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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Oh Wonder - White Blood

Oh Wonder - All We Do

Oh Wonder - Without U







지난 10월이었다. 민윤기를 만난 건.




"저... 도와드릴까요?"




길바닥에 주저앉아 바닥을 더듬거리는 그에게 다가간 것도.




"아... 고맙습니다. 혹시 주변에 지팡이 같은 거 없나요?"




겉보기엔 다른 사람과 다를 것 없어보였는데 그가 고개를 들자 텅 빈 눈동자를 마주한 것도.




"괜찮으시겠어요?"




은빛 지팡이를 주워 그의 손에 쥐어준 후에 내 손에 까끌거리는 흙이 남은 것도.




"네.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길을 걷는 그의 뒷모습에 홀린 듯 뒤를 따라간 것도.




"따라오실 거 없어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충분히 익숙한 길이니까요."




어떻게 안건지 그가 다시 뒤를 돌아 내가 찾아준 그 지팡이로 내 신발 끝을 쿡, 찍던 것도.




"아... 네."




멋쩍게 뒤를 돌아 한 걸음 떼놓고 다시 고개를 돌려 그가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계속 보고 있었던 것도.




<장애인 보호·재활센터>




가까운 건물로 들어가던 그 모습 뒤로 들어온 표지판에 잠시 멍해있었던 것도.




"진짜네..."




설마가 확신이 된 순간 찾아온 안타까움. 그리고 느낀 죄책감도.



내가 뭐라고 저 사람을 그런 눈으로 봤는지.



내 신발코를 가볍게 찌르며 당차게 말을 내뱉던 모습이. 은빛 막대기로 바닥을 탁, 탁, 내려치며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던 발소리가 하루 종일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것도.




전부 10월이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같은 곳을 찾게 만들었다.






3일 후였다. 그를 다시 만난 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를 찾아다녔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마 운명적인 일이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다.



그 날은 비가 오는 날씨 탓에 미끄러운 도보 위를 곡예 하듯 걷다 결국 나자빠진 그에게 숨 가쁘게 달려갔다.



그의 손을 잡아 그를 일으켜주려 했을 때, 그는 내차게 내 손을 쳐냈다.



저번과는 달리 차가운 그의 태도에 제자리에서 굳어버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었다.




"지금 저 장애인이라고 무시하세요?"




그런 게 아닌데. 그런 마음이 아니었는데.




"미안해요. 그런 건 아니었어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내 목소리에 그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어본 목소리네."




스치듯 가볍게 던진 혼잣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우리 본 적 있어요. 3일 전에."




무슨 생각으로 그 말을 내뱉은 건지.



내 말에 고개를 갸웃하던 그는 이내 지팡이를 쥔 손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아. 이거 주워주셨던 분이죠?"




나는 그가 날 볼 수 없다는 것도 잊은 채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불쾌해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홱 지나쳤다.



영문 모를 그의 행동에 나는 그 자리에서 멀뚱히 그가 사라진 자리만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뒤로 나는 그 길 근처를 지나칠 수가 없었다.






한 달 후였다. 상당히 우연한 계기로 그를 다시 만나게 된 건.




"우리가 이번에 갈 봉사활동 장소는 총 세 곳이고요. 이 중에 한 곳만 각자 지원해서 가도록 하겠습니다."




봉사활동 동아리에서 가게 된 봉사활동 장소 중 한 곳이.




"다음은... 시혁동에 있는 장애인 센터. 갈사람?"




그 곳이었다. 그가 있는.



머리가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내 손은 이미 저 높이 들려 있었다.




"명단 다시 한 번 확인할게요. 4학년 김돌진, 4학년 김남준, 4학년 성이름, 3학년 정호돌, 1학년 박지민. 맞죠?"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곧 그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안녕하세요."




한 달 만에 오는 이 길이 낯설 만도 한데 내 몸은 아직 여길 기억하고 있었다.




"봉사활동 하러 오신 분들이죠? 이쪽으로 오세요."




