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OST- Save you
경성 비밀결사대 08
written by 스페스
무릎을 감고 있던 지민이 고개를 들어 태형의 얼굴을 보았다. 분명 제 목숨을 구해줄 동아줄이건만 지민은 적잖이 혼란스러웠다. 태형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지민은 그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태형을 따라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진 복도를 가로지르는 동안 무슨 정신으로 걷고 있는지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지민은 앞서 걷는 소년의 뒤통수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그를 불러 세웠다.
"저기."
지민의 목소리에 태형이 고개를 돌렸다. 아직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그제야 지민은 비로소 태형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고는 말했다.
"왜 그랬어?"
"응?"
태형의 반문에 지민이 두리번거리며 복도를 살폈다. 일본 경찰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내 일행이 아직 저기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럼 일행이랑은 밖에 나와서 만나면 되잖아."
마치 질문이 새삼스럽다는 듯, 천진하게 대꾸하는 태형의 말에 지민은 할 말을 잃었다.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반면 지민을 응시하던 태형의 낯은 점점 어두워졌다.
"내가 혹시 잘못했어?"
"어? 잘못은 아닌데..."
"아, 그럼 다행이다."
지민을 향해 씽긋 웃는 태형이었다. 사진 속 표정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에 지민은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사무소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마치 꿈같았다.
「김태형!」
멀리서 들리는 소리에 소년이 출구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민은 단번에 목소리의 주인공이 윤기임을 알았다. 지민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고마웠어. 난 빨리 가봐야 해서."
이제 막 검문을 통과한 세 사람이 바리케이드를 지나 복도로 걸어 나왔다. 지민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들 뒤로 바짝 붙어 걸었다. 지민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태형은 다시금 자신을 부르는 윤기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복도와 맞닿은 출입구에 윤기의 실루엣이 보였다. 태형은 반가운 마음에 지민을 지나쳐 출구를 향해 내달렸다. 손에 쥔 가죽 가방이 태형의 걸음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숨이 차도록 뛰어나온 태형을, 윤기는 웃으며 바라보았다. 이윽고 바닥에 가방을 내던진 태형이 와락 윤기를 껴안았다. 윤기가 몇 번이나 밀어내려 했지만 태형은 개의치 않았다.
"형 보고 싶었어. 형도 나 보고 싶었지?"
"야, 남자끼리."
"보고 싶었다니깐."
"김태형. 어쩜 그대로냐."
윤기가 자연스레 태형의 가방을 빼앗아 들고는 선착장 구석에 세워둔 승용차를 향해 걸었다.
"너 괜찮아?"
"응?"
"안에 무슨 일 난 것 같던데."
"괜찮으니까 형 앞에 있지. 근데 나 약간 이제 배고프다. 형."
"가자. 밥 먹으러."
* * *
주인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책장 뒤로 울리는 둔탁한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깨달았다. 바닥으로 떨어진 책 소리와 동시에 책장 뒤로 솟아오른 얼굴. 남준이가 서점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멀찍이 떨어진 우리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지만 남준이는 그저 말없이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녀석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윽고 망부석처럼 서 있던 녀석이 가방을 쥔 채 출입문으로 향했다.
"다음에 다시 올게요."
주인아저씨가 나와 출입문을 번갈아 보고는 물었다.
"느그들 무슨 일 있었나?"
"죄송한데 저도 다음에 올게요."
오늘만큼은 녀석을 붙잡고 시원하게 물어야 할 것 같았다. 대체 동경에서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왜 마음이 변한 건지. 이미 서점을 빠져나간 남준이를 따라나섰다. 골목 끝에 선 녀석의 어깨가 괜스레 무겁게 보였다.
"김남준!"
녀석은 잠시 멈칫했으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도망치듯 골목을 벗어나는 남준이를 덥석 붙잡았다. 어쩔 수 없이 돌아보는 그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책방에는 왜 갔어? 거긴 이제 네가 좋아할 만한 책은 없을 텐데."
"사상이 변한 사람은 추억도 그리워하면 안 돼? 그건 너무 가혹한데."
남준이 내 눈을 피한 채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왜 변한 건데."
"옳다고 생각하는 걸 따른 것뿐이야."
