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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바마마, 제 누이는요? 어마마마께선 어디에 계시는 것입니까?"

"세자,"

"다 거짓입니다! 모략입니다! 분명 제가 보았습니다! 건강한 울음을 터뜨리는 제 누이를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단 말입니다!"

"그만하라."

"죽다니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바마마, 부디 자세한 내막을 알아내 주십시오! 누군가의 모략이 분명합니다! 하룻밤 새에,"

"그만 하라지 않았느냐!"

"아바마마...."

"세자... 너의 어미와 누이는 지난밤 명을 다하였다 하지 않았느냐. 누군가의 모략도, 어떠한 내막도 없느니라. 다 이 아비의 잘못이다. 이 아비가...."

"...."

 

 

 


"진아. 하나 딱 한 가지만 기억하거라. 너의 누이. 누이를 절대 잊어선 안 된다. 그래, 너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그 누이를,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알겠느냐?"

"... 예. 아바마마."

"때가 올 것이야. 반드시 그 때가 올 것이다...."

 

 

 

 

 

 

 

 

 

虎熊傳

호웅전 ; 밤에 피는 꽃

03

 

 

 

 

 

 

 

 

 


-

"아바마마의 건강이 날로 쇠하시는 것 같아 걱정이다."

 

 


문후를 드리고 돌아온 석진은 갈수록 안색이 죽어가는 왕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간을 잔뜩 누른 채 한숨을 길게 빼내었다. 그 앞에선 내색하지 않았으나 혈색이 거의 돌지 않는 제 아비의 용안에 여간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심려치 마십시오. 근래 늦은 시각까지 정사를 보시느라 고단하신 듯합니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내 생각엔... 혹 김두형이 아바마마를 향해 사람을 써서 흑술이라도 부리고 있는 건 아닐까? 살! 살 같은 것 말이다."

"어후, 큰일 날 말씀을! 아무리 김대감 속이 새까맣다 해도 설마 그런 짓까지 하겠습니까?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 만약 그리했다면 하늘 님이 먼저 노하셔서 그 자에게 큰 벌을 내리셨을 것입니다!"

"알았다, 알았어. 속상해서 해본 소리야. 흥분하지 말거라. 난 흑술 같은 거, 믿지도 않잖아. 단지 몸이 피곤하여 비친 낯빛이 아니셨으니 그러는 것이다. 어딘가 곪아가는 것이 분명한데 의원들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하니."

 

 


몇 달전부터 군왕이 병 들어간다는 것을 느꼈다. 자주 어지럼증을 호소하거나 간혹 헛소리를 늘어놓은 적도 있으며, 얼굴빛은 불이 꺼지는 듯 갈수록 어둑해졌다. 그런 군왕을 석진은 매우 걱정했다.
차라리 김두형의 짓이길 바랐다. 그랬다면 당장에 왕을 해한 죄를 물어 목이 달아나게 할 수 있었을 텐데. 또한 그리하고 나면 왕의 건강 또한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 아니야.
하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대체 어떤 이유인지 알 수가 없었으니 골머리를 앓는 것이었다. 그 용하다던 의원들도 한 마디 답을 내어놓질 못 했다. 어떤 약을 써도 듣질 않고, 그 좋은 음식들을 대령해도 소용이 없었다.

 

 


"한데 호석아."

"예."

"아바마마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셨다."

"무슨 말씀이요?"

"기억하라고. 지켜야 한다고."

"...."

 

 


순간 호석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공주, 그뿐이었다. 왕이 죽고 나면 석진이 기억해내 그를 대신해 반드시 지켜야 할 사람, 그의 누이. 공주 말이다.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조차 사라진 공주의 존재는 석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나라에 공주가 태어난 적이 있다는 것마저 애초에 말끔히 지워버린 그들처럼, 제게 누이가 있었다는 사실 또한 그의 기억 속에선 이미 지워지고 난 후였다. 단 한 번이었다, 공주와 눈을 맞춘 적이. 그녀가 태어나던 날, 단 한번. 어째 서글픈 듯한 울음을 터뜨리는 공주에게 손을 내밀자 제 오라비인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검지를 꼭 쥐며 뚝 그치곤 방글방글 웃던 그 모습을, 석진은 기억하지 못 했다. 그 당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사흘 내내 식음을 전폐하고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지. 결국 그 후로 다시 한번 보지도 못 한 채, 제 어미와 사라져버린 공주를 흘러가는 세월과 함께 떠내려 보냈다.

호석은 별안간 덜컥 석진에게 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은 왕을 생각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벌써 이 세상을 떠날 채비를 하시는 것일까. 호석에겐 가끔 은밀히 불러 그 안부를 묻곤 했다. 잘 지내냐며, 잘 컸냐며. 조심스럽게 물으시곤 쓰리고 애처로운 미소를 띠셨는데.
한데 이제껏 숨겨오시다 하필 이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뭔가 꺼림칙하고 불안이 밀려왔다.

 

 


"당최 무엇을 기억하고 지키라시는지. 내내 그 말씀만 하시다 무엇인지는 끝내 말씀해주지 않으셨어. 그게 뭘까. 내가 뭘 잊고 있는 것이야."

"...."