서너 개의 작은 방을 지나치며 투명한 유리창 사이로 그의 모습을 찾으려 했지만 나는 그의 작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오늘은 안 오나..."



"누가요?"




내 뒤를 따라오던 지민이 말을 걸었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황급히 당황한 표정을 숨겼다.




"앞으로 5일 간 이 두 분은 점심 배식을 도와주시고 나머지 세 분은 청소를 도와주시면 돼요."




내심 쉬운 일을 하고 싶었던 탓에 배식을 도우러 식당으로 들어가는 둘을 부러워하며 나는 손걸레 하나를 집었다.




유리창만 다섯 개째 닦고 있을 무렵,




"아, 윤기 왔구나."




그렇게 기다렸던 그가 나타났다.



그는 익숙하게 고개를 꾸벅 숙이곤 나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갔다.




"윤기..."




처음 알게 된 그의 이름을 혼잣말로 되뇌는 나를 본 한 아주머니께서 슬며시 다가오셨다.




"아는 사람이야?"




바로 옆에서 들려온 큰 목소리에 놀라 손걸레를 떨어뜨리자 아주머니께서 미안해하시며 그것을 주워 내게 건네셨다.




"미안해, 학생. 귀가 어두운 분들은 크게 말해야 겨우 들으시거든. 습관이 돼서 나도 모르게..."



"아니에요. 괜찮아요."




고개를 저으며 그가 들어간 방을 보고 있자 아주머니께서 다시 물어오셨다.




"그런데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야?"



"아는 사이 아니에요. 그냥 길가다가 몇 번 본적이 있어서..."



"아, 그래? 학생도 이 근처 사나보네. 윤기도 요 앞에 사는데. 그럼 열심히 해요-"




아주머니는 여전히 그가 들어간 곳을 보고 있는 나를 지나가셨고 나는 그제야 숨을 편히 쉴 수 있었다.



엄청난 비밀이라도 들킨 듯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잘 먹겠습니다!"




점심이라기엔 좀 늦은 시각. 배식이 끝난 식당은 우리의 목소리를 빼곤 한없이 고요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저기요."




익숙한 목소리에 돌린 시선의 끝엔 그가 서있었다.




"네?"



"아, 물 좀..."




시설 특성상 조금 숨겨진 위치에 있는 정수기 탓에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그는 꽤나 불만스러워보였다. 자존심이 상한 것 같기도 하고.



"여기요."



그의 손에 물이 담긴 컵을 쥐어 주며 나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어쩌면, 또 목소리만으로 날 알아봐주지 않을까.




"고맙습니다."




하지만 내게 고개를 까딱이고 다시 뒤를 돌아 가버리는 그는 끝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듯 한 표정이었다.




"치..."




분명 아무 사이도 아닌데. 괜스레 서운했다.






"안녕히 계세요-"




해가 막 넘어가려는 애매한 시간, 하루의 봉사가 끝났다. 그리고




"저도 가볼게요."




그도 막 우리와 함께 센터를 나섰다.




"누나는 반대쪽이죠?"



"조심히 가, 성이름-"



"응. 내일 봐."




혼자만 집으로 가는 방향이 다른 탓에 일행들과 떨어졌다.



그리고 내 앞에, 그가 걷고 있었다.



다가가서 말이라도 걸어볼까, 싶었는데 아는 거라곤 '윤기'라는 이름 두 자 뿐인데다 연결 고리라곤 고작 두 번 본 게 끝인데. 괜히 주제를 넘는 것 같아 결국 자리에 멈춰 선 나는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는 같은 시간에 센터를 나섰다.



그리고 하루 종일 청소만 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 앞에서 항상 걷고 있었다.






어느새 마지막 날이었다.



그는 여전히 내 앞을 걷고 있었고 나는 점점 걸음을 늦추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내 손을 뿌리치고 가버린 그 곳에 멈춰 서서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빤히 바라보는 게 내 하루 일과의 끝이었다.