"... 혹시 아버지 때문이야?"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남준이의 전향에 대한 몇 가지 설이 돌았다. 그중 가장 유력한 가정은 독립운동가였던 그의 아버지에 관한 얘기였다. 남준이의 아버지는 동료의 밀고로 체포된 후 결국 옥에서 생을 마감하셨다. 아마도 그 소식을 듣고 남준이의 생각이 변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몇몇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마치 정설처럼 받아들여졌다. 동료의 밀고로 인한 충격.
"아니야 그런 거."
"밀고 때문에? 믿었던 사람들이 배신하는 거 보니 모든 게 덧없게 느껴져서?"
"그런 거 아니야. 월아."
말을 마치고 녀석이 나를 떼어냈다. 다시금 방향을 틀어 길을 걷는 녀석을 향해 소리쳤다.
"차라리 네가 그래서 마음이 변한 거라면 좋겠어!"
녀석이 고개를 돌려 다시금 나를 바라보았다. 슬픈 낯이었다.
"아버지의 희생이 절대 부질없지 않다는 걸 언젠가 알게 되면, 그럼 네 생각 다시 바뀔 수 있는 거잖아."
꾹 참아보려 했지만 자꾸만 왈칵 눈물이 솟았다. 남준이가 내게로 가까이 오려다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틀렸어, 그 추측. 그니까 기대하지 마. 울지도 말고."
자꾸만 눈물이 나는 통에 더 이상 녀석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흐려진 시야 사이로 녀석의 뒷모습이 흩어졌다. 기대하지 말라는 말이 가슴에 박혀 계속 따끔거렸다.
* * *
도어맨이 출입문을 열자 윤기와 태형은 조선호테루 로비에 진입했다. 내부는 한껏 차려입은 사람들뿐이었다. 태형은 목을 꺾은 채 천장 한가운데 놓인 샹들리에를 훑어보다가 이내 실내 곳곳을 살폈다. 그리고는 윤기를 향해 말했다.
"우와, 경성도 많이 변했네. 저기 저건 승강기야? 경성에도 이제 승강기가 있어?"
달뜬 태형의 목소리가 로비 안을 울렸다.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윤기가 태형에게 눈짓으로 주의를 주었다. 그럼에도 한껏 신이 난 태형은 윤기보다 반발자국 앞서 걸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두 사람은 로비를 가로질러 조선호테루 내 프렌치 레스토랑인 팜코트로 향했다. 팜코트는 미쓰코시 4층 카페만큼이나 모던걸, 모던보이들의 모임 장소로 유명세를 치르는 중이었다. 미리 예약해 둔 덕분에 가장 안쪽 테이블에 자리 잡은 윤기가 태형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윤기는 메뉴판 첫 페이지부터 정독하는 태형을 빤히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형은 뭐 먹을 건데?"
여전히 메뉴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태형이 윤기에게 물었다.
"나?"
"응, 나는 그럼 그거."
"그거 뭐?"
"형이 먹는 거."
"그럴 거면서 메뉴는 왜 봤어?"
"다들 이렇게 하던데."
태형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윤기가 웨이트리스를 불러 능숙하게 주문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란서식 요리가 하나둘 테이블 위에 놓였다. 윤기는 식사를 하는 내내 태형의 동경 생활에 대해 들었다. 일본에서 무슨 공부를 했냐는 윤기의 질문에 태형은 몇 번 못 들은 척하다가, 결국 공부는 자신에게 안맞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실토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없는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경성은 어떻게 변했는지 쉴 새 없이 물었다. 숙부는 몇 번 동경을 방문했던 터라 종종 만났지만, 윤기와의 조우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두 사람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그간 쌓아둔 이야기를 나누었다.
빵을 오물거리던 태형이 갑작스레 무언가 떠오른 듯 윤기에게 말했다.
"맞다. 나 아까 엄청 놀랐다."
윤기가 수프를 뜨다 말고 태형을 바라보았다.
"나 총 맞는 거 처음 봤어."
"아까 사무소에서?"
"어. 누가 쏜지는 모르겠는데 일본 사람 한 명, 아니, 두 명이 총 맞고 쓰러졌어. 엄청 무서운 거 있지."
"경성에서는 빈번한 일이야."
"근데 내가 한 명 구해줬지."
"구해줘?"
"응. 일본어로 딱 말하면서 데리고 나가줬어."
태형은 오늘 오전 출입국 사무소에서 있던 일들을 윤기에게 상세히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한껏 목소리를 내리깔고 당시 상황을 재현했다. 이윽고 뿌듯한 표정을 지은 태형이 윤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칭찬을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누굴 데리고 나갔는데?"