 

 


저를 빤히 보는 석진에게 호석은 그동안의 사실들을 모두 털어놓을까 생각했다. 이젠 알려도 되는 것인지, 아직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멀쩡히 살아있다는 사실마저 꽁꽁 숨겨둔 것도 모자라 석진 대신 공주에게 오라버니라 불리며 어찌나 죄책감을 느꼈는지. 귀휴를 청할 때마다 호석은 당연히 아무렇지 않을 석진의 기색을 괜스레 살폈다. 지레 마음이 찔려 그랬던 것이지. 공주에 연관된 이야기를 꺼내놓아야 할 때면 늘 양심이 걸렸다. 그건, 왕 또한 그 긴 세월 호석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던 까닭은 그저 왕의 명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석진을 대신하는 그 자리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공주와 함께 있을 때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으니까.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에게 잘못하는 짓인 걸 알면서도.

 

 


"참 이상한 게. 꼭 아바마마의 말씀 때문만은 아니라. 그전부터 늘 무언가 잊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 마음 어디 한 곳이 뻥 뚫린 것처럼 말이다."

"...."

"한데 그걸 아무리 찾아보아도 모르겠잖아.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답이 나오질 않아."

"...."

"그게 뭘까, 호석아."

 

 


세자 저하의 누이요. 곁을 지켜주는 가족도, 벗도 없이 별궁에 홀로 사시는 공주마마 말입니다. 이젠 그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조차 찾을 수 없는 불쌍한 공주마마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세자 저하만은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호석은 목구멍에 걸쳐 자꾸만 터지려 하는 것을 누르고 또 눌렀다. 뱉으려 하면 누르고, 삼켜내면 또 차오르고.

 

 


"때가 되면 저절로 깨닫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럴까?"

 

 


언젠가, 때가 되면 꼭 말씀드리겠습니다.

 

 

 

 

 

 

 

 

 

-

"나가고 싶어?"

 

 


정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멍하니 그 담 너머를 보고 있다 정신을 톡- 깨는 태형의 목소리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

 

 


"또 보고 있잖아. 그런 표정으로."

"...."

"별궁 밖을 나가고 싶은 거지?"

"...."

 

 


가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별궁 담 너머를 빤히 보곤 했다. 그럴 때면 항상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는데. 그 어떤 표정이냐면. 글쎄, 정말 별궁 밖을 나가고 싶은 걸까. 동경, 갈망, 자유. 사실, 솔직한 마음으론 그런 듯했다. 이젠 그만 이곳을 나가보고 싶어. 이곳, 별궁을 벗어나 먼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말이 아니었다.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그래 궁 안팎을 자유로이 드나드는 태형처럼. 가끔 궁 밖을 나서 사람들 구경도 하고 늘 태형이나 호석에게 전해 듣기만 했던 것들을 직접 보기도 하고. 그저 그런 사소한 것들을 그리고 있었다. 머리가 커서 그런가. 어렸을 땐 마냥 그런대로, 흘러가는 대로 놓아두었는데. 정말 궁 밖은 너무도 위험해서 한 발짝 닿지도 못 하는 곳인 걸까. 아직도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되지 않은 연약한 여인인 건가. 근래 들어 그런 생각들이 자주 들었다.

곁에선 늘 함께 했던 태형은 곧잘 그런 공주의 표정을 읽어내렸다. 어쩌면 그건 당연한 걸까. 태형은 원체 답답한 곳을 꺼려 했으며 속박당하는 것 또한 질색했다. 방안에 잡혀 가만히 있지 못 하고 저잣거리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거나 당신을 따라 정치길에 오르길 바라시는 아비의 뜻을 거스르고 자신이 원했던 금군이 되려 하거나.
그러했으니 자신과 비슷해지는 공주의 표정을 읽어내리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한번 나가보는 건 어때?"

"...."

"항상 그랬잖아. 궁 밖을 나가면, 보고 싶은 게 많다고."

"...."

 

 


그랬지. 보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하지만 그 말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루에서 내려와 신을 신고 당차게 문을 열어젖힐 수 없었다. 무엇을 망설이는 걸까.
그녀의 어머니나 호석이나 늘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했다. 꼭 세뇌라도 시키려는 것처럼. 궁 밖은 너무도 잔인하고 험해서 내가 많이 자라 강인해질 때까지 나가선 안 된다고. 그래서 그때가 올 때까지 안전한 이곳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한 번이라도 좋으니 궁 밖을 구경해보고 싶다는 말을 꺼낼 때면 평소답지 않게 목소리에 힘을 주며 화를 내는 호석이었다. 다른 어떤 안전한 방도들을 꺼내어 놓아도, 반응은 항상 같았다. 위험하니 안 된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 분명했다. 그때가 결코 오지 않으리란 것도 분명했다. 너무 모순되지 않냐고. 호석이 말해주는, 태형이 말해주는 궁 밖은 공주를 이곳에 스물두 해가 지나도록 묶어둘 만큼 험한 곳이 아니었다. 그저 아름답고 평화롭고 행복한 곳일 뿐이었는데. 물론 그들이 내게 좋은 것들만 들려주는 것이겠지만. 호석이 늘 뒤에 그렇게 덮붙였으니까. 이게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고.
처음 이런 삶에 의문을 던진 것은 공주가 아닌, 태형이었다. 이상하지 않냐고. 세상은 그리 무섭고 잔인한 곳만은 아닌데. 나도 너의 오라비도 잘만 들락거리는 그 밖이 뭐가 위험하냐고. 그때 처음, 공주도 자각한 것이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그걸 알면서도 얌전히 이곳에 묶여사는 이유는 뭘까. 자신을 가두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태형의 말이 전혀 틀리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두 저를 가두기 위한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쉬이 벗어나지 못 하는 이유는, 대체 뭘까.
아마 두려움, 그것 때문이겠지. 아닌 것을 알면서도 쉬이 깨지지 않는 두려움. 태어나 한 번도 이 별궁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밖이 아무리 아름답고 평화롭고 행복한 곳일지라도, 알지 못 하는 다른 어떤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또 한 가지라면, 나로 인해 세상이 어지러워질지도 모른다는 것. 태형이 살아온 바깥세상은 그러했다. 사람들은, 공주를 기억하지 못 했다. 이 나라의 공주는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렸다, 모두 그리 알고 있다고. 하긴, 이곳에서조차 공주의 시중을 드는 어떤 이들도 그녀를 공주라 부르는 이는 없었다. 그저 아가씨, 그렇게 불렀는데. 이 세상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이 나라의 공주를. 하니 돌연 세상 밖으로 나와버린다면, 저로 인해 세상이 어지러워질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내가 옆에 꼭 붙어서 지켜줄게. 누구도 해를 끼칠 수 없게, 내가 옆에 꼭 있어줄게."