고요한 길가에 울리는 둔탁한 그의 지팡이 소리가 참 좋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가 먼저, 그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나도 따라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다시 길을 걸어 그의 바로 뒤에서 다시 멈췄다.



서로의 옆을 딱 한 걸음씩 남겨두고 우린 그 길가에 가만히 서있었다.




"난 다른 사람이 내가 장애인이라서 도와주는 거, 싫어해요."




먼저 말문을 연 건 그였다.




"굳이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에 간섭 받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해요."




아, 그래서 그때 표정이 그렇게 안 좋았구나.



기분 나쁜 표정으로 나를 홱 지나치던 그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쪽 기분을 상하게 하려던 건 아닌데 그렇게 느꼈다면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해요."




서투르게 빙빙 돌려 사과의 말을 전하는 그에게 나는 도리어 미안해졌다.



그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한 건 나인데 사과는 그가 하고 있다니.




"미안해요. 그런 생각은... 못했어요."



"내일도... 와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




그의 짧은 탄식이 들리고 그가 몸을 조금 돌려 말했다.




"민윤기라고 해요."




내가 있는 곳에서 약간 떨어진 허공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손을 내민 모습이 조금 웃겨 애써 웃음을 참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저는 성이름이에요. 근데 저인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는 잡았던 손을 놓으며 내 머리카락 부근을 가리켰다.




"제가 후각이 좀 예민해서. 한 번 맡은 향은 기억에 오래 남아요. 그 쪽 목소리로도 알아챘었고."



"아..."




그는 첫 날부터 알고 있었다고 했다. 처음 센터에 들어왔을 땐 착각인가, 싶었는데 물을 마시러 식당에 들어온 순간 확신했다고 했다.



그의 집은 정말 가까이에 있었다.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5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그는 짧은 시간동안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18살 때부터 혼자 살기 시작해 지금은 23살이라고 했다. 동갑이라는 내 말에 그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본래 고아원에서 자라 가족이 누군지, 살아는 있는지 전혀 모른다고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고아원에서 얻어줬다고 했다. 나라에서 주는 생활비로 살고는 있는데 아껴쓰면 나름 괜찮다고 했다. 또 동사무소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사람이 오기 때문에 혼자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했다. 아, 선천적 시작 장애라 일상생활은 전혀 불편하지 않다고도 했다. 그래도 빛 정도는 감지한다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무덤덤하게 책을 읽듯 말을 잇던 그는 별안간 말을 멈추었다.




"아, 쓸데없는 얘기를 너무 많이 했네. 말동무는 오랜만이라. 계속 앞으로 가요?"




그는 우리가 걷고 있는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네. 그쪽은요?"



"조심히 가요."




그는 별 대답 없이 몸을 돌려 한 사람 들어가기도 벅찬 골목 사이로 더듬더듬 들어갔다.



그리고 난, 우리가 볼 일이 더는 없을 줄 알았다.






그날 이후로 또 한 달이 지났다. 작년 12월은 그 해 중 유독 바빴다.



졸업이 가까워지니 할 일이 많아졌고, 그만큼 약속도 늘어났다.




"어? 아. 아냐. 괜찮아. 그래. 다음에 봐."




그러던 어느 날, 약속 하나가 깨져버렸다.



정말 미안하다는 친구의 문자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뭔가, 싶어 슬쩍 흘깃대다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




그였다. 민윤기.



크리스마스 공연을 하는 밴드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 속 가만히 쭈그려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사람들을 지나쳐 그의 옆에 앉았다.




"오랜만이네요."




뜻밖의 소리에 놀란 듯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크게 돌렸다.




"아..."




날 못 알아보는 건가, 싶었는데 이내 그가 작게 웃어보였다.




"그러게요. 오랜만이네요."



"크리스마스가 오긴 왔나 봐요. 이런 것도 하고. ...이런 거 안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왜요?"




의외라는 듯 한 내 말투에 그는 더 의외라는 듯 내게 물었다.



"아니, 뭐..."



"눈이 안 보인다고 귀까지 안 들리는 건 아니니까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느낌이 그렇다고요. 느낌이."



