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해가 고요히 내려앉은 눈밭 위에 떠오르면, 저절로 반사되는 따사로운 빛에 저절로 눈이 뜨이기 시작한다. 왠일로 루한보단 민석이 먼저 눈을 부볐다. 신발을 신어도 차갑게 달아오른 발이 아려왔다. 루한. 나 아픈데. 칭얼거릴 곳이 없자 입꼬리를 아래로 축 내려버린다. 항상 그렇다. 여기는 우리만의 고립무원이니까, 루한밖엔 말 상대가 없으니까. 다시 눈을 부벼본다. 흐릿하게 보이는 시선은 자꾸만 눈 앞에 남아 사라지지 않는다. 깨버리고 싶다. 하얀 성에가 낀 눈을 닦아 깨버리고 싶었다. 루한. 일어나. 민석은 얌전히 기다린다.
앉아서 턱을 두드려본다. 발을 콩콩 굴러본다. 루한은 고요히 자고있다. 벌어진 천장 틈새로 바람이 들어와 민석의 몸이 잠시 움츠러 들었다. 춥다. 어서 루한이 일어나서 자신을 안아주었으면 했다. 어쩌면 루한은 물빛에 갇혀 수온을 누리고 있지 않을까. 금붕어가 입을 뻐끔거린다. 수족관 안에 갇혀 큰 강을 고대하는 작은 물고기는, 몽상을 꿈꾼다. 루한. 너는 참. 민석의 손이 루한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자, 조금씩 움찔거리는게 눈에 선하다. 루한. 소리내어 불러본다. 일어나자. 그제서야, 민석이 배시시 웃는다.
항상 루한이 먼저 일어나는데, 민석은 풋 웃으며 많이 피곤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돌아보면 항상 루한이 솔선수범 움직인 것 같았는데. 오히려 자신은 산장 안에서만 돌고 돌았던 셈이였다. 루한. 오랜만에 민석의 입술이 루한의 볼에 닿는다. 부스스 정신을 차리던 루한이 배시시 미소를 띈다. 왠일이야. 루한의 손이 민석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귀엽긴. 민석도 웃고, 루한도 웃는다. 오로라가 올랐다가 사라진 하늘은 공허하게 푸르렀다. 쓸쓸할 정도로 부는 바람에 민석이 살짝 몸을 떤다. 추워? 응. 루한의 옆에, 민석의 작은 몸이 쏙 들어찬다.
"루한은 어떤 꿈을 꿨어?"
"한국에서 민석이랑 있던 꿈."
"음... 좀 안좋은 꿈이네."
"왜?"
"한국은 싫어. 여름처럼, 한국은 너무 싫어. 지독하게 더운 열병처럼 짜증나는기억밖엔 없잖아."
"...민석아."
"...어쨌든. 싫어."
민석은 단호하게 굴었다. 왜 우리가 공유했던 추억은 떠올리지 않는건데. 루한이 민석을 안으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다 괜찮을꺼야. 자꾸 부정적으로 군다며 따지고 싶지만, 여린 금붕어를 위해 루한이 참아야 할 장애물일 뿐이였다. 울지말고. 참 현실이란게, 억울하지. 결국엔 루한도 한숨을 쉬어버린다. 그만 일어나자. 루한은 애써 나오려는 성격을 꾹꾹 참으며 민석을 안아 일으켰다. 오늘따라 아이같이 구는 태도에, 루한은 한숨을 푹 쉬어버린다. 펑펑 속절없이 내리는 눈 같은 상황이라고, 루한은 비유했다.
간단히 아침을 먹였다. 열쇠의 원래 주인인 아저씨에게 생필품을 조달받지 못한게 2주가 다 되어버려서 이제 남은건 사과 몇개와 각종 채소들 밖에 없었다. 계란은 진작 다 먹은지 오래였고, 식빵이나 고기류도 이미 비워버리고 남아있지 않았다. 괜찮아? 루한의 손에 들린 사과를 가져가 입에 무는 민석은 왠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창 밖으론 밤새 오던 눈이 그쳤다. 이제야 천장에 임시로 붙어있던 푸른 방수포를 떼도 될 것 같았다. 하늘을 보기 위해 창밖을 살피던 루한이 몇번이고 되풀이해 읽은 책을 다시 보고 있는 민석을 향해 얘기했다.
"민석아. 밖에 눈이 그쳤어."
"진짜?"
"응. 오랜만에 한번 나가볼까?"
"응응. 나가볼래."