 

 


태형은 공주의 가라앉은 눈을 마주 보며 포근하게 말했다. 금방 답을 내어놓지 못 하고 애먼 손가락만 툭툭 뜯고 있는 공주에게 그는 늘 따스히 건네주었다. 지켜준다고. 단단한 그의 눈빛과 살랑거리는 그 목소리를 들을 때면 정말 모든 것이 다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 말을 해줄 때면, 세상이 정말 무섭고 고약할지라도 그의 손을 잡고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후일에, 시간이 더 흐르고 나면. 그때. 그때가 되면 잊지 말고 꼭 그 약조를 지켜줘야 해, 알겠지?"




하지만 그 두려움이란, 아주 뿌리깊히 박혀있어 태형의 힘으로도 빼어낼 수 없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있어야만 한다고.
그렇게 또 한 번 되내며 고인 물속으로 사라진다. 다 썩어버릴 때까지.




"또. 또 그런다."

"응? 그리해줄 거지?"

"응. 꼭 그리할게."

 

 


늘 같은 답답하기만 한 대답이 나오더라도 태형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내 고개를 끄덕여주며 살긋 웃어주었다. 그럼 공주 또한 그와 눈을 맞추며 활짝 웃는 것이다. 언제라도, 꼭 그때가 오길 바라면서.

 

 


"한데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뭐든 물어봐!"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 무슨 근심이라도 있는 거야?"

"아... 그게...,"




오늘은 어째 힘이 쭉 빠져 늘어진 발걸음으로 별궁을 찾은 것이 영 신경에 쓰였다. 평소처럼 재잘재잘했던 말을 또 늘어놓거나, 의미 없는 말을 늘어놓지도 않고. 집중을 잘 하지 못 하는 것도 같고. 해서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건지 조금 전까지도 가끔씩 눈썹 사이를 찌푸리며 제 입술을 잘근 물어뜯기에 결국 물어보았더니 금세 답이 튀어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했던 벗이 하나 있는데. 글쎄, 혼인을 한대. 그것도 얼굴 한번 보지 못 한 여인과."

"그게 왜? 혹여 혼인을 하게 되면 더 이상 함께 시간을 보내주지 못 할까 봐?"

"아니."

"그럼 무엇 때문에?"

 

 


그게 아니면, 하고 다시 물었더니 태형은 가만히 내 눈을 바라보다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짧은 찰나, 태형은 곧 울 것 같이 울망울망 눈동자를 흔들기도 했고 하기 싫은 말을 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움찔거리기도 했다.

 

 


"나도 혼인을 하게 되면 어쩌지."

"...."

"아버지께서 내게 한마디 의논도 없이 덜컥 혼처를 구해오시면, 그러면 어떡해?"

 

 


뚝- 하고 떨어진 태형의 답에 멋대로 눈이 동그랗게 떠지더니 입은 벌어지고 목구멍은 막혀버렸다. 혼인, 혼인이라.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 하였다. 태형이 혼인을 한다는 것은. 사실 때를 이미 오래전에 넘겼기에 덜컥 혼처가 잡힌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태형의 가문은 꽤나 이름난 귀족 가문이라 그의 가문과 사돈이 되려는 다른 귀족 가문들이 줄을 서도 벌써 섰다는 것을 둘 다 알고는 있겠지.

 

 


"난 싫어. 혼인도 싫고, 얼굴도 모르는 여인과 평생을 함께 해야 하는 것도 싫어. 상상만 했는데도 벌써부터 온몸이 저릿저릿 거리는 걸."

"...."

"아, 그게. 혼인이 싫다는 것이 아니라... 난, 나는... 난 너와...."

