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각]일곱번째 네버랜드 w. 천월&소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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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BGM : Sentimental Scenery - Soundscape)
열대야가 기승이다. 여름 내내 30도를 웃돌며 끔찍하게도 사람들을 괴롭혀댔던 기온은 8월을 넘어 9월에 접어든 시점에서도 좀처럼 내려가지 않았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밤에도 에어컨을 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후끈후끈 찌는 집안에서 하나둘 탈출해나와 강가나 바닷가에 자리를 잡고 밤을 지새우는 나날들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사람들은 도대체 이 지긋지긋한 여름은 언제쯤 끝나냐며 쉴새없이 투덜대었고, 저마다 부채와 얼음물이 담긴 물통을 하나씩 손에 쥔 사람들은 서산 너머 져버리고 나서도 이렇게 끈질기게 열기를 지상에 남겨두는 태양을 원망했다.
그러나 성열에겐 그 태양이 원망스럽다기보단 한없이 고마운 존재였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검은 티셔츠에 검은 바지에 캡모자까지 푹 눌러쓴 성열은 청계천 주변에 이곳저곳 펼쳐진 돗자리 주변을 어슬렁대고 있었다. 돗자리 주인들은 편의점에 갔는지 물에 발이라도 담그러 내려갔는지 짐가방만 잔득 쌓아둔채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캡모자를 조금 더 눌러쓴 성열은 쉬지않고 놀리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무릎을 굽혀 앉았다. 모든 일은 몇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일어났다. 성열의 손가락이 무릎께 바로 앞에 놓인 빨간 핸드백 안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갔고, 곧바로 곧게 펴진 성열의 다리는 아무일도 없었다는듯 휘적휘적 걸어 청계천을 벗어났다. 주머니엔 핸드백 색깔처럼 새빨간 가죽 장지갑이 들어있었다.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장지갑을 열었다. 작게 휘파람을 분 성열은 지갑 안에 든 5만원짜리 지폐 네장을 빼내 주머니에 넣고 앞부분에 들어있는 동전으로 컵라면을 계산했다. 편의점 밖으로 나온 성열은 차도 한가운데로 지갑을 던져버렸다. 손가락에 끼고 있던 지문방지용 살색 실리콘 골무까지 빼낸 후에야 모자를 벗어버린 성열은 여전히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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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계단으로 가득 찬 좁은 골목길을 올라가는데 신발이 어느새 너덜너덜해진게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오늘 번 돈으로는 신발을 새로 사 신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거의 꼭대기까지 올라와서야 낡은 콘크리트 벽이 얼룩덜룩해진 집에 도착했다. 기분 나쁜 끼이익 소리를 내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좁은 방이 나타났다. 터덜터덜 집안으로 걸어들어간 성열은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아까 사온 컵라면이라도 해먹어야 기운이 날 것 같았지만 집에 가스가 다 떨어졌다는 사실이 떠올라 성열은 그저 모든 괴로움을 잊고 잠들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악몽을 꾸었다. 꿈 속에서도 성열은 텅 비고 어두침침한 방 안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성열의 머리맡에서는 5년 전의 악몽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었다. 끊임없이 팔에 주사기를 찔러넣던 아버지, 말리려다 그만 아버지가 휘두르던 칼에 찔려 붉디 붉은 피를 쏟아내며 이 세상에서 스러져갔던 어머니. 악을 쓰는 고함 소리와 울음 소리, 그리고 신음 소리가 도저히 그 장면을 지켜볼 수 없어 눈을 감아버린 성열의 귀로 생생하게 들려왔다. 두 손으로 귀를 막아보았지만 소리들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소리들은 형상이 없는 존재 주제에 커다란 검은 물체로 돌변해 성열을 집어삼켜버렸다. 몸에 아무 감각이 없었고, 머릿속은 끔찍하게 울려왔다.
