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행기(退行期) : A
w. 다원
연아. 봄이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이 곳에도, 꽃이 피긴 피었어.
그 꽃 한송이가, 왠지 자그마한 희망 같이 느껴져 미련한 마음이 둥실 부풀어 오르더라.
익숙해 지는 게 무서운 거라고, 이 잔인한 곳에서 피어난 그 꽃 한송이로 인해 오늘 아침은 간만에 기분이 좋아졌어, 바보처럼.
네가 맨날 고치라고 했던 그 무른 성격이 아직도 고쳐지지 않았나 봐.
네가 없는 난, 여전히 사리분별 할 줄 모르고 어떠한 판단 조차 하지 못하고, 사실 지금 난 어디로 가야할지 조차 알지 못해.
벌써 네가 없는 채로 162번의 해가 지고 떴는데, 아직도 네가 나의 곁에 없다는 게 무서워.
너를 다시 보지 못할까봐 두려워. 매일 볼 수 있다 생각했던 그 웃음이 사실 마지막이었을까 봐. 무섭고 또 무서워.
연아. 이번엔 내가 너를 찾아갈게. 반드시 너를 꼭 찾아가서, 모든 게 다 괜찮을 거라고, 너의 모든 두려움을 품에 꽉 끌어안아 줄게.
지금 많이 무서워하고 있을 나의 연아.
사랑해.
나의 사랑, 부디 살아서 만날 수 있기를...
- 102,988번 째 희생자의 편지 中
2019. 06. 27
7 : 20 pm
정신연령이 어려지면 몸과 마음이 모두 어려지기라도 하는 건지,
매퀘하게 올라오는 담배연기를 바라보던 지민이 진짜 7살 난 아이마냥 입을 가린 채 콜록콜록-하고 마른 기침을 내뱉었다.
매운 냄새 덕에 지민의 붉어진 눈동자 속엔 벌써부터 눈물이 가득차기 시작했고,
나 또한 사람이긴 한 건지 일말의 죄책감이 발끝부터 스물스물 기어올라오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담배를 끊다든지 그런 미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보다 그저 그런 지민의 모습을 바라보며 의자에 더욱더 몸을 깊숙이 묻었다.
담배 연기가 가득 찬 병원은 참 이질적이면서도, 오히려 금단의 것이 아름답다 하듯, 꽤나 멋있는 풍경으로 다가왔다.
지민을 처음 본 건, 내가 이 병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물론 레지턴트 1년차가 얼마나 따까리인 건지도 몰랐을 때였고.
['regression (퇴행)' 이네요. 더 좋았고, 편했던 어린시절으로 되돌아 감으로 인해 불안한 것들을 피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대처기제인데, 별로 심한 정도는 아닌 것 같고. 'psychotherapy (심리치료)' 몇 번만 받으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걱정가득한 얼굴로 '의사선생님, 의사선생님' 하며 빌빌 기는 어머니 앞에서, 기고만장한 얼굴로 잘 알아듣지도 못할 용어를 써가며
잘난체 하는 그 의사새끼가 보기 싫었던 건지, 아님 그 옆에서 창백한 얼굴로 금방이라도 죽을 것같이 벌벌 떠는 성인 남자가 보기 싫었던 건지.
[선배, 그거 'regression (퇴행)' 아니고 DH (망상과 환각) 이에요. 쟤 지금 혼자 중얼거리는 거 안 보여요?
대처기제가 아니고, 딱 봐도 이상행동이잖아요. 이상행동 보인 지는 꽤 된 것 같은데.
DH 상태에서 어줍잖은 심리치료 같은 거 전혀 안 먹히고요. 쟤 지금 격리 안 시키면 바로 미쳐요. 자살한다구요.
선배가 몇년 차인데 저한테 보이는 게 선배한테 안 보일리는 없고, 설마 귀찮아서 그냥 보내려는 건 아니죠?]
지나가던 따까리가 툭 뱉은 말에, 지나치게 당황하며 아니다. 쟤가 1년차인데 뭘 몰라서 그런다. 어머님은 하나도 신경 안 쓰셔도 된다.
손사래 치며 부정하던 선배는, 결국 지민이 일주일만에 손목을 긋는 해프닝을 만들고서야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그리고 선배한테 대들었던 따까리인 나는, 이렇게 1년을 넘게 지민 전담 레지던트로 이름이 붙게 됐고.
"선, 생님. 콜록- 벌써 7시 넘었는데, 지민이 집에 안 가요?"
25살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린 얼굴을 갖고 있는 지민을 바라보며 후- 하고 숨을 내쉬자,
말간 얼굴의 지민의 얼굴이 순식한게 확- 붉어지며 그가 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 앞으로 손사래를 쳤다.
콜록콜록- 기침 소리가 잦아졌고, 눈을 질끈 감은 지민이 결국 손가락을 들어 코를 막았다.
지민아, 집에 가고싶어? 퍽이나 다정한 목소리에 울먹이던 지민이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저는 선생님이랑 더 같이 있고싶은데, 선생님은 바쁘시니까.
그럼 지민이가 집에 가야하는 거 아니에요?"
코가 막혀 앵앵거리는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려퍼졌다.
예전 같았으면 추궁하는 목소리에 벌써 울음을 터뜨렸을텐데, 지금와서 보니 그래도 많이 컸다 싶다.
뭐, 그렇다 쳐도 약 10살 정도겠지만.
지민의 우물쭈물한 목소리를 들으며, 이미 짧아진 담배를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비벼끄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앞에 서자, 앞 의자에 앉아있던 지민 또한 쪼르르 달려와 내 옆에 섰다.
하얀색 커튼 뒤로 무언가 복잡하게 움직이는 것들이 비춰지고, 그에 호기심이 일었는지 커튼으로 내밀어지려는 지민의 손을 꽉 붙들었다.
지민아.
...네, 선생님?
채 닫히지 못한 커튼 뒤, 꽤나 높은 층에 있는 우리를 발견한 건지, 우리를 향한 눈빛이 느껴지고.
그를 유심히 바라보던 지민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몇발자국 물러났다.
"선, 선생님. 방금 누가. 누가 저를."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로 내 옷자락을 잡아오는 얼굴은 역시 어렸고, 또 여렸다.
내게 제 모든 것을 기대 듯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지끈거리던 머리가 더더욱 아파왔다.
자유를 원했던 적은 있었다.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없어졌길 바랐던 적도 있고, 이 세상에 홀로 남길 바랐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내가 원했던 게 이런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바람을 이런 식으로 돌려 받는 건가, 빌어먹을.
지민아.
선생님이랑 더 같이 있고싶다고 했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에 겁을 먹은 건지, 파르르 떨던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그의 행동에 커튼 틈, 방금 지민과 눈이 마주쳤을 한 남성을 내려다 봤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붉은 눈동자에, 갈증 때문인지 쉴새없이 떨리는 온 몸.
사람의 외형을 하고는 살아있는 것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동자.
피와 비명이 난무하게 돌아다니는 잔인한 현장.
지민이 더이상 보지 못하도록 커튼을 닫으며 끝내 하지 못할 말을 삼켰다.
"그래, 다행이다."
아마도,
우린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고.
*Whalien52 글이 너무 이어지지 않아 가져온 예전에 써놨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