 

 


공주는 차마 태형과 눈을 맞추지 못 하고 고개를 떨구었고 태형 역시 말을 끝까지 내뱉지 못 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다른 여인과 태형이 혼인을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뜨끈하게 올라오는 것을 느낀 공주였다. 아직도 그때 그 비녀를 꼭 간직하고 있는데. 직접 머리에 꽂아주겠다는 약조도 기억하고 있는데. 공주는 가끔 그 비녀를 꺼내보며 꿈에 그리곤 했다. 태형과 함께 하는 혼례는 이러해야지. 그리 크지 않은 곳에서 많은 이들의 축복을 받으며 월견초가 만개한 그곳 한가운데에 서서 고운 혼례복을 차려입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래서. 그렇다고 해서. 아마 그럴 일은 결코 없을 테지. 태형과 혼인을 하는 일도, 그 비녀가 공주의 올림머리에 꽂히는 일도. 행복하게 꾸었던 그 꿈이 실현되는 일도.

 

 


"모두... 그리 혼인을 한다잖아. 집안 어르신들께서 정해주신 가문의 사람과 부부의 연을 맺는 것은 당연한 거야."

"...."

"혹시 너에게도 그런 날이 온다면, 마음에 들지 않는 여인이라도... 그 뜻을 거스르면 안 돼. 차차 마음이 통할 수 있을 거야. 부부는 일심동체라잖아? 함께 살다 보면 좋아질지도,"

"진심이야?"

 

 


애써 꾹꾹 누르며 담담한 척 뱉어내던 말들이 태형의 한마디에 다시 먹혀들어갔다. 울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진심이냐고. 진심이겠어. 어찌 진심일 수 있겠어. 모두 거짓이야.
공주는 끝내 태형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 하고 뚝 떨구어 참아내느라 꾹 누르고 있는 제 두 손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 눈을 보게 되면 정말 왈칵 눈물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으니까.

 

 


"그 말, 진심이냐고."

"...."

"내가 다른 여인과 혼인을 해도, 평생을 함께 해도 넌 괜찮아?"

"...."

"말해봐. 내가, 내가 아버지 뜻대로 아무 말 못 하고 얌전히 니가 아닌 다른 여인과 혼인을 해도 넌 괜찮다는 거야?"

"...."

 

 


아무 대답도 하지 못 한채 가만히 고개만 숙이고 있는 공주에게 목소리를 키우며 태형이 물었다. 그를 볼 수가 없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속이 터지고 있어 꽉 쥔 손엔 힘이 더욱 들어갔다.
이제껏 서로를 향한 마음을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었으나 한 번도 서로를 향해 피우고 있는 그 마음을 속 시원히 내뱉은 적은 없었다. 우린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으니까. 그저 이렇게, 가끔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밖에 하지 못 하니까. 태형이 했던 그 약조는, 그저 어렸을 적 추억일 뿐이었다. 언젠가 흩어져버릴, 가슴에 품고 살아야만 하는 추억.

 

 


"대답해!"

"하면 내가 어찌할 수 있는데! 괜찮지 않다고 하면, 정말 우리가 혼인이라도 할 수 있어? 나는, 이 별궁을 한번 나서본 적도 없어. 사람들 기억 속에선 이미 사라진 공주의 몸일 뿐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그 어떤 것도 없는데!"

"...."

"내가 괜찮지 않다면? 니가 싫다 하면, 그러하다면 너와 내가 세상 밖으로 나가 혼인이라도 할 수 있는지 먼저 대답해 봐!"

 

 


꾹꾹 눌러도 한계에 다다른 마음이 결국 터져버려 그 김에 그동안 싸매고 있던 속 또한 모두 털어내버리자, 벌컥벌컥 눈물을 쏟아내며 울분을 토했다. 공주가 하는 말마다 틀린 것 없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 태형은 그 이상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 역시 애초에 제 처지를 알고 있었기에 친한 벗의 혼인 소식에도 그리 낯빛이 어두웠던 것이었다. 저도 답답하고 겁이 났겠지.

누구도 기억하지 못 하는 별궁에 숨겨진 공주에 불과했다. 세상 밖으로 쉬이 나서지 못 하는 겁쟁이에 아무것도 하지 못 하는 힘없고 나약한 공주. 그런 주제에 어찌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혼인을 할 수 있겠어. 하물며 태형이 별궁에 드나든다는 사실조차 떳떳하지 못 해 그 누구에게, 호석에게도 숨기고 있으면서.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둘 사이엔 그 어떤 것도 불가했다.

 

 


"미안해."




멈출 줄을 모르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아무렇게나 훔쳐내고 있는 공주를 보며 태형은 촉촉이 젖은 그 손을 잡아 내려 대신 눈물을 닦아주었다. 공주의 우는 모습을 보자니 태형의 속은 더욱 찢어지고 망가졌다. 커다란 멍울이 생겨 무언가가 누르는 듯 진하게 아려왔다.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정작은 이곳에 갇혀있는 것은, 그런 제 신세가 한스러운 것은 공주일 텐데.




"... 무엇이... 무엇이 미안해. 어째서 니가 미안하다 하는 건데...."

"내가 아무것도 해주지 못 해서. 혼인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그건 내가,"

"아니. 공주님 탓이 아니야. 나 때문이야. 내가 널 좋아해서, 이렇게 울게 했잖아."

