그냥 티켓을 준다는 얘기였구나. 그랬구나…. 티켓을 받은 호원이 아무 말도 없이 서있자 동우는 슬쩍 호원의 안색을 살폈다.
"무슨… 문제있어요? 영화가 별로인가…."
가게안으로 들어가려던 동우를 불러세운 호원, 잠시 머뭇거리더니 '내일 시간있으세요?'하고 동우에게 한발짝 앞으로 다가선다.
"저, 그러니까 제가 같이 볼 사람이 없는데 어, 서울에 별로 친구가 없, 아, 남우현이라고 있는데 걘 영화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좀 또라이같은게 걔가 저랑 초등학교때부터, 아, 아니 이게 아니라 아무튼 그 내일 혼자 보기 좀 그러니까 동우씨가 시간만 되면,"
내려가있던 호원의 입꼬리가 다시 비실비실 올라가기 시작했다.
"뭐? 맞선!?"
성규가 숟가락을 소리나게 내려놓으며 버럭 언성을 높혔다. '그래, 맞선'하고 태연하게 말하는 봉신 씨의 모습에 더 열이 뻗친다. "무슨 맞선이야!"
낄낄거리며 말하는 명수의 머리를 쥐어박은 성규가 발을 동동 구르며 난리를 폈다.
"아, 싫어싫어! 나 내일 쉴꺼야! 안 나가, 맞선!"
결국 봉신 씨의 숟가락에 머리통을 맞았다.
"엄마 말 들어! 너 이제 서른이야. 지금 아니면 연애할 시간 없어!"
숟가락을 입에 물고 히죽 웃는 명수의 머리를 성규가 한번 더 쥐어박았다.
"아, 짜증나 진짜. 몇 살인데?"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불붙은 성규와 봉신 씨의 말다툼에 혀를 끌끌 차며 식탁에서 일어난 명수가 젓가락을 든 채 인터폰 앞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들고 있던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고 서둘러 현관문을 열고 나가 대문을 열었다.
"…여,여기…."
성열이 손에 들고 있던 박스를 수줍게 내밀었다.
"이게 뭔데?"
상자를 열자 여러 모양의 초코 쿠키가 가지런히 담겨있었다.
"오…. 이거 우리 주는거야?"
하트 모양을 집어들고 한 입 깨물어 맛을 봤다. 달달하고 쌉싸름한 초코 맛이 물씬 풍긴다.
"완전 맛있다!"
다행이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암튼 잘 먹을게. 잘 가!"
성열의 어깨를 토닥거리듯이 툭툭 친 명수가 쿠키를 먹으며 대문을 닫았다.
"……."
명수의 손이 닿았던 어깨가 화끈했다.
*
"그 여자가 누군지 얼굴도 모르는데 만나라구요?"
넥타이를 풀던 우현이 허리에 손을 얹고 짐짓 화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도 우현이 너가 이런거 싫어하는거 잘 알아. 근데 그 자리에선,]
전화를 끊고 침대에 홱 던지듯 내려놓은 우현이 풀던 넥타이를 마저 풀었다. 황금같은 주말을 생판 처음보는 여자를 상대해야한다니. 끔찍하다.
*
인생그래프꼭짓점
와이셔츠 단추 하나 끼우고 한숨 한 번, 양말 한 짝 신으며 한숨 두 번. 정장 마이를 걸치며 한숨 세 번, 졸린 눈 비벼대며 한숨 네 번. 맞선 자리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자니 한숨만 푹푹 나온다. 늦게까지 퍼질러 자고 있는 명수가 얄미워보여 침대위에 있던 베게를 명수의 얼굴로 휙 던졌다.
"윽…."
부스스한 머리를 비벼대며 고개를 들어 성규를 한번 슥 쳐다본 명수가 다시 베게에 머리를 박고 잠들었다. 나도 저렇게 늦잠잘 수 있는데….
"잘 해. 점잖게 말하고."
툴툴거리며 집을 나왔더니 지랄맞게 날씨마저 화창하다. 햇빛을 받아 알록달록 빛이 나는 꽃밭의 꽃들,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나뭇잎들, 평상에 앉아 있는 잠자리까지.
"에이씨…."
차라리 비가 주룩주룩 내렸으면 좋으련만. 맞선 장소는 프랑스 디저트를 전문으로 하는 라프레즈라는 디저트 전문점이었다. 그래. 가서 디저트나 실컷 먹어야지. 버스를 타고 시내에서 내려 시간을 보며 서둘러 라프레즈로 발을 재촉했다. 약속 시간은 12시지만 그래도 남자가 좀 더 일찍 나가있는게 매너라고 생각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점심까지 같이 먹어야할 것 같은 불안감을 애써 떨쳐내며 라프레즈의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 어지간히 많네."
