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파찌
"스탠바이! (Stand-by)"
카메라 라이트로 가득한 작은 세트장에서 먼지마저 둥둥 가라앉는 게 보일 때쯤, 사인이 내려졌다.
"큐!"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입담 실력 좋기로 유명한 진행자가 노련하게 시작을 뽐낸다. 주말 이른 저녁 시간을 맡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평소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스타들의 이야기를 안방에 앉아 마치 대화하듯 접하며, 그들의 삶이 우리의 것과 다름 없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일상의 신선한 재미가 환기된다'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는 무슨. 전부 좆 까는 소리다. 프로그램은 작가들이 집필한 시나리오대로 흘러간다. 가령 녹화 시작 전, 모든 스탭들이 받는 큐 시트(Cue sheet)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이 프로그램에 투입된 작가만 해도 여섯이다. 그 여섯 중 하나인 나는 투입된 지 얼마 안 된 신입 작가로 본래는 영화 쪽을 꿈꾸다 돌연 길을 바꾼 사람이었다.
여자가 밥 벌어 먹고 살기 힘들다는 업종을 선택하면서도 끈을 놓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 나는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을 극도로 부인할 정도로 싫어하는 걸 쥐고 있을 위인이 아니었으며, 험난한 세상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기적이어도 괜찮다는 마인드를 가진 썩어빠진 현대인이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무엇이든 한 번 빠져들면 극도로 집중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 성취감을 느끼는, 조금은 괴랄한 악취미였다.
그런 내가 방송국을 다니며 엔딩 텔롭에 〈○○○> 이름 석 자를 남긴다는 게 얼마나 큰 자부심인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많은 역경을 디디고 일어설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다. 누구에게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없어 꺼려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오늘의 게스트!......"
왜 말할 수 없느냐고 궁금해한다면 그 이유조차 편하게 툭 터놓고 깔 수가 없다.
"월화 드라마 시청률 40%의 신화, 최승철 씨 나와 주셨습니다!"
세트장 밖에 놓인 조명과 카메라의 불빛. 작가진들과 스탭들, 감독들이 바라보는 한 공간에서 유독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저 사람은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가수로 데뷔하여 1집부터 대박을 터트린 뒤, 돌연 드라마 주연부터 조연까지의 모든 자리를 씹어먹고 있는 거물이었다.
"안녕하세요, 최승철입니다."
더 덧붙이자면, 내 고등학생 시절 첫 사랑이었다. 최승철과 결혼하겠다며 TV 붙잡고 엉엉 우는 애들과, 그런 것쯤은 무시하고서 수업에 집중하는 애들이 있었다면 난 후자였다. 참 독하게도 샤프를 붙잡았었다. 방송국 입사해서 최승철을 봐야 하니까. 물론 대학교에 들어간 후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시간표를 망친 탓에 억지로 들어야 했던 강의 하나가 유독 마음에 들었고 영화계 진출을 결심하게 됐다. 당연 전공도 영화 연출로 선택했다. 졸업 때 단편 영화 제작한다고 그 고생만 안 했다면 선택이 바뀔 일은 영영 없었을 거다. 어쨌든 최승철 한 명의 여파는 상당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요즘 주위에서 난리일 거 아니에요. 승철 씨한테 연락오는 여배우도 많을 거 같은데."
"그럼요. 많죠. 걸그룹 중 한분께도 연락받은 적 있었어요."
"아니, 그래서요?"
"호감을 먼저 표현해 주셨는데 제가 거절했죠. 아무래도 지금은 일에 몰두해야 하니까요."
"에이, 다들 쉬쉬 연애하고 그러던데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을까요?"
"워낙 살아남기 힘든 곳이기도 하고, 제 팬분들이 계시니까요. 저는 그걸로 만족합니다."
최승철의 입가에 웃음이 만연했다.
"미친놈..."
황홀경에 빠져 있는 다른 작가들의 수근 거림 틈에서 나의 비속어가 유난히 돋보였다. 나밖에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는지 선배들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뇨, 친구요." 그제야 내게서 시선들을 거뒀다. 이렇듯 '승행설'과 '인답승'을 유행시킨 최승철을 욕하는 건, 빨간 국기를 흔들며 강남 한복판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찬양하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 물론 나도 한때 인답승이었다. 이제야 알맹이를 보게 됐을 뿐.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인생의 답은 승철이야'를 주장하던 사람 중 하나였지만 최승철의 환상을 파괴시키는 면모에 기겁해 팬 인생을 마감시킨 지 오래였다.
"아, 근데 승철 씨. 우리 작가들 중에서도 승철 씨 팬이 있어요."
"그래요? 어떤 분이시죠."