 

 


공주의 잘못이 아니었다. 다, 그 모든 것이 제 탓이라 생각했다. 아무런 힘도 없어서. 얼굴을 감싸 쥐고 눈물을 몇 번 닦아주던 태형은 끅끅 삼켜내는 공주를 제 품으로 끌어당겨 꼭 안아주었다. 그 품에 안겨 공주는 다시 눈물이 뚝뚝 떨어뜨렸다. 처음으로 말해주었다. 좋아한다고. 좋아한다는 그 말을, 진정 꺼내주었다. 몇 번이고 입 밖으로 꺼내 말해주고 싶었으나 가슴에 얹혀 차마 꺼내지 못 했던 그 말을 먼저 꺼내주었다.
좋은데, 나도 너무 좋은데. 그래서 더욱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니, 다 내 탓이 맞아. 공주는 초라한 제 꼴이 한없이 밉고 한심했다. 왜 이렇게만 살아야 하는지. 아무도 모르게 숨어 사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을 마음껏 마음에 두지 못 하는 것도 모두 싫었다. 이제 다 싫어. 할 수만 있다면 함께 아주 먼 곳으로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다.

 

 


"내가 뭐든 할게."

"...."

"그리되지 않도록, 내가 뭐든 할 테니까. 그러니 울지 마세요, 공주님."

"...."

"내가 했던 약조, 꼭 지킬게."

 

 


'만약에 혼인을 한다면, 그럼 이걸 머리에 꽂아줘. 나랑 혼인하면 그때 내가 꽂아줄게.'
그때를 다시 떠올렸다. 절대 빈말이나 장난이 아니었다. 제 진심이었다. 굳게 다짐한 약조였다. 얼마가 걸리든, 꼭 지켜낼 약조.

 

 


"이 별궁 밖을 나갈 수 있게 해줄게. 모든 이의 환대을 받으며 나설 수 있게 해줄게. 내가, 그리해줄게."

"...."

"그때가 되면, 꼭 나와 해주어야 해. 혼인."

"...."

"그러니 그때까지 기다려줘. 울지 말고, 마음 아파하지 말고. 기다려줘."

 

 


이까지 꾹 물어가며 터지려는 눈물을 누른 채 공주 역시 태형을 안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의 대답을 들은 태형은 품에서 살짝 떼어놓으며 달큼하게 웃어주었다. 그 맑은 얼굴에 검게 타 그을린 마음이 씻겨내리는 것만 같았다. 믿고 싶었다. 그가 한 모든 말을 믿고 싶었다. 뭐든 다 괜찮아질 것만 같았으니까. 태형을 믿는다면 뭐든 다 괜찮아질 것 같았다. 그 말에 모른 척 깜빡, 속고 싶었다.

울음을 집어삼키며 끅끅거리는 공주를 가만히 눈에 담아내다 태형은 촉-, 하고 초근히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고 따뜻하게 닿아오는 그의 입술에 어째서인지 공주는 그 찰나,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월견초의 향기가 풍기는 것만 같았다.

 

 


"야화, 너와 꼭 할 거야."

 

 

 

 

 

 

 

 

 

-

군왕의 병세가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갔으니 침소 밖으로 한 발짝 나설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대단하다던 의원들은 당최 무얼 하는지 딱 떨어지는 병명 하나 찾지 못 하였으니 맞는 처방 또한 받을 수 있었겠느냐고. 줄어들기는커녕 해가 거듭될수록 불어나는 근심으로 인해 그 마음과 정신이 썩어들어 생긴 병이 아닐까, 하는 말만 늘어놓았다.

 

 


"세자."

"예. 아바마마. 소자 여기 있습니다."

"내 너에게 미안한 것이 참으로 많아. 너를 두고 떠나는 길이 마냥 편치만은 않구나. 이 못난 아비 대신 이 나라, 월음의 백성들을 헤아려야 할 것이야. 이젠 너의 백성들이니라."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저를 두고 어디로 떠나신단 말씀이십니까."

 

 


왕은 석진의 손을 꽉 쥐며 마른 기침을 몇 번 토해냈다. 곧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그 소리가 너무도 탁하고 날카로워 석진의 마음은 걱정과 불안으로 번져갔다.

 

 


"진아."

"예, 아바마마."

"일전에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꼭 명심하거라. 반드시... 기억해내야 한다. 이 험하고 모진 세상에서 니가 꼭 지켜주어야 해."

"무엇을,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못나고 부족한 탓에 그 아이에게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그 흔한 이름조차 붙여주질 못 했어. 살아생전 한번 다정히 보듬어주지도 못 했던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하니 아들아. 내 너에게 한 가지 부탁을 더 해야겠구나. 불쌍한 그 아이를, 부디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

"누구를 말씀이십니까? 그 아이가 대체 누구입니까, 아바마마!"

"꼭... 부탁한다, 진아."

"아버지! 아버지! 어의, 어의를 불러라! 당장 어의를 부르거라!"

 

 

 

 

 

 

지난밤 하늘에 떠있던 위태롭고 희미하던 따스한 별 하나가 그 수명을 다하여 떨어지니 월음의 백성 모두가 거리로 나와 땅에 머리를 박고 통곡했다. 나라님이 승하하셨다. 이 어찌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있는가.

