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같은 선배와의 전쟁
by. 탄덕
02
그렇게 호석선배와의 의도치 않은 말싸움으로 멘탈이 종이가루처럼 분쇄되어버린 난 표정 하나 제대로 바꾸지 못하는 주제에 겉으로는 태연한 척 충고 감사하다는 문장을 내뱉었다. 진정 그가 원하는 답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건 명백한 오인이었다. 되려 선배의 신경을 더 긁어버리는 꼴이 된 줄도 모르고 눈을 맞췄다. 정확하게 마주친 시선에 숨을 참았다.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공허한 눈빛이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내가 그를 추측할 동안 선배는 단 한 마디의 말도, 어떠한 표정변화도 없이 올곧게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뻘쭘해진 난 가보겠다는 말과 함께 몸을 숙이고서 인사를 했고 옆에 있던 태형선배가 호석선배 대신 나에게 가보라는 인사를 전했다. 이에 자리로 돌아가 가방을 챙기고서 호프집 문고리를 잡았다. 뭔가 모르게 찝찝했다. 아직 승인이 나지 않은 프로젝트를 나홀로 진행하는 기분과도 맞먹는 느낌이었다. 지금이라도 가서 사과할까, 후배인 내가 그래도 선배한테 까불면 안 되지. 아까 전의 일을 잠깐 떠올리곤 잡았던 문고리를 손에서 놓았다.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 표정은 겁먹은 쥐새끼인데 말투는 아주 건방지네, 원래 그래?"
제대로 나를 궤뚫어본 일침에 꿀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런 내 행동에 더 화가 난 건지 조금은 격양된 목소리가 연속으로 귀에 때려박았다.
" 원래 그러냐고, 너."
" 고양이 앞이라 쥐새끼가 쫄았나보죠."
소세지에 포크를 세게 찔러박았다. 그 날만 생각하면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웠다가도 이불을 걷어올리고 벌떡 일어날 정도로 분함이라는 감정 아래 후회가 가득 쌓여있었다. 다시 한 번 그의 마지막 문장을 되새겼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고양이 앞이 아니라 쥐새끼 본능이잖아, 후회할 짓 하고 튀는 거. 낱말 한 자 한 자도 모자라 숨소리까지 모조리 다 들었지만 애써 무시하곤 먼저 가본다는 말과 함께 문을 열어젖혔다. 선배의 말 어디에도 틀린 점은 찾을 수 없었다. 멋도 모르고 까불다 보란듯이 개발렸고 구차해지기 싫어 줄행랑을 쳤다, 완벽한 팩트 그 자체였다. 그 다음 날, 바로 사과를 하려고 했지만 호석선배는 학교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몇 일이 쥐도새도 모르게 흘러갔고 난 우리 학교의 핫한 이슈메이커가 되었다.
" 와- 유명해, 달린 댓글 수가 몇 개인줄 아냐. 내 친구 장하다. 1학년의 기세를 등등하게 해주는 태권브이래, 시바."
" 그래, 네 친구 존나 유명하다. 복 받은 줄 알아. 욕과 칭찬을 한 몸에 얻어먹고 사는 특급대학생이랑 밥 드시고 계시니까. 진지하게 휴학이나 할까봐."
그 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카톡이 울렸다. 별 쓸데없는 얘기이겠거니하곤 침대 위에 아무렇게 던저져있는 폰을 확인하지도 않고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그런데 유독 한 번 울리고 말았어야 할 알림음이 연속으로 울렸다. 등골이 쎄한 게 영 꺼림칙해 폰을 들어올려 톡을 확인했다. 시발, 확인하자마자 처음으로 한 생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페북이며 트위터며 지구에서 sns라고 불리는 모든 소셜네트워크에서 나와 호석선배의 말싸움 현장이 생중계로 찍혀져 영상으로 전국 방방곡곡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벌써 댓글엔 의도치 않은 찬반 토론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였고 진실은 점 점 과장으로 인해 거짓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앞 뒤 내용 들어보지도 않고 그저 자신들이 결론지은 울타리 안에서 당사자들을 판단한다. 연예인들의 삶이 얼마나 지치고 힘들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같은 동기생들은 오죽했으면 그랬겠나며 나에게 위로의 말들을 메세지로 전하곤 했다. 발악해봤자 나아질 상황이 아니라는 걸 인지한 난 바닥에 앉아 차분히 댓글들을 하나씩 읽어나갔다. 그러고 얼마 가지 않아 잠시 잊어버린 사실 하나를 발견하고서 이내 한숨을 쉬었다. 좆됐어, 우리 학교에서 인기 많은 선배들을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고 하면 호석선배는 자연스럽게 거론이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이마에 두 손을 올렸다. 그런 인물과 엮였으니 평범하지만 아름다웠던 나의 캠퍼스 생활은 이미 쓰레기 소각장으로 옮겨진거나 다름없었다. 누가 올린거야, 옷장에 머리를 몇 번이고 박았다. 사건의 피해자는 나뿐이었고 가해자도 오직 나뿐이었다.
