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힘이 들고, 지치고, 나른한 하루였다면 오늘 밤은 조금 즐겨도 괜찮지 않아요?
회색 안개가 낀 듯 어두웠던 날씨가 어느샌가 밝은 햇살을 머금는다면···.
내 머리가 바람에 흩날려 눈 앞을 가리고 이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 내 시야가 머무는 곳에 그가 있다.
우리 무슨 사이야? 03
_순니
항상 다니던 그 길이 어쩐지 색달라 보였다. 지수가 준 그 메모지에 무슨 마법이라도 있는 걸까. 여주의 발걸음이 아주 가벼워졌다. 점점 노을이 지는 거리에는 다양한 조명들이 건물마다 색색별로 매달려있었고 상점 앞에는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나와 있었다. 벌써 크리스마스라도 되는 것처럼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다. 상점의 주인들이 가게 밖으로 간판을 걸고, 밖의 테이블에는 꽤 많은 사람이 하우스 와인처럼 간단한 술을 즐기거나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베이컨 냄새가 코끝에 머물고, 시끌벅적하고 활기찬 분위기가 거리를 채운다. 여주는 그것이 퍽 마음에 든다고 생각한다.
이제 거의 4시가 다 되어간다. 나는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하곤 서둘러 그 장소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날씨는 쌀쌀했다. 나는 찬 바람이 불어올 때면 내가 입은 갈색 코트를 꽁꽁 여 맸다. 하얀 입김이 나오는 게 정말로 12월의 막바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크리스마스 때 약속 없이 집안에 틀어박혀있거나 민규와 의미 없는 카톡을 주고받는 게 다였는데, -그마저도 김민규가 약속이 있다며 대화를 급히 끝냈다- 이렇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걸 듣는게 아닌, 직접 느끼니 기분이 색달랐다.
그 장소에 도착하고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다가가니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늦은 밤, 가끔 지수가 집의 뒷마당에서 연습하던 곡이었다.
지수가 어느 영화에 나올법한 달달한 노래를 연주하고, 그에 사람들은 그 주변의 계단에 앉아서 고개를 흔들거나, 동영상을 찍었다. 바쁘지 않은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지수의 노래를 들었다. 지수는 가까이에 있는 나를 알아봤는지 이내 싱긋 웃는다. 아, 홍대에 온 것 같다. 길거리의 사람들도, 달달하게 들리는 노래도. 평소에는 생각조차 나지 않는 내 고향이, 지금 만큼은 한국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기엔 충분했다.
***
노래가 끝나고 사람들은 열심히 그것에 부응하듯 박수를 쳤다. 그렇게 짧은 버스킹이 끝나면 사람들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들 제 갈 길을 갔다. 원래 모든 게 한여름 밤의 꿈 같은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수! 노래 엄청 잘하는데 왜 지금까지 안 보여준 거야- 나는 노래가 끝나고 뒷정리를 하는 지수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음, 그야 여주가 반할까 봐? 내 질문에 지수는 이렇게 능글맞은 대답을 한다.
"seriously?"
"It was just kidding"
그냥 장난이었어 라고 뒷말을 붙이는 지수에 나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래 뭐, 좀 힐링은 됐어.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스레 새침한 표정을 짓다가도 금세 다시 해맑게 웃었다. 벌써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여섯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하늘은 어두컴컴해졌고 이내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어두웠음에도 오히려 아까의 낮보다 더 많아진 듯 보였다. 찬 바람이 저녁이 되자 잠잠해지고 찬 공기가 되어 시큰하게 내 콧등에 앉는다.
지수야, 나 배고파.
아까까지만 해도 몰랐었는데, 밤이 되니 거리 곳곳에 퍼져있는 음식 냄새들이 배를 고프게 했다. 음식점에서는 주황색의 불빛이 흘러나왔다. 내가 기타를 챙기고 있는 지수를 기다리며 지수의 옆으로 가 배가 고프다며 칭얼대고 있었을까, 뒤에서 내 어깨를 잡아 오는 사람에 의해 나는 순간적으로 뒤돌아봤고 그 뒤에는···.
"여주씨 우리 벌써 세 번째에요."
"또, 우연이네요."
하얗게 탈색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조금은 어색하게 웃고 있는 순영이 있었다.
***
엉겁결에 여주는 순영과 함께 있다. 어떻게 된 상황이냐면 지수가 좀 짓궂은 장난을 쳤다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눈치가 너무 빠른 지수가 여주의 붉어진 얼굴을 보더니 다 알겠다는 표정으로 여주를 순영에게 보내준 게 이 상황의 발단이었다. 일행이 있는지 몰랐다고 말하며 이만 가보겠다는 순영에게 지수는 No Problem. 이라며 전혀 문제 될게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은 너는 문제가 없겠지만 나는 있다니까···! 여주는 속으로 생각하며 울상을 짓는다.
"미안해요, 괜히 방해한 것 같은데."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럼 다행이지만···."
"저···, 우리 저녁 식사 같이 할래요?"
아, 조금 당황했겠지. 나는 정적을 깨며 무심결에 나온 내 말에 혼자 자책했다. 항상 이 남자 앞에서는 조급해지는 마음에 생각과 달리 말이 먼저 앞섰다. 조금 크게 떠진 순영의 두 눈을 보니 여러 가정을 들며 생각을 해 봐도 역시 거절의 대답만 나올 것 같았는데 순영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고, 머뭇거릴거 라는 생각과는 달리 꽤 빠르게 나온 대답이었다. 좋아요, 저도 아직 저녁 안 먹었거든요.
***
둘은 식당을 찾으려 시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밤이 되니 밝게 불이 켜진 조명이 예뻤다. 어느 거리는 붉거나 노란 전등이 가게 앞에서 반짝거렸고 또 다른 곳은 밝은 녹색 꼬마 전등이 길거리에서 빛나는 곳도 있었다. 크리스마스트리들은 아쉽게도 아직은 아무런 옷도 입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곳에 눈이 내리고, 손이 시릴 정도로 많이 쌓이게 되면 정말 예쁠 거라는 생각을 한다. 순영은 이내 자신의 목도리를 벗어 주위를 둘러보는 여주에게 건네준다. 어느새 눈 앞에있는 회색 목도리를 멈칫하며 바라보던 여주는 정말 괜찮다며 거절했지만, 말할 때마다 나오는 하얀 입김과 여주의 붉은 콧등이 밤이 되어 날씨가 더욱 추워졌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렇게 날씨가 추운데, 목도리도 안 하고."
"진짜 괜찮아요···! 별로 춥지도 않구."
"목도리가 저한테 안 어울려서 그러니까, 대신해줘요."
순영은 기어코 목도리를 받아들지 않는 여주의 목에 직접 목도리를 둘러줬다. 아, 거리가 예뻐요. 여주는 순영의 말에 고개를 돌려 거리를 쳐다본다. 발걸음이 멈춘 이곳은 하얀 전구와 불빛들이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방금 막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불빛이 어두운 하늘에 대조되어 더욱 밝다. 더욱이 목도리에 남아있는 순영의 향수 향기가 코끝을 맴돈다. 역시 사람은 자신을 닮은 향수를 쓴다던데. 너무 무겁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은 포근한 향기가 은은하게 남아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면 순영은 여주의 마음에 들어온다. 그래, 오늘만큼은 행복해져도 괜찮을 것 같은 밤이었다. 초콜릿이 없이도 말이다. 한여름 밤의 꿈이었든, 조그만 바람에도 쉽게 꺼질 촛불 같은 날이었든, 어찌 되었든 오늘은 혼자서 나쁜 버릇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그런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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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주우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