 

 

 

 

 

 

 

 

 

-

어째 푸르고 높아야 할 가을 하늘이 탁하게 가라앉아 있더라니. 깊은 잠에서 깨어나 번쩍 눈이 떠진 그 찰나, 어째 평소와 다른 싸한 기분이 들더라니.
매 일과였던 아침 산책을 위해 별궁 정원을 한가로이 거닐던 공주는 별안간 저를 찾아온 호석에게 반가움을 표하는 것도 잠시,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에게 부고를 전해 받았다. 제 아비, 이 나라의 군왕이 승하하셨다고. 하며 아침 일찍부터 소식을 전하기 위해 별궁에 들른 호석은 국상 채비로 한동안은 별궁 출입이 불가할 것 같다 덛붙였다. 사실 빛이 희미했던 그 별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한참이 지난 새벽이었으나,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곤히 잠들어 있을 공주를 생각하며 호석은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렸다 이제야 별궁에 당도한 것이었다. 무엇도 아닌, 이 부고를 전하기 위해. 누구 하나, 공주에게 소식을 전해줄 사람이 없었으니까.

괜찮으냐, 묻는 호석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공주는 썩 맑지 못 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괜찮습니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눈물이 쏙 빠지도록 울음을 토할 거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의 예상보다는 담담한 모습의 공주를 보며 호석은 더욱 걱정스러운 낯빛을 비추었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곁에 있어주겠다는 호석의 말에도 바쁠 텐데 어서 가시라 꾹꾹 밀어 대는 바람에 그제야 뻑뻑하게 붙어있던 발을 떼며 별궁을 떠났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더라. 그다음 무얼 했더라. 그래, 그 후 끼니도 모두 거른 채 정자에 앉아 딱딱한 돌이라도 된 것처럼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한 번도, 태어나 한 번도 뵙지 못 했던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럼에도, 나는 그때 무얼 하고 있었지. 내 아비가 생사를 오가며 힘겹게 목숨줄을 잡고 계실 때에도, 가늘었던 숨을 거두실 때에도, 늘 그랬듯 그 어떤 것도 알지 못 한 채 별궁에 처박혀있었다. 그분의 임종도, 곁에서 지켜드리지 못 했다.

하나 기운이 빠져라 울부짖으며 얼마나 아끼시어 벌써 그분을 데려가셨나 무심한 하늘을 원망해도 모자랄 판에,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한없이 멍한 것이, 어째 정신이 저 먼 곳으로 쏙 빠져버린 듯했다.
정말 괜찮은 건가. 내 아비가 돌아가셨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 할 만큼, 그분을 그리지 않았던 건가.

 

 


"야화야!"

 

 


답해줄 누군가도 없이 무의미한 물음만 반복해서 던지고 있자면 익숙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오늘 하루 종일은 이런 상태일 줄 알았는데.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았던 정신이 그제야 깨질 수 있었다. 군왕의 서거로 궁안이 잔뜩 어지러웠으니 별궁의 경비 또한 그리 빡빡하지 않아 처음으로 당당히 그 문으로 걸어들어올 수 있었다. 한데 왜 그게 오늘이냔 말이다. 하필 이런 때, 이런 이유로.
평소와 다른 태형의 등장에 썩 의문이 갈 만도 한데 공주는 어찌 그리로 들어오느냐, 물어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얼른 버선발로 달려나가 그를 맞이해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 했다.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나 봐.
태형 역시 평소와 다른 공주의 태도에도 그러려니 빠른 걸음으로 공주의 곁으로 다가가 정자에 나란히 앉아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국상 채비로 바쁠 텐데. 이곳에 와도,"

"괜찮아?"

"... 괜찮아. 나는 니가 더 걱정이야. 이리 자주 자리를 비워도 돼?"

"지금 내 걱정하는 거야? 난 상관없다니까. 어차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도 공주님을 더 자주 보기 위해서였는걸. 그보다,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달려왔어야 했는데 부대 소집 명령이 떨어져서.... 그리하지 못 해서 미안해. 한데 정말 괜찮은 거야? 난 공주님이 엉엉 울다 지쳐 혼절이라도 했을까, 어찌나 걱정을 했는지 몰라."

"괜찮아. 이상하리만큼, 정말 괜찮아."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안심이 되었던 걸까. 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푸스스- 웃어 보였다. 자리를 비우고 이곳으로 오는 것이 쉽지 않았으리란 것쯤은 공주도 알고 있었다. 궁 안은 분명 국상 채비로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금위군 또한 이런 때일수록 더욱 긴장을 하고 경비를 철저히 봐야 할 텐데. 부대장이라는 사람이 이리 자주 부대를 비우니 좌천이나 천적이 되면 어쩌려고.
되려 그를 걱정하는 공주였으나 정작 태형은 아무렇지 않은지 그저 괜찮냐, 몇 번 더 물을뿐이었다. 정말 아무렇지 않았으니 괜찮다 고개를 끄덕여도 태형은 무언가 언짢은 듯 표정을 조금 찌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거짓이지."

"응?"

"괜찮을 리 없잖아. 내겐 솔직하게 말해도 돼. 슬프면 슬프다고, 말해도 괜찮아."

 

 


태형은 그녀의 무릎 위에 곱게 포개놓은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정말 괜찮은데. 거짓이 아닌데. 벌써 몇 시각이 지났는데, 아무리 기다려보아도 슬픔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고 눈물 또한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처음 호석에게 비보를 들었을 때도 그저 놀람, 그뿐이었다. 지금은 그 놀람 또한 가라앉아 느껴지는 감정이라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지금 나는.

