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혼사, 혼사 노래를 부르는 바에 민상선이 하는 건 어떻습니까?"
"전하, 전 내시부 소속이옵니다"
"근데 어찌 이리 혼사에 관심이 많다 말인가?"
"다 전하를 위한 것이옵니다"
앞뒤 꽉 막힌 민상선의 대답에 오늘도 대화를 하기에는 글렀다고 판단한 왕은 익선관을 거칠게 벗어 내려놨다. 이 모든 상황이 익숙한 듯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상선은 내팽겨처진 익선관을 조용히 주웠다. 어전회의만 하고 나면 대신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혼사 이야기를 들먹거리는 탓에 왕은 다 내팽개치고 며칠째 방 안에서 꼼짝도 않는 중이었다. 이참에 밀린 잠이나 잘까 몸을 눕히려다가 민상선의 따가운 눈빛을 못 이겨 괜스레 백성들의 상소문만 만지작거렸다.
"성수청 소속인 자ㄱ"
“싫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럼 어찌하실 요량이십니까?”
“뭐, 그야 알아ㅅ… 그 눈빛 뭡니까? 내가 애ㄷ..”
차분히 말을 이어보려는 상선의 말을 불같이 왕은 불쑥 튀어나와 끊어버렸다. 또 한 번 입을 열려는 민상선을 잽싸게 알아채고 더 이상 대꾸도 못하게 왕은 그를 꾸짖어버렸다. 그러다 매서운 민상선과 눈이 마주치자 하품을 하는 척 눈을 슬쩍 감아버렸다. 민상선은 당장 얄미운 머리에 꿀밤 한 대를 놔주고 싶으나 시선 끝에 걸린 익선관 덕분에 간신히 올라가는 손을 막을 수 있었다.
“예, 전하 마음대로 하십쇼. 하찮고 안목도 없는 저는 이 이상 개입하지 않겠습니다”
“민상선..?”
“진정한 사랑 따위는 모르는 일개 상선을 왜 그리 아련히 바라보십니까?”
“아니,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습니까! 난 그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 그런 것입니다”
타임 in 21세기
01
w.스노우베리
"오랜만에 보니 반갑, 반갑구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왕의 말은 앞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성수청 소속 대신을 향하나 눈만은 민상선을 향해 무섭게 치켜세워져있었다. 그렇게 싫다고 했겄만. 하지만 민상선은 그저 능청스럽게 허리만 굽힐 뿐이었다. 꼭 이럴 때만 상선답게 군다니깐.
왕의 말에 쭈뼛쭈뼛 일어나 눈치를 보더니 무릎을 꿇고 앉자 이번에는 그 아니꼬운 시선을 앞에 앉은 자에게 옮겼다. 그러자 왕을 한 번 힐끔 훔쳐본 자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더니 이내 일어나 편히 앉아서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렇게 성수청은 가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코 성수청 소속으로 가셨네요, 김 석자 진자 형님"
"전하, 하대하십시오"
"그리 편히 앉아놓고 하대를 하라니 너무 모순적인 거 아닙니까?'
"송구하옵니다."
나름 농이라고 이것, 저것 뱉어보았는데 끝까지 격식을 차리는 모습에 왕은 진저리가 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민상선에게 시선을 옮겨 옆으로 와 앉으라는 손짓을 보내왔다.
"강녕 하셨습니까?"
"12첩 밥상을 먹으니 강녕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옆에서 민상선이 꼭 하나씩 뺏어 먹기는 하지만"
왕의 어린 투덜거림에 조금은 가벼워진 분위기에 다들 미소를 머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국정만 살피는 왕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저 큰 연꽃잎이 과연 비를 막아내줄 수 있을까라는 쓸모없는 고민을 같이 나눠줄, 그런 엉뚱한 생각을 못 미더운 척하면서 비가 오는 날에 직접 연꽃잎을 뜯어 비를 막아낼 수 없다고 단단히 고뿔에 걸려 힘겹게 말을 잇던 피 한 방울 하나 섞이지 않은 형제가 곁에 머물러주던.