"그래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있는 얼굴을 보며 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노래를 듣는 그의 표정이 꽤 행복해보여서.




밴드의 공연이 끝나고 그는 천천히 일어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디 가요?"



"집에 가야죠. 그 쪽은요? 약속 같은 거 있어요?"



"있었는데. 깨졌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별 말 없이 길을 걸었고 난 그의 옆을 조용히 따라갈 뿐이었다.




"저기요. 몇 개만 물어봐도 돼요?"



"네. 그럼요."




그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 갖가지 질문을 해왔다.



어디 사는지, 형제나 자매는 있는지, 어떤 학교에 다니는지, 거기선 뭘 배우는지, 요즘은 어떤 봉사를 다니는지, 이제 자기가 다니는 센터에는 안 올 건지. 그리고...




"남자친구는... 없어요?"



"그러게요. 주변 사람들은 다 있는데. 저만 없네요. 윤기 씨는요?"



"저요? 저도 뭐..."



"왜요? 충분히 잘 생기셨는데."




내 말에 웃음을 터뜨린 그는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때문에 안돼요."




자기보다 눈도 좋은 사람이 자기랑 처지가 똑같으면 어쩌냐며 힘없이 웃는 모습에 어딘가 씁쓸한 기분이 들어 재빨리 화재를 바꿨다.



그동안 별 일은 없었는지, 센터는 여전히 잘 다니는지, 거기선 뭘 하는지.



그는 고작 한 달인데 변할 게 뭐가 있겠냐고 했다. 다들 잘 지낸다고, 그래서 자기도 잘 지낸다고 했다. 센터에선 점자 읽는 법을 배우는데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어 힘들다고 했다. 그리곤 나도 잘 지내냐고 물었다.




"아뇨. 잘 못 지내요. 곧 졸업이라 바빠서. 이런 주말이나 밖에 나오지, 평소에는 도서관에서 거의 살아요."




그리고 문득, 생각이 났다.




"혹시 내년 2월에 바빠요?"



"왜요?"



"안 바쁘면 내 졸업식... 보러 올래요?"




그는 자리에서 멈칫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왜 그래요?"



"아니. 졸업식은 처음이라."




괜히. 마음이 울컥했다.




"학교... 다닌 적 없어요?"



"있긴 있는데 죄다 졸업식까지 못 가봤어요. 상황이 상황이라."




일반 학교에선 그를 받아주지 않았고 받아준 소수의 학교에서는 아무리 다녀도 괴롭힘 때문에 제대로 적응할 수 없었다고 했다. 결국 왕복만 4시간인 특수학교를 다녔는데 돈이 비싸 싼 곳을 찾아 학교를 자주 옮겨 다녔고 학비에 교통비까지 감당할 수 없었던 고아원 원장님의 뜻에 따라 학교를 포기했다고 했다. 아쉽지 않냐는 내 물음에 그는 추억이 없으니 아쉬움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졸업식은 어떻게 해요?"




고아원에서 나오기 하루 전 날, 친구들과 함께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었다고 했다. 갖가지 게임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졸업식도 그렇게 하는 거냐는 그의 물음이 정말 순수하기 그지없어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이별 파티를 되게 좋게 했나 봐요."



"그 당시엔 상당히 성대했죠."



"그랬을 것 같아요. 졸업식은 음... 좀 비슷해요. 많이 학생들이 모여서 교장 선생님이나 총장님이 하시는 말씀 듣고, 졸업장 받고, 친구들끼리 사진도 찍고 그래요. 되게 시끄럽죠."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의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 앞에서 그는 내 이름을 불렀다.




"그 졸업식... 진짜 가도 돼요?"




계속 그 생각을 했던 건지 더듬더듬 말을 잇는 그에게 정말 와도 된다고 답하자 그는 지금껏 봤던 얼굴 중 가장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론 기억이 없다. 하도 바빠서 그날이 그날, 저날이 저 날이었으니.



