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병실에서 눈을 떴다. 햇살이 창으로 스몄다. 햇살은 이렇게도 가득한데 나의 세상은 어둡다. 눈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어둡다. 그저 햇살의 따듯함만을 느낄 뿐이었다. 손을 더듬어 머리 맡에 있는 핸드폰을 쥐었다. 어둠속에서 널 기다렸다. 끝도 없이. 네가 없는 나의 하루는 침상에 누워있는 것이 전부였다. 네가 오기를, 네가 와주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간호사가 들락날락 내 상태를 체크했다. 변백현 환자분, 용변 안 마려우세요? 대답하지 않았다. 변백현 환자분, 도움이 필요하시면 벨을 눌러주세요. 다정한 음성이 병실을 매꿨다. 머리 맡에서 느껴지던 숨이 일어섰다. 그녀는 날 어떤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을까. 드르륵, 간호사가 병실을 나가는지 문을 열렸다. 아, 안녕하세요. 설레임을 입은 음성이 병실을 채웠다. 네. 단정한 음성이 이어졌다. 찬열아, 찬열아. 찬열아. 길을 잃은 아이가 엄마를 찾듯이 널 불렀다. 드르륵, 문이 닫혔다. 저벅저벅 발걸음을 떼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나 왔어. 앞머리를 정돈해주는 네 손길이 그리웠다. 어제도, 엊그제도, 내 앞머리를 정돈해주는 네가 보고싶었다. 찬열아, 나 화장실 가고 싶다. 내 말에 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또 참고 있었어? 간호사 불러서 같이 갔어야지. 니가 애야? 네 잔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치만, 간호사는 여자잖아. 부끄러운걸? 작게 한숨 쉰 네가 날 침상에서 일으켰다. 드륵드륵 끌리는 링거걸이를 붙잡은 네가 앞장서 걸었다. 재잘재잘 거리는 사람들의 음성이 귓바퀴에 와닿았다. 꺄르륵, 뛰어다니는 아이들. 얘들아 여기서 뛰면 안 돼! 야단치는 부모님. 네…. 시무룩해진 아이들이 털썩, 쇼파에 앉았다. 아이들의 까랑까랑한 음성이 내게로 도착했다. 엄마, 근데 저 형아는 왜 벽을 더듬으면서 걸어? 얘! 조용히 해! 민망한 여자의 목소리가 아이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나의 세상은 어둡다. 나의 나침반은 무슨 표정을 짓고있을까.
"신경쓰지마 백현아."
"응? 뭐가?"
"………."
해맑은 내 대답에 넌 말이 없었다. 난 괜찮았다. 나의 세상은 어두웠다. 하지만 너라는 빛이 있으니 난 괜찮았다. 드륵드륵 바닥을 끄는 링거걸이를 건네받았다. 여기서 기다릴께. 같이 들어가자는 내 말에 너 애 아니다 변백현. 야단치듯 말했다. 빵빵해진 볼이 기다란 손가락에 눌렸다. 다녀와. 여기 있을께. 드륵드륵,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경쾌하다. 너와 맞잡은 손이 따스하다. 백현아, 지금은 봄이야. 응. 알아. 네 앞엔 벚꽃이 피어있어. 그래? 이뻐? …아니, 안 이뻐. 어쩐지 기운 빠진 목소리였다. 나는 슬펐다. 찬열아, 나는 벚꽃 안 좋아해. 응. 대답한 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너의 손이 따스하다. 백현아, 여기엔 꽃이 심어져있어. 빨간 꽃, 노란 꽃, 주황색 꽃도 있어. 그리곤 하늘은 새하얘. 주변은 분홍색으로 가득해. 넌 앞을 볼 수 없는 네게 주변 풍경을 설명했다. 그러게, 정말 이쁘네. 하는 내 말에 넌 말이 없었다.
"나도 볼 수 있어. 네 설명을 듣고, 마음 속으로 그림을 그려."
"…………."
"정말 아름다워."
나의 세상은 어둡다. 어둠이 찾아온지 2년이 되어갔다. 지방에 계신 부모님의 얼굴이 가물가물하다. 대신 단 한가지, 네 얼굴만은 또렷하다. 찬열아. 넌 내가 좋아? 난 네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은데. 내 말에 넌 대답이 없었다. 응? 재촉하는 내 말에 넌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런 소리 하지마. 내가 없어도 넌 살 수 있어. 미미한 떨림을 감춘 또렷한 음성이었다.
"변백현 환자 보호자 분."
"네."
백현아.
"앉으세요."
"안녕하셨어요, 선생님."
나는 두렵다.
"찬열씨, 본론 부터 말씀 드리자면…"
"……네."
날 볼 수 없는 널 보지 못 할까봐.
"아직 각막을 기증한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조금 더 기다림이 필요할 듯 싶습니다."
"선생님."