“옥색 가락지가 잘 어울리십니다. 용안이 워낙 화려하셔서 그런가- 하... 하”
석진의 말에 세 사람 사이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왕은 그의 말에 흠칫하더니 소매 안으로 손을 꽁꽁 숨겨버렸다. 석진이 마른침을 삼키며 옆에 앉은 민상선을 흘겨보자 민상선은 그저 눈을 질끔 감아버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렇게 깡다구가 없어서야 상선 자리는 어떻게 꿰찬건지. 석진이 조용히 혀를 찬 뒤 보기 좋은 미소를 띠었다.
“시간이 그렇게 지났는데 아직 윤기가… 크"
아, 물론 옆에 앉아있는 윤기 말고요. 다른 대신들이라면 벌벌 떤 채 바닥에 이마를 박았겠지만 석진은 오히려 능청스럽게 농으로 왕의 날이 선 시선을 맞받아쳤다.
시간이 이리 흘렀는데 왜 제 눈앞에는 아직도 어린 전하가 앉아있는 겁니까.
“강산이 변해도 사람은 안 변한다더니…“
"이리 사소한 것에도 성노를 내는 것을 보니 너 또한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가정도 있으신 분이 아직 그리 어리셔서"
"네가 아이가 없ㅇ... 아, 너 내시부 소속이구나"
석진이 안타깝게 시선을 천천히 내렸다. 일방적으로 패를 당한 윤기가 입모양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자 석진은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번에는 윤기가 석진에게 엿을 선물해주기 위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왕은 자신의 책상을 한 번 내리쳤다. 예고 없는 큰 소음에 놀라 두 사람은 토끼눈을 하다 왕의 찌푸러진 미간을 발견한 나머지 조용히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두 형님 다 나가계세요!!!”
* * *
“뭐 아직도 그 눈빛이 상처라던가-“
“잘 들어라, 윤기야. 그 상황에 내가 하늘에서 전하의 연은- 으로 입을 떼는 순간 난 평생 전하를 뵙지 못할 것이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냐.”
“하루가 멀다 하고 대신들이 중전의 빈자리로 전하를 깎아내리고 있는 판국에 지금 그게 문제입니까?”
짜증이 가득 섞인 채 투덜거리는 윤기를 무시하고선 태평하게 돌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가던 석진이 뒤를 돌았다. 드디어 마주한 석진의 얼굴에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윤기가 또 석진이 제 말을 무시하기 전에 뒷말을 덧붙이려 했다. 허나, 돌아오는 석진의 대답에 윤기는 그저 멍하니 석진의 뒷모습이 점이 되어 사람인지 분간 할 수 없을 때까지 그저 가만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안다. 어연 3년이 지났어.”
“그 긴 시간이 흘렀으면 무뎌지지 않았을까 생각했지.”
“그래서 네 부탁을 들었던 것이고”
“근데 오늘 내 눈앞에 아직도 세자 전하가 앉아있더라.”
“그래서 난 태형이가 스스로 그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때까지 기다리려고.”
“너처럼 한 나라의 왕으로서 태형이를 생각해주는 이만 있으면 태형이가 숨은 쉬고 살 수 있겠냐.”
“나처럼 아우로 생각해주는 이도 있어야지-”
"다음에는 궁이 아닌 낙엽 떨어지는 나무 아래에서 보자, 항상 그랬듯이"
* * *
태형은 나무 밑에 편안히 누워 은행잎을 주워 따가운 햇빛을 가렸다. 그러나 이내 태형의 손가락에 끼워진 가락지가 햇빛을 반사해 태형의 눈을 괴롭혔다. 그래, 이제 마음도 모자라 눈까지 괴롭히는구나. 낙엽을 떨어뜨리고 오랜만에 새끼손가락에서 가락지를 빼보았다. 언제까지 이 조그마한 가락지 하나가 날 조여올까, 벗어나지는 못할까. 태형도 굳이 민상선이 말을 전해주지 않아도 제 자신을 대신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살아생전 제대로 된 지아비의 역할도 하지 않은 왕이 중전이 죽고 나서 이 난리를 피우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떡해야 이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평소처럼 실마리가 보이지 않은 생각에 잠시 눈을 감자 낙엽은 세찬 바람에 조용히 태형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살아있으면 빌어라도 볼 수 있을 것을…”
* * *
"오호라- 썅!!!"
