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그래프꼭짓점 22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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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요."
떡볶이 전골로 가득찬 배를 어루만지며 조수석에서 내린 성규가 차에 기대 자신을 보고 있는 우현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성규의 억지에 우현이 피식 웃으며 '무슨 결론을 말하는 건데요?'하고 되물었다.
"아까 니가 한 말. 큼…자,자꾸 내가 생각나고 보고 싶다며."
확실히 말해줘요? 우현의 말에 성규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얼른 끄덕였다.
"내 성적취향을 바꾼 사람이에요, 김성규씨는. "
아아, 얼마만에 느껴보는 설레임인가.
"사실 어제까지만해도 몰랐어요. 내가 김성규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감정으로 대하고 있는 건지."
쑥쓰러워 괜히 한 허튼 말에 우현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맘은 그게 아닌데.
"김성규씨는 나 어떻게 생각해요."
끄덕끄덕.
"여태까지 이런 저런 말 하면서 난 안 창피했을 것 같아요? 나 원래 다른 사람한테 내 맘 잘 안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그런데도 다 내보였잖아요.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말해봐요."
대답을 마친 성규가 후다닥 대문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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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은 대문을 닫고 들어가는 성규를 빤히 쳐다보며 기분좋은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표정을 굳히더니 차에 기대 걸쭉한 한숨을 내뱉는다. 아직 이럴때가 아닌데. 아직도 가슴 한 켠에 순재가 남아있으면서 이래선 안 되는데. 내가 이렇게 다시 행복해해도 되는 걸까? 우현, 아직 불이 켜져있는 자신의 집을 한번, 그리고 성규네 집을 한번 번갈아 쳐다본다. 스스로 자책하며 마른 세수를 했다. 어쩌자고 이런 짓을 한 걸까. 저지르고 난 뒤에 느끼는 후회는 쓰디 썼다. 성규와 옛 연인 순재 사이에서 갈등하다니. 자신은 정말 염치없는 놈이었다.
"…아닐꺼야."
우현은 절대 즉흥적인 사람이 아니란 확신이 들었다. 그럼 순재를 깨끗하게 정리한건가…. 내일 한번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평상에 드러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구수한 청국장 냄새가 폴폴 풍긴다. 가방을 벗어 방침대에 던져두고 정장 마이만 벗은 뒤 소매를 두어번 걷으며 식탁에 앉았다.
"김명수는?"
다시 방안으로 들어가 가방을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연결음이 얼마 안 가 명수의 짜증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 형! 전화 잘 했다.]
그러더니 전화가 뚝 끊겼다. 싸가지없는 놈. 궁시렁거리며 명수의 뉴발 슬리퍼를 주섬주섬 신고 밖으로 나왔다. 대문을 열기도 전에 명수의 목소리가 들린다.
"야, 이제 우리 형 나오니까 얼른 가줄래?"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서둘러 대문을 열고 나왔다. 명수에게 찰싹 달라붙어있는 미희가 성규를 보고는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어머, 성규오빠! 오랜만이에요!"
무슨 개소리야. 명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옆에 달라붙어있는 미희를 조금 거칠게 떼어냈다. 그러던말던 미희는 밝게 웃으며 성규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저 기억 안 나세요? 고등학교 다닐때 제가 맨날 선물 갖다드렸는데…. 저 미희에요, 장미희!"
가물가물한 기억이 점점 또렷해졌다. 고등학교 때 매일 자신을 찾아와 명수에게 선물을 전해달라며 기분나쁜 선물셔틀을 시켜댔던 나쁜 기집애잖아.
"그나저나 무슨 일인데?"
미희는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말투로 말했다. 짧은 단발에, 짙고 길게 늘어트린 눈꼬리, 요염한 옷차림.
"저기 미희야. 잘못은 아닌데 딱 봐도 넌 내 동생 스타일로는 영 아니다."
바락바락 소리지르는 미희를 뒤로하고 대문을 쾅 닫았다. 대문을 닫은 뒤에도 미희는 자리를 떠나지않고 계속 떠들다가 곧 제 풀에 지쳤는지 격한 구둣소리를 내며 집으로 돌아갔다.
"성격좋네. 화끈하고."
옷에 배인 향수냄새를 팡팡 턴 명수, 진저리를 치며 먼저 집안으로 쏙 들어간다. 쟨 얼굴도 잘생긴게 왜 연애를 안 하는 지 모르겠네. 끌끌 혀를 차며 뒤따라 들어가려던 성규의 눈에 하나둘씩 꽃잎을 떨구고 있는 꽃들이 들어왔다.
"조만간 다 떨어지겠네."
