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같은 선배와의 전쟁
by.탄덕
03
강의실 문이 활짝 열렸고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확인하던 난 당혹감에 굳게 닫혀있던 입이 진주알을 품고 있던 조개처럼 서서히 벌려지다 기어코 들고 있던 가방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툭- 적막한 강의실 안에 아주 작은 굉음이 일었다. 그래, 전과는 아니겠지. 전에 경영인 머시기 하던데 에이 설마, 아닐거야. 찌푸린 미간과 함께 고개를 뒤로 빼며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이를 놓칠 리 없는 윤기 선배가 앞으로 성큼 다가와 주름 생긴다며 내 미간을 꾹 눌렀고 그 행동에 멋쩍게 웃으며 선배의 손을 떼어내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고막에 울러퍼졌다. 생각해보니 저 인간도 있었네, 밑에 떨어져있던 내 가방을 자기 앞에서 치우라는 제스처와 눈빛이 아주 가관이었다.
" 가방 좀 치워주지. 밟고 지나갈 순 없잖아."
예예, 어련하시겠습니까. 예민보스 공주님 가시는 길 편히 해드리지요. 가방을 들어올려 품 안에 안았다. 그러고선 호석 선배를 조심히 올려다봤다. 저 재수 없는 꼬락서니는 20분 전에 만났을 때와 비교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수업 시간이 다가오는 건지 밖이 잠시 어수선해지더니 이내 태형 선배를 기점으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선배는 저 멀리서 강의실 한 중간에 있던 우리 셋을 발견하고는 후다닥 달려와 윤기 선배와 호석 선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웰컴, 정호석. 태형 선배가 그를 향해 베시시 웃었다. 무거워, 치워. 그렇다고 해서 예민보스가 호락호락하게 어깨를 내어줄 리가, 당연히 선배는 보기 좋게 무시당했다. 웃어보이는 낯짝과는 달리 씁쓸함이 겹쳐져오는 안쓰러움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 정시우, 웬일이냐. 맨날 간발의 차로 지각 면하던 애가."
" 얘 이름이야? "
" 어, 내가 아끼는 후배."
" 이제 보니 우리가 통성명을 못했네, 내가 정호석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지 않나."
" 또 왜 그러냐."
" 장난이야. 모르는 사이에 우리 꽤 친해졌거든."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옛날 속담 틀린 거 하나 없었다. 흥미롭다는 식의 어감과 순진하게 웃어보이는 눈매가 나를 간과했다. 명백한 조롱이었다. 이 선배를 내가 감히 이길 수 있을까, 발악해봤자 닿지 않는 산꼭대기 비탈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벌써부터 나를 가지고 얼마나 흔들어댈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문장에 뜻하지 않던 잔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까불지 말랬잖아, 소위 우리가 독특하다고 부르는 4차원이 아닌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부류들 중의 하나였다. 이제서야 겁이 났다, 이 사람은 함부로 다가가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걸 특유의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여유로움에서 알아채버렸다. 하지만 그를 두려워하는 나의 치부쯤이야 이 선배는 간파했겠지, 쥐새끼처럼 쫓기다 완벽히 들켜버렸다.
" 오늘 학식 먹다가 한 판 했다며, 호석이가 정리했다고 하던데."
" 네, 얼굴 보고 사과도 드렸어요."
태형 선배는 잘했어, 이 한 마디를 넌지시 낚시대처럼 던지더니 넋이 나가있던 나를 보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저 행동은 백프로 자기가 한 말을 후회하는 중임을 뜻할 것이다. 나와 선배의 상황을 두 눈으로 똑똑히 감상한 유일무이한 목격자인데, 몸만 치고 박고하며 싸우지 않았지 만났다 하면 시비가 붙어버리는 당사자 둘 앞에서 대놓고 얘기를 했으니 후회할 만도 했다. 거, 길막들 하지 말고 비켜봐. 뒤에서 불만을 토로하는 학생들에 의해 정신이 다시 들었는지 태형 선배가 내 팔을 낚아채 남아있는 빈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난 설명을 요구했고 참아왔던 궁금증들을 쏟아부었다.
" 뭐예요? 정호석 선배 맞죠? 그럴 리가 없는데, 잘못 본 건가."
" 아니, 너가 면상에 대놓고 신명나게 까내리던 정호석 맞아."
" 그럼 그 때 저한테 조금이라도 귀뜸을 해주셨어야죠."
" 그래서 내가 너 가만히 다시 앉혔는데 네가 빡쳐서는 호석이한테 따진거잖아."
" 그거야 잘못도 없는 선배가 사과를 하니까 열이 받아서- 몰라요."