아버지는 성열이 열다섯살일 때부터 약을 시작했다. 잘 사는 편은 아니었어도 평범한 축에 속했던 성열의 집은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30평의 아파트에서 15평의 투룸으로, 투룸에서 또다시 10여평짜리 원룸으로, 원룸에서 달동네 작은 콘크리트 집으로, 결국에는 달동네 중에서도 가장 꼭대기에 있는 낡고 허름한 단칸방으로. 잘생기고 깔끔한 외모 탓에 넘쳐났던 성열의 인간관계도, 선생님께 사랑받는 가장 큰 요인이었던 성적도, 무엇보다 언제나 밝고 서글서글했던 성격까지도 모든 것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빚과 매일 눈물로 밤낮을 지새우는 어머니를 지켜보며 성열은 추락했던 그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다. 다시 되살릴 의지조차 갖지 못했다. 그리고 2년 후, 어머니가 죽었다. 그 후로 아버지는 집을 나가 들어오지 않았고, 빚쟁이들은 성열을 찾아와 협박했다. 왕따를 감수하고 어렵게라도 다니고 있던 고등학교는 자퇴했다. 친척들과 친구들은 모두 등을 돌렸다. 돌린 등 너머로도 비난의 화살은 끊임없이 날아왔다. 성열은 그 이후로 죽지 못해 살고 있었다.
중졸, 고아, 빚쟁이. 성열을 따라다니는 세 단어는 성열이 그 어떤 일에도 손을 댈 수 없도록 만들었다. 공부도 알바도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고, 심지어 공사판의 막노동도 포기해야했다. 빚 독촉자들이 성열이 가는 곳마다 쫓아와 닦달해댔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시도했던 모텔의 허드렛일꾼마저 모텔에 찾아온 깡패들에 의해 흠씬 얻어맞고 쫓겨난 후에, 성열은 꼬박 일주일을 어두운 방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그 다음날, 성열은 다니던 고등학교에 몰래 잠입해 돈이 될만한 모든 것들을 털어서 팔았다. 그 후로 도둑질은 빠르게 손에 익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되듯, 성열은 점차 좀도둑에서 전문적인 도둑으로 변해갔다. 성열이 훔치는 것들은 충분히 돈이 되었다. 대부분은 빚을 갚는데 쓰이고, 나머지 약간은 집 월세와 생활비에 쓰였다. 살기 위해 하는 일이었지만 종종 성열은 자기 자신에게 끔찍한 혐오감을 느꼈다. 이렇게 살아야했지만,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성열의 눈에 보이는 것은 눈이 아플 정도로 모든 곳이 새하얀 세상이었다. 아직 꿈을 꾸고 있는게 분명했다. 좀전까지의 고통과 괴로움은 어디가고 성열은 자신의 몸과 머리가 눈에 띄게 가벼워졌다는 것을 느꼈다. 왠지 모르게 기분까지 맑고 또 밝았다. 꿈에서 깨어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갈 바에야 차라리 이렇게 꿈 속에서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하얗던 공간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또다시 시야에 검은 것이 가득 들어찼다. 도대체 언제쯤 이 우중충한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는건지, 성열은 공포보다 지루함을 먼저 느꼈다.
검은 그림자는 한동안 성열의 주변에서 어슬렁댔다. 그림자의 모양은 쉴새없이 바뀌었고, 그 주인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성열은 그것이 그림자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그렇게 하릴없이 움직이는 그림자를 지켜보던 성열의 귀에 뜬금없는 시계 초침 소리가 들려왔다. 똑딱똑딱, 규칙적이면서도 불안정한 소리였다. 초침 소리는 점점 커져왔다. 갑자기 불안을 느낀 성열은 누워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소리는 사방에서 성열을 괴롭힐뿐, 그 근원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만큼 소리가 커져오자 별안간 하얗고 까맣던 공간에 초록색 빛이 스며들어왔다. 초록색 빛은 검은 그림자와 엉켜들어 흰 공간을 점점 잠식해나갔다. 성열은 정체모를 불안감이 점점 커지는 느낌에 고함을 내지르고 말았다.
"그만!!!"