"네, 찬열씨."
"이번 봄은 언제 끝이 날까요?"
"예?"
"벚꽃잎은, 언제까지 만개할까요."
"………."
찬열아, 어디 다녀왔어? 네가 잠든 새 다녀온다는 걸 깨워버리고 말았다. 어디를 다녀왔냐고 묻는 넌 표정을 굳혔다. 오늘이 무슨 날 인지 알고있기 때문이었다.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을 너를, 내가 먼저 짓밟았다. 아직 기증자가 나타나지 않았어. 발길질에 짓밟혀 꺾여진 꽃처럼 넌 시들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괜찮아. 기대 안 했어. 나라는 희망으로 살아가는 너에게 세상을 선물하기로 했다. …근데, 곧 나타날 것 같데. 그러니까 기다려보자. 와! 진짜? 진짜야?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널 보는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누군데? 기증 해 준다는 사람이 누구야!? …응, 미국에 사는 사람. 몸이 안 좋으신 분인데, 건강하실 때 부터 장기기증을 신청하신 분이야. 근데, 병원장님이 도와주셔서 그 분이 돌아가시면 너한테 각막을 기증해 주기로 하셨어. 이름은? 이름이 뭔데? 만날 수 없으니 이름이라도 알고 싶어. 교포 분이신데, 이름을 밝히는 걸 원하지 않으셔서 이니셜만 알아. 응, 그거라도 알려줘. …B, …C, …W. 그리고 백현아.
"응?"
"넌 갈 수 없으니, 내가 그 분을 찾아가서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해."
"해외라면서?"
"그래도, 감사한 분인데 인사는 드려야 하지 않겠어?"
"으응, 언제 가려고?"
"지금 당장."
"뭐?"
"어쩔 수 없어. 그 분이 요양원에 들어가신데. 그래서 면회가 안되는 모양이야."
"………."
"대답 안 하네?"
"그치만, 싫은데."
"우리 백현이 스물세살이야. 애 아니라고."
"…싫은 걸 어떡해."
"얼굴만 뵙고 돌아올게."
"그럼 언제 가, 내일? 내일 가는거야?"
"응, 내일 당장 출발 하려고."
"…………."
"백현아, 내가 다녀오면…"
"응?"
"다녀오면, 그 때 우리 벚꽃 보러가자. 사실은 너 벚꽃 좋아하잖아."
"……그래, 기분이다! 내가 너랑 벚꽃 구경 하러 가 줄께."
나, 이제 가볼게. 일 늦겠다. 응, 찬열아 조심해서 가. 내일도 올, …아. 내일 전화 해, 응? 멀뚱히 천장을 바라본 채 두 눈을 깜빡이는 네 머릿결을 쓸어넘겼다. 너 머리 잘라야겠다. 많이 길었어. 응, 잘라야지. 길어진 앞머리를 손으로 당겨보는 네게 입을 맞췄다. 넌 따듯한 온기를 내게 선물했다. 갈께. 네게서 뒷걸음질 쳤다. 병실 문에 등이 닿는 순간까지 널 두 눈에 담았다. 찬열아, 전화해. 해맑게 손을 흔드는 널 바라보았다. 백현아, 나도 너 없으면 못 살아. 나도 네가 좋다. 등 뒤로 만개한 벚꽃처럼 아름다운 네 미소를 등지고 병실을 빠져나왔다. 내일은 이른 아침 일어나야겠다.
'찬열아, 더 좋은 곳 구했다더니 바로 관두기냐?'
'이렇게 헤어져서 어떡하냐. 연락 해.'
'외국유학? 아, 박찬열이 외국 물 먹으면 얼마나 더 많은 여자들이 울까.'
'네? 찬열씨가요? 말도 안 되요. 살아있는 사람은 장기를 기증 할 수 없어요.'
'박찬열님, 장기기증이 신청되셨습니다.'
"엄마, 아빠. 저 왔어요."
"……."
"어쩌면, 나 이제는 엄마 아빠를…."
"………."
"뵐 수 있을 것 같아요."
"…………."
고요한 납골당에 서글픈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빼곡히 들어선 사진들 가운데 새하얀 꽃다발을 품에 안은 찬열은 유리 너머 사진을 바라보았다. 유리에 비친 중년의 남녀가 찬열을 향해 환하게 미소짓는다. 그리고 망울져 흘러내리는 눈물이 비친다. 난, 이제 엄마 아빠를 만나뵈러 가려고 해요. 내가 곁으로 가면, 아무것도 안 보일테니. 엄마 아빠가 날 좀 이끌어주세요. 거기서 친해진 사람들은 많아요? 아들이 앞 못 본다고 놀리는 사람들은 없길 바래요. 오늘이 엄마 아빠 보러오는 마지막 날이야. 죽어서도 이리로 오고 싶은데, 나 챙겨 줄 사람이 없어서 그러지는 못 할 것 같아. 대신 하늘에서 만나면 우리 못 다한 이야기 나눠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부모님께 못 보여드려서 죄송해요. 대신 내가 이야기로 다 들려드릴게. 그 아이의 생김새, 목소리, 모든 걸 다 말씀 드릴께. 그러니까 나 좀 용서해 줄래요?