흙에 쌓인 꽃잎들이 눅눅해져있었다. 아마 비가 한바탕 오는 날이면 꽃잎이 다 떨어지고 앙상하게 마른 나뭇가지만 남겠지. 우현의 고백아닌 고백을 들은 탓인지 괜히 센티멘탈해지는 밤이다.
"이번 주말에 고기 구워먹자."
저녁밥을 먹던 중, 봉신 씨의 제안에 명수와 성규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럼 성규는 내일 가서 회사 팀장한테 주말에 시간 비워두시라고 해."
찌개를 떠먹는 성규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명수도 처음 듣는 얘긴지 깜짝 놀라며 성규에게 재차 물었다.
"진짜야? 저기 김치냉장고 만든 회사?"
명수의 숟가락이 부엌 한 구석에 있는 김치냉장고를 가르켰다. 김치냉장고 모서리에 써있는 서동의 이니셜. 김치냉장고뿐만 아니라 거실에 놓인 TV, 명수의 스마트폰, 그리고 성규가 다니는 직장까지. 모두 서동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응." "넌 그걸 알고 있었으면서 미리 말도 안 해주니? 암튼 성규 너, 무조건 잘해."
줄을 잘 서야 활짝 피는거야, 인생이. 알았지? 봉신 씨의 말을 꾸역꾸역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옆집 팀장형이랑 친해지면 나 핸드폰 저거 공짜로 바꿀 수 있는거야? 그 핸드폰도 서동전자에서 만든건, 읍."
옆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대는 명수의 입에 삶은 양배추를 한가득 쑤셔넣었다.
*
"깜짝이야. 왔으면 얘기를 하지 왜 멍하니 서있어?"
성규와 떡볶이 전골을 먹긴 했지만 순재가 정성스레 준비한 저녁을 마다할 순 없다. 정장 마이를 벗으며 방으로 들어가 무거운 손목시계와 넥타이를 풀렀다. 그제야 몸이 좀 가벼워진 기분이다. 왁스칠한 머리를 긁적거리며 성열의 방으로 향했다. 두어번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침대에 누워있는 성열이 보인다. 성열아, 저녁 먹자. 우현의 목소리에 드러누워있던 성열이 먹구름이 가득 낀 얼굴로 주섬주섬 일어났다. 머리 이쁘게 했네. 몽글몽글해진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하는데도 여전히 우울한 얼굴이다. 무슨 일 있었나?
*
"근데 성열이 무슨 일있어? 표정이 어둡던데."
순재가 찻잔을 어루만지며 기분좋은 웃음을 지었다.
"로맨틱은 무슨. 짝사랑이 얼마나 괴로운 건데."
그러게. 정말 다 컸네. 순재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정말 모든 걸 잃었을땐 다시 이렇게 행복해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순재야."
그러던 중에 우현이 갑자기 진지하고 나긋한 말투로 순재의 이름을 불렀다.
"어. 왜?"
망설이는 우현. 하기 힘든 말인지 계속 머뭇거린다. 순재가 '나한테 뭐 할 말 있어?'하고 물어도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응. 할 말 있어."
말하진 않고 순재만 빤히 바라본다. 순재도 이상한 느낌을 받은건지 말없이 찻잔 손잡이만 만지작거렸다.
"순재야."
우현, 눈가를 비비며 피식 웃는다.
"졸려서 먼저 들어갈게. 뒷정리 도와주려고 했는데 미안."
우현이 방으로 들어가고 홀로 주방에 남은 순재가 우현이 마신 커피잔을 싱크대에 옮기려다가 갑자기 밀려오는 복통에 인상을 찌푸리며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렸다. 며칠전부터 명치 아래쪽이 지끈지끈 쑤셔오더니 방금 복통은 다리힘이 풀릴 정도로 극심했다.
"…아아…."
복통이 금세 사라지긴했지만 기분이 영 찜찜했다. 방으로 들어온 우현은 한숨을 쉬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사실 할 말은 많았다.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 것 같은데 마음 한 켠에 여전히 너가 놓여져있어서 고민이라고. 하지만 막상 순재앞에선 입도 뻥끗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더한 건, 이제 순재 얼굴만 보아도 성규 얼굴이 떠오른다는 점이었다.
"…어떡할까."
우현이 손을 뻗어, 어느새 침대 맡으로 자리가 옮겨져있는 갓파 인형을 잡아들고 물었다. 어떻게해야 누구도 상처받지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갓파 인형은 말이 없었다.
"진짜 들어주기만 하는구나."
