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연정 w. 채셔
09. 그대의 연인이 되려고 하면
제 꿈의 주인공을 석진이 아닌 정국이 당당하게 차지하는 것은, 여주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일어났을 때에도 정국은 당연스레 여주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한 나라의 황제가 된 이가 이리 틈을 보여서 되는 것인가. 그 틈이, 바로 여주 제 자신이 되어도 되는 것인가. ……꿈속에서 그리 애틋하게 연정을 주고받던 이가 정국이라니, 기분이 이상할 따름이었다. 꿈은, 생각의 표상이라 하였다. 어떠한 생각이든, 그러니 역으로 제 머릿속을 잔뜩 차지하고 있는 이는 정국인 셈이었다. 그리 해 당연히 꿈의 주인공도 정국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고. 여주는 괜히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참으로 이상하지요."
"…………."
"어찌, 폐하입니까."
"………."
"어찌 하필 당신입니까."
여주는 가만히 정국을 올려다보았다. 저도 피곤했던 것인지 옆에서 앉은 그대로 잠에 든 정국은,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새삼 경국지색의 황제라고 수군대던 것이 머릿속을 휘감았다. 혹여나 균형을 잃어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여주는 정국의 손을 잡아주었다. 넘어진다면 이쪽으로 끌어당겨 다치지 않게 할 참이었다. 어찌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지. 태자전에서의 일은 여주 제가 생각해도 놀라웠다. 그리 해서 괜히 이상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제가 다칠 만한 자리에는 항상 정국이 있었고, 그 때마다 저를 구해준 이는 당연히 정국이었던 것이…… 어쩌면 우연이 아니라…. 여주는 서서히 입술을 물었다. …진정 그런 것일까. 여주는 정국의 손을 놓았다. 순간 눈에 침상 옆의 자기가 들어왔다.
"장난질일지 모르지요, 허나…."
"……."
"어쩌면 저와 폐하는…."
여주는 눈을 꼭 감고 자기를 제게로 떨어뜨렸다. 입술을 물었을 때, 쨍그랑하고 파열음이 세게 귀를 파고들었다. 허나 고통은 없었다. 눈을 살며시 뜨자 정국이 놀란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여주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번에도 정국이었다. 정국은 아주 쉽게 여주를 안아들고, 이내 '여 봐라!'하고 크게 호통을 쳤다. 그 얼굴에 피곤함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화나 보였다. 궁녀 하나가 허리를 굽히며 들어오자, 정국은 '얼른 치우지 않고 무엇 하는 게냐.'하고 노성을 내었다. 궁인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힘들지도 않은지 정국은 침상이 정리될 때까지 여주를 안아든 채로 수고롭게 서 있었다. 침상 위의 이불이 모두 교체되고 자기 조각들이 치워진 이후에야 정국은 여주를 침상에 뉘여 주었다.
"내 저 자기를 놓은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말 것이다."
"……."
"또한 너는 어찌 그리 네 몸을 생각하지 않는 게냐."
"……."
"어찌 그리 네 몸에 무신경하냔 말이다."
"……."
여주는 정국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화를, 내고 있었다. 이리 그대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일은 아니었으나 그저 궁금했다. 순수하게 호기심이 생겨, 여주는 무덤덤하게 정국의 화를 받아내며 물었다. 어찌 그리… 화를 내십니까. 여주의 말에 정국의 화가 뚝 멎었다. 이내 정국의 얼굴에 파악하기 어려운 감정이 들어찼다. 그 감정을 알아내기 위해 여주는 더욱 깊게 정국의 용안을 살폈다. 심해처럼 깊은 그 눈빛에 잠수해 들어간 순간 여주는 알 수 있었다. 그 때 보았던 그 아이의 얼굴이었음을. 순수한 질문이었으나 제 행동에 대한 질책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정국은, 후회하고 있었다. 또한 두려워 하고 있었다.
"네가… 다칠 뻔 하지 않았느냐."