정호석, 그 선배에겐 언제나 난 하수라는 존재일 뿐이었다.
첫 날은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조금은 덜 알려졌으니. 하지만 동기이자 동네친구인 정민이와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현 2일째는 버틸 수 있는 한계점이 다다르다 못해 초과해버릴 지경까지 이르렀다. 나름 연기한답시고 신경쓰지 않은 척 있었지만 사실 옆과 뒤에서 날 곁눈질하는 모양새와 속닥거림이 다 보였다. 앞에서 댓글을 보며 히죽대고 있는 정민이를 올려다봤다, 얘만 아니었어도 이 판국에 학식을 처먹고 있지는 않았을텐데. 테이블에 고개를 다시 박고 밥만 우적우적 먹고 있는데 내 시야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야, 때 아닌 손님 방문에 얼굴을 들었다. 아주 간간히 마주쳤던 얼굴인 것 같기도 하고 거의 처음 본 얼굴에 가까운, 딱 봐도 나랑 동갑인 티가 나는 한 여자애가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 근데 얘는 날 언제 봤다고 초면에 '야'래, 말 대신 눈빛으로 '왜'라고 답했다. 그러자 다시 '야'라는 단어가 그 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참 한 번만에 말귀 못 알아듣네.
" 누군데요, 너? "
" 나 몰라? 심리학과 정혜인."
" 내가 널 어떻게 알아, 과가 다른데. 근데 네가 우리 학교에서 제일 이쁘다는 얘긴 들었어."
" 나도 네 얘기 들었어, 무슨 목적이야? 호석선배 앞에 딱 달라붙어서 꼬리치는거니? "
그럼 그렇지, 날 찾아온 이유가 정호석 때문이겠지. 피곤함과 짜증이 몸 전체에 퍼졌다. 그런 인간과는 엮이는 게 아니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는 폰을 들어 영상을 찾고는 정혜인인가 하는 아이에게 귀를 가리키며 넘겨줬다. 더불어 이어폰도 한 묶음으로 친절하게 위에 올려줬다.
" 넌 지금 이 상황이 좋아보이냐, 귀가 있으면 이어폰 끼고 잘 들어봐.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인지."
" 웃기지마, 네가 호석선배한테 꼬리치고 다니는 거 다 소문났어."
" 정혜인 네가 먼저 시작했겠지, 그 되도 않는 소문 퍼트리는 일. 피곤하지도 않냐, 남의 인생에 끼어드는 거. 내가 꼬리치고 다니는지 아닌지 정 그렇게 궁금하면 정호석 선배한테 직접 물어봐, 나한테 와서 난리 피우지 말고."
나와 정혜인이 싸우는 바람에 소란스럽던 학생식당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이와 동시에 학생들의 시선 또한 일제히 우리에게 꽃히고 말았다. 젠장, 일부러 목소리 낮춰서 말했는데. 학생들 입에 또 내 얘기가 오르락거릴 걸 생각하니 골이 아파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이제서야 마주쳤다. 지금 내 상황을 더 지랄같게 만드는 장본인, 남방에 크로스백을 맨 그와 눈이 마주쳤다. 다 듣고 있었겠지, 선배님때문에 제가 남자한테 꼬리치는 여자애가 됐는데 어떡하실거에요? 눈으로 따졌다. 그럼에도 그는 호프집에서 나를 쳐다봤던 것처럼 올곧은 시선이었다. 해명할 수 있는 사람이 온 것에 대한 안도감이었을까, 참고 있던 눈물이 조금씩 고였다. 염치없는 거 아는데 좀 도와달라고요, 선배. 그러자 내 눈빛의 의도를 알아챈건지 그가 발걸음을 나에게 돌렸다.
" 야, 너 울어? 와, 어이없어. 누가 보면 내가 너 한 대 친 줄 알겠다. 호석 선배한테 이렇게 행동한거야? 이거 완전 여우네."
" 잘못 알고있어, 얜 여우가 아니라 쥐새끼고 네가 여우잖아."
" 어? 언제 오셨어요? 저 진짜 아무 말 안 했어요. 그냥, 애들이 선배한테 그런다길래. 근데 여우라뇨, 선배님 저 진짜 섭섭해요."
" 가만보면 이해력 존나 딸려, 섭섭하라고 해준 말이 아니라 기분 나쁘라고 한 말이야. 내가 너 싫다고 분명히 전달했을텐데, 나한테 고백했을 때. 그리고 네가 내 여자친구도 아니고 내가 아끼는 후배한테 충고 좀 해줬는데 뭐가 그렇게 아니꼬운지 모르겠네. 이해가 안 돼, 싫다는데 왜 질척거리는지."