거짓말처럼 빛과 그림자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어느새 그 형체들은 하나의 인격체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엉켜든 초록색 빛과 검은 그림자가 제자리를 찾아 오그라들었던 모양을 쭉 펴낼 때, 성열은 검은 그림자의 한 부분이 크게 찢겨진 것을 눈치채었다. 한참을 지켜본 덕분에 정이 들어버린건지 성열은 쓸데없는 호기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분명 이건 꿈이었는데, 꿈이 아닌듯한 기분이 들어 성열은 검은 그림자가 찢긴 부분을 중심으로 서서히 난잡스럽던 움직임을 멈추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성열의 귀에 맑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아, 이런. 그림자가 찢어져버렸네. 이걸 어쩐다."
소스라치게 놀란 성열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눈에 보이는건 어느새 검은 그림자와 한쪽 끝이 맞닿은채로 이어져있는 초록 빛 뿐이었다.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그림자는 소중한 존잰데. 큰일났다, 그치? 누가 이거 꿰매줬으면 좋겠는데."
"......"
"거기 너, 이성열. 찢긴 그림자 좀 꿰매줄래?"
성열은 결국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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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억...헉..."
깨어나보니 눈에 보이는 것은 찢긴 그림자가 아닌 어두운 단칸방의 곰팡이 핀 천장이었다. 귀에 들려오는 소리도 괴상한 맑은 목소리가 아닌 밖에서 술취한 아저씨들이 내뱉는 욕짓거리였다. 어스푸름한 새벽이었다. 하늘의 색깔은 검은색과 푸른색, 그 사이의 어딘가의 오묘한 경계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창 밖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던 성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악몽은 하루걸러 꾸는 꿈이었지만, 어젯밤처럼 당황스러운 꿈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명수에게 느껴진 것은 공포보다는 따스함이었다. 정체모를 목소리에서 어떻게 그런 따스함이 느껴질 수 있는지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냥 느낌이 그랬다.
밖으로 이어진 수돗가로 가서 대충 머리를 감았다. 새벽 동안 식어버린 열대야의 열기에 얼음같이 차가운 물은 두피를 얼얼하게 했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말릴 생각도 하지 않고 성열은 다시 집을 나섰다. 그냥 오늘은 이 짜증나는 방안에 있고 싶지 않았다. 아직 나오지 않은 햇빛 덕분에 도저히 마를 생각을 하지 않는 머리를 탈탈 털며 성열은 골목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갔다.
어제 훔쳤던 20만원 중 15만원을 통장에 넣었다. 집안 재산을 다 털었기 때문에 빚은 사실 천만원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었다. 성열은 열일곱살때부터 시작했던 도둑질로 천만원 정도야 이미 갚은지 오래였지만, 도저히 도둑질이 손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벌써 통장에 쌓인 돈만 해도 삼백만원 가까이 되었다. 천몇백만원 어치를 훔쳐왔는데도 이때까지 한번도 걸리지 않았다는 것을, 성열은 다행이라고 생각해야할지 불행이라고 생각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통장 안엔 조금 더 나은 집의 보증금을 댈만한, 또는 먹고 살 수 있는 일을 시작할만한 돈이 있었지만 성열은 그 돈들을 한 푼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냥 묵히고 묵혀두었다. 굶어죽지않을만큼의 돈만을 남겨두고, 모든 돈은 성열의 통장 속에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이 지긋지긋한 도둑질을 멈춰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경찰에게 잡혀 수감되던지, 아니면 훔칠만한 물건을 찾지 못해 굶어 죽어가던지, 심지어 이 끔찍한 손목을 잘라버리던지.
잔돈으로 과자 한봉지를 사서 근처 공원으로 갔다. 더운 날씨에도 아랑곳않고 후드를 푹 눌러쓰고 과자 봉지를 힘없이 뜯어냈다. 손가락에 딸려나온 작은 과자 조각들은 입이 아닌 바닥으로 던져졌다. 뒤룩뒤룩 살이 찐 비둘기들이 걸어와 성열이 던진 과자를 열심히 주워먹었다. 누군가가 성열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갔다. 성열은 더욱 더 고개를 움츠렸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질타하고 멸시하는 것 같았다. 저 새끼 고아야, 근데 도둑질까지 해. 지금까지 훔친 돈이 장난 아니라지? 인간 말종이구먼- 미친듯이 환청이 들려왔다. 밖에만 나오면 반복되는 증세였다. 후드를 더욱더 끌어내렸다. 낡은 긴 팔 후드집업 주머니에 손을 구겨넣었다. 반도 넘게 남은 과자는 한입도 먹지 않은채로 벤치에 버려졌다. 한차례의 환청을 겪고 나자 또다시 손이 간지러웠다. 아마 나중에 또다시 제 손목을 잘라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겠지만, 성열은 5년 동안 이성보다는 본능에 익숙해져버렸다.
