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 '11년차 남자친구 김민규에게'와 이어집니다.
11년차 남자친구 김민규가 너에게
![[김민규/단편] 11년차 남자친구 김민규가 너에게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6/06/19/0/0f95e44342defdf9c25f793d05e7408b.gif)
안녕 여주야, 내 여주야. 나 민규야. 잘 지냈어?
미안해, 염치없이 잘지내냐는 이런 말 해서 정말 미안해.
너 없는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사는게 사는게 아닌 것 같았어.
회사 사람들이 다 무슨일이 있냐고 묻고, 팀장님한테도 많이 혼났어. 병가내고 회사도 몇 번 빠지고, 진행하고 있던 프로젝트에서도 나왔어.
근데, 여주야, 나 그런거 이제 아무상관없어. 회사에서 짤려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더라도 상관없어.
너가 주는 사랑이 너무 익숙해서 소중한 줄을 몰랐나봐. 11년간 난 연애하면서 사랑에 목말랐던 적이 한번도 없어.
생각해보면 넌 첫만남부터 날 분에 넘치게 사랑해줬어. 미안해. 이 사실을 이제야 알았어.
고등학교 1학년 때, 난 1등으로 입학했다는 사실에 숨이 막혔어. 친구들도, 선생님도, 나를 김민규가 아닌 1등으로 생각했고, 그에 걸맞는 행동을 요구했으니까.
가끔은 차라리 적당히 공부해서 평범하게 살고싶다는 생각도 했어. 그런데 이미 나에게 쌓인 기대치가 너무 커서 그것들을 모조리 무너뜨릴 용기도 안나더라. 그래서 항상 미친듯이 공부하고, 결과를 바라고,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고 살았어.
내 주위에 있는 친구들이 날 우러러보고, 누군가는 대단하다고 칭찬도 해줬지만, 그 모든게 날 짓눌렀어. 당시엔 너무 힘들어서 나쁜 생각도 종종 했었어.
그랬던 나를 제대로 살게 해주고, 내가 다시 건강해지게 해준 사람이 바로 너야.
날 아무 조건 없이 좋아해주고 날 대함에 있어서 앞과 뒤가 같았던 사람은 너가 내 인생에 유일했어.
북적북적한 등굣길에 내 앞에 나타나 배시시 웃으며 잘잤어, 민규야? 하는 너가 처음엔 부담스러웠을지도 몰라. 그냥, 너도 언젠가는 다른 아이들처럼 김민규도 별거 없네, 하고 등돌려 떠날 것 같았거든.
상처받기 싫어서 일부러 너의 고백에 제대로 된 대답도 해주지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너가 나에게 지어주는 미소가 너무 예뻐서 내심 너는 한결같기를 바랐어.
그런데 내 바람대로 너는 1년간 지치지 않고 나를 계속 좋아해줬어.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수고했다고 우리반까지 달려와 어깨를 두드려줬고, 매점에 가면 꼭 내가 자주 마셨던 음료수를 사와 같이 먹자고 말해줬고, 내가 기운이 빠져있으면 나보다 더 불안해하면서 조심스레 힘내라며 걱정해줬어. 제멋대로 나에 대해 기대했다가 실망해 떠나는 사람들과 넌 달랐어.
그리고 날 쳐다보다가 얼굴이 발그레해져선 떨리는 목소리로 민규야, 나 너 좋아해. 라고 말하는 너는 참 사랑스러웠어. 그 때 마다 대답하지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는 나도, 나도 널 좋아해, 여주야- 라는 말을 몇번이나 외쳤는지 몰라.
야자를 하다가 면학실에 단 둘이 남아있을때면 심장이 쿵쿵대서, 이 소리가 너에게 들릴까봐 불안했어. 너에게 관심이 없는 척 하면서도 너가 나가는 대회가 있으면 나도 따라나갔고, 주변에서 너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관심 없는 척 하면서 귀를 기울였어.
널 좋아하면서도, 너가 돌아서면 어쩌나 싶어서 내 마음을 계속해서 부정하고, 너와 더 깊은 관계가 되지 말자고 생각하면서 널 밀어냈어.
그런데, 1년간 다져온 내 다짐을 모두 무시하고 널 안아버린 건 정말 잘한 일이야. 네 많은 고백 중 왜 하필 그날의 고백을 받아주었냐고 묻는다면, 그냥, 내가 사람에 대해 쌓고있던 벽이 그 순간 다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였거든. 어렸을때부터 쌓아온 그 큰 담벼락이, 너를 만난 이후로 계속해서 허물어지더니, 그 추웠던 때, 너가 날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 완전히 녹아내렸어.
