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핀잔
: 신념의 근원.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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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석은 지민과 함께 다니는 여자아이가 자꾸만, 제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작은 키에 신기할 만큼 일자인 단발머리가 귀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거기에 누가 보든말든 제 할 일을 묵묵히 해내는 것도, 참 예뻐보였다. 호석은 여자아이를 눈에 담으면서도 아이가 제 쪽으로 향해오면, 도망가기 바빴다. 나 같은 애를 좋아할리 없잖아. 하며. 그래서 늘 벽장 뒤, 혹은 기둥 뒤. 그곳이 호석의 자리였다.
호석은 언젠가 자신의 키가 청년부의 신부님만큼 크면, 그때는 아이에게 먼저 다가가리라 다짐했다. 그 조그맣고 신기한 아이에게.
*
지민에게 이따금씩 그 여자아이 이야기를 꺼내면, 지민은 긴 눈을 제법 샐쭉하게 뜨며 되물었다. '걔는 왜?' 하며. 호석은 추궁하는 듯이 묻는 지민에게 하마터면, '걔가 좋아.' 라고 말할 뻔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였다. 차마 좋다는 말을 내뱉지도 못한 채로, '아니 그냥 -' 하고 제 마음을 감추기 급급했지만. 하지만 그 마음이 쉬이 감춰졌을리가 없었다. 그것도 제 또래의 남자아이에게 말이다. 지민은 알고 있었다. 호석의 마음을.
호석의 마음은 어느 방향으로도, 절대 이루어져서는 안됐다. 제 부모의 죽음을 방치한 집안의 딸에게 마음을 품다니. 물론 호석은 제 부모가 왜 죽었는지도 모르고, 제가 감정을 피우는 아이가 어느 집 자식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삼류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소재였다.
호석은 자주 제 양볼을 발그레 붉히고는, 탄소의 이야기를 꺼냈다. 제 딴에는 관심이 없는 척, 손장난을 치며 들어도 그만 - 안 들어도 그만 - 이라는 태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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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 탄소 시점]
"키는 많이 안 컸네."
"...나 언제부터 알아봤어?"
"뭔 소리야."
"내가 그 팔찌 준 애라는 거."
"아."
정호석의 짧은 탄식을 끝으로, 나는 바짝 긴장했다. 처음부터 알았던 거 아니야? 고양이 일로 마주쳤을 때부터? 나는 순간 차오르는 괘씸한 마음에 그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로, 물었다.
"처음부터 알아봤지?"
"뭐?"
"아니. 너 나 처음부터 알아보고, 장난친 거잖ㅇ"
정호석은 내 말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까지 숙이고는 크게 웃었다. 뭐야. 저 반응은? 나는 팔 하나를 길게 뻗어 그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야! 뭘 웃어. 하며. 정호석은 잠시 후 제 몸을 일으키며, 나를 개구지게 바라봤다. '너 공주병 있구나.' 말하면서. 그의 말에 당황한 내가 무슨 공주병이야! 하고 소리치자, 그는 제 의자를 당겨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뭐, 뭐해."
그는 제 허벅지 사이에 내 허벅지를 가두고는, 앞 쪽으로 흘러내린 긴 머리를 어깨 뒤로 넘겼다. 꽤 투박한 손길이었다. 가까운 거리 탓에 자꾸만 그의 향이 몰려왔다. 깔끔한 향이었다. 어딘가 그를 닮은. 그는 내 머리를 뒤로 넘기고는 조금 멀어졌다.
"머리 때문인가."
"뭐가?"
"다시 보니까 그때랑 똑같이 생겼네."
"..."
"머리가 길어져서. 그래서."
"..."
"바로 못 알아봤네. 내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뭐랄까. 편안한 얼굴이었다고나 할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는 사람 같았다. 아니. 그나저나 내 머리에 관심 있던 사람이 이렇게나 많아? 박지민에. 기억도 안나는 정호석에. 나는 짐짓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처음부터는 아니고."
"..."
"언제부터 나인 줄 알았어?"
"...박지민이랑 얘기하는 거 보고."
순간 복도에서 지민이와 투닥이던 장면이 떠올랐다. 지민이의 동생과 전화통화를 하며, 지민이가 내게 머리 잘 어울린다고 했던 때. 아. 그때도 나를 보고 있었구나.
"어떻게 컸나."
"..."
"되게 궁금했는데."
"...ㄴ, 네가 왜 궁금해."
필터링 없이 내 뱉는 그의 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사실 그가 내가 준 팔찌를 차고 있을 때부터, 마음 속 어딘가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아주 오래 전 옷 주머니에서 잃어버렸던 것을 찾은 기분이랄까. 근데 그게 또 마냥 좋지가 않다. 뭐를 찾은 건지. 그걸 잘 모르겠다. 선물의 주인? 그 날 생일이었던 아이? 여러 감정이 미묘하게 뒤섞였다.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복잡한데 - 정호석은 자꾸만 다른 색깔의 감정까지 내게 툭툭, 던졌다. ...아니. 자기가 뭐라고, 내가 어떻게 컸는지가 궁금하다고... 응? 막 그래?
