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데는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
없다라고 말하는 순간 말과 말 사이의 삶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이병률, 눈사람여관-
광염과 퇴색 1
"엄마. "
원우는 정말 착해요. 또 나한테 잘해줘요. 내가 초코우유 좋아하는 걸 알고 매일 사다주거든요. 원우는 키도 크고 공부도 잘해요. 반에서 1등이거든요. 원우 꿈이 경찰이라고 했어요. 공부를 열심히 하고 경찰이 돼서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나쁜 사람들을 벌준다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나쁜 사람들도 종류가 있고 사연이 있다고 해줬어요. 단지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도 했어요. 원우가 알겠대요. 자기는 그런 걸 잘 구별해낼 수 있다고 했어요. 원우가 그랬어요. 잘못을 한 사람은 정작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른대요. 그래서 우리가 느끼고 있는 이 죄책감은 우리의 잘못에서 비롯된 게 아니에요. 우린 착한 사람들이라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엄마, 우리 이제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에요.
엄마는 늘 벽을 보고 계신다. 벽을 한 번씩 훑고 나서 바닥을 바라본다. 먼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도 내려앉는 먼지 때문에 엄마의 눈은 잠시라도 쉴 틈이 없다. 먼지를 발견하면 그대로 화장실로 가 락스를 꺼내오신다. 그리고선 창문을 활짝 열고 바닥에 락스를 뿌린다. 그렇게 엄마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먼지와의 전쟁을 벌이신다. 처음에는 엄마의 성격이 다른 사람에 비해 유난히 깔끔하신 편인 것인줄로만 알았다. 그런 엄마의 증상이 결벽증이라는 진단을 통보 받고서, 그제서야 천천히 엄마를 이해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쩌면 엄마는 엄마의 상태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 엄마의 그 행동들이 아버지로 인해 생겨났을 것이라고.
난 아직까지도 엄마의 전남편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알지 못한다. 알고 싶지 않았고, 알 필요 역시 없었다. 엄마는 내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남편과 이혼을 했으며 그 이유는 남편의 외도였다. 그 당시 어린 나는 매일 같이 소리 지르며 싸우고 물건을 부수는 부모님의 모습들을 기억에 담아두지 않으려 애썼으며 고사리 같이 작은 손으로 두 귀를 막고 밤을 지샜다. 하루 종일 뵈이지 않았던 아버지는 밤이면 엄마의 머리채를 잡으며 등장하셨고, 나는 두려움에 벌벌 떨며 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이것이 나의 유년 거개의 기억이다. 그래서 난 아직도 큰 소리를 들으면 지레 겁을 먹고선 소변을 보고 싶어진다.
머리가 제법 커지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다녀가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잔해들을 치우며 작고 여린 내가 그 사실을 알지 않았으면 했던 것이다. 치우면 생기고 닦으면 또 다시 생겨나는 쓰레기 따위의 것들을 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버지가 만든 더러운 소행을, 불쌍한 엄마의 눈물을 말이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터벅터벅. 혼자서 등교를 한다. 오늘은 원우도 없고 나 혼자다. 말동무가 없으니 아침부터 햇빛이 쨍쨍한 여름인데도 옆구리가 시렵다. 원우는 시골에 있는 할머니댁엘 갔다. 매년 여름 방학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 일주일 동안 놀러간다고 한다. 나도 그 틈에 껴서 같이 놀러 가고 싶지만 원우의 가족과 피도 호적에도 섞이지 않은 내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면 퍽이나 좋아라 해줄 것이다. 나 같은 애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공부를 해야하는 죄인은 방학에도 보충을 나가야한다.
곧 있으면 장마가 올 건지 날이 갈 수록 기온이 높아지는 것 같다. 덕분에 아침부터 온몸이 땀으로 범벅되어 있다. 땀이 몸에서 나는 건지 셔츠에서부터 새어나오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시간만 남아돌았다면 지금 당장 집으로 다시 들어가 샤워를 하고 새로운 셔츠를 꺼내 입었을 것이다. 망할 여름. 죽기 전에 여름이 꼭 사라졌으면 좋겠다.
"뭔데 오늘은 혼자 가냐?"
그렇지 않아도 더워서 짜증이 나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들으면 절로 머리가 아파지는 인물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건방지고 상스럽기 짝이 없는 말투와, 깡패처럼 한 손을 주머니에 반쯤 집어넣은 다소 건들거리는 듯한 자세를 겸비한 인물이다. 머리는 노랗게 탈색을 한 건지 끝이 보기 흉하게 얼룩졌다. 사탕을 밀어넣어 빵빵해진 볼을 하고선 얇고 긴 다리를 휘적이며 다가온다.