여주야, 나도 널 안을때 느꼈던 네 어깨, 갈피를 못잡고 허공에서 헤매이던 손, 다 기억나. 나도 너만큼, 널 좋아하고 있었어.
너 덕분에 내 고등학교 생활은 행복했어. 누군가 뒤에서 욕하거나 손가락질해도, 학교에 완전한 내 편인 너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버틸 수 있었어.
억지로 꾸역꾸역 머리에 집어 넣던 공부가 너와 함께라면 즐거웠고. 도서관 식당에서 먹는 밥이 그렇게 맛있는 줄 처음 알았어.
도서관이 닫을 때 까지 혼자서 공부하다가, 혼자서 버스정류장으로 발걸음을 돌리면 느껴지는 그 공허함이 너무 싫었어. 그 탓에 버스정류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너와 함께한 이후부터는 어디든지 행복했어. 도서관도, 울렁거리도록 싫던 버스정류장도.
비록 처음 시작은 소중한 너가 떠날까 맘졸이는 불안함이 컸지만, 갈수록 나는 너를 온전히 믿고 기댈 수 있었어. 재미없던 내 인생에 너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난 처음으로 인생이 살만하다고 느꼈어. 내 친구들도 하나같이 그랬어. 너 여자친구 만난 후로 사람이 달라졌다고, 애가 밝아졌다고. 난 그럴때마다 우리 여주가 그만큼 착하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자랑했어,
너 고 2때 축제나갔었잖아. 반 친구들이랑 약속했다고 어쩔 수 없이 나갔다고 한거.
나 그 때 진짜 신기한 경험 했었다? 너희 반 여자아이들이 열댓명정도 단체로 나왔었잖아. 인원이 많고 그랬는데, 내 눈에 너만 빛나는거야. 스포트라이트가 너에게만 향해있는 것 처럼. 내 눈이 이상한가 싶어 몇번 다시 쳐다봤는데도 너만 보였어. 너가 제일 예뻐서 그랬나봐.
평소였으면 진저리쳤을만한 귀여운 옷을 입고 춤을 추는 너가 자기 전에도 생각 날 만큼 귀여웠어. 나중에 노래방가서 그거 춰달라고 몇번이나 부탁했는데 너 한번도 안해줬잖아. 그래서 너한테 괜히 삐졌던거 생각나?
너는 몰랐겠지만, 나 그때 방송부 친구한테 간곡히 부탁해서 장기자랑 영상 얻어서 보관했었어. 지금도 아마 있을걸? 내 컴퓨터 폴더에 아직 있을거야. 대학교가서 너랑 꼭 다시 봐야지, 생각했었는데. 너가 싫어할 것 같아서 참고 참다가 결국엔 못보여줬다. 나중에 만나면 그거 갖고갈게. 10년 전의 김여주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너 눈으로 봐봐.
수능 끝나고, 아주 망한 것 같다며 의기소침해져있는 널 달래서 처음으로 찍은 스티커 사진, 아직도 내 지갑에 붙여져있어.
전날에 운동장에서 펑펑 울고 난 뒤라, 얼굴은 팅팅 부어있고 둘다 웃는게 웃는게 아닌 것 같은 표정이긴 한데, 나름 귀여워. 아. 이 때 사진 보니까 갑자기 생각났는데, 너 우리학교 교복 되게 잘 어울렸어. 학교에서 너 마주칠때마다 그생각했는데, 한번도 말해준적이 없네.
너 3년동안 넥타이 매는 법도 제대로 몰라서 선도부한테 맨날 걸렸잖아. 왜 우리학교만 아직도 이런 구린 넥타이냐고 툴툴대고. 그래서 내가 자주 매줬었는데.
넌 그럴때마다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지만, 난 아침마다 너 얼굴을 빤히 쳐다 볼 수 있었으니까 좋았어. 그래서 너가 넥타이 매는 법을 배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했었어. 결국, 내 바램은 이뤄져서, 졸업식날 네 넥타이도 내가 매줬지.
아, 맞다.
이제와서야 말하는 거지만, 부모님은 내가 외국에 있는 대학교를 가길 원하셨어. 그 때 난 처음으로 부모님한테 큰 소리를 냈었어. 내가 언제 엄마 말 안들은 적 있냐고, 그러니까 이번 한번만 제발 내 소원대로 하게 해달라고 빌었어.