"띠링♪ 메세지가 도착하였습니다."
'찬애·아 왜 저·ㄴ하 아해'
"……아……아, 맞다 사진. 사진이 있지 참. 엄마 아빠, 내가 사진으로 보여드릴께."
"…………."
"어때요? 남자라서 놀란건 아니죠? 요즘 시대엔 그런 거 안 따져요."
내가 목소리도 들려주고 싶은데, 그러지는 못 할 것 같아. 내가 들을 수가 없어서 그래요. 정말, 정말, 이쁘죠? 남자답기도 하고. 나 고등학교 때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쁜 짓 하고 다녔잖아. 그 때 백현이가 나 사람 만들어 줬거든.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하다보니까, 서로 사랑하고 있더라고. 엄마 아빠. 근데 나 백현이 목소리 듣고 싶어서 어떡하지? 아까 병원 다녀오면서, 몰래 문 밖에서 보고 왔는데, 또 보고싶어서 어떡해요? 나 죽으면, 백현이 다시는 못 보는 거잖아. 죽는건 안 무서운데. 엄마 아빠 한테도 미안한데. 나 아직 부모님 곁으로 가기 싫다. 백현이 옆에 있고 싶어요. 나 너무 이기적이다. 그죠.
"띠링♪ 메세지가 도착하였습니다."
'찬연아 보·그싶 다'
'미안해, 공항인데 일이 좀 있어서 연락이 늦었네. 근데 어떡하지 백현아. 나 바로 비행기 타야 할 것 같아. 메세지는 간호사 누나한테 읽어달라고 해. 핸드폰 꺼야겠다. 목소리 못 들려줘서 미안. 그리고 백현아. 너와 봄을 보고싶었다.'
시트위에 초록색 병들이 뒹군다. 깡깡, 흔들리는 자동차에 따라 소주가 맑게 부딪혔다. 곧 달리던 차는 한적한 도로 외각에 멈춰섰다. 고개를 쳐 들고 소주를 들이킨다. 턱 끝으로 흘러내리는 알코올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입가를 따라 줄줄 흐르는 소주처럼 찬열의 눈가는 눈물로 젖어 헐어있었다. 손에 쥐어진 핸드폰 액정에선 교복을 입은 두 소년이 환하게 웃고있다. 그 뒤로 분홍색 벚꽃이 배경이 되어 늘어져있다. 그리고 이 도로 역시 짙어져가는 봄이 벚꽃으로 가득차 있었다. 소주를 내려놓은 찬열은 한 손을 핸들 위에 올려 놓았음에도 다른 손은 핸드폰을 꾹 쥐고 놓지 못한다. 그의 가쁜 날숨이 구슬프다. 백현아, 나는 이 봄의 끝에서 벚꽃이 될테니 너는 나의 눈으로 나를 담아줘. 내가 네 곁에 머무를 수 있도록. 끝끝내 핸드폰을 내려놓은 찬열이 핸들을 꺾어 도로위에 섰다. 몸을 죄이던 안전벨트를 풀어낸 찬열이 두 손을 올려 눈물로 젖은 두 눈을 감싸쥐었다. 그의 무릎이 움직임과 동시에 바퀴가 빠르게 굴렀다. 달리는 차 위로 벚꽃잎이 쏟아진다.
변백현 환자, 변백현 환자? 귓바퀴를 난타하는 음성에 정신을 차렸다. 날 뚜러져라 바라보는 사람들이 낮설다. 이질적인 느낌이 들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흐릿한 조명이 동공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세상이 돌아왔다. 어째서인지 기쁘지 않았다. 각막 기증이 체결되어 그토록 기다리던 이식 수술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와 같았다. 기증자를 만나러 간다던 넌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거니. 왜 내가 처음으로 보게 된 세상에 너만 없는걸까. 보고싶다. 찬열아.
시간은 흘렀다. 계절이 바뀌었다. 열이 일고. 눈이 왔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에도 넌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림은 끝이 없었다. 아직도 흐릿한 세상이 반갑지 않았다. 이제는 알게 되었다. 이 세상은 네가 내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음을. 나와 봄을 보고 싶다던 넌 내 곁에 없다. 너의 각막에 익숙해지지 못한 난 아직도 흐린 세상을 바라보며 산다. 계절이 바뀌었다. 봄은 돌아왔고. 넌 돌아오지 않는다. 흐릿한 벚꽃은 적응이 덜 된 각막 때문일까, 아니면 내 눈물 때문일까. 찬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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