"저기, 우리 신입 작가인데. ○○ 씨, 이리 나와 봐요."
자연스럽게 돌아오는 카메라는 K.S(Knee Shot)로 나를 담았다. 잠깐만, 이런 거 대본에 없었잖아.
"예쁘게 생겼죠. ○○ 씨가 고등학생 때 그것도 썼다며. 팬픽? 승철 씨 아이돌로 활동할 때 말예요. 잠깐 둘이 악수라도?"
카메라가 나를 담고 있는 도중 당황한 얼굴을 보일 수 없어 애써 웃었다. 웃고 웃으며 다가오는 최승철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나 우리 신입 작가 부끄러움 타는 건 또 처음 보네. 역시 진성 팬인가 봐. 어때요. 직접 보니까?"
나는 이를 악 물었다. 빨개진 내 얼굴을 당황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승철은 프로답게 젠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최승철이 내게 인사를 한다. 나는 표정 관리에 실패해 선배들 틈 사이로 숨어들었다. 녹화장은 소소한 웃음 소리로 가득 찼고 별탈 없이 이어졌다.
이윽고 두 시간을 넘긴 녹화가 끊겼다.
"녹화 쉬는 동안 테이프 갈고 갈게요!"
잠시 휴식 시간이 생기자 온몸의 긴장감이 빠졌다. 김 빠진 콜라마냥 밋밋해진 내 표정은 인생무상을 깨달은 성인 같았다. 최승철은 흐트러진 머리 모양새를 다잡기 바빴다. 끝내주는 얼굴은 카메라 워크가 끝나도 유지되고 있었다. 얌전히 코디의 손에 기대고 있던 최승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는 매니저로부터 물병을 받아들었다.
"○○○."
최승철이 나를 부르며 온다.
잔뜩 움츠러든 몸을 억지로 움직여 세트장 밖을 나서기 위해 등을 돌렸다. 하지만 그 발악도 잠시, 걸음 보폭이 넓은 최승철에 의해 어깨를 붙잡혔다.
"어딜 가."
"그게..."
카메라 앞에서와 달리 여유가 사라진 최승철의 얼굴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나 오늘 게스트로 나오는 거 네가 몇 주 간 말렸다며?"
"......"
"왜 그랬어."
나는 갈 곳 잃은 두 눈을 내리 깔았다. 최승철이 웃으며 물병을 건넸다.
"뭐 그건 그렇다 치자. 나 곧 영화 찍어."
오늘따라 유독 붉게 변한 입술을 보고 있자니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너도 알잖아. 이상철 감독님이 우리 소속사 사장님이랑 친하신 거. 생각해 보니 혼자 촬영장 다니기 심심할 것 같더라. 그래서 오빠가 홧김에 너 추천했어."
"네?"
최승철은 더 활짝, 더 인상 좋게 웃으며 물병을 쥔 내 손 위로 본인의 손을 겹쳤다.
"잘했지? 이제 우리 같이 있을 수 있어."
내가 무어라 대답하려는 사이 선배들이 사인을 보냈다.
"녹화 다시 들어갈게요! 준비해 주세요!"
다시금 세트장 위에 앉아 카메라를 향해 미소짓는 사람은 단지 내 앞에 있었던 최승철이 아닌 배우 최승철이었다.
나는 물병을 바닥에 대충 내려놓았다.
최승철의 팬이냐고? 이 자리에서 머리를 쥐어 뜯다가 한강 가는 버스를 잡아 타고 싶은 심정을 누르는 것만으로도 내겐 벅찼다. 26살의 나이, 나는 최승철의 팬이 아니다. 시작과 동시에 최승철이 손을 내려 보내는 것처럼 보였던 문자가 내 핸드폰으로 도착했다. 나는 얼굴을 구기며 그것을 확인했다.
[거절하면 네가 썼던 공금 팬픽 다 뿌려 버린다]
씨발, 진짜로 나는 최승철의 팬이 아니다. 이 미친 새끼! 내가 다시 최승철의 팬이 되면 사람이 아니다. 이 세트장에서 유일하게 날선 눈초리를 최승철에게 보내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던 나는 졸업 후 멋모르고 나갔던 팬 싸인회 때 최승철로부터 영혼까지 털린 안타까운 희생자였다.
*
연애 못하는 여자랑 따로 쓰고 싶었던 건데 누구로 쓸까 하다가 승철이로 골랐어요...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럴 때도 암호닉 동일하게 받는 건가요? 작품마다 받아야 하는 건가 해서요...! 방송 작가와 배우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고 나머지 이야기들은 차차 풀어갈 생각입니다... ㅠㅠㅠㅠ 오타는 나중에 눈에 보이면 고칠게요~! 어색한 문장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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