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았을 때, 한 번만 생각나고 말았더라면 그저 웃으며 어느 날의 추억이라고 가볍게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근데 있잖아, 사실은 단 한 번이래도 남아버린 그 잔상을 몇 번이고 찾아다녔을 것이다.
우리 무슨 사이야? 02
_순니
나는 지금 엄청난 민폐를 끼치고 있다. 그러니까, 원래는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순영은 여주를 의자에 앉힌 뒤 수건을 건네줬다. 수건 끄트머리에는 조그마하게 토끼가 그려져 있었다. 순영은 무의식적으로 커피를 집어 들었지만 이내 손에서 내려놓고는 코코아 파우더를 꺼낸다. 초콜릿 프라페를 마시던 여주가 떠올라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주가 수건으로 자신 때문에 떨어진 물기들을 닦으려고 하자 순영은 핫초코를 만들다 말고 그 수건을 집어 들더니 여주의 머리의 물기를 닦는 듯 머리 위로 수건을 살포시 얹는다. 보들보들한 촉감이 부드럽게 여주의 피부를 스쳤다.
"다른 곳은 제가 정리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요."
"···."
"그러니까 그쪽부터 챙겨요."
"그게···, 아침부터 죄송해요···."
순영은 다정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의미었다.
이거 마셔요. 순영은 핫초코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핫초코 위에 올라가 있는 조그마한 마시멜로들이 초콜릿 강을 둥둥 부유한다. 순영은 이내 무언가 떠올랐는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양쪽 입꼬리를 올린다.
아, 근데 그쪽이라고 하니까 되게 정 없어 보인다.
순영은 여주의 테이블 앞으로 와서 다른 테이블의 의자를 끌어다 앉고 두 팔을 테이블 위에 얹어 놓더니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어제 일을 생각하는 듯했다. 여주가 순영의 이름을 묻고는 스스로 당황하며 벌떡 일어나 카페를 나가 버렸다는 그런 사소한 이야기.
"그쪽은 내 이름 아는데, 나만 그쪽 이름 모르는 건 좀 불공평하잖아요."
"아···."
"제 말은, 그쪽 이름 좀 알려달라는 거예요."
***
우리 통성명도 했는데, 자주 놀러 와요. 어차피 손님도 없구, 여기 꽤 심심하거든요.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었다. 나는 정말 수십번도 더 울고 싶어졌다. 미안함 반, 창피함 반이었다. 아침부터 찾아가서 온갖 민폐란 민폐는 다 부리고 왔으면서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왔다. 사실 그가 왜 아침부터 찾아왔냐고 물었을 때 내 머리는 새하얗게 백지가 되어버렸다. 김민규의 말처럼 정말 내 마음이 가는 데로 한 행동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유 같은 건 없어요, 그냥 그쪽이 내 기억에 잔상으로조차 남지 않을까봐 두려워서, 그래서···. 하여간 이렇게 말할 순 없었으니 나는 입만 꾹 다물고 이내 생각이 정리됐을 때 이렇게 말했다. 마침 지나가는 길이어서 들렸던 거라고. 말도 안 되는 뻔한 거짓말이라는 걸 이미 들킨 지 오래였지만 그는 캐묻지 않았다.
우리 카페가 다시 찾아올 만큼 맛있긴 해요.
그냥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래, 이렇게 뻔한 나의 변명대신 사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는 나를 위해 그럴 듯한 변명을 새로 만들어준다.
***
아, 또 그 아이다. 전원우, 그 아이가 내 꿈에 나왔다. 내가 조금 느슨해질 때면 항상 나에게 다가와서 나의 숨을 못 쉬게 한다. 내가 조금이라도 행복감에 취하려 하면 너는 그걸 바라지 않는다는 듯 내 꿈속으로 찾아온다. 내가 나쁜 버릇이 든 이유가 너라는 걸 알아달라는 듯, 너를 잊을 때쯤이면 어느 방식으로든 다시 찾아와서 나를 훼방 놓는다.
"여주야, 빨리 가자. 학교 늦겠다."
.
.
.
여주는 부스스한 눈으로 비몽사몽 일어난다. 여기저기 아파오는 몸에 주위를 둘러보면 자신이 책상 위에서 곯아떨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엉망진창 놓여있는 전공 책과 필기구들이 아무렇게나 책상 위를 돌아다닌다.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다가 여주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04:23. 화면에 뜨는 숫자가 익숙하지 않다. 아, 24분으로 바뀐다. 여주는 피곤하면서도 다시 잠자리에 들 생각은 하지 않는다. 혹여나 잠자리에 들었을 때 다시 전원우가 찾아올까 봐, 그래서 억지로 기지개를 피고 잠에서 헤어나오려 책상을 정리한다.
***
"You look tired."
"Oh···, I couldn't sleep yesterday."
지수가 내 다크써클의 상태를 보더니 내가 많이 피곤해 보인다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무래도 내 꼴이 말이 아닌가 보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이내 일어난다. 아침을 먹으려고 내려왔지만 생각보다 몸이 무겁다고 느껴서 먹지 못했다. 역시 피곤한 건 숨길 수 없다는 게 맞는 듯했다. 지수는 커다란 통기타 케이스를 등에 메더니 신발을 구겨 신고는 문을 열었다. 내 눈에 비치는 지수의 통기타는 어쩌면 지수의 상징 정도. 아무튼 문을 여니 생각보다 춥지 않은 바람이 흘러들어온다. 내가 잘가, 라며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자 잊어버린 게 있다는 듯 다시 내게로 뛰어왔다. 지수는 내 손에 메모지를 쥐여주고는 You need to get some rest. 라며 집 마당을 빠져나간다. 내가 휴식이 필요하다고? 나는 샛노란 메모지를 확인한다.
-Grafton street, 4 o, clock.
아무래도 지수가 공연할 예정인가보다. 항상 나를 챙겨주는 지수가 없었더라면 이곳에서 어떻게 지냈을지, 아주, 아주 조금은 외로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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