며칠 동안 쫄쫄 굶은 몸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비틀대는 다리를 이끌고 공원을 빠져나가 길거리로 향했다. 먹잇감이 없을까, 사냥감이 없을까, 나에게 당할 사람이 없을까, 날 구원해줄 사람은 없을까. 머릿속에서 마구 정신이 엉켜들었다. 약을 하지 않았음에도 옛날에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처럼 자신이 점점 미쳐가는듯 했다.
이젠 온 세상이 어지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성열은 휘적휘적 걸어가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남자의 뒷주머니에는 지갑이 꽂혀있었다. 남자의 뒤에 바짝 따라붙은 성열은 주위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차단됨을 느끼고 조용히 손을 뻗었다. 꿀꺽- 마른 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길게 뻗은 엄지와 검지가 지감에 톡하고 닿는 순간이었다.
"뭐해요?"
"으악!"
얇은 손이 성열의 손목을 휙 채왔다. 지갑에만 꽂았던 시선을 위로 올려다보니 지갑의 주인인 남자가 고개를 뒤로 돌려 성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성열은 온 몸이 나른해짐을 느꼈다. 남자의 지나치게 크고 맑은 눈이, 아무것도 모른다는듯 물어보는 목소리톤이, 자신의 손목을 감고 있는 따뜻하고 여린 손이 그랬다. 숙련된 도둑인 성열이 남자가 뒤돌아보고 손을 뻗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리가 없었지만, 성열에겐 그딴건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저 눈 앞에 있는 남자의 눈. 힘이 풀린 다리와 까딱하고 넘어가는 정신을 붙잡지 못한 성열은 서서히 몸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끼며 남자의 눈을 조용히 응시했다. 푸른 빛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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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열이 정신을 차린 곳은 병원이었다. 성열의 옆엔 아까의 남자가 앉아 성열을 지켜보고 있었다.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자신이 어디서 뭐하다 이렇게 된건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성열은 천천히 눈을 깜박여 남자의 눈동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아..."
"기억났어?"
그제야 좀전까지 길거리에서 남자의 지갑을 훔치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이 떠오른 성열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종알종알 떠들어댔다.
"놀랐잖아, 그렇게 내 어깨에서 잠들어서. 하얀 가운 입은 사람이 영양실조라고 했던 것 같아."
"......"
"그게 뭔진 잘 모르겠지만. 근데 안 더워? 이 날씨에 검은색 긴 팔이라니!"
남자의 말은 한마디로 정신사나웠다. 잠드는게 아니라 쓰러진 거였고, 의사면 의사인거지 하얀 가운은 뭐고, 초면인 사이에 반말을 틱틱 내뱉는 것부터 화제가 휙휙 바뀌어가는 것까지 하나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그러나 성열은 남자의 말투 속에 숨어든 수많은 문제들은 하나도 신경쓸 수가 없었다.
"어디서..."
"응? 말할줄 아네?"
"어디서 들었어..."
남자의 목소리가 익숙했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데, 도저히 그 기억의 종착 지점을 찾을 수 없었다. 다시금 고개를 들어 쳐다본 남자의 눈은 여전히 푸른 빛이 일렁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얼핏 보면 초록색도, 때론 분홍색도 섞여 있었다.
"말할줄 알면 진작 말하지, 혼자 떠드느라 어색했잖아."
"......"
"뭐 묻었어? 아까 먹은 김치찌개 고춧가루가 안 빠졌나?"
빤히 쳐다보는 성열의 시선에 괜히 당황하며 얼굴을 더듬는 남자의 눈을 한참이나 더 쳐다보고서야 성열은 그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림자..."
"어? 뭐라고?"
"너...그림자..."