"너 때문에"
"..."
"사람 못죽여."
"..."
"나."
전혀 예상 밖의 이야기였다. 나 때문에 사람을 못 죽인다니? 나는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 때문에? 그러자 그는 내 손에 들린 팔찌를 다시 차며, 답했다.
숨 쉬는 한 희망은 있다며. 네가.
근데 내가 사람을 죽여버리면.
저 말이 앞 뒤가 안 맞아져.
버젓이 사람을 죽여놓고, 내가 아직 살아있으니까.
희망이 있다.
이건 좀,
불공평 하잖아.
희망이라는 말에 기대려면.
기댈만한 사람이어야 되니까.
그래서 최소한.
내가 내 손으로 사람은 안 죽여. 아니.
못 죽여.
그는 자신의 말을 끝으로, 제 뒷머리를 헝클이며 일어섰다. 나는 여전히 넋이 나간 채로 그를 바라봤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거야...?
그는 멀뚱히 앉아만 있는 나를 향해 뒤돌며, 말했다. '밥이나 먹자.'
*
[현재 / 남준 시점]
"밥 좀 올려줘."
"...저 여자랑 밥 먹게?"
"응."
남준은 다시 방으로 걸음을 돌리는 호석의 손을 잡아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언제적 소꿉놀이를 아직도 하겠다는 건지.
"정신차려. 정호석."
"뭐가."
"쟤 두드림 딸이야."
"..."
"두드림."
"..."
"잘 생각하고 돌려보내."
"...내가 알아서 ㅎ"
"아니."
"..."
"너 알아서 못해."
카페에서 여자와 처음 대화를 나눴을 때, 호석이 그녀에 대해서 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물론 대부분이 술에 취해, 취기에 젖어 뱉어 낸 말들이었지만. 호석은 술이 거하게 취했다 싶으면, 제 첫사랑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측근이라면 적지 않게 들었을 이야기였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호석에게 유일한 신념을 심어준 여자였으니 말이다. 나 역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은 이야기였다. 그래서 언젠가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고. 그녀를 만난 날은 호석이 총으로 기어오르는 새끼의 허벅지를 쏜, 그 날이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비상구에서 자책하고 있을 호석이었기에 서둘러 비상구로 향했다. 하지만 나보다 빨랐던 건, 그녀였다. 그녀는 방금 전 제 눈 앞에서 총구를 당긴 남자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사람을 쏘면 어쩌냐고.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진작에 도망갔을텐데. 골 때리는 여자다 싶었다. 또 동시에, 저 여자가 그 여자일 수도 있겠다 - 싶었고.
아니나 다를까 호석의 첫사랑 주인공이었다. 그녀는.
그녀는 나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조금도 기 죽지 않았다. 나 역시 가슴 팍에 총을 지니고 있다는 것 쯤은 알았을 텐데. 사실, 대기업의 맏딸이 난민구호자를 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게 말이 되나 싶었다. 아무렴, 두드림의 장녀인데. 하지만 그 장녀가 호석의 첫사랑이고, 그 첫사랑이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맹랑할 정도로 주체적인 여자라면. 말이 됐다. 모든 게 납득이 될 정도로.
호석은 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십 년전과 같이. 열일곱의 자신으로 돌아가서, 그녀에게 다시금 제 신념을 심어달라고 할 것만 같았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녀를 품었다고 쳐도, 지금은 달랐다. 모든 걸 안다. 모든 걸 안 이상, 그 마음을 다시 피워내면 안됐다.
나는 호석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무언의 압박이었다. 알아서 잘, 하라는. 물론.그 '잘' 은 마음을 주지 말라는 뜻이고. 호석은 내게 잡힌 팔을 거칠게 빼내며, 말했다.
여자 하나 때문에, 지난 계획 다 물거품 만들어 버릴 정도의 병신 아니야. 나.
혹시 알아? 우리의 새로운 공격 카드가 될 지?
호석은 자신있게 말하고는, 내게서 등을 돌렸다. 어찌됐든, 새로운 공격 카드와 밥을 먹겠다. 이건가.
호석은 제 오른 팔에 위치한 팔찌를 왼 손으로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참나.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가당치도 않은 그 신념에 기대면서.
그 신념의 주인공이,
새로운 공격카드라.
**
안녕하세요. 겨울소녀입니다.
이번 화는 호석이에게 탄소가 어떤 의미였는지가 들어나는 스토리였습니다!
개인적으로 호석이가 살인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설정을 한 데에는, 최소한의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물론, 간접적인 살인이라고 정당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픽션이니까요.
소설은 허구지만, 허구로 진실을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이야기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이야기꾼이 되고 싶구요.ㅎㅎ
9화도 금방 업뎃 될 것 같아요 - 다들 이번 주도 화이팅 하세요!
다정한 사람들
- 암호닉 신청 했는데, 없으신 분들은 말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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