부모님은 끝까지 내 의견을 들어주시지 않았지만, 내가 이겼어. 그냥 원서를 안냈거든. 접수 한 척 하고, 떨어졌다고 거짓말했지, 뭐. 이유는 딱 하나였어. 너랑 계속 함께있고 싶었거든.
너랑 같은 학교를 가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자주 볼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어. 그만큼 너와 떨어지는게 무서웠고, 그래서 너와 이웃한 학교에 합격했을때는 정말 뛸 듯이 기뻤어. 집에서는 비록 인정해주지 않았고, 지원해주지 않는다고 단언하셨지만, 너랑 20대의 시작을 함께 할 수 있단 사실로도 나는 충분했어.
대학교에 가더니, 원래도 예뻤던 너가 훨씬 더 예뻐져서 너무 불안했어. 고등학교때도 사실 너 예쁘다고 좋다는 애들 꽤 있었단 말야. 그때마다 내 여자친구한테 신경끄라고 으르렁거리고 그랬지.
고등학교때도 그랬는데, 대학교가서 너한테 기분나쁘게 치근덕대는 남자가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했어. 그래서 일부러 너희 학교에도 자주 찾아가고, 승관이한테 너 잘부탁한다고도 그랬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참 어리기도 했고 너한테 미안하기도 하다. 치기어린 김민규의 패기였다고 생각해줘.
공강시간에 만나 너가 어떤 복한한 선배가 과제에 제대로 참여를 안하네, 승관이가 과대를 하네, 엠티에 가서 동기가 필름이 끊겼네 하며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말하는게 얼마나 귀여웠는지 몰라.
우리가 결혼해서 만약 딸을 낳는다면, 그 아이도 너처럼 나에게 달려와 작은 입을 오물대며 말하겠구나 싶었어. 난 널 보며 자연스럽게 우리의 미래를 상상했어. 10년 후의 내 옆에도 너가 있다면 난 정말 행복할거라고. 그리곤 막연하게 당연히 그럴거라고 생각했었고. 나는 그렇게 습관적으로 너와 함께있는 내년을, 내후년을, 결혼 후를 상상했어.
우리 5주년에 같이 일본여행갔었잖아, 몇 살 때지. 23살이겠구나. 제주도 가는 비행기는 타봤어도, 진짜 다른나라로 가는 비행기는 처음타본다고 너 엄청 신나했는데. 면세점에서 화장품 살 돈을 아껴 주변 사람들에게 사 줄 선물 리스트를 추가해가는 널 보며, 너같이 착하고 예쁜 아이가 어떻게 나에게 왔을까, 세상엔 참 알 수 없는 일이 많다고 생각했어.
내가 초콜렛 좋아하는 걸 기억해서, 나 몰래 쇼핑백 잔뜩 초콜렛을 사와 내 가방에 몰래 넣어둔 널 보면서, 넌 내게 너무 아까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에 비해서 나는 너무 부족했지만, 너에게 조금이려도 더 어울리는 남자가 되려고 많이 노력했어.
예전같았으면 내 일이 아니라고 무시했을 여러 사람들을, 여주라면 어땠을까-하고 다시 쳐다보게 됐고, 너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며 좀 더 많은 곳에서 내 행복을 찾게됐어.
여주야, 나는 11년간 너와 함께한 매 순간에 성장했고, 행복했어.
그리고 너를 힘들고 지치게한건 시간이 아니라 나야. 내가 나빴던거야.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지금 이 회사에 들어오고, 너는 그 1년 뒤 취직을 했어. 너와 사귄 이후, 처음으로 겪는 거리감이여서 너무 낯설기도 했지만, 살아가려면 이 상황에 적응해야된다는 생각밖엔 없었어. 그래서 비정상적으로 바쁜 내 일상에 익숙해졌고, 주변을 둘러볼 여유조차 잃었어. 너와 11년을 함께 하면서 꼭 1등이 아니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배웠는데도, 이 회사에서 인정받으려면 나를 버려야한다고 생각했어. 눈 앞에 닥친 이 일들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내가 너무 한심한 사람이 될 것 같았거든.
그렇게 정신없이 일에만 빠져 살고 있는데, 승관이한테 연락이 오더라. 요즘 잘 살고 있는거 맞냐고 묻더라. 왜그러냐고 물었더니, 여주가 요즘 힘들어 보인다고, 제대로 살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아보인대. 그래서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나 싶었대.