「아, 이런. 그림자가 찢어져버렸네. 이걸 어쩐다. 그림자는 소중한 존잰데. 큰일났다, 그치? 누가 이거 꿰매줬으면 좋겠는데. 거기 너, 이성열. 찢긴 그림자 좀 꿰매줄래?」
꿈 속의 그 목소리였다. 그림자라는 세 어절 단어를 내뱉는 성열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남자는 눈치채지 못한듯 특기로 추정되는 동문서답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아, 그러고보니 그림자! 그러고보니 쓰러지는 널 잡느라 내 그림자가 찢겨 버렸어. 어쩌지?"
"......"
"그림자는 소중한 존잰데. 큰일났다..."
성열의 사지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너,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남자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떨리는 성열의 손가락을 남자가 천천히 잡아내렸다.
"왜 그래? 설마 그림자가 왜 소중한건지 모르는건 아니겠지?"
"...너...너..."
"그림자는 내 생명과도 같아. 그림자가 있기에 우린 빛이란 존재를 깨달을 수 있어. 빛은 내 생명이니 그림자도 내 생명인거야."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성열의 손을 꼭 잡았다. 성열은 남자의 손에서 또한번 따스한 온기를 느꼈다. 또다시 몸이 나른해져왔다. 방금까지 몸을 떨게 했던 악몽 생각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남자가 생명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자신의 그림자를 가리켰다.
"이것 봐, 찢어졌잖아."
"......"
남자의 말대로 그림자의 모양이 이상했다. 남자가 앉아있는 형태 그대로 드리워져야할 그림자의 한쪽 끝이 진짜 찢겨진 모양처럼 덜렁대었다.
"음...그럼 성열아, 니가 좀 꿰매줄래?"
이어지는 남자의 말을 들은 순간, 성열은 다시 악몽의 공포에 휩싸이고 말았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거야? 내 꿈은 또 어떻게 아는거고? 창백해지는 성열의 표정을 보며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바느질 못해? 나도 못하는데. 바느질은 완전 젬병이거든."
"무슨 소릴... 하는거야..."
분명 저 남자가 하는 이야기는, 아무것도 모르던 순수한 어릴 적 읽었었던 동화 속의 이야기가 틀림없었다. 허황되고 어이없는, 영원히 늙지 않게 해달라는 헛된 소망을 어린이들에게 각인시키는 쓸데없는 동화따위 관심도 없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찢긴 그림자를 운운해대는 남자의 말을 들으면 저절로 피터팬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응? 피터팬 몰라, 피터팬?"
"......"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멀건 얼굴로 물어왔다. 피터맨을 모르는게 아니고, 니 정신세계를 모르는거야, 미친놈아. 성열은 당장이라도 입밖에서 튀어나올듯한 핀잔을 다시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그림자가 이상하다고 진짜로 느껴버렸던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보니 그의 그림자는 전혀 문제될게 없었다. 병원의 조명과 밖에서 쏟아지는 햇빛이 섞여 오묘한 모양을 만들어냈을뿐. 성열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자신은 왜 이런 날 병원에 누워있어야 하고, 하필 웬 정신병자에게 걸려서 이상한 소리나 듣고 있는지.
"설마 진짜 모르는거야? 찢긴 피터팬의 그림자를 웬디가 예쁘게 꿰매주는 그런..."
"닥쳐, 시끄러 죽겠어."
"...어?"
"너 혹시 정신병있어? 멀쩡한 그림자가 뭐 어쩌고 저쩌고... 알아듣지도 못하겠어, 니 말."
"피터팬 모르는거야?"
"피터팬이고 뭐고 간에, 날 여기까지 왜 데려와서 대놓고 반말에다가. 이름은 또 어떻게 아는건데?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이상한 소리만 해대고!"
목소리가 커져버렸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남자의 앞에서 씩씩거리는 성열의 머리가 띵해져왔다. 며칠간 먹지도 못하고 돌아다닌 후유증이 지나치게 컸나보다. 저런 남자 앞에서 쓰러지기나 하고.
"그야 당연히 내 눈 앞에서 쓰러지니까 병원에 데리고 왔지. 아, 혹시 기분 나쁜게 내가 무례하게 대해서야?"