원래 봄이란, 항상 겨울이라는 고통이 지나고 나서 찾아오는 법이니까. 민석은 해사하게 웃으며 꼭지만 남은 사과를 쓰레기통으로 던지곤 목도리를 목에 둘둘 말았다. 식탁에 널브러진 책들을 제자리에 정리하면서, 루한은 마냥 신나있는 민석을 못말린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 예쁜 아이가, 지독한 열병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뭔가 씁쓸해졌다. 한낮인데 어두운 방. 민석이 좋아하는 책이였다. 밖에 눈이 상당히 쌓였어. 문을 살짝 열어본 민석이 신난다는 듯 크게 소리쳤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이 새하얗게 펼쳐져 있었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결정들이, 꼭 우리가 다른 행성에 와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어차피 둘이서 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해봤자 집 주변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갑갑한 여름의 공기보다는 훨씬 나았다. 광화문을 생각한다. 외국인들 사이에 껴서 처음으로 보는 동상들과 세차게 쏟아져 나오는 분수에서 동심으로 돌아가 물에 흠뻑 젖어버린 시간들. 여름은 더웠다. 문에서 내려오는 계단에 앉아 눈을 오소소 띄워버리는 민석의 뒤통수가 동글동글했다. 루한은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와 푸르다 못해 눈이 시릴만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김을 푹푹 내쉬었다. 민석은 눈에 정신이 파뭍혀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루한이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민석아."
"응. 루한?"
루한의 말에 민석은 눈속에 두었던 시선을 위로 들어야 했다. 입김이 호호 배어나오고 우거진 수풀과 나무들 속에 우리밖에 존재하지 않는 고립무원에, 첫 눈이 내리고 있었다. 왜그래? 민석은 방실방실 웃으며 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눈을 한가득 퍼올려 자신의 위로 훌훌 털어버린다. 눈이 더 많이 내렸으면 좋겠다. 순진한 아이같은 모습에, 루한은 핏 웃어버리고 말았다. 잘게 부서진 눈이 민석의 머리를 타고 후드득 흘러 내린다. 아코코. 눈가에 들어갔는지 민석이 발개진 손으로 여린 살을 세게 비볐다.
"벌써 봄이 왔어."
"...진짜?"
"그럼. 봄이 왔어. 이제 겨울은 사라질꺼야."
봄이 왔다고 했다. 그 증거로 루한은 민석과 마찬가지로 수북이 쌓인 눈송이들을 손에 한가득 얹어와 마치 어린 아이가 상장을 내보이듯 자랑스럽게 웃었다. 모순 같다고 느껴질 지라도, 민석은 가만히 웃어주었다. 겨울과 봄. 겨울은 봄이였고, 봄은 겨울이였다. 차가운 세상 위로 햇빛은 매우 따사로웠다. 하지만, 겨울과 봄의 경계선에 선 세상은 아직도 찬 바람을 훅훅 내뿜고 있었다. 아직은 끄트머리에 닿아있지 않아서, 루한과 민석은 상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윈터 스프링. 지독히도 추운 겨울날의 한송이 꽃.
"그러게. 벌써 봄이 오고있어."
"꽃도 곧 피겠다."
"그러게. 예쁠꺼야."
창문 너머로 루한이 채워둔 꽃병이 보인다. 하얀 눈꽃들이 우겨지듯 눌러진 초르스름한 꽃병. 완연한 봄은 아직 아닌 것 같다고, 루한은 생각했다. 벚꽃같은 눈을 민석은 한번 더 쓸어본다. 그러면 손 안의 온기로 녹아 사르르 사라진다. 눈이 녹는다. 한참 후에, 꽃병 안에는 말간 물만이 남아 찰랑이고 있었다. 눈이 평생 녹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항 안에, 눈이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 스노우볼 처럼. 위 아래로 끊임없이 뒤집어서 절대 멈출리가 없는 눈들이 펑펑 쏟아지는 세상. 한국에서 보았던 다양한 모양의 스노우볼이 루한의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어항 안에 눈이 내린다. 루한은 생각한다. 밀폐된 공간에 흩날리는 하얀 가루들을 바라보며 가지 못할 곳을 상상해본다. 루한. 이거봐봐. 눈이 뭉쳐지지 않아. 민석은 연신 신기한듯 눈들을 조물거리며 루한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차갑게 달아오른 조그마한 손을 들어 꼭 잡아준다. 민석. 춥지 않아? 루한의 걱정스러운 말에도 고개를 도리도리 지으며 동글동글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민석이였다. 어쩌면, 지독한 여름보다는 포근한 겨울이 나을지도 몰라. 루한의 손을 꼭 잡으며 민석은 중얼거렸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거야. 루한은 대답대신 웃음으로 웃어보였다.
"아저씨한테 얘기해서, 스노우볼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해볼까?"
"갑자기 그건 왜?"
"그냥. 우리랑 너무 닮아있는 것 같아서."
"어... 기왕이면 안에 산타 있는걸로 부탁해봐. 난 산타가 있는게 좋아."