말도 안 돼, 이런 일은 세상이 두 쪽 나도 없어야 한다며 책상에다 미친놈처럼 반은 정신을 놓은 채로 머리를 내리꽃고 있는데 비어있던 옆자리에 인기척이 들어 머리를 책상에 붙이고서 옆을 돌아봤다. 언제 대화를 다 끝내고 온 건지 윤기 선배가 본인이 잘 구슬리고 왔다며 슬그머니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윤기 선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에 진지하게 휴학을 고민했다. 두 달간 같이 공부한대, 심리랑. 어떠한 말도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았다. 두 달이라 거의 한 학기인 셈이었다. 반대편에서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호석선배를 훑어봤다. 괴리감이 느껴져 내 눈을 의심하고 싶었지만 반박조차 불가한 형체에 이내 모든 걸 포기하고 풀려버린 눈꺼풀과 함께 다시 볼을 책상 위로 기댔다. 왜 저에게 이리도 가혹한 시련을 주십니까, 가끔 좀 욱해서 문제였지 나름 착하게 살았잖아요.
아무런 죄목도 없는 신을 원망했다.
" 근데 너 공고 붙여놓은 거 못 봤냐."
" 제가 공고 볼 시간이 언제 있었겠어요, 저 인- 선배와 관련된 일 아시잖아요."
" 들었어, 사이좋게 좀 지내라. 틱틱대서 그렇지 괜찮은 애야."
" 괜찮기는."
" 가만 보면 너한테만 유독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 근데 분명 제 기억상으론 지원한 적이 없는데 잠깐 착오가 있었나봐요. 어쩐지 없던 수업이 갑자기 잡히는 게 이상했더니만 문자를 잘 못 보낸 -"
" 이번에 같이 프로젝트 한다고 해서 내가 너까지 이름 써서 올려보냈지."
진짜 없애버릴까, 삼각눈을 접으며 자랑스러운 낯빛을 지어보이는 그에 선배고 나발이고 순간 어퍼컷을 갈길 뻔 했다. 강의실을 나가려고 가방을 주섬주섬 올려매던 손으로 주먹을 말아쥐곤 가슴 한 구석에서부터 차올라오는 화를 꾹 눌러 담아 상황의 키워드를 다시 바로잡았다. 윤기 선배는 일그러진 내 면상을 본 건지 아니면 못 본 척 하는 건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나를 설득시켜왔다.
" 생각을 해봐, 우리 학교가 밀어주는 곳이 어디냐."
" 심리요."
" 거기에 경영을 더해봐."
끝, 선배가 손을 목 위로 올려 게임 오버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아- 굉장히 집중도 높은 고강도 설득력에 탄식이 흘러나왔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위 아래로 열성적이게 끄덕이고 있었다. 이 불같은 거부 반응을 단번에 묵인시키는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것도 모자라 박수까지 쳐주고 싶었다. 민윤기 선배의 말빨이란 사기든 뭐든 무얼 해도 먹고 살 성공할 인재다.
" 지금 같은 불황기에 여기서 잘만 하면 인생에 하드캐리한 스펙 하나 남기는거야, 자식아. 고작 말싸움 한 번 한 거 가지고 내빼지 말고 잘해. 다 선배가 겪고 온 거 아니겠냐."
하드캐리한 스펙같은 소리하지 마세요, 제 인생은 이제 두 달간 사해 바다에 내팽겨친거나 다름없으니까.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얼마나 대단한 프로젝트길래 내가 자진으로 지원한 것도 아닌데 억울하다고! 두 손으로 책상을 세게 내리치고선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쌓여져있던 분덩어리가 마그마처럼 올라와 도리어 화산을 분출해버렸다. 약간의 말소리만 들려오던 적막한 강의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목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 그러니까 대체 경영과 심리학이 공동으로 진행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뭐가- 커피 드실래요?"
시발 미친, 분주하던 손놀림이 멈췄다. 그보다 시공간이 멈춰버렸으면 하는 바람일지도 모르겠다. 감각 신경이 한 데로 모여들었다. 역시 한낮 불쌍한 대학생따위를 신께서 보살펴 줄 리 만무하시지, 풉- 피식대던 웃음소리가 연달아 들려오더니 곧이어 학생들의 비웃음소리가 내 귓 속을 쑤셔박았다. 하다하다 정호석 조롱거리도 모자라 학생들의 비웃음거리까지 된 것 같은 느낌에 마치 서커스단의 원숭이로 환생한 기분이었다.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아가면서까지 설교를 펼쳤는데 애당초 계획에도 없던 데이트 신청이라니 이건 뭐 허공에 달려있는 줄을 끌어당겨 목에 매달고 싶을 정도의 절박한 심정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자리를 박차고 열변을 토하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옆 쪽으로 기울였다. 마침 그가 이 곳에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까먹고 있었다. 이 놈의 깜박 증세는 어째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해지는 모양새다. 나를 꿰뚫듯이 쳐다보는 그의 검은 눈동자와 눈길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하기 위해 이 거지같은 주둥아리에서 내뱉어버린 말이라곤 용돈을 쓴다는 미친 소리였다. 빌어먹을 반사 신경, 이 개같은 척수를 다 뜯어버리던가 해야지. 뒷통수가 뻐근해져왔다.