나는 10년 간 너 옆을 지켜왔으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걸 모르고 있었어. 내가 사랑하는 것 만큼 너도 나를 사랑해주고 있었고, 내가 너에게 의지하는 만큼 너도 나에게 의지하고 있었다는 걸. 그런 내가 너보다 다른 무언가를 우선순위에 두고 있었던거야. 승관이가 여주가 내색은 안하지만 많이 외로워하는 것 같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는데, 가슴이 덜컥 내려 앉더라.
마음 한켠으론 점점 외로워하고, 내게 지쳐가는 널 알아챘으면서도 너는 그래도 아파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었나봐. 나는 어렸을때보다 나아진 것 하나 없는 모습으로, 아니 오히려 더 영악해져서는 너에게 기대려고만 했어.
너가 혼자 밥먹는걸 가장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 점심시간에도 일을 한답시고 회사 밖으로 나가질 않아 너가 밥을 묵묵히 입에 욱여넣도록 만들던, 항상 부산스럽도록 챙기던 너의 생일에 여지껏 사준 선물중 가장 비싸지만, 가장 정성은 들어가있지 않던 선물을 건네 그간의 무관심을 무마하려던 내가- 그 김민규가 원망스럽고 사무치도록 싫었어.
이런 내 모습에도 불구하고 항상 씁쓸한 미소를 숨기고 풋풋했던 열일곱, 그때와 똑같은 미소를 지어주던 너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그 모든 생각은 하나로 귀결되더라.
너는 나에게 너무 아까운 여자다. 너무 예쁘고 착한 널 묶어두기에, 나는 너무 부족한 사람이다.
이런 생각이 내 머리를 온통 지배해서 네 얼굴을 감히 볼 수가 없었어. 내 바닥을 본 뒤, 다시 너를 온 마음으로 좋아하기가 두려워졌고, 예전처럼 너 눈을 보고 사랑한다고 말하기가 겁이 났어. 내 주제에 맞지 않는 짓이라는 생각을 했거든. 너를 생각하는 빈도는 훨씬 많아졌지만 너에게 표현하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너의 얼굴에 자주 스쳐가는 외로움을 보며 내 자신을 더욱 타박하기만 했어. 그게 널 더 힘들게 할 줄 알았으면 차라리 내 모든 생각을 털어버리고 그냥 너를 안고 마음껏 울 걸 그랬어.
한 달 전, 너에게 편지를 받은 후 심장이 떨어지는 듯 했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어. 너가 행복하려면 이 길을 택해야겠지, 넌 나한테 너무 아까운 여자니까 놓아주는게 맞는거겠지, 싶었거든. 그리고 너가 먼저 날 정리해줬으니, 나는 어찌됐든간에 남겨진 사람이였으니까- 내가 더 많이 힘들어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여태 그래왔듯 일에 미쳐살다보면 피어오르는 너의 추억을 모른 척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 근데 여주야,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더라.
너는 내가 없는 동안 나를 지우며 잘 살고 있어? 너 말대로, 내 말대로, 내가 정말 잔향처럼 남아 너를 가끔 괴롭힐까? 너는 그런 나를 잘 지워내고 있어? 나는 그러질 못하겠어.
내가 다니는 길, 음식점, 버스, 심지어 내 옷에 조차 너의 추억이 스며있어서, 내 일상 한군데도 빠짐없이 묻어있는 너를 주체하지 못하겠어. 가끔 시간을 내서 길을 걷다보면, 의도한 것도 아닌데 너와 함께 걸었던 길이더라.
그리고 우리가 자주 갔던 가게들을 보며 여기서 여주가 뭘 했었는데. 여기서 여주가 나한테 뽀뽀해줬는데. 여주가 여기 음식 되게 좋아하는데. 이런 저런 너에 관한 생각을 하다가, 그 모든 회상이 과거형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세상이 가라앉듯 침울해져버려. 너와 만나던 시간이 비어버리니까 쉴 틈도 붕 떠버려서 뭘 해야될지 모르겠어서 공허하게 시간을 보내.
회사 선배가 어느날에 멍하니 탕비실에서 커피를 타는 날 보더니 요즘 무슨일 있냐고 묻더라. 별 일 없다고 얼버무리는데 그 선배가 요즘 내가 알맹이가 빠져있는 것 같대. 껍질만 겨우 살아서 돌아다니는 사람 같대. 옛날 친구들을 만나면 어김없이 너와 잘지내냐고 묻고, 헤어졌다니까 놀라면서 왜그랬냐고 물어. 나때문에, 라는 네글자로 말을 줄이고 술만 먹었어. 애들이 괜찮냐고 물어서 당연히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니까, 절대 안믿더라. 널 만나는 동안의 나는 행복해보였는데, 너와 헤어진 이후의 나는 널 만나기 이전의 나보다 못해보인대.