정혜인과 마주보며 내 옆에 있던 선배가 갑자기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아끼는 후배? 이 선배가 미쳤나, 순간적으로 눈알이 튀어나올 뻔 했지만 어깨에 올려져있는 손때문에 경직된 고개를 힘들게 옆으로 돌렸다. 언제부터 날 보고 있었는지 위를 올려보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그러다 내 귓가에 대고 까불지 말랬잖아, 내가.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주변을 이용하는 사람이었다. 나를 이용했든 아니든 어쨌거나 억울함이 풀렸다는 사실에 다리가 주저앉아버릴 걸 정신력으로 버텼다. 선배의 폭로에 화가 단단히 난 정혜인은 나를 노려보다 사람들 많은데서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냐며 선배에게 따졌다.
" 어, 그래야 네가 내 후배한테 이렇게 분별없이 행동하는 일 없을 거 아냐."
" ............................"
" 영상만 보고 오해하시는 그런 일 절대 아니니까 얘한테 그러지 마세요, 다들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해요."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영상사건은 선배의 등장으로 단순한 해프닝으로 이틀만에 막을 내렸고 식당에 있던 학생들도 좋게 넘어갔다. 그간 좀 예의없게 대했던 행동들이 생각나 정민이에겐 먼저 강의실에 간다면서 밖으로 급하게 뛰어나갔다. 저 멀리서 단정한 뒷통수가 보였다. 왜 우리 학과 쪽으로 가는거지, 왼쪽 건물 아닌가. 사람을 잘못 본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다 비슷한 생김새에 부리나케 달려갔다.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선배를 불렀다.
" 선배님, 오늘 감사했어요. 제가 저번에 호프집에선 술 기운이 좀 있어서 그랬나봐요. 예의 없게 행동한 점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여 진중하게 사과를 했다. 나의 이 뭐같은 성격을 이해해주거나 사과를 받아준다는 건 애당초 기대조차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알겠다는 수긍의 의미가 담긴 문장 정도는 나올 줄 알았다.
" 너 도와준 거 아닌데 착각하지 마, 귀찮게 달라붙는 떨거지 떼어내려던 참이었는데 우연찮게 잘됐다하면서 간 거였고, 단지 그 이유밖에 없으니까."
와아, 도도해. 할 말을 잃었다. 끝까지 싸가지 컨셉을 유지하겠다 이거죠. 그래, 난 사과 드렸고 그 사과는 저 인간이 받지 않은 거다. 내가 해야 할 도리는 마침표를 찍었다.
" 패를 다 보여주지 말라고 하시더니 다 드러내셨네요. 죄송한데 저 착각한 적 없어요. 저도 마침 저 떨거지가 거슬리던 참이었는데 선배님께서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전해드리고 싶었고 제 행동에 대해서도 사과를 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우리의 두번째 또한 만만찮게 거지같은 만남이었다.
난 속으로 온갖 욕에 욕을 하며 건물을 찾아들어갔고 그 건물 안에서도 또 그 인간과 마주쳤다. 아 놔, 오늘 일진 왜 이래. 물론 1도 신경 쓰지 않을테지만 보란듯이 계단을 쿵쾅거리며 올라가 강의실로 들어섰다. 내가 이르게 온 건지 안은 나 혼자였다. 괜히 그 인간때문에 먼 거리를 달렸다면서 쓸데없는 핑계거리를 잡아 욕을 하다 뜬금없이 의문이 들었다. 아니, 근데 왜 그 인간이 이 건물에 있어. 학교 다니면서 거의 본 적이 없었는데 왜 왼쪽으로 꺾지 않고 경영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지. 분명히 다른 건물로 가야하는데 이 곳에 있는 그를 이상하게 여기다 나름의 사정이 있겠거니하고서 궁금함을 접어두곤 폰을 찾고 있는데 밖에서 약간의 말소리와 발걸음이 들리더니 강의실 문이 열렸다. 무의식적으로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가방을 뒤지다 몸을 돌려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가방 속 안을 뒤지던 내 손놀림이 멈췄다.
윤기선배와 같이 들어온 다른 한명의 남자는 정호석, 그 사람이었다.
우연인지 악연인지 모를 질긴 연결고리가 우리들 손목에 채워졌다.
♥ 너무 너무 너무 고마운 탄님들 ♥
[●달걀말이●] [지팔] [희라] [하찌][유자청]
여러분들!!!!!!!!!!!!! 연말 잘 보내셨어요??♡
★늦었지만 새해엔 우리 탄님들과 방탄이들과 모든 독자님들에게 좋은 일들만 가득하기를 소망해여★
곧 있으면 과제로 치이는 인생 선물 옛다하면서 던져주세요(필사적인 애교)
♥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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