"누구? 누군지는 몰라."
윤기는 자못 심각한 얼굴로 쥐고 있던 수저를 수프 그릇에 떨궜다. 그리고는 목이 타는 듯 유리 잔에 든 물을 연거푸 마셔댔다.
"만약에 네가 구해줬다는 그 사람이 진짜 범인이었으면."
"내가 계속 봤는데 총 안 쐈어."
"그게 문제야? 친구라고 거짓말한 거 발각돼서 너 끌려갔으면 아버지 지금쯤 난리 나셨다."
"근데 너무 불안해 보였어. 자꾸 눈이 마주쳤단 말이야."
윤기의 눈치를 보던 태형은 입술을 삐죽이고는 수프 그릇에 고개를 묻었다. 태형의 말을 곱씹던 윤기의 머릿속에 갑작스레 떠오른 이가 있었다. 누군가를 도와주겠다며 앞뒤 안 가리고 나서던 여자. 윤기는 슬쩍 웃다가 표정을 고치고 말했다.
"하여간 주변에 대책 없는 사람 투성이다."
윤기의 혼잣말에 태형은 민망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정찬의 마지막 순서는 커피였다. 태형은 주변 사람들을 쭉 훑어본 뒤, 커피잔을 들어 향을 음미하고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태형의 모습에 윤기는 팔짱을 감은 채로 피식 웃었다. 아마도 태형의 입국 덕에 집안 분위기가 한결 좋아질 듯했다. 여태껏 제게 집중되었던 숙부의 관심 또한 태형에게로 옮겨 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테고.
두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구를 향해 걷는 동안 테이블에 앉은 뭇 여성들의 이목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윤기는 노골적인 눈길이 불편한 듯 무표정으로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팜코트 맞은편에는 투숙객을 위한 고급 양장점이 자리했다. 태형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걷다 말고 홀린 듯 상점의 쇼윈도 앞으로 다가갔다.
"와, 경성도 유행 엄청 빠르다. 얼마 전에 미유키가 저 옷이랑 똑같은 거 샀었는데."
태형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쇼윈도 안에 걸린 단정한 크림색 원피스였다. 소란스러운 태형의 목소리에 윤기 또한 양장점 쇼윈도로 시선을 던졌다. 고급스러운 남녀 양장이 각각 조명을 받으며 걸려있었다. 윤기는 무언가 생각난 듯 태형에게 말했다.
"옷 사줘?"
"아니, 나 괜찮은데."
"금의환향. 비단옷은 구식이니까 양장으로."
그리고는 태형의 말을 듣지도 않은 채, 상점으로 걸어 들어가는 윤기였다. 주인이 두 사람을 보며 반색했다. 윤기는 턱짓으로 태형을 가리키며 점원에게 말했다. "얘 사이즈에 맞게, 밖에 걸린 옷으로요." 점원이 태형의 양팔을 들어 올리고 신체 곳곳 치수를 쟀다. 한참 숫자를 기록하고 있는 점원에게 윤기가 다가가 말했다.
"그 옆에 걸린 옷도 같이 계산해 주세요."
"여성복이요?"
"네."
혹시나 들릴까 노심초사하며 대답했건만, 태형은 어떻게 들은 건지 윤기에게 다가와 물었다.
"누구 주려고?"
"있어."
"혹시 애인?"
"아니야."
"오. 애인 맞나 보네. 나 형수 생기나 봐. 그치 형?"
"아니라니까."
태형이 윤기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장난스럽게 놀리자, 윤기가 귀찮다는 듯 그 얼굴을 피했다.
"에이 맞네. 형수네. 나 그럼 도련님 소리 듣는 거야?"
"아니라 했지."
"뭐 어때, 자유연애시대에."
"김태형 그만해라."
윤기의 굳은 표정을 살핀 태형은 곧 입을 다물었으나, 자꾸만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윤기는 옷값을 계산하고, 포장된 여성용 원피스를 손에 쥔 채 양장점을 빠져나왔다. 로비를 지나 자동차로 향하는 내내 헛웃음이 나왔다. 윤기는 속으로 몇 번을 자책했다. "내가 미쳤지."