게다가 전부 다 커플이다. 하긴, 이런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운 디저트 전문점에 커플로 넘쳐나는게 이상한 일만은 아니지. 그나저나 자리가 거의 다 꽉 차서 앉을 곳이 없어보인다.
"어서오세요. 혼자 오셨어요?"
젊은 종업원이 안내해주는 자리를 따라가니 , 세상에. 바로 옆 테이블에 우현이 앉아 커피잔을 들고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다. 심심함에 가득 차있던 우현이 성규를 발견하고는 잠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가 곧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김성규씨가 여긴 왜 왔어요?"
자리에 앉아 맞선 상대가 오기 전에 입이라도 달랠 생각으로 종업원이 건네는 메뉴판을 펼쳤다. 마스카포네치즈 티라미수, 마카롱, 비스코티, 피칸파이, 파나코타, 샤를로트 등등. 성규, 당황하며 손가락으로 더듬더듬 메뉴 이름들을 훑는다. 사진이라도 붙혀주지, 몹쓸 놈들. 그 모습을 보던 우현이 풉,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새침하게 우현을 흘긴 성규가 아무거나 휙 가리켜 주문을 한다.
"비,비스코티? 이거 주세요."
우현, 여전히 웃고 있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본전도 못 찾은 성규가 코를 긁적거리며 푹신한 쿠션에 머리를 기댔다. 여기저기서 커플들이 하하호호거리며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는데, 참 눈꼴시려서 못 봐주겠다.
"세상에 할 짓 없는 인간들은 죄다 모아놨네, 에이 쯧."
우현이 대답없이 커피를 한모금 들이켰다.
"아, 쪽팔리게 같이 맞선보는거에요?"
종업원이 다가와 나무바구니에 담긴 비스코티를 내려놓는다. 비스코티가 가지런히 담겨져있었다. "주문하신 비스코티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고소한 냄새의 비스코티 한 조각을 씹는 순간 '와그작!'하는 소리가 성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의 우현, 자신이 먹던 커피를 성규의 앞에 놓아준다.
"딱딱하죠?"
잠시 머뭇거린 성규가 손에 들린 비스코티를 우현이 내민 커피에 살짝 찍어 맛을 봤다. 맛있다. 아까보다 훨씬 부드럽고 달콤쌉싸래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진다.
"미리 말해주지, 좀…." 성규의 중얼거림을 들은 우현이 잡지를 한 쪽으로 치워두며 찌뿌둥한 몸을 뒤척거렸다. 그때, 라프레즈의 유리문이 열리고 늘씬한 청순녀와 뚱뚱하고 사납게 생긴 기쎈녀가 들어온다. 제발 저 앞에 오는 청순한 여자가 자신에게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속으로 연신 기도를 하는 성규에게 청순녀가 다가왔다. 올레! 힐끗 옆테이블을 보자 썩은 표정의 우현이 자신의 앞에 선 뚱뚱한 기쎈녀를 떨떠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푸흡, 웃음이 터진 성규에게 청순녀가 말을 건넸다.
"혹시 남우현씨 되세요?"
엥? 지금 나한테 남우현이라고 물은 건가? 성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때 우현의 테이블로 갔던 기쎈녀가 우현에게 물었다.
"혹시 김성규씨?"
우현,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성규를 가리키자, 망연자실한 표정의 성규도 '아뇨. 옆 테이블이에요'하고 엄지로 우현을 가리킨다. 기쎈녀와 청순녀가 서로 자리를 바꿨다. 우현은 뭐가 그리 웃긴지 피식피식 웃고 있었고, 성규는 자신의 앞에 앉은 기쎈녀에 눌려 우현이 놓아준 커피만 계속 들이켰다. 기쎈녀가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실망할 사람이 누군데! 성규는 당장 봉신 씨에게 전화해 따지고 싶었다.
"반가워요. 장춘동이라고 해요."
캬아. 이름 한번 죽인다. 장춘동. 잘 못 들으면 장충동인 줄 알겠네. '전 김성규에요'하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액면가는 40대초반같은데. 짙은 화장에 새빨간 립스틱, 짝 달라붙는 검은 원피스에 손가락에 끼워진 굵은 알의 반지까지. 성규가 싫어하는 요소는 골고루 다 갖췄다. 반면에 청순녀는 피부도 하얗고 날씬하고 머리도 긴 생머리다. 웃을때 보이는 하얀 이가 그녀를 더 청순해보이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우현은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성규도 장춘동이라는 이 기쎈녀에게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기쎈녀도 성규가 그리 마음에 드는 눈치가 아니었다.