루한의 말을 민석은 잘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눈과 노는데 집중을 했다. 가만히 민석의 뒤로 다가간 루한은 팔로 민석을 감싸 안아 몸을 좌우로 살짝씩 흔들었다. 마치 온 지구가 스노우볼 안에 놓여있는 것 마냥 구는 두사람은 마치 어항 속에서 서로에게만 의지하고 있는 느낌이였다. 지금쯤 한국은 더울까, 아니면 추울까. 여기는 매우 춥다. 그리고 두사람을 매우 우습게 취급했던 나라의 사람들도 춥기를 바랬다. 한기가 느껴지도록. 아주 고통스럽게. 해선 안될 생각이지만, 민석의 볼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루한은 기도했다. 민석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얼음장 처럼 차가웠다.
간단한 저녁을 먹이고 아저씨와 연락을 취하고 난 후에, 책을 같이 드문드문 읽다가 잠든 민석을 재운 루한은 그 옆에 가만히 누워 색색 숨을 뱉는 몸을 토닥였다. 그거 알까. 너는 푸른 해원을 좋아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보여. 그저 나와 같은 동상이몽을 꾸기 위해서 단순한 호기심에 빠져버린게 아닐까? 루한은 잠든 민석의 뺨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오로라가 하늘 위에 펼쳐진건지 온 세상이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한국을 생각한다. 우리와는 판이한 태도를 보였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시간은 지나가고, 우리가 신경써야 할 사람들은 모두 우리를 신경쓰고 있지 않으리라. 민석.이제 수면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도, 공기가 금붕어를 향해 다가오진 않을꺼야. 루한의 입가에 짐짓 미소가 떠올랐다. 태피스트리 담요가 슥슥 쓸렸다.
수면에 가라앉은 너를 구해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너는 너의 손을 잡자마자 악력으로 나까지 가라앉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너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부둥켜 안고,끝까지 내려가 바닥을 맛보려 했다. 중간에 너는 말했었다. 이렇게 가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냐고. 물살을 가르며 빠르게 낙하할때, 너를 안은 나는 대답한다. 나는 너만 있으면 수면의 바닥도 괜찮다고. 푸르스름한 바닷빛 사이에서 눈물이 부그르르 솟아올랐다. 괜찮다. 어차피, 너는 나의 손을 잡아 주었으니, 그걸로 족한다.
흐느끼는 소리가 난다. 민석이다. 루한의 품에 안겨있던 민석이 으응 거리며 우물거린다. 잠을 이루지 못하던 루한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민석의 상태를 확인해본다. 루한의 옷자락을 꼭 잡으면서 계속 허우적 거리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민석의 작은 몸을 토닥인다. 루한은 민석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생각했다. 이 작은 아이가 무슨 꿈을 꾸느라 이렇게 겁에 질려 울먹일까. 괜찮아. 초연하게. 초연하게 하면 되는거야. 루한의 따뜻한 온기가 민석을 감쌌다.
"민석아. 울지마."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린다. 어떨까. 너는. 루한은 담요로 민석을 둘둘 말으며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하늘에선 천둥이 울리고, 눈을 펑펑 쏟아낸다. 봄이 와. 가만히 닫혀있던 루한의 입에선 봄 이라는 단어만이 계속 맴돌았다. 하지만, 아직 그것을 판단하기엔 너무 이르다. 데면데면한 시간에 대한 모순을 짚어주자. 식탁에 올려두었던 머그컵이 속이 비어가며 제 온기도 함께 잃어갔다. 겨울과 봄은 너무 많이 닮아 있었다. 눈이 온 흔적들은 창틀에 그대로 쌓여 차가운 공기에 이내 얼어버렸다. 뭐 어때. 방수보로 막힌 천장을 물끄러미 보던 루한은 어깨를 으쓱 했다.
"민석아. 꽃이 그쳐간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벌어진 천장 틈을 가만히 보던 금붕어는 푸른 해원을 그리워 하는 금붕어의 눈물을 가만히 닦아주었다. 루한은 천장으로 어스름히 들어오는 밤의 빛을 가만히 보며 민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금붕어는 울면 희망을 잃어버린다고 했어. 어디서 지어냈는지 모를 말로 자고있는 민석을 위로하며, 루한은 스스로를 달랬다. 괜찮지도 모를꺼야. 어항 안에서는 나도, 너도 제 3자의 입장에 서서 우리의 행복만을 바라고 있으니까. 절대 당사자가 되서 손가락질 따위 받지는 않겠지. 루한의 손에 이끌린 태피스트리 담요가 서로를 감싸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순간에도 그렇게 붉은 달은 깊어만 갔다.
그리고 돌아오는 박가네 김형제들
어항으로는 오랜만입니다
이 시리즈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현재글 [EXO/루민] 어항-3
12년 전공지사항

인스티즈앱 ![[EXO/루민] 어항-3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d/2/8/d28660e9e6dbd737036ee0b1e34eff74.gif)
내 친구 저점매수 성공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