정국이 중얼거리며 작게 말했다. 왠지 자신이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고개를 떨구며 말하는 정국의 얼굴에 여주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앉곤, 살짝 웃어보았다. 뜻밖의 웃음이었는지 정국은 다시 고개를 들고 눈썹을 까딱 들어올렸다. 폐하가 구해주실 것 아닙니까. 제 말에, 떨고 있던 정국은 숨김 없이 미소를 지었다. 전의 두려움은 온데간데 없이 아주 고운 웃음이었다. 여주는 그 웃음을 응시했다. 어쩌면 우리는… 운명이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차마 말할 수 없던 말을 제 마음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제가 위험할 때는 언제나 정국이 있었다. 심지어 제가 없는 상황에 모두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국은 제 후궁을 죽이면서까지 여주의 죽은 명예를 살려주었다. 그렇다보니 어쩌면 석진이 우연으로 끼어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석진을 잃어 온종일 숨막히는 아픔에 신음해야 했던 일이… 어쩌면 운명을 잘못 택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라고. 여주는 손을 뻗어 정국의 용안을 만져보았다. 제 작은 손길에도 굳는 이 사내를 어찌 하랴.
"……무엇이 그리 두려우십니까."
잔뜩 굳은 정국의 볼을 아주 천천히 어루만지던 여주는 아주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국은 그 음성에 저도 모르게 한껏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여주의 얼굴에 고정시켰다. …이내 정국은 탄식했다. 이 고운 낯을 석진은 매일 보았을 테다. 이 눈길을 매일 받고, 미소에 매일 녹아 내렸을 게다. 정국은 그것이 슬펐다. 이 고운 낯을 어떻게 해야 제 것을 만들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 수가 없어서. 천자가 되었음에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서.
"도대체."
"…………."
"네 연인이 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
저도 모르게 내뱉어버린 말이었으나, 말을 주울 새도 없이 정국의 입술에 여주의 고운 입술이 내려 앉았다. …그 행동이 진실이라고 믿을 수가 없어, 정국은 여주를 안아줄 틈도 없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긴장되어 제 아랫 입술을 물어오는 그 입 맞춤에 대응해줄 수도 없었다. 맞댄 입술 사이로 여주의 미소가 흘러나오자 정국은 그제야 정신이 드는 듯해 부드럽게 여주를 안았다. 혹시라도 이것이 꿈일까 봐, 언젠가 깨져버릴 환상일까 봐 정국은 여주를 꼭 안아주지도 못했다. 둘 사이에 틈 하나라도 없이 꽉 안아주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헐겁게 안은 새로 제 심장 박동이 크게 울려 퍼졌다.
"의도가 무엇이냐."
"참으로 분위기 없는 질문입니다."
정국의 순수한 질문에 여주는 농으로 되받아쳤다. 이내 여주는 정국의 품에서 시선을 딱히 두지 못한 채로 대답했다. 제게 묻지 마십시오, 저도 제 마음이 무언지 모르겠습니다. 여주의 말에 정국은 푸스스 웃으며 비로소 여주를 꼭 안았다. 틈 하나라도 새어나갈까 그것이 아까워서. 또한 둘 사이에 필요없는 공기 따위라도 없애버리고 싶어서.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것이 꿈이 아님을. 꿈이었다면, 저도 제 마음이 무언지 모르겠다는 대답은 하지 않았겠지. 정국의 품에 안긴 여주는 가슴팍에 반쯤 묻혀진 발음으로 다시 대답하였다. 그저 입을 맞추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여주의 대답에 정국은 작게 등을 토닥여주었다.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으므로 손길은 아주 소심하였다.
"그래, 나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 치도 알 수가 없구나"
"………."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내 연정은 오로지 너였으니 탓은 하지 말거라."