나는 이렇게 살아. 너는 괜찮은가 모르겠어. 난 멍해있는 와중에 너가 생각나면, 너를 지우려는 의지도 생기지 않아서 너와의 좋았던 추억을 마치 지금인마냥 행복해하며 떠올렸어. 사실 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도 너한테서 내가 쉽게 지워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얼마전에 우리 고등학교때 선생님을 뵈러 학교에 갔어. 왜, 우리 3학년 때 문학에다가 부장이셨던 선생님 기억 나지? 그 김에 우리가 썼던 면학실을 들렀어.
아직도 너랑 내가 어디에 앉았었는지 기억이 나서, 그 자리에 다시 앉아봤어. 그때보다 키가 컸는지 책상이 많이 낮아진 것 같더라.
너랑 나 사이 칸막이에는 아직도 우리가 했던 낙서가 남아있어. 귀여웠지, 우리. 민규 하트 여주.
그 낙서는 우리가 졸업한지 8년이 지나도 약간 바랬을 뿐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어. 그런데 우리는 닳고 닳아서 결국 서로를 떠나고야 말았구나.
교복을 입고 서로를 좋아하던, 대학의 로망을 함께하던, 사회의 불안을 나누던 우리가 결국 과거에만 남아있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져서 그 낮은 책상에 엎드려 엉엉 울었어.
미안해, 여주야, 너가 날 접게 만들어서 미안하고, 널 외롭게 해서 미안하고, 그냥 내가 다 미안해. 11년 동안 함께한 시간을 이렇게 끝낼 마음을 먹게 해서 정말 미안해. 착한 너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고민했으며, 오랜시간 혼자서 마음 졸였을거란걸 알아. 너를 그 외로운 공간에 혼자 있게해서 미안해.
그런데, 여주야, 나는 너가 ‘추억’이 된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어. 넌 나한테 과거였던 적이 없으니까. 내 옆에는 너가 있었고, 내일도 너가 내 옆에 있을거란 생각을 했어. 내가 오만했고 틀렸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어.
너를 더 이상 나의 여주라고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절망스러워, 너는 나의 행복을 위해 날 놓아준다고 했지만, 나는 너 품에 있을때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어. 내 여주야. 11년간 너에게 사랑을 받는 행복함이 얼마나 큰 지 배웠으니, 이젠 너가 그 행복을 알게 해주고싶어.
만약 너가 싫다면, 내가 없어야 행복할 수 있다면 너를 기꺼이 놓아 줄 수 있어. 억지로 나에게 돌아와달라고 하지는 않을게.
그래도, 이거 하나는 알아줘. 난 널 절대 못잊을거야. 너가 곳곳에서 피어올라 나를 괴롭혀도 감히 지우려는 노력조차 하지 못할거야.
그만큼 넌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고, 앞으로도 너만큼 소중한 사람은 내 인생에 절대 없을거야.
원래 사람은 처음을 잘 못잊는대.
너는 내게 첫사랑이고, 처음으로 내 사람이라고 느꼈던 사람이고, 처음으로 날 울게 하고 웃게하는 사람이였어. 내 인생에 너무 많은 처음이 너라서 난 널 잊기 힘들 것 같아.
내가 이기적이고 못된거 알아. 하지만, 여주야, 난 여기 항상 있을테니까, 너가 언제든지 돌아오고 싶다면 주저없이 날 찾아줘. 열여덟의 김민규로 돌아가 널 기다리고 있을게.
사랑해, 내 여주야.
보고싶어.
미안해.
사랑해.
![[김민규/단편] 11년차 남자친구 김민규가 너에게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6/06/25/21/fff8f3d8c4aa645352bf8ef7c92d0c6f.jpg)
-
작가입니다 . 텀이 너무 길었죠,, 제가 워낙에 글을 느리게 쓰고, 또 오래 두었다가 계속 수정하는 타입이라 ㅠㅠ
하튼 이런 망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좋은일 가득한 하루 되시길 바라요.
두시간 뒤에 일어나야하는데 어쨌든 자러 갈게요 .감사합니다 :)
아,,맞아! 브금을 넣어보았어요. 잘 맞았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석민이글은 시리즈물이긴한데, 에피형식으로 진행될거니까 부담감없이 가끔 심심하실때 들러 읽어주시면 감사할것같아요,헤헤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