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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틴/전원우] 평행선공리
w. 러트
나와 원우는 2년 전부터 동거를 시작했다. 둘 다 가진 것 하나 없는 평범한 대학생이라 원룸에 살다가 원우가 계속 서재로 쓸 방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방 두 개와 화장실 하나가 딸린 반지하 월셋방으로 이사를 왔다. 이사 후 자신만의 서재를 꾸린 원우는 내가 그의 서재에 출입하는 걸 싫어할 뿐만 아니라 내가 서재 문을 두드리는것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서재 문 두드리지 말고 용건이 있으면 전화를 하라고, 전화가 오면 내가 거실로 나가겠다고.
평소엔 누구보다 둥글고 순한 원우인데 서재 이야기만 나오면 날이 서는 원우의 말투에 마음이 상해 셀 수도 없이 싸웠지만 그럴때마다 원우는 늘 한결같이 강경했고, 단호했다. 저 방 안에서 도대체 뭘 하나 싶어 문 앞에 살금살금 다가가 귀를 대고 있어 본 들 들리는 건 하나도 없었다. 나에게 비밀을 만드는 것만 같아서 거실에 홀로 앉아 뾰루퉁해져있으면 눈치 빠른 원우는 어느새 내 옆에 앉아 내 손을 자신의 큰 손으로 덮고선 -이름아, 화났어? 라며 나를 끔뻑,끔뻑. 쳐다보곤 했다. 너에게 짜증을 내면 늘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그러다 서러워져 울면 내 눈물을 닦아주며 날 품에 안고는 울지마, 미안해. 하면서 곧 죽어도 서재를 보여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 너에게 화내기도 지쳐 그러려니, 하기까지 6개월이 걸렸다.
# 2017. 11.
"이름아, 나 김민규 만나러 밖에 잠시 나갔다 올게."
"민규씨? 알겠어. 언제쯤 올 거야? 오늘 저녁 같이 먹자 !"
"뭐 먹을까? 필요한 거 있으면 오는 길에 마트 들렸다 오고."
"음.. 오랜만에 닭볶음탕 해 먹을까? 어때?"
"니가 해 주는 건 다 맛있어. 뭐 필요해?"
"음.. 닭이랑.. 감자랑 떡만 사 오면 되겠다. 조심해서 갔다 와, 또 저번처럼 걷다 넘어지지말고. 알겠지?"
"걱정도 많다. 내가 유치원생이야?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올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약속이 생겼다며 밖에 나갔다 오겠다는 원우를 현관 앞에서 배웅하고 뒤를 돌아섰는데 살짝 열려있는 서재의 문틈이 보였다. 원우는 밖에 나갈 일이 생길 땐 무슨 일이 있어도 서재의 문을 잠그고 외출했다. 단언컨대, 결코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었다. 떨리는 손과 마음을 다잡고 문고리를 꽉, 쥔 후 팔을 뻗어 문을 앞으로 밀었다.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켜고 긴장감에 꽉 감은 눈을 서서히 떠 주위를 둘러보니,
벽이 온통 잿빛의 계란판들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바닥에는 수많은 약통들과 쏟아진 알약들이 질서없이 흐트러져 있었고, 얇은 이불 한 장이 덩그러니, 형편없이 구겨진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마구잡이로 주름진 이불옆에 놓여진 웃고있는 너와 내가 들어있는, 오른쪽 아랫부분의 유리가 깨진 액자가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혼란스러웠다. 서재가 아니었다. 책꽂이에 빼곡히 꽂혀있어야 할 책들은 온데간데 없고 책꽂이 위에는 곱게 접혀진 투약 설명서 여러장과 책꽂이 한켠에 위태롭게 기대어있는 책 두어 권,
뇌종양 100문 100답, 암과 싸워 이겼다, 암은 낫는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눈 앞이 하얬다. 힘이 풀린 다리를 겨우겨우 끌어 책 옆에 놓인 봉투를 열어 봉투 안의 종이를 꺼내펼쳤다.
성명, 전원우
주민등록번호, 960717 - 1xxxxxx
병명 및 임상소견, 악성 뇌종양 - 중추 신경계 질환 단계로 추정 (MRI + SPECT)
진료일, 2016년 2월 5일
발행일, 2016년 2월 9일
의료기관명 : ○○대학병원
담당의사 : 권순영 (인)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친구와 건강검진을 다녀왔다길래 결과를 물으니 -응? 아픈 곳 없대, 라며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짓던 2월 늦겨울의 너도, 개인 서재가 있어야 된다며 이사를 강력히 주장했던 일도, 이사한지 며칠 뒤 갑자기 달걀이 좋아졌다며 달걀을 몇 판씩이나 사 오던 것도, 내가 네게 속상해서 우는 것을 봤음에도 기를 써가며 서재를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이유도. 모든 실마리가 풀렸다. 동시에 우릴 겉돌던 해도 졌다. 캄캄한 앞날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모든 것을 혼자 짊어졌을 네가 먼저 떠올랐다. 그제서야 눈물이 났다.
아, 너는 이 자리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아파했겠구나, 마른 너의 몸에 수많은 알약들을 쑤셔넣어가면서 고통을 참았겠구나. 두개골이 쪼개지는듯한 통각에도 내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게 싫어서 네 손으로 직접 이 계란판들을 붙였겠구나, 너를 범람해오는 크나큰 고통속에서 몸부림 칠 때에 넌 책꽂이에 위태로이 기대어있는 책들의 제목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추운 방 안에서 외로이 신음소리를 참으며 울었겠지, 너무나도 아픈데 의지 할 곳이 없어 너와 내가 웃고있는 작은 액자만을 부서져라 붙들었겠지,
깨져있는 액자의 오른쪽 아랫부분 유리는 네가 그동안 버텨왔던 고통의 산물이겠지.
호흡이 가빠지고 쏟아져나오는 눈물로 인해 시야가 계속해서 흐려졌다. 한 손에는 부정할 수 없으리만큼 네 이름과 병명이 선명히 찍힌 진단서를, 다른 한 손에는 니가 아플때마다 의지했을 액자를 들고 주저 앉아 엉엉 울었다. 깨져있는 액자의 오른쪽 아랫유리에 엄지 손가락을 대 보았다. 서재를 안 보여주는 이유가 대체 뭐냐고, 여기가 너 혼자 사는 집이냐고. 답답함과 서운함에 네게 소리치고 화내고 울던 내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런 나를 보는 네 마음은 어땠을까, 생각해보니 아침에 먹은게 모조리 올라 올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없어 거의 기다시피 해 서재를 빠져 나와 침실로 향했다.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도저히 벗어 날 수가 없었다. 네 얼굴을 도저히 볼 자신이 없어 침실 문을 잠근 후 울고 또 울었다.
***
"이름아, 나 왔어"
평소와는 다르게 싸한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 하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원우는 집안을 두리번거리다 열려있는 서재의 문에 시선이 멈췄다. 신발을 내팽겨치듯 황급히 벗어던지고 서재의 문 앞에 선 원우는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었고, 그의 손에 들려있던 비닐봉지들은 힘없이 추락했다. 보이지 않는 액자와 진단서 봉투, 침실으로부터 옅게 들려오는 이름이의 울음소리. 원우는 앞으로 다가 올 일들에 절망이 섞인 깊은 한숨을 끌어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 한 방울이 조금 전 이름이 주저앉아 울던 자리를 또 한 번 덮어적셨다.
지독하리만치 어두운, 밤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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