눈이 안 보이니 핸드폰을 안 쓴다는 그의 말에 센터로 전화하겠다고 한지 두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당장 다음 주가 졸업식이었다. 그의 생각이 났다.



센터에 전화를 걸어 민윤기를 바꿔달라고 했다. 오랜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여보세요? 나 이름이에요."



"네. 알아요."



"다음 주가 내 졸업식인데. 올 수 있죠?"



"아, 그게..."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무슨 일이 있는 거냐, 했더니 그건 아니라는데 자꾸 정적이 길어졌다.




"네. 갈게요."




한참 만에 들은 대답이었다.



그날 아침에 데리러 가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끊긴 전화가 왠지 찝찝했다.






졸업식 당일, 아침에 만난 민윤기는 평소와 사뭇 달랐다.




항상 부스스한 머리에 편한 복장을 고집하던 모습은 어디가고 깔끔하게 뒤로 넘긴 머리에 새 옷도 샀다고 했다.




"...이상해요?"



"아뇨. 평소보다 훨씬 나아요."




그는 보통 양복을 입고 간다기에 사러 갔더니 생각보다 비싸서 어쩔 수 없었다며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도착한 학교는 이미 온갖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떻게 생겼어요, 여긴?"



"음... 네모난 학교 앞에 사람들이 많아요. 여기선 꽃도 팔고요."



"꽃도 팔아요?"



"네. 보통 졸업할 때 축하하는 의미로 많이 주거든요."



"아..."




내 말에 빈손을 만지작대는 그의 모습에 나는 그를 가볍게 툭, 밀었다.




"됐어요. 어차피 저는 꽃 별로 안 좋아해요."




내 말에 표정이 좀 나아진다, 싶더니만 이내 다시 진지해진 그가 기죽은 듯 한 목소리를 냈다.




"근데 졸업식은 가족이 오는 데라면서요."




오는 내내 표정이 풀리질 않더라니 이것 때문이었다 보다.



저번에 오겠다는 대답이 유독 길어진 것도 아마 이것 때문이었겠지.




"아- 보통 그러긴 하죠. 그런데 오늘은 저 말고도 제 동생이 졸업하는 날이거든요. 거기 가셨어요."



"아. 그 중학생이라던..."



"네. 걔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표정이 그제야 밝아졌다.




"여기 앉아있어요. 난 저기 앞에 앉아있어야 하거든요. 끝나면 데리러 올게요."




알겠다는 대답도 모자라 약속에, 도장에, 복사까지 하고 나서야 나는 겨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래도 뭐가 그리 불안한지 나는 졸업식 내내 틈만 나면 뒤를 돌아 그를 찾았다. 혹시 지루하진 않을까, 무슨 일이라도 생기진 않을까.



다행히 그는 꽤나 즐거워보였다. 아무도 웃지 않는 학생회장의 개그에도 혼자 실없이 웃을 정도였으니.




졸업식이 끝나고 학교에서 나오는 길에 그가 별안간 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요?"



"그게..."




그는 한참동안 주머니를 만지작대더니 뭔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졸업 선물이에요. 보통 다 챙겨준다길래."




그에게로 손을 내밀어 대체 뭔가, 하고 보니




"라이언?"




요즘 유행한다는 사자 형상의 캐릭터 인형이었다. 가방에 걸 수 있도록 고리까지 달린.




"직접 산거에요?"



"가긴 직접 갔는데 고르는 건 센터 선생님이 도와주셨어요."




삼일 전, 센터 앞 공원에서 플리마켓이 열렸다고 했다. 다 같이 구경을 갔다가 이게 요즘 인기가 많다는 선생님의 말에 문득 내 생각이 나 산거라고 했다. 꽤나 심각한 고민을 했다는 말이 웃겨서 나는 결국 웃음이 터져버렸다.




"고마워요. 잘 쓸게요."




들고 있던 가방에 인형을 다니 전혀 어울리진 않았지만 나름 귀여웠다.




"이거 만져봐요."




그의 손을 끌어당겨 내 가방을 쥐어 주니 이내 잡히는 인형에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진짜 고마워요."