" 네가 쏘는 건가, 여기 있는 학생들까지 다."
교묘한 새끼, 선배라는 호칭이 아깝다. 쥐구멍으로 쏙 빠져나가는 꼬락서니가 네가 쥐새끼네, 난 병신같이 당하는 곰새끼고. 말 섞는 것조차 유감이라고 생각해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굳이 대꾸하지 않아도 차피 10초만 더 있으면 들떼같이 고맙다며 얻어먹을 인간들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내 예상은 백발백중이었다. 이 상황을 노린 거겠지, 순순히 꼬리를 내린 적이 없는 그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수업이 끝나자 난 학교 내 카페로 향했고 오늘 같이 들었던 사람 수라도 적어서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상황에 두 손을 내저었다. 아- 두 개는 지금 바로 주실 수 있나요? 다른 학생들에겐 결제를 미리 해놨으니 이름 얘기하면 된다고 전해주고서 내 커피와 호석 선배의 커피를 두 손에 나눠 들었다. 분명 그 인간 자존심에 먹지 않을 걸 대비해 결제한 내 돈이 아까워서라도 챙겨줘야만 했다. 절대 신경이 쓰인다거나 그런 이유들은 하등간에 존재하지 않았다. 설마- 하며 강의실로 조심히 들어섰다. 벌써 가고도 남아야 할 시간인데도 호석 선배는 혼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기다린 건가, 의외의 행동에 잠시 마음이 일렁여 김칫국 한 사발을 거뜬히 들이마셨다.
" 선배, 왜 아직도 여기 계세요?"
" 네가 칠칠맞게 지갑만 들고 밖에 나갔잖아. 가방은 왜 안 들고 가? 그렇다고 네 가방 지켜준 건 아니고 정리할 게 좀 남아서 여기 있었던 것 뿐이야."
" 아, 커피 드세요."
" 마신다고는 한 적 없는데."
" 지금 똥개훈련 시킵니까."
"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어쩔 수 없고."
" 밑에까지 내려갔다가 선배 드릴려고 여기까지 올라왔다고요."
" 따박따박 말대꾸도 잘하길래 똑부러지는 줄 알았는데 실망이야."
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던 난 두 손에 들려있던 아메리카노를 번갈아 들여다봤다. 대체 뭐가 실망이라는건지 시럽때문인가. 아니지, 맛을 보지도 않았는데 시럽을 넣은 줄 어떻게 알아. 그리고 나갈 채비를 끝냈다는 듯 선배가 가방을 어깨에 올려맸다.
" 이미지 관리를 이런 식으로밖에 못하는 점에 대해선 조금은 너한테 실망했다고.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지마, 그게 더 후져보여."
".........................."
"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가져가달라 그 말이지."
그가 내 오른손에 쥐어져있던 아메리카노를 손에 들고서 여유롭게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후져보인다라, 당신이 뭔데 날 판단해. 아니, 그럴 만한 자격은 있나. 심사가 뒤틀렸다. 이판사판이었다. 강의실을 빠져나와 그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폰질을 해대면서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는 내 커피를 쓰레기통에 곤두박질쳐버리곤 유유히 발걸음을 옮기는 그 인간을 발견하고서 숨을 깊게 들이마시다 입술에 침을 축였다. 와- 개새끼, 들리지 않을 욕짓거리와 함께 쓰레기통 안에 고이 박혀있는 커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나 또한 한 모금도 대지 않은 커피를 그대로 쓰레기통에 내다꽃았다.
재수 없어,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꼬여버린 주인들의 사정은 아는지 모르는 건지 쓰레기통엔 두 개의 아메리카노가 나란히 놓여져있었다.
♥ 저의 원동력 ♥
[●달걀말이●] [지팔] [희라] [하찌] [유자청] [광어] [토끼누이] [뉸기찌]
오늘도 읽어줘서 고마워요♡
좋은 꿈 꾸셨으면 좋겠스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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