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저기 괜찮으세요? 입에서 피가 나요! 어떡해!!"
"……."
"이거 구급차를 불러야 하나?! 제가 폰을 안에 두고 나왔는,"
"잠깐만."
"아니요, 말하지 말고 계세요!! 금방 수건이랑 다 가지고 나올 테니까…!!"
피로 칠갑을 하고 벽에 기대 앉아있는 남자를 움직이지 못하게 제지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몰라도 어서 구급차를 불러야…! 허둥지둥 헤메다 쓰레기 봉투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한 나를, 남자가 피가 잔뜩 묻은 손을 뻗어 잡았다. 가까이서 보니 남자의 상태는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려는 내 입을 한 손으로 막은 남자가 그런 거 아니니까 가만히 있어. 라며 입을 열었다. 당황한 나머지 떠듬떠듬 뭐냐고 묻는 내 말에 남자는 자신이 그러니까… 그 흡혈귀 뭐시깽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무슨 이런 터무니없는 소리가 다 있어? 했으나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한약 팩에서 그의 몸에 묻은 것과 같은 빨간 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고 난 그제서야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인지했다.
"살… 살려주세요……. 저 진짜 오늘 아무 것도 못 본 걸로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죽이거나 피… 빨아 먹거나 그런 거 하지 말아주세요……."
나는 남자를 향해 무릎을 끓고 빌었다. 솔직히 그쪽 피나는 줄 알고 내가 구급차도 부르려고 하고 수건도 가지고 오려고 하고 그랬는데 제발 살려주세요 엉엉. 물론 울지는 않았지만 동네방네 소문내지 말고 입이나 다물으라는 남자의 말이 아니었으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난리가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저기요. 민윤기씨. 제발 딴 데 보면서 걸으면 안돼요?"
"왜?"
"아까부터 자꾸 제 목만 보고 계시잖아요! 그거 진짜 부담스럽다구요…."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아니, 그렇게 대놓고 보는 걸 누가 몰라요…. 모르는 게 더 이상하겠다. 참나."
"그럼 네가 스카프를 둘러. 이건 본능이라 어쩔 수가 없어."
무슨 한여름에 스카프를 둘러요… 솔직히 흡혈귀니 뭐니 다 거짓말이죠? 사실은 그냥 토마토 주스 좋아하는 변태 아니에요? 날 죽이지 않을 거란 걸 알게 된 이후로 겁대가리를 상실한 내 말에 민윤기씨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까 다 봤잖아. 그냥 토마토 주스였으면 네가 놀라지도 않았겠지. 여전히 내 목 언저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민윤기씨를 흘기며 목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민윤기씨는 그제서야 쩝, 하고 아쉬운 소리를 내더니 날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불편함이 한결 가신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이제 집도 다 왔는데 언제까지 따라오실 생각이세요? 민윤기씨가 계속. 하고 답했다.
"아, 왜요…. 제가 진짜 발설 안 하겠다고 약속도 했는데."
"말로 한 약속을 내가 어떻게 믿어?"
"그럼 약속을 말로 하지 뭐로 해요. 뭐 귀로 하나? 눈으로 해?"
"아까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 버렸어야 했나."
"……그냥 각서 같은 거 쓰면 되죠?"
"신체 포기 각서 쓸 거 아니면 관둬."
"아… 그럼 뭐 어떻게 하라구요……."
내가 투덜대며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자, 민윤기씨가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러다 진짜 집까지 따라오는 거 아냐…? 불안해하며 민윤기씨를 바라보는데, 이미 계단을 오르며 몇 층이야. 하고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설마 진짜로 집에 들어오려는 건 아니죠?"
"왜, 안 돼?"
"당연한 거 아니에요? 여자 혼자 사는 집인데!"
"다행이네. 부모님이라도 계시면 어떡하나 했는데. 혼자 살면 더더욱 문제될 거 없잖아. 아니야?"
나는 곧 민윤기씨에게 말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아니 오늘 마침 부모님 오시기로 했거든요? 이따가 한 10분 뒤에…… 급히 말을 바꿔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요즘엔 신체 포기 각서 쓰고 싶다는 말을 그렇게 하나봐. 재미있네. 라는 민윤기씨의 목소리에 조용히 3층이요…. 하고 대답하기 무섭게 민윤기씨는 진작 그렇게 하지. 하며 나를 내버려둔 채 계단을 올랐다. 어차피 집 비밀번호도 모르니 이대로 친구 집으로 도망이나 갈까 했으나 허튼 생각 말고 올라오라는 말에 아니거든요? 저 가고 있어요! 하며 괜히 큰소리를 쳤다.
뭐 잠깐 감시하다 말고 가겠지…. 했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민윤기씨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내가 핸드폰을 만질 때마다 흉흉한 눈을 하고 날 바라봤다. 말했다간 즉시 사망인데 제가 뭐 하러 그러겠어요… 저 절대 아무 말도 안 한다니까요! 이런 내 말에도 민윤기씨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진짜 계속 여기 계실 거예요?"
"네가 말 한마디라도 잘못 했다간 내가 위험해지는 일인데 그래야지."
"아니… 그럴 수도 있긴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 조금 있다 가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계속 있어야겠네."
"아니요, 절대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을 걸요? 저 정말 민윤기씨에 대해서 한마디도 안 할 자신이 있다 못해 넘쳐요."