"수고염"
"아니, 저번이랑 점수는 같은데 이렇게 등급이 떨어지는 게 가능해?"
초등학생이냐 점수에 연연하게. 절망스러운 모의고사 등급에 그대로 종이를 꾸겨 현실도피를 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잘못 프린트된 것일 거야. 그래야만 해. 제발 살려주세요,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그렇게 다시 구겨진 종이를 폈을 때 달라진 것 없는 뚜렷한 검은 숫자들에 망연자실해 머리를 헝클이고 엎드렸다. 아씨, 나 할머니한테 짱 잘 봤다고 했는데...
"원래 공부는 우리 길이 아니었잖니, 새삼스럽게"
"위로 참 고오맙습니다-"
나랑 별반 다를 것 없는 숫자가 적혀있는 종이를 든 친구가 시원하게 미소를 짓더니 내 등짝 몇 번 두드리고는 버스정류장으로 뛰어갔다. 나는 바구니에 가방을 넣고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저런 사소한 교통비가 얼마나 큰 지출인지 잘 알기에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데 다행히 오가는 길에는 평지만 가득해서 딱히 문제도 없었고 이제는 날 신기하게 보던 시선들도 익숙해져버렸다.
"나는 낭만고양이~"
"홀로 떠나가 버린 깊고 슬픈 내 바다여~"
스트레스 푸는 데에는 노래방이 최곤데. 입맛을 다시고 다시 한번 힘껏 페달을 밟았다. 집은 가까워지는데 아직도 할머니한테 말할 좋은 변명이 생각나지 않아 열심히 이것저것 생각하고 시뮬레이션을 해보는데 사람이랑 부딪혀버렸다. 부딪혀버렸다? 부딪? 그러니깐 사람이랑...?
"까아아악!!!!!"
나도 똑같이 넘어진 와중에 자전거 앞에 누워있는 사람을 보고 더 놀라서 인정사정없이 소리를 질러버렸다. 사람은 죽은 건지 인기척이 없었고 눈도 뜨지 않았다. 나 지금 사... 사람 죽인거야? 살인자는 죽어도 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다가가 코밑에 손가락을 대자 미약한 바람이 느껴졌다. 안심이 들자 몸에 힘을 풀고 그제야 부딪힌 사람을 눈에 제대로 담는데 참으로 이상하기 짝이 없다. 어디서 이런 옷을 구해와서 입고 있는지 누가 보면 오늘 할로윈, 아니 이 정도 갖춰 입은 거면 조선시대에서 날라온 줄 알겠다.
"하..."
"저기요…저기요!! 눈 떠봐요!!"
남자는 머리가 어지러운 것인지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눈을 뜨려다가 다시 힘없이 감아버렸다. 안돼, 다시 뜨라고! 떠야 해! 내 고함에 주변 사람들이 한 번씩 쳐다보고 가는데 괜히 자전거 살인자로 오해를 받을까 봐 입을 싹 다물었다.그래, 숨은 쉬니깐 아직 죽은 건 아니지. 머리에 피도 안 나고, 괜찮을 거야.
"아~ 부축해달라고요"
"머리 울려..."
"아~ 걸을 수 있다고요?"
제멋대로 해석해서 대답을 하는 내가 이상하게 느껴졌는지 그제야 남자는 눈을 살그머니 다시 뜨기 시작했다. 옳지, 그렇게 뜨는거야! 그리고 멀쩡히 일어나서 가던 길 가는 거예요. 남자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내 안경을 홱 벗겨버렸다.