성규도 자신이 준 엽기토끼에게 고민을 이야기할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인형을 침대 옆에 뉘여놓고 잠들 준비를 하는데 '띠링'하고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충전기에 꽂혀져있는 핸드폰을 집어들자 성규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잘자요]. 분명 한참을 고민하다가 보낸 신중한 세글자일게 분명했다. 스물여덟살 먹은 남자가 이렇게 귀엽게 느껴질 수도 있다니. 귀엽다를 연신 중얼거리며 답장을 적어내려갔다. [아깐 반말하더니]. 답장을 보낸지 몇 분 되지도 않아 바로 답장이 온다. [내맘이야.] 글자만 읽는데도 성규의 말투가 들렸고 표정이 보이는 듯 했다. 그 정도로 우현은 자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성규에게 푹 빠져있었다.
인근 마트에서 바나나와 바나나주스를 가득 산 호원은 제법 추운 날씨에 몸을 부들부들떨며 서둘러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동우네 초인종을 누르면 항상 안에서 '누구세요?'하는 달달한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오늘은 초인종을 두어번 반복해서 눌러도 잠잠하다. 혹시 자나? 아닌데. 들어올때 보니까 분명 불 켜져 있었는데. 마트 봉지를 고쳐잡고 조심스럽게 문을 콩콩 두드렸다.
"동우형. 나에요. 호원이."
혹시나하는 마음에 문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너무 쉽게 문이 열린다. 현관문앞에 놓인 신발로 봐서는 집에 있긴 있는 것 같은데… 열린 문틈사이로 집안을 슥 둘러보며 다시 한번 동우를 불렀다.
"동우형!"
현관문을 꼭 닫고, 동우의 앙증맞은 운동화 옆에 가지런하게 구두를 벗었다. 식탁에 마트 봉지를 내려놓고 다시 한번 동우를 부르려고 할 때, 욕실 문이 벌컥 열리고 문 뒤에 숨은 동우가 고개만 빼꼼히 내밀었다.
"아, 미안! 샤워하느라 못 들었네. 편하게 앉아있어."
호원은 떠듬떠듬거리며 소파로 가 앉았다. 살짝 보였던 동우의 하얗고 뽀얀 가슴팍과 야시시한 쇄골. 호원은 초조하게 다리를 떨며 손에 고인 땀을 무릎팍에 슥슥 닦아냈다. 잠시후, 물소리가 멈추고 회색 츄리닝바지에 달라붙은 하얀 나시를 입은 동우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거실로 나왔다. 순간,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오래 기다렸지?'라는 동우의 말이 슬로우 모션처럼 '오으래애 기이다으려우웃지?'처럼 들려온다. 넋이 빠진 호원의 모습에 동우가 호원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호원아?"
갑자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호원이 동우의 부드러운 어깨를 덥석 잡았다.
"하,한번만 안아봐도되죠!"
그러더니 별안간 동우를 덥석, 그것도 아주 꼬옥 끌어안은 호원이 몇 초 동안 동우를 놓지않았다. 맞춤 제작한 것처럼 한품에 쏙 안기는 동우에게선 달큰한 살 내음이 났다.
"호원아?"
동우가 부드러운 손길로 호원의 등을 토닥거렸다. 그게 아닌데. 졸지에 우환있는 애가 되버렸다.
"아, 형. 저 그만 가볼께요! 미안해요 진짜!"
동우를 확 떼어낸 호원이 후다닥 집을 뛰쳐나왔다.
8시 10분. 대문이 열고 나오던 성규는 집앞에 세워진 우현의 차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얼른 차에 올라탔다.
"잘 잤어요?"
우현의 물음에 성규가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거렸다.
"왜 아무 말이 없어요?"
우현이 피식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성규, 운전하는 우현의 모습을 쳐다본다. 항상 멋드러지게 왁스로 매만진 머리, 깔끔한 정장, 손목에서 반짝거리는 시계, 그리고 반반한 얼굴까지. 도대체 이 남자가 안 가진 게 뭘까. 성규는 이제 아예 대놓고 우현을 빤히 쳐다봤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부담스럽게."
참나. 기가 찼지만 또 막상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남우현씨."
남우현씨? 갑작스런 호칭에 우현이 고개를 돌려 성규를 쳐다봤다.
"솔직하게 말해줘요, 내가 묻는 질문에."
신호등이 빨갛게 변하고 차가 멈춰섰다. 뜻밖의 질문에 우현이 할 말을 잃은 듯 보였다. 묻잖아요. 순재씨랑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냐고.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이 성규가 재차 물어왔다.
"난 남우현씨가 순재씨와 어떤 사이던간에 신경 안 써요. 다만, 순재씨 좋아하고 있으면서 나한테 어제 그런 말 한 거면 나 못 참아요."
그럼 됐어요. 짤막한 성규의 대답과 함께 신호등이 빨간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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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후 23편이 나옵니다.
이제 인그꼭도 점점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가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