정국의 말에 여주는 그 고운 웃음을 다시 정국의 앞에 내비쳤다. 그것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리따워서, 정국은 다시 무의식적으로 곱다 말해주었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피 떡이 된 마음 없이, 상처를 낼 날카로운 말 없이, 또한 숨김과 거짓 없이 맞는 연정의 공기였다. 그것이 둘에게는 무척이나 어색하고 이상하고 또 기묘하면서도, 무엇보다 익숙하고 상쾌했다. 곧 여주에게 닥칠 비보가 아니었더라면, 둘 사이의 공기는 어쩌면 둘을 집어삼켜 연인의 굴레로 쉽게 빠져들게 했을 참이다. 허나 인연은 그리 쉬운 끈이 아님을 알기에 동시에 둘은 불안해 해야 했다. 그래서 둘은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를 놓칠 새도 없이, 시선을 맞추었다. 때때로 숨을 죽이고 웃기도 하고, 설렌 미소를 비치기도 했으며, 한순간 울음이라도 날 듯 아련한 눈길로 바라보기도 했다.
"온통 모르는 것들 중에 하나는 알겠구나.'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은애해, 너를."
"…………."
"그것 하나만이 선명해, 한 번도 거짓인 순간이 없었다. "
또한 둘은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다시 입을 맞추었다. 정국의 말대로 온통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허나 지금은 정국이 여주를 은애한다는 것, 또한 여주가 정국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것. 그 두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순간이었다. 그렇기에 둘은 지금을 흔쾌히 맞이하는 것 뿐이었다. 언제 끝날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이 순간을, 한 번이라도 편히 받아들이고 싶었기에. 입맞춤을 하고 나서, 서로는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듯 한참을 서로를 보며 숨을 골랐다. 온통 피 바다가 된 세상 속에 둘만 살아남은 것처럼.
폭군의 연정
정국이 제 침전으로 간 시각이었다. 정말 기분 좋은 시간들이었고, 여주에게도 잊지 못할 순간들이었으나 여주는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한 몸이라도 된 것처럼 정국과 입 맞춤을 나눴으나 사실은 아직도 석진에게 매여 있는 기분이었다. 쉬이 잠을 자지 못하고 찻잔만 비우는 여주 탓에 태형도 오늘은 빨리 궐을 떠날 수가 없었다. 물론 여주는 태형에게 퇴궐하라 명하였으나, 태형이 그럴 리가 없었다. 검을 꼭 쥐고 한참을 여주의 침실 앞에 서서 서성이고 있을 때에, 갑작스레 느껴지는 한기에 태형은 검을 한 손으로 빼 들었다. 이내 검을 누군가의 목에 겨누고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태형은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윤기였다. 천천히 칼을 거둬 칼집에 검을 넣은 태형은 예의를 갖춰 읍했다.
"웬일이십니까."
"…밤이 깊어 혹여라도 이상한 소문이 돌까 이리 몸을 숨겨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
"………."
"마마는 침소에 드신 게냐."
윤기의 물음에 태형은 고개를 저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하고 물었지만 윤기는 쉬이 대답해주지 않았다. 좋지 않은 일이냐 물었을 때 그제야 그렇다 대답할 뿐. 태형은 괜히 입술에 침이 마르는 기분이라 몇 번이고 혀로 입술을 축였다. 이내, 태형은 혹시라도 여주가 놀랄까 작은 목소리로 윤기가 들었다 고했다. 이내 몇 초의 정적 끝에 드십시오, 하고 짧게 허락이 떨어졌다. 태형이 문을 열었고, 다상에 앉아 있던 여주가 윤기를 맞았다.
"이 밤 중에 어인 일이십니까."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급히 전할 말씀이 있어…."
여주는 의아하게 윤기를 바라보았다. 그 대쪽같은 성정에 윤기는 이리 무례히 아녀자의 침실에 드나들 위인이 못되었다. 괜히 불안해지는 기분에 짧게 윤기를 바라보던 여주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이내 아, 하고 작게 탄식을 내뱉은 여주는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전하의 일입니까. 순간, 여주의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정말, 세상이 끝나는 것 같았다. 온통 제 마음 속이 피 바다가 되는 기분이었다.
덧붙임
오늘도 반갑습니다.
댓글 달 때에는, 꼭 암호닉과 함께 달아주세요.
확인 글은 조금만 뒤에. TㅁT...
시간이 나서 쓰러 왔는데 지금 있는지 모르겠네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고마워요 이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