"직업이 뭐에요?"
뭐 이런 직설적인 여자가 다 있어. 눈은 청순녀에게 향해있지만 귀는 성규와 기쎈녀의 대화를 엿듣던 우현이 흥미진진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과연 성규가 어떻게 대답을 할까.
"아직 안 받아봐서 잘 모르는데요. 그러는 장춘동씨는 직업이 뭔데요."
점입가경은 이럴때 쓰는 말이다. 술집에 대해 줄줄히 설명을 늘어놓는 모습에 점점 호감이 뚝뚝 떨어진다. 뭐, 처음 볼때부터 호감은 없었지만.
"차는 당연히 있겠죠? 우리 자리나 옮겨요."
우현이 피식 웃었다. 덕분에 이 쪽 대화가 점점 더 지루해지고 있다.
"우현씨?"
청순녀는 내색 한 번 않고 조용조용한 말투로 묻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조근조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빠한테 듣기론 주택에 사신다고 들었는데."
그 말에 성규가 콧방귀를 뀌며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얼른 집에 가서 발톱에 낀 때나 벗겨야겠네요. 이 시간보단 그 시간이 더 값질 것 같아서. 그럼 차 있고 집 넓은 영계 만나세요. 화이팅."
주먹을 불끈 쥐어보인 성규가 미련없이 카운터로 가 자신이 먹은 비스코티를 계산하고 라프레즈 문을 열고 씩씩하게 걸어나왔다. 그 모습에 우현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디가세요?"
커피값을 계산한 우현, 서둘러 성규를 뒤쫓아 따라간다.
"김성규씨!"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우현의 목소리에 휙 뒤돌아본 성규. 퉁명스런 말투로,
"그 청순녀랑 잘 해보시지 왜 나오셨어요?"
버럭! 소리친 성규가 성큼성큼 걷다가 다시 뒤돌아 우현을 보며 말했다.
"팀장님이 사는 거죠?"
한편 동우와 만나기로 한 호원이 거울을 보며 한껏 멋을 내고 있다. 체크무늬 하얀 셔츠에 아이보리색 가디건, 그리고 왁스를 바르지않고 차분히 내린 머리. 훈훈한 대딩같은 모습에 거을을 보며 한번 씨익 웃어준 호원이 차키를 들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차에 올라타 서랍에서 방향제를 꺼내 차안에 몇 번 칙칙 뿌려 잡냄새를 없애고 쓰레기통도 깔끔히 비운 상태에서 한번 더 체크를 마친 후에야 차를 출발시킨다. 자일리톨을 씹어 입안에 향긋한 민트향이 퍼지게 하는 건 필수.
"으으…떨려."
동우의 고깃집이 가까워지자 가슴이 쿵쾅쿵쾅대고 콧구멍이 벌렁벌렁거린다.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호원의 차를 발견한 동우가 환히 웃으며 달려가 조수석에 폴짝 올라탔다.
"와! 조수석에 타는 건 되게 오랜만인 것같네…. 호원씨 좋은 아침!"
후진할때는 조수석 뒷부분을 잡고 목선을 강조하며! 지식인에 나온 그대로 멋지게 후진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동우는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호원, 씁쓸하게 웃었다. 영화관에 도착해 차를 주차시키고 차에서 내리며 호원이 동우에게 물었다.
"동우씨는 무서운 영화 잘 봐요?"
영화관 로비로 향하는 복도에 현재 상영중인 영화 포스터들이 붙어있었다. 하나하나 훑으며 지나가던 호원이 한 포스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
쌍화탕. 조인선과 주진몽, 그리고 송지요가 나오는 동성애 영화였다.
"동우씨. 이 영화 알아요?"
잠시 고민하던 호원. 최대한 담담한 말투로 묻는다.
"동우씨는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동우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괜히 물어봤나하는 마음도 든다. 저 입에서 '혐오해요'라는 말이 나온다면 또는 '끔찍해요'라는 말이 나온다면, 아. 생각만 해도 아찔한데 너무 위험한 걸 물어본 듯 싶다.
"난 괜찮다고 생각해요. 죄도 아니고 사람이 사람 좋아한다는데 동성애 반대하는 사람들 보면 어휴…."
내심 바랬던 대답이 동우 입에서 나오자 호원은 자신도 모르게 동우의 손을 덥석 잡을 뻔 했다.
"아, 팝콘이랑 콜라는 내가 살게요."
지갑을 들고 팝콘과 콜라를 사려는 동우의 손을 호원이 슥 밀어넣는다. 동우가 계산한다면 왠지 자존심이 상할 것 같다. 마치 여자친구에게 얻어먹는 남자친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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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