고개를 끄덕이며 지팡이를 고쳐 잡는 그는 지금까지 본 모습 중 가장 기분이 좋아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회사에 취업을 했다. 새파란 막내로.



비정규직이지만 내 자리 하나 있는 게 어딘가.



그 뒤로 시간이 날 때마다 센터 앞에서 그를 기다리곤 했다.



사실 시간이 안 나도 굳이 만들곤 했다.




"또 가는 거야?"



"네. 오늘도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직은 할 일이 없기도 하고.



남자친구를 보러 가는 게 아니라고 숱하게 말했지만 이미 회사 분들은 데이트라고 못을 박으신 듯했다. 이젠 알아서 생각하라고 놔두기로 했다. 기분이 썩 나쁘지도 않고.




"윤기야."




이젠 말도 놓았다. 반말도 하고. 농담도 하고.




"뭐야. 또 다쳤어?"



"아침에 넘어졌어."



 

윤기네 집으로 가는 골목 중간 즈음에 꽃집으로 이어진 통로가 있어 자주 물이 고인다고 했다. 평소엔 잘 피해 다니는데 가끔가다 물의 양이 많을 땐 그대로 미끄러져 팔이며 다리에 반창고를 한두 개씩 붙이고 있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다친 것도 아닌데 괜히 속상해져 그에게 툴툴대면 자기는 괜찮다며 오히려 날 달래곤 했다.



그렇게 내 하루의 마지막은 대부분 그와 함께였다. 고작 해봐야 5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은 하루 종일 긴장해있던 나를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꽤나 흘렀고 요 근래 자주 봄비가 내려 딱딱한 땅을 촉촉하게 적셔주었다.



그리고 우리의 관계에도 시간이 흘렀다.




가끔은 그가 남자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작은 행동, 짧은 말에 설레기도 했다. 어쩌다 한 번은 우리가 연인이 된다면, 하고 상상해본 적도 있었다.



3개월 쯤 후였을 거다. 여름이 오려는지 점점 초록빛으로 물들어가는 나뭇잎을 보며 그와 집으로 향하던 나는 여느 때처럼 항상 헤어지던 골목길 앞에서 그에게 내일 보자는 인사를 건넸고 그는 여느 때와 다르게 서투른 몸짓으로 내 팔을 잡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왜?"



"그게..."




한참을 머뭇대는 그를 기다리다 지쳐 중요한 얘기가 아니면 내일 하자는 내 말에 그는 급하게 소리쳤다.




"좋아해!"



"...어?"




예상치 못한 말에 그저 멍하니 붉어진 그의 얼굴만 보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좋아해."




벚꽃 잎이 흐드러지는 나무 밑에서 받는 고백보다 달콤한 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두운 골목길 앞의 주황색 가로등 밑에서 받는 고백도 꽤나 로맨틱했다.




24살. 갓 서로에게 눈을 뜬 초여름이 우리 연애의 시작이었다.






둘이서 맞는 여름이 끝나갈 즈음, 우리는 동거를 결심했다. 딱히 특별한 계기나 동기 없이 그냥 마음이 통해 정한 일이었다.



내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도, 그 남자친구가 보통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도 모르는 가족들에게는 직장이 너무 멀어 그 근방에서 자취를 하고 싶다는 말을 해놓고 그와 작은 원룸에서 살기 시작했다.



혹여 계단을 오르내리다 일이라도 날까, 싶어 최대한 계단이 적은 집을 찾았는데 너무 낮은 집은 내가 위험하다며 걱정을 하는 그가 고집을 부려 결국 높이가 조금 있는 1층으로 정하게 되었다. 멍이 잘 드는 그를 위해 가구며 벽 곳곳에 스펀지를 잔뜩 붙였고 날카롭고 다칠만한 물건들은 최대한 집 안쪽에 깊이 숨겨놓았다.