그래, 이 새끼야. 무례해도 너무 무레했어. 알면 제발 반말 찍찍 내뱉으면서 화나게 하지 말고 내 앞에서 꺼져.
"음...내 소개도 안하고 다짜고짜 피터팬 얘기부터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난 김명수야. 반가워, 성열아!"
"씨발."
성열은 벌떡 일어섰다.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저 남자와 같이 있다가는 자신이 먼저 미쳐버릴 것 같았다.
"어? 왜 그래? 어디가?"
덩달아 일어난 남자가 얼떨결에 성열의 손목을 잡아챘다. 순간 아까전 지갑을 빼내려다가 이렇게 잡혔던 기분나쁜 느낌이 떠올라 성열은 진저리쳤다.
"이거 놔!"
그의 손을 뿌리치려 시도했지만 쓰러졌다 깨어난지 5분도 안된 성열은 생각보다 센 남자의 악력을 이길 수 없었다. 억울하고도 짜증나는 마음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잔뜩 인상을 찌푸린채로 성열이 남자에게 소리질렀다.
"나한테 왜 이러는건데! 뭐가 문제야? 니 지갑을 훔치려던건 미안하고, 쓰러져서 니가 여기까지 날 끌고 오게 한 것도 미안하고, 지금 이렇게 소리지르는 것도 미안하니까, 나 좀 보내주지 그래? 보아하니 차려입은게 딱 부잣집 도련님 스타일이네. 난 니새끼랑 다르게 존나 밑바닥에서 빌빌 기며 살아온 병신이라서 니가 지금 지껄이는 피터팬이니 뭐니 그딴 얘기 하나도 이해안되거든?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
"넌 생판 모르는 남 붙잡고 별거지같은 얘기하는게 취민가봐? 존나 정신사나워서, 씨발. 잡소리 들어줄 여유 없으니까 이 손 놓고 빨리 좀 꺼져, 새끼야."
남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한없이 맑고 순수한 눈동자였다.. 마치 어릴적 제 모습같았다. 그리고 성열은 다시 이를 악물었다. 어릴적 따위, 떠올리기도 생각하기도 싫었다. 자신은 그냥 이렇게 골골대며 살다 천천히 죽어가면 되는 그런 존재일 뿐이었다.
"저기...난 그냥..."
"저기고 뭐고 필요없어. 이것 좀 놔."
"싫어."
"뭐?"
남자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니, 원래보다 더욱 강한 느낌의 무언가가 담겨있었다. 성열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쳤지만 하얗고 뽀얗게 고생없이 자란 남자의 겉모습과는 이질적인 그의 센 악력이 성열을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다시 한번 알려줄게. 내 이름은 너도 아니고 새끼도 아니고 김명수야. 너 힘들게 살아온건 나도 알아. 그래서 도와주려는거야."
"뭐라고?"
성열은 순간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인간이 부잣집 도련님 티를 그렇게 내고 싶은지, 돈이라도 퍼부어 주려나?
"더러운 돈 따위 필요없으니까 꺼..."
"성열아, 너 많이 외로워보여. 어둡고 칙칙하고 우울해. 세상에 너무 많이 물들어서 그래. 벌써 어른이 되어버린거야. 내 눈엔 그게 보여."
"미...미친 새끼..."
스무살이 넘었는데 어른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성열은 정말 미쳐버리는 기분이었다. 자꾸만 불안해졌다. 무언가 폭발할 것 같은 울렁임이 가슴속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내가 밑도 끝도 없이 피터팬이니 그림자니 운운해대서 어이없었지? 내가 왜 이러는지 목적이 궁금했을거야. 아무래도 이제 말해줘야겠다."
남자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만갔다.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워졌다. 제발 이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벗어나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냥 이 새끼 옆만 아니면 어디로든지 돌아가도 좋을 것 같았다.집으로, 또 아까 그 공원으로, 어제 지갑을 훔쳤던 다리 밑으로, 라면을 샀던 편의점으로,
"내가 너의 어린 시절을 되찾아줄게."