"무례하다. 짐 앞에서... 아"
지금 말없이 내 안경을 멋대로 벗긴 게 더 무례하신 건 모르시는지. 내가 어이가 없어 빤히 바라보자 남자는 내 시선에 민망한 건지 아님 정신이 드는지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펴보더니 또다시 표정을 일그렸다.
"아니, 이, 이게 다 뭐라 말이냐?"
말도 더듬고 이상한 말투도 쓰는 게 뇌에 문제가 생긴 건가 싶었다. 아, 뇌 다친 거면 보험비에, 병원비에... 와, 사고 진짜 제대로 쳤구나.
"저기 괜찮으세요? 막 뼈나 다른 아픈 곳은 없어요?"
"넌 누구냐?"
1번 당신을 자전거로 친 사람, 2번 오늘 모의고사 등급 때문에 할머니한테 먼지 날리도록 맞을 불쌍한 사람, 3번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고등학생. 문제는 삼지 선다형이고 맞춰보세요-하고 싶을 정도로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듯해 보이는 남자에게 내 입으로 내가 그쪽을 자전거로 쳐버렸다고 자진해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근데 문제는 뒤에 질문이 더 가관이었다.
"여긴 어디냐?"
"사거리요."
"아니, 궁도 아니고 저잣거리도 아니고. 아니 저것은 또 무엇이냐"
궁? 저잣거리? 저것이라고 남자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가니 유유히 지나가는 초록 버스 한 대가 보였다. 와, 5살 아기도 알 단순한 단어인 버스도 모를 정도면 머리를 얼마나 다친 거야. 버스요. 내 대답에 유치원생 마냥 똑같이 버스라고 힘겹게 단어를 내뱉는데 또 곧바로 내게 저것은 무엇이냐고 물어오는데 신호등이라고 답해주니 머리를 쥐어뜯을 기세로 감쌌다.
"이곳은 어디냐!!!"
"네?"
"어디냐고!!"
"서... 서울이요!!"
"서울? 그건 뭐냐?"
와, 미치겠네. 진짜 단단히 뇌를 다친 게 분명하다. 나는 내가 범죄를 일으켰던 말던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의 상태의 심각성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가 더 큰일이 날까 싶어 무작정 남자의 손을 잡고집으로 뛰어갔다. 더 이상 상태가 심각해지기 전에 어서 할머니한테 말해야 한다. 남자는 내 손에 끌려오면서 자꾸만 주위를 둘러보는 바람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그리고 집 앞에 도착하자 남자는 손을 홱 빼버렸다. 내가 의아해 뒤를 돌아보자 남자는 얼빠진 얼굴로 혼자 중얼거렸다.
"이곳은 조선이 아니다..."
"조선? 그게 언제적인데. 뭔 조선이래"
"그게 언제적인데?"
남자는 필사적으로 내 팔을 붙잡아왔다. 아니, 그렇게 얼굴을 들이미시면. 부담스러워 눈을 이리저리 돌리자 더 격하게 내 팔을 흔들었다. 공부 지지리도 안 해서 이런 거 잘 모르는데 그래도 대충 조선시대니깐 한 1900년 정도면 끝나지 않았으려나 싶어 열심히 머리를 굴려 사칙연산을 했다.
"뭐... 한 대충... 조선이 끝난지 100년도 더 됐죠!"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쓰러저버렸다.
* * *
뭐겠어요! 여러분들의 설마가... 맞습니다!!! 이거슨 신작이로다!! 아니... 쇼트트랙 다 끝나면 시작하려고 했는데... 어제 룰루랄라 쓰던 28화 날라는 가구(눈물) 마음은 허한데 크리스마스날 독자님들을 만나고는 싶구... 한성이 보니깐 너무 뽐뿌받아서 못 참겠구... 그래서, 아무쪼록 '타임 in 21세기' 잘 부탁드립니다.ଘ( ˊᵕˋ )ଓ이거슨 작가의 토킹이다
MERRY CHRISTMA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