 

 


"있지, 태형아. 나는 내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 한 번 뵌 적도 없으니 말이야. 어쩌면 내가 태어나던 날, 것도 아니면 내가 기억하지 못 하는 아주 어린 시절에 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아버지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

"그래서 나는 늘 이곳에서 그분을 기다렸어. 언젠가 한 번은 나를 찾아주시겠지. 설마 이 별궁을, 나를 잊으신 것은 아니겠지."

"...."

"근데, 살아생전 한 번도 나를 찾아준 적이 없잖아. 어머니께서 내 곁을 떠나실 때도, 이곳을 들려주지 않으셨어. 결국 그분 역시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가실 때까지도, 나를 찾아주지 않으셨어."

"...."

"많은 것을 바란 것이 아니었는데. 나는 그저 그분께 한 번이라도 '아버지'하고 불러드렸으면, 못나도 좋으니 내 이름을 지어주셨으면 했는데. 그날만을 기다리며 꾹 참고 이곳 별궁에서 버텨왔던 것인데...."

 

 


한마디 한마디를 꺼내놓을 때마다 속 깊은 곳에서 뜨겁고 따가운 것이 끌어올라 오는 듯했다.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는데. 이상하리만치 너무도 괜찮은 줄 알았는데.
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음에도 공주는 아직 이 별궁을 벗어나지 못 했다. 호석마저도 국상 채비로 분주한데, 오직 공주만이 가만히 앉아 평소와 다름없이 별궁을 지키고 있었다. 딸이 그 아비의 임종을 곁에서 지켜주지도 못 했거니와 그 누구도 그녀에게 아비의 장례를 치러야 하니 채비를 하라, 데리러 오지 않았다.

 

 


"태형아. 아버지께서 나를 잊지 않으셨다고 말해줘."

"...."

"세상 모두가 나를 잊지 않았다고 말해줘."

"...."

"그렇지. 그런 것이지?"

"...."

 

 


그래, 괜찮은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별세에도 아무렇지 않게 그랬구나 넘길 수 있던 것이 아니라,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 할 만큼 아버지를 그리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그럴 자격조차 없다, 여겼던 것이었다.
세상 모두가 이 나라의 공주를 잊었다 해도 괜찮았다. 그럼에도 공주를 찾아주고 기억해주는 태형이 있고, 때가 되면 모두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을 터이니 기다리라며 늘 공주라는 그녀의 본분을 상기시켜주는 호석이 있었으니까. 제 아버지와 하나뿐인 오라버니는 왕과 세자로서 나랏일이 바빴으니 마음이 이곳에 계셔도 한번 들러주시기 어려운 것이겠지, 생각했다. 그때가 오면 이곳을 벗어나 먼저 그분들을 만나러 찾아가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내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나를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셨고, 나는 헛된 꿈을 꾸고 있었던 것뿐이었어.

아무리 기다려도 나올 생각을 않더니 끝내 눈물이 차오르기에 치맛자락을 꽉 쥐는 것도 모자라 입술까지 터질 듯 물어 참아냈다. 울 자격조차 내겐 없는 거야. 슬퍼할 자격조차 없는 거야. 나는 그분께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분은 나를 기억조차 못 하시니까. 나는 그분의 딸도, 그 어느 것도 아니었어. 그분이 미웠다. 원망스러웠다. 당최 어떤 이유로 나를 이곳에 묶어두시고 까맣게 잊어버리셨는지 너무도 원망스럽고 야속했다.
한데도 왜 이리 가슴이 아픈 것인지. 어떤 분이셨는지 머릿속에 그려지지도 않는 그분의 별세에 왜 이리도 가슴이 아픈 것인지. 그제야 느껴지기 시작했다. 실감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 아비라고, 내 가족이라고. 한번 본 적도 없는 그분이 평생 볼 수도 없는 먼 곳으로 떠나갔다는 생각에 공주는 그제야 아픔이 느껴졌다.

 

 


"그것 봐. 거짓이라고 했잖아."

"...."

"괜찮지 않잖아. 슬프잖아. 아프잖아."

"...."

"울어도 돼.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끝까지 참아내려 했는데. 결국 그 말에, 그 표정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며 공주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정말 울다 지쳐 혼절이라도 할 기세로 서럽게도 울어댔다.
그분이 나를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신 채 세상을 뜨셨다는 이유로 울었다. 어머니도 모자라 아버지마저 내 곁에 계실 수 없다는 이유로 울었다. 이렇게 잘 자랐다 한번 모습을 비춰드리지도, 어떤 분이신지 뵙지도 못 하였는데 벌써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셨다는 이유로 울었다. 그분이 그립고 원망스러워서 울었다. 또한 어떤 이의 방문도 없는 이곳에 고여 사는 내 신세가 너무도 한탄스러워 울었다. 지금껏 용기 한번 내지 못 했던 자신이 한심스러워서 울었다.