"남이사. 혼자 가든 말든. 머리나 어떻게 좀 해봐. 머릿결 다 상했네."
"남이사. 상하든 말든. 왜 그 새끼랑 안 가?"
"말 좀 그렇게 하지 마. 이름 예쁜 애를 왜 그런 식으로 불러?"
"... 권순영이 더 예쁜데."
"뭐?"
아이씨. 전원우보다 내 이름이 더 예쁘다고. 그렇게 말하는 권순영의 얼굴은 조금은 붉어져 있었다. 처음 본다, 저런 얼굴. 꼭 선생님한테 잘못한 걸 들킨 얼굴 같잖아. 코스프레를 한 듯 백금발에 가깝게 탈색을 한 머리는 노랗고 부끄러움에 얼굴은 달아올라 빨간 꼴이 마치 신호등 같아 웃겼다. 별 시덥잖은 말로 질투 아닌 질투를 하고 부끄러워 하는 게 조금 귀엽기도 하고.
"... 넌 좀 뜬금없는 말을 잘 해."
"뭐래. 야 꺼져. 지는 뭐 얼마나 말을 잘 한다고."
"이것 봐. 너 내 말 제대로 이해도 못했지?"
"야! 아씨. 학교나 가. 장원우도 옆에 없는 게."
"원우 없어도 갈 수 있거든. 그리고 전원우야."
"어쩌라고. 내 이름은 권순영인데요."
어쩌라고. 내 이름은 권순영인데요. 이 두 마디가 날 웃기게 할 줄이야. 떼를 쓰는 아이처럼 떽땍거리던 권순영이 얄미워서 째려보다가 저 두 마디로 인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나보다. 나를 따라서 웃는 권순영을 보니 순간 기분이 이상해졌다.
조금만 심기를 건드려도 욱하는 성격의 권순영은 점화된 가스레인지 위의 양은냄비 같았다. 기분이 안 좋다가도 금세 까먹어버리고 헤실거리는 얼굴을 하면 얘가 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구분이 가질 않는다. 내가 무시하는 말투로 말을 하면 그걸 또 듣고서는 씩씩 거리다가, 어느 순간 무엇에 의해 화가 풀린 건지 바보 같이 화가 나 있던 얼굴을 뭉개고 눈꼬리가 휘어 보이게 웃으면, 그러면...
"반하겠다."
"뭐라고? 반한다고 나한테?"
"멍청한 게 귀여워서 반할 것 같아."
"야 너 이리와. 너 지금 그거 욕이지."
들켰다. 아니야. 아무래도 더위를 먹은 것이 분명하다. 아침부터 사정없이 몸을 향해 내리꽂는 햇빛을 이겨내지 못하고 드디어 더위를 먹고 돌아버린 거야. 아무렴. 그렇지 않고서야 저 망할 권순영이 웃는데 귀여워서 반하겠다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뱉어냈겠어? 평소 같으면 주름 생기니까 적당히 웃으라고 한 마디 정도만 해주는데 말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른 한 쪽으로는 계속 이 생각을 밀어내고 있었다.
나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잡으며 학교로 끌고가는 내 옆의 권순영이, 있어줘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처음이었다. 오늘따라 원우의 빈자리는 컸고 때마침 권순영이 그 자리를 채워줘서일까. 원우가 다시 오면 이 생각도 곧 없어지게 될까. 머리는 여러 개의 생각들이 엉켜 서로를 붙잡고 놓아주려 하지 않고 있다.
코 끝에서 권순영의 향기가 맴돈다. 어릴 때 엄마가 빨아주던 스웨터에서 나던 냄새 같이 포근한 냄새. 원우가 뿌리는 향수와는 또 다른 냄새다. 향수를 뿌린 원우의 몸에서는 갓 샤워하고 나온 듯한 냄새가 항상 났었는데.
"권순영. 너 향수 뿌려?"
"왜. 내 몸에서 냄새 나냐?"
"조금. 뭐 쓰는데?"
"다우니 보라색."
"멍청아. 그게 향수냐."
아 왜 또 시빈데. 하며 울상을 짓는 권순영이 또 귀여워서. 나는 단정 짓기로 했다. 정말 나는 더위를 먹은 것이 확실하다고. 미치려면 곱게 미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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