"그건 당연한 거고."
또 말렸어. 또! 땅을 치고 후회해봤자 이미 늦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민윤기씨는 영영 가지 않을 사람처럼 소파에 등을 비스듬히 기대 눕기까지 했다. 미쳐, 내가 어쩌다 저런 거랑 엮여서… 하필 팩이 다 터져서 진짜 피처럼 보였을 게 뭐야…… 안 그랬으면 그냥 토마토 주스나 먹나 보다 했을 텐데…. 나는 운도 지지리 없지. 신경질이 나니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거실 한구석에 놓여 있던 선풍기를 질질 끌고 와 텔레비전 옆에 코드를 꽂았다. 더워? 민윤기씨가 나를 향해 물어왔다. 뭐 여름인데 당연하죠…. 민윤기씨는 안 더워요? 난 그런 거 못 느껴. 그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 앉았다. 찝찝한데 눈치 보여서 샤워도 못하고 이게 뭐야…. 거실 한가운데 놓인 식탁에 엎드려 가만히 선풍기 바람을 맞았다.
"…민윤기씨."
"……."
"배 안 고파요?"
"목은 마른데. 주면 먹고."
"냉장고에 생수통 있으니까 꺼내 드세요."
"물 안 마셔. 내가 뭐 달라고 하는지 알잖아?"
"…설마 미쳤어요? 절대 안돼요!!"
"농담이야."
"그런 농담 하나도 재미없거든요?"
"사실 반은 진심."
사람이 뭐 저래? 사람이 아니라서 저러는 건가? 툴툴대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진짜 흡혈귀가 맞기나 한지 확인이나 해봐야겠다. 저기, 저 지금 밥 할 건데 부엌 좁으니까 그냥 거기 계세요! 혹시라도 달그락 대는 소리에 민윤기씨가 따라 들어올까 미리 말을 던졌다. 골탕 먹일 생각하니까 갑자기 또 기분이 너무 좋네? 저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프라이팬으로 밥과 야채를 대충 볶은 다음 잘게 잘라둔 생마늘을 그 안에 모조리 쏟아 부었다. 만들고 보니 밥 반 마늘 반이 됐지만… 내가 먹을 건 아까 따로 덜어놨으니까 뭐. 설마 이 정도 먹는다고 죽진 않겠지? 큼큼 헛기침을 하며 쟁반을 들고 거실로 나갔다. 식탁 위에 볶음밥을 내려놓으니 민윤기씨가 아무 말 없이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저기요……."
"먹는데 말 시키지 마."
"…그거 맛있어요? 너무 많이 먹는 것 같은데…."
"처음부터 먹고 죽으라고 준 거 아니야?"
"에헤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한대?"
"반응 보니 더 진짜 같은데."
"그냥 그렇다는 거져…… 근데 그 뭐냐… 뱀파이어는 원래 마늘 먹으면 죽지 않나?"
민윤기씨가 허, 하며 실소를 터트렸다. 물론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따라 붙는 민윤기씨의 시선을 모른 척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장난 친 건 진짜 미안해요….
"미안한 걸 알긴 해?"
"솔직히 한두 입 먹었으면 안 미안했을 텐데 그릇을 싹 다 비우셨잖아요. 왜 그랬어요, 진짜?"
"만들어 준 건데 다 먹어야지 그럼."
"사람이 무식하게…"
"뭐?"
"아니요. 민윤기씨 무지 씩씩 하시다구,"
"입에 맞지도 않는 마늘을 계속 먹었더니 갈증이 나네."
"……."
"어떡할래."
헉 매워서 그런가? 전 마늘볶음밥 안 먹어서 모르겠는데 설거지 하는 동안 물 떠다 마시던지 하세요! 또다시 농담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민윤기씨를 피해 설거지를 한다는 핑계로 그릇을 바리바리 싸들고 거실에서 벗어났다.
"진짜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곧 가실 거 맞죠…?"
"내가 왜?"
"내가 왜는 무슨 내가 왜예요? 이제 밤인데 자야죠! 민윤기씨도 자야 되잖아요."
"안 그래도 되는데."
"자면 갈게."
"왜요? 자는 거 지켜보기라도 하게?"
"뭐 이것도 안 돼?"
"저 불편하면 잠 못 자거든요? 차라리 집 전화기랑 핸드폰을 가져가세요."
"그럼 주던지."
아니 그렇다고 진짜로 가져가란 말은 아니었다구요……. 저 현대 문물에 완전히 찌든 사람이라 핸드폰 없으면 일초도 못 살아요.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 놓지 않으려는 나를 빤히 쳐다보던 민윤기씨가 거실에 있다가 너 자면 옆에 두고 갈 테니까 빨리 줘. 하고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진짜요…?"
"싫으면 말고."
"아, 아니요! 꼭 두세요, 꼭!"
"알았으니까 내일 나가지 말고 집에 붙어있어."
"또 왜요……."
"신체 포기 각서 쓸래?"
"…어차피 약속도 없어서 집에 있을 참이었거든요?"
"잘됐네."
"…퍽이나……."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할 테니까 잘 자."
민윤기씨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에 들려있던 핸드폰을 가져가더니 곧 방문을 닫고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파가 바스슥거리며 가라앉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로… 나 지금 잘하고 있는 거 맞아? 하는 의구심이 들었으나 그 생각은 점점 몽롱해지는 정신 아래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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