둘 다 원래 살던 곳보다 거리가 있는 곳으로 이사를 왔기에 한동안 민윤기는 나와 함께 센터를 다녔고 다는 항상 버스를 잘못 타 다음 정류장에서 급하게 내리곤 했다.






그 후로, 3개월이 더 지났다. 민윤기는 혼자 센터에 다녀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익숙해졌고 이젠 신호등이 켜지는 시간을 계산하는 능력도 생겼다. 나 역시 더는 정류장을 헷갈리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가 둘이서 맞는 첫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국에 뷔온대

아그대 후속작으로 생각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시각장애인 1급 민윤기와 아직 내용엔 나오지 않지만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딸은 아닌 여주의 동거 이야기에요.

몇 달 전에 독방에 짧게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뭐였는지는 비밀입니다!


문제는... 여전히 제목을 정하지 못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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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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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헐 대박이에요 작가님 ㅠㅠㅠㅠ글 완전 제스타일...대박...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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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2
헐 진짜 좋아요...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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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3
헐....세상에 진짜 너무 좋아요 [정연아]인데요.. 암호닉은 이어지고 추가로 받으시나요 아니면 아예 새로 받으시나요??
벌써부터 작가님글이 기대되요♥♥♥ 기대할께요!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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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4
쓰니워더인데요 이거 어디서봉거같아햇다!!!독방이켜써ㅠㅠㅠㅠㅠ진짜ㅠㅠㅠㅠ여주착한사라 ㅠㅠㅠㅠㅠㅠㅠ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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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5
갓찌민디바입니다! 되게오랜만이에여! 제가 독방에 자주들어가지않아서 미리보진못했지만 글 너무대박이에요ㅠㅠㅠㅠ 그래서 다음편은 언제올리신다구요??ㅠㅠㅠ 으아으다음편 빨리읽고싶어요 흐엉유ㅠㅠㅠㅠㅠㅠ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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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오는소리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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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6
헐 완전 대박이에요... 신알신 누르고 갑니다 후속작 너무 기대되요!!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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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55.105
winter twilight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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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7
아 마음아픈데 취저에유ㅠㅠㅠㅠㅠㅠ 암호닋받으시나요!?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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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8
허...미친... 작가님 너무너무너무 짱이신듯...ㅜㅜㅜ 내용 완전 기대돼뇨♡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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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9
방소에요 ㅠㅠ아 엄청 기대돼요 ㅠㅠㅠㅠㅠㅠㅜ ㅠㅠㅠ한번도 접해보지 않은 글이라 신선하고 빨리 보고싶네요!!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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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0
헐헐 소재 너무 좋아요 작가님!!분위기도 너무 좋고..암호닉 받으세요?받으시면 [캔디]로 신청할게요!!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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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1
같이달리겠습니다!♡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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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2
아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댇ㅂ각 말이 제대로 안나오네 대박이에요 ㄷ작가님 ㅠㅠ사랑해여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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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3
늘봄이에요'-'*♡ 아니 이건 정말... (입들 막) 작가님은 어떻게 소재마저 제 취향을... (오열) 눈이 안 보이지만 후각으로 여주를 기억한 윤기ㅠㅠㅠㅠ아이고ㅠㅠㅠㅠㅠ이건 꼭 볼텝니다ㅠㅠㅠㅠ작가님 애정 해요❤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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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4
헐 넘 좋아요...진짜..넘 좋아요....빨리 보고싶어요...(운다)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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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5
둥둥이에요!!!! 핳.. 분명 미리보기였는데 본편 보는 줄 알아ㅛ어요...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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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6
헐 아 진짜 좋아여 ㅠㅠㅠㅠㅠㅠ 기다릴게요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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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7
헐 대박 작가님... 벌써부터 대박적인 스멜이... 진짜 쩌러여.. 기대할게여..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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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8
헐..좋아요..이거...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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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9
비비빅이에요! 이 글도 분위기가 대박이네요ㅠㅜㅜㅜ뭔가 풋풋하기도 하고ㅠㅜㅜ설레기도 한데 또 궁금해지고ㅜㅠㅜㅜ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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