속에 담겨있던 눈물이란 눈물은 모두 뽑아낼 작정으로 울어대는 공주를 태형은 품 깊이 안아주며 천천히 등을 토닥여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어찌나 걱정을 했는지 모른다. 고된 하루를 끝내고 피곤함에 절어 곯아떨어져있던 때였다. 한번 잠이 들면 잘 깨지 않는 편인데 어찌나 밖이 소란스럽던지. 비몽사몽 잠이 덜 깬 채로 소리의 원인을 찾아 밖으로 나왔더니, 그대로 정신이 번쩍 들어버렸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공주, 그녀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당장에 궁으로 달려가고 싶었는데, 비상이 걸려 부대 소집 명령이 떨어진 바람에 뒷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불안함과 걱정에 몸을 달달달 떨며 안절부절하고 있으니 꼴이 여간 별로였는지, 잠깐 쉬고 오라 하더이다. 그래서 냅다 이곳으로 튀어올 수 있었다. 아무 소식도 듣지 못 했으면 어쩌나. 아님, 소식을 듣고 혼절을 했으면 어쩌나. 이런저런 걱정을 하면서.

그런 태형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근데 참 신기한 게, 공주 역시 그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 표정 하나에 마음이 참으로 편안하고 포근해진다더라. 말하지 않아도 다 느껴지는 것 같다더라.

 

 


"야화야."

"... 응."

 

 


잔잔하게 제 태명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 공주의 따뜻한 뺨에 흐르던 눈물이 차츰 말라갔다. 자주 그리 불러주었다. 숨어서 훔쳐만 보던 그 아이의 정체가 사실 공주라는 것을 듣고 난 후 급히 존칭을 쓰는 태형에게 그러지 말아달라 말하였다. 태형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이미 그러했으니까. 꽤나 거리감이 느껴지는 단어와 표현이었다. 호석에게도 똑같이 말했지만 가끔씩 그리 편하게 말해줄 뿐이었다. 너 자신을 잊으면 안 된다면서.
해서 오직 태형에게만 아직 이름이 없으니 어머니께서 불러주셨던 태명을 대신 불러달라, 말했고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가끔 경어를 붙이긴 하지만 그 무엇이든 이젠 상관이 없었다. 나를 향한 그의 목소리라면 그 무엇이든 다 괜찮은 공주였다.

 

 


"이 곳을 나가자."

"...."

"이 답답한 별궁을 나와 함께 벗어나자."

"...."

"응? 그리하자, 야화야."

 

 

 

 

 

 

 

 

 

 

 

 

 

 

 

왜 이렇게 찌통인 거지... 오늘은 내내 울다가 끝이 났네요 하하하하

아, 엄청 중요한 것은 아닌데 아니 중요한가... 어쨌든! 원래 생각해놓은 태형이 아버지 이름이 김두형이었는데 언제부턴가 김대형이라고 부르고 있더라구요.... 참 나도 정신 없지ㅠㅠㅠㅠ 그냥 김대형으로 할까 하다가 태형이랑 너무 비슷해서... 다시 바꿔놓았습니다! 갑자기 김두형이 툭 튀어나와서 놀라셨지요?ㅠㅠㅠㅠㅠ 그랬답니다...

근데 생각보다 전개가 엄청 느리네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러다 진짜 한 50까지 가겠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또또! 자랑(?)할 것이 있는데 저 암호닉분들이 늘었답니다!ㅎㅎㅎㅎㅎㅎ

너무너무 감사합니다ㅠㅠㅠㅠ 정말 50까지 늘어날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어찌나 행복한지ㅠㅠㅠㅠㅠ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암호닉♡

새싹  슈가코팅  자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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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꺄아악 빙탄상애 새싹이 선댓 남기구 읽어볼게요❤❤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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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2
암호닉이 점점늘고있네요 추4ㄱ하드러요❤❤❤작가님 글넘나잘쓰시는거수ㅜㅜㅜㅜㅜㅜㅜ아울었어요ㅠㅠㅠㅜㅜㅜ울야화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아휴....진짜 단한번도 아버지 뵙지ㅁ도못하고..아버지한테 흔한 딸소리 이름한번못듣고...얼마나 비참했을까......그리고 태형..쏘 스윗가이.......ㅡ앤드 샤이가이...난...난ㄴ...너와.!! 할때심장이간질간질.ㅡ.❤❤❤ 석진아 잘새각해..ㅡ니가잊고있는게있아아니사실 그게석진이가단순하고무뎌서라기보단...이미세상에없다고교육받은것을가지고 주어도없이이재와서 지켜야한다 기억해야한다 하는 왕ㅇ이 바부다..... ..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넘 잘보고가요 짜까님 싸룽해요 500편이ㄷ되더라도 암오케이 암해피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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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판다
우아 감사합니다>< 이번편이 좀 찌통이지요ㅎㅎㅎㅎㅎ 우리 야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꼬ㅠㅠㅠㅠㅠ 크 그때 태형이가 딱! 나타나서 저리 다정하게 토닥여주니ㅠㅠㅠㅠㅠㅠㅠ 그러게요 석진이는 또 얼마나 답답할까여... 아이고 저도 싸랑합니다ㅠㅠㅠㅠ 정말 감사해요ㅠㅠ 매번 이렇게 와주셔서 댓글도 달아주시고 제가 새싹님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씁니다!!ㅎㅎ 감사합니다♡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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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3
아이고..직가님...새벽에 글읽으면서 울다가 갑니다...잘읽었어요❤❤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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