그리고 나의 어린 시절로... 순간 눈물이 터져버렸다. 쌓였던 불안감과 두려움은 모두 이 말을 위해서였나보다. 남자의 짧은 말 한마디에 그만 모든 것이 눈물로 터져버렸다. 어둡고 깜깜했던 머릿속에는 서서히 환한 빛이 감돌았다. 어린아이의 밝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고, 달콤한 향내가 코를 간지럽혔다.
"난 영원히 늙지 않는 네버랜드의 피터팬이야. 김명수의 웬디가 되어줄래, 성열아?"
몸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주저앉은 성열의 눈에선 쉬지않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우는건지 이유도 모르겠고, 지금 머릿속에 떠도는 이 느낌이 무엇인지도 전혀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는채로 성열은 그렇게 숨이 넘어갈듯이 울기만 했다. 밝게 웃으며 손을 내민 명수의 실루엣이 눈물 너머로 아른거렸다. 어쩌면 정말로 난 어린 시절을 그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성열은 그렇게 생각했다. 무서운 세상 속에서 세상을 무서워하는 슬픈 어른이 되기 싫어서 지금까지 발버둥쳐왔는지도 모르겠다고. 어렴풋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네버랜드는 없다.
눈물을 훔쳐내자 다시금 명수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자꾸만 터지려는 눈물을 애써 막아낸 성열이 벌떡 일어나 명수의 손을 내쳤다.
"지랄하지마, 세상에 네버랜드 따윈 없어. 세계지도 본 적 없냐? 그딴건 존재하지도 않아."
"......"
"내 어린 시절, 다시 돌아가봤자 결과는 똑같아. 난 또다시 어른이 될거야. 이 세상은 날 순수한 어린아이로 놔두지 않아. 니가 지금 한낱 동화 따위에 빠져서 허황된 망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딴거 제발 집어쳐. 그래, 어릴때로 돌아가고 싶은건 누구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절대."
횡설수설 말을 내뱉는 동안 머릿속에서 맴돌던 웃음소리도, 달콤한 향기도 점차 사라져갔다. 밝은 빛은 사라지고 어두운 빛밖에 남지 않았다. 행복한 세상을, 피터팬을, 그리고 네버랜드를 꿈꿔본적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하지만 그것들은 단지 꿈으로만 남을 뿐이야.
성열의 머릿속에는 더 이상 희망을 가진 무언가가 남아있지 않았다. 단지 어둡고 좁은 골목길을 올라가 도착할 썩어가는 집에서, 또다시 오늘 끼니를 어떻게 때워야할지 고민해야할 앞으로의 우중충한 미래. 그리고 수많은 도둑질에 문드러진 자신의 시꺼먼 손 뿐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너랑 이딴 얘기하고 있었단 자체가 창피하다. 병원비 내고 이제 내가 나갈..."
"그거 내가 냈는데."
"씨발, 나갈테니까 너도 이만 내 눈앞에서 꺼져."
성열은 얼굴에 아직 축축하게 묻은 눈물을 훔쳐내고 병실 문을 열고 나갔다. 그 뒤를 다급하게 따라오는 발걸음을 애써 무시한채로, 울었던 것도 쓰러졌던 것도 도둑질을 걸렸던 것도 모두 쪽팔려죽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성열은 병원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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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열아, 너 집 어디야?" "......"
"너 밥먹었어?"
"......"
"아, 안 먹었으니까 쓰러졌겠구나..."
병원에서 집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는 짧은 거리였다. 그러나 성열은 그 두 배의 시간을 쏟아가며 이 길 저 길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그럼 나랑 맛있는거 먹으러갈래?"
저 망할 새끼를 어떻게 따돌리지. 아무리 무시해도, 욕을 해도 천하태평하게 밥 얘기나 하면서 따라오고 있다. 성열은 진심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있잖아, 몇 살이야? 나는 스무살이야. 성열이는 되게 어리게 생겼는데, 근데 나보다 나이 많으면 어쩌..."
"좀 닥치라고, 씨발아!"
"...헉."
동그래진 눈으로 쳐다보는 남자를 뒤로 하고 성열은 냅다 뛰었다. 너덜대는 신발이 자꾸만 거슬렸다. 뒤에서 더 이상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성열은 그렇게 명수에게서, 그리고 행복에게서 자꾸만 도망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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