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너무 오래돼서 말을 못한 이야기가 하나 있긴 한데 - [마칫나] 담임은 지루한 종례를 언제까지고 이어갈 폼이었다. 금요일인데? 금요일인데. 방학인데. 보충이 다 끝났는데. 여름인데. 날씨가 좋은데. 햇살이 눈부신데. [ㄴㄴ] 단답으로 카톡을 띡 날리고 애써 다 싸놓은 가방을 한번 뒤적거렸다. 승철이 인내심 별로 안 좋은데. [오래걸리나] 봐라. 얘가 이렇다. [ㅁㄹ 담임 계속 떠드는데] 대답하기가 무섭게 또 답이 날아온다. [농구] 얼핏 운동장을 보니 파란 교복 한 무리가 뒤엉켜 농구대로 간다. 저어기 있네, 최승철. 드리블하고 신났네, 아주. 흙먼지 다 뒤집어쓰고 이 더운 여름에 뭐 좋다고. 기나긴 기다림 끝에 담임이 드디어 떠들기를 마쳤다. 한 3세트는 했겠다. 날듯이 계단을 내려가자 여전히 농구에 정신이 팔린 저 파란 교복. "아오, 저거 땀 젖은거 봐라." 되려 내가 승철이를 기다리는 꼴이 되었다. 입이 심심해 매점에 들렀다 30도를 육박하는 이 더위에 땀 흘리는 금수새끼가 가여워 죠스바도 하나 샀다. 하교하는 아이들 사이를 느긋하게 헤집으며 운동장으로 돌아오니 이제 막 끝났는지 수돗가에 얼굴을 처박고 세수인지 샤워인지 모를 것을 하고 있다. "야, 최승철." "어? 언제 마칫노." "니 농구하는 동안 벌-써 마칫다." 물 뚝뚝 떨어트리며 친구들에게 인사하는 입에 죠스바를 물려주자 눈이 휘둥그레해진다. '니가 웬일이고.' 다, 저건. 몇번을 얻어먹어놓고도 저 새끼 저건.. "입 닫고 가자. 오늘 과외다." "으, 뭔데! 금요일이가!" "니 또 숙제 안 했제!!" 땀냄새 풀풀 풍기는 이 새끼 내가 뭐가 예뻐서 십수년을 데리고 놀아주고 죠스바 사먹여주는지. 지금도 그렇다. 1년 다 돼가도록 같이 받는 과외 날짜도 똑바로 기억 못해서 숙제는 허구헌날 까먹고 웃으며 실실 넘기지. 재수없다. "아, 누나 우리 인간적으로 갈구지 말자. 니도 가끔 까먹을때 있잖아." "팔 내려라. 더럽다." 이건 더 재수없다. 능청스럽게 어깨를 감싸고 씩 웃는 이거. 어라, 힘주네, 얘? "니 씻지도 않았잖아, 빠가야!! 내리라고!!" "에헤헤," 아니, 안으라는 소리가 아니라. 으, 진짜. "죠스바 고맙디. 누님, 내가 사랑한다, 알제?" "알긴 뭘 알아, 금수야. 변명 안 대준다고." "어어어-" "애교 아니다, 그거!!!!!!!!!" 십수년. 말이 좋아 십수년이지, 지내보면 안다. 가족끼리도 친해 학교고 밖이고 여행이고 빠지지 않는 존재라는게, 어릴때부터 어떻게 커왔는지 이목구비는 어떻게 변해왔는지 이마의 흉터는 언제 생겼고 몽고반점은 언제쯤 사라졌는지 아는 존재라는게, 그게 얘라는게, 그 시간이 '십수년' 이라는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아, 같이 좀 가자고-!" "누! 나! 그! 새낀 나! 빠!" 왁스의 오빠를 멋대로 바꿔부르며 신나게 뛰어간다. 같이 가재도 지밖에 몰라요. 9일 먼저 태어난거 가지고 생색이란 생색은 다 떨더니 지 필요할때만 누님누님하고. 진짜 재수없다. 재기는 어찌나 잰지 그새 골목을 돌아 대로변 횡단보도까지 건넜나보다. 마음이 급하다. 같이 좀 가주지, 동네도 같은 새끼가. 지각해도 내가 변명 대면 되는데. 건널목을 디디는 발길이 한 박자 빨랐다. 분식집 오토바이가 미끄러지듯 들어오는데 시신경을 제외한 나머지 근육들이 모조리 수축한다. 어? 어..? 간단히 나를 돌려세운다. 든든한 힘이 어깨를 재빨리 낚아 등을 받쳐낸다. "뭐하노! 빨간불이다이가!" "어? 니 안 갔네?" "말 돌리지 말고! 죽을뻔 했다이가!" "아니 나는 니 먼저 간 줄 알았지!" 입에 뭔가 불쑥 들어온다. 바밤바다. "니 두고 어디를." 초록불을 쓱쓱 건너가는 등을 본다. 재수없다. 어릴때부터 같이 커온게, 이목구비가 어떻게 자라왔는지 아는게, 이마의 흉터는 언제 생겼는지 꿰뚫는게, 몽고반점은 언제쯤 사라졌는지 줄줄 외는게, 그게 너인게, 그 시간이 '십수년' 이라는게, 괴롭다. 싫다. 재수없다. 누군 그것 때문에 아주 오래된 이야기도 못하는데. 쟤는 자기가 내 마음에 종이 비행기를 몇개나 날렸는지 알기나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