* * *
호석은 스페스로 들어오는 지민의 얼굴을 살폈다. 평소보다 삼십분가량 늦었지만 되려 눈치를 살피는 건 호석 쪽이었다. 요 며칠 지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지민이 실내로 들어오며 연신 죄송하다고 꾸벅이는 통에 민망해진 호석이 괜찮다고 대꾸했다. 이윽고 바에 앉은 호석이 그를 바라보자, 지민 또한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평소에 안 늦으면서 오늘은 웬일이야?"
"오전에 친구를 만났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죄송해요."
"아냐. 아직 개점시간 한참 남았는데, 뭘. 근데 너 요즘 얼굴이 안 좋다."
"저요? 저 괜찮은데."
지민은 제 얼굴을 매만지며 호석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혼란스러운 마음은 잘 숨겨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민의 등을 두드리며 일어난 호석이 덧붙였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얘기해. 단순히 고용주, 직원으로만 생각하면 섭섭하다. 형은."
형. 호석의 마지막 말에 놀란 지민이 고개를 들었다. 호석은 그런 지민을 향해 씩 웃고는 창고로 걸음했다.
순간 지민은 호석에게 모든 상황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경성에 올라온 이후 지민에게 발생한 수많은 사건은 혼자 감당하기에 벅찬 것들이었다. 원체 타고난 성품이 대범하지 못한 지민이었다. 독립운동에 발을 담근 이후로 몇 번이고 독립에 투신하기를 잘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한 개인으로서 느끼는 불안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특히 경감에게 총을 쏜 이후로 종종 일본군이 자신의 쪽방에 들이닥치는 악몽을 꾸고는 했다. 때로는 귓가에서 반복적으로 총성이 울려대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지민은 책상 위에 놓인 낡은 액자를 소매로 닦으며 주문처럼 같은 말을 되뇌고는 했다.
'형. 나는 괜찮아. 내가 꼭 자랑스러운 동생이 될게.'
호석은 창고에서 새로 들어온 와인 한 짝을 들고 나오며 지민을 흘끗 보았다. 또 멍하니 있는 그를 향해 호석이 말했다. "박지민.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호석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지민이 높은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곧 구석에 놓인 손걸레를 집어 들고는 호석을 향해 웃으며 대꾸했다.
"아무 일 없어요. 사장님. 아니, 형. 저 걸레 빨아 올게요."
지민이 자리를 뜨자마자, 철문에 걸린 종이 딸랑거렸다. 호석의 시선이 출입문에 멈췄다. 카페에 들어온 이는 윤기와 낯선 사내였다. 호석은 한눈에 보기에도 잘생긴 소년을 응시하다가, 윤기에게 누구냐고 입모양으로 물었다.
"우와. 진짜 멋있다."
윤기와 함께 온 소년이 넋을 놓고 스페스 내부를 훑었다. 곧이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태형은 호석을 향해 씩 웃었다.
"여기 사장님이에요? 진짜 멋있어요."
"집에 데려다주고 혼자 오려고 했는데, 굳이 따라오겠대서."
윤기가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호석을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
"김태형입니다."
태형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호석이 그제야 누군지 알았다는 듯 반가운 얼굴을 했다.
"오매. 일본에서 돌아온 거야?"
"저요? 오늘이요."
호석이 윤기를 향해 물었는데도, 태형이 앞서 대꾸했다. 호석은 그런 태형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태형은 어느새 테이블 한 쪽에 쌓인 모던 잡지를 구경하다가, 또 카페 구석에 놓인 축음기를 돌렸다. 그때 지민이 물에 적신 손걸레를 들고 홀로 나왔다.
"지민아 인사해. 윤기형 동생이래."
호석의 목소리에 축음기를 매만지던 태형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얼떨떨한 얼굴로 지민을 바라보았다. 지민 또한 태형을 보고 적잖이 놀란 기색이었다. 태형의 사촌 형인 윤기가 스페스에 자주 들르니 곧 태형과 다시 만나겠다 싶었지만,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조우할 거라고는 예상치도 못했다.
"어? 저기."
"처음 뵙겠습니다. 박지민입니다."
지민이 선수를 쳤다. 고개를 숙이며 수만 가지 생각을 했다. 혹시 태형이 저를 아는척 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뻔뻔하게 계속 모른척 할까.
태형이 손가락으로 지민을 가리킨 채 얼떨떨해하자 옆에 선 윤기가 물었다.
"알아?"
"아뇨. 전 처음 봤는데..."
분명 태형에게 물었는데 지민이 먼저 나서서 대답했다. 그런 지민을 바라보는 태형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서운해 보였다. 카페 안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호석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자, 태형이 금세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동경에서 알던 친구랑 많이 닮아서 놀랐어요."
태형의 알 수 없는 시선이 지민을 향했다. 지민은 애써 그 눈길을 피하며 조용히 숨을 뱉었다.
네 사람은 곧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이윽고 호석은 태형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호구조사를 마친 호석이 지민에게 말했다.
"태형이랑 너랑 동갑이네. 둘이 친구하면 되겠다. 근데 형은 얘 카페 구경시켜 주러 온 거야?"
"아니, 그게."
윤기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리자, 호석이 윤기를 데리고 안쪽으로 향했다. 여자의 밀서를 태워주었던 그 방이었다.
"뭐야, 형 오늘 표정 이상하네."
윤기가 한참이나 머뭇거리더니 또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포장된 상자를 올려놓았다. 상자 위에 적힌 상호를 빤히 바라보던 호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쌈닭 오면 전해 줘."
"쌈닭? 아, 그분. 언제 오는데?"
"다시 여기 올 일 없을까?"
"아니, 여기에서 받아 가기로 미리 약속하거나 그런 게 아니야? 그럼 이거 뭐야? 선물? 지금 형 굉장히 수상해."
호석이 그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자, 윤기가 애써 시선을 피했다. 호석은 선물 꾸러미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딱 봐도 양장점 상호이고, 그럼 옷이라는 거네. 옷 선물은 왜 하는 건데."
"사정이 좀 있어. 근데 쌈닭 진짜 여기 올 일 없냐?"
"그걸 내가 아냐? 형이 알지."
"그러게. 이거 어쩌냐."
"어쩌긴 뭘 어째. 저번에 데려다줬으면 집 알 거 아니야."
한숨을 내쉬며 마른 세수를 하는 윤기에게 호석이 재차 말했다.
"쌈닭은 형 병원에 있다는 말 듣고,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바로 달려 나갔건만, 형은 남자가 뭐 이래?"
그 말을 듣고 윤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석은 테이블 위에 놓인 상자를 윤기 쪽으로 밀었다. 그제야 상자를 집어든 윤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호석은 윤기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웃으며 덧붙였다.
"형이 나서지 않으면 그냥 끊어질 연 일수도 있어. 가서 좀 이어봐."
"연은 무슨. 태형이는 여기서 더 놀다가도 되지?"
"당연하지."
윤기는 무거운 걸음으로 스페스를 나섰다. 주차해 둔 차를 향해 걷던 윤기가 갑작스레 방향을 틀어 전차역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가는 언제고 마음이 변할 것 같아서였다. 덜컹거리는 전차 안에서 윤기는 그간의 일들을 곱씹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연이은 며칠간의 만남으로 당연히 쌈닭과 다시 조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연이은 우연으로 관계가 계속 이어진 탓에, 둘 사이를 그다지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그러나 윤기는 깨달았다. 상황을 되짚을수록 호석의 말이 맞다는 것을. 굳이 이으려 애쓰지 않으면 다시 만나기 힘든 연이었다.
윤기는 의자에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자꾸만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From.스페스 |
여러분 즐거운 한 주 보내셨나요? 오늘은 가온시상식 덕에 모두들 행복하셨을 것 같아요. :)
이번 화는 유독 안써지는 통에 애를 먹었습니다. 그러니 노잼이라도 이해해주세요ㅠㅠㅠㅠㅠㅠㅠ 더불어 이 글은 앞으로 일주일에 1화 정도 업로드 될 예정이에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기다려주시는 독자님들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하실 것 같아요.
아! 저 정말 꿀 발라놓은 것 마냥, 댓글을 읽고 또 읽는답니다. 댓글에 하나하나 답을 달지 못해 미안한 마음 뿐이에요. 정성스레 달아주시는 댓글들과 독방에서 써주시는 추천글들, 너무너무 감사한데 그 마음을 다 표현할 길이 없네요.
여하튼 빈말처럼 보일지라도, 다시 한 번 말하려구요. 독자님들 제가 많이 애정합니다.
+ 암호닉은 최신화에 계속 받고 있어요. 마지막 글에 신청부탁드려요. 누락된 암호닉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사랑스런 암호닉들!
ㄱ 감자 / 강아지똥 / 개나리 / 경화수월
ㄴ 나비 / 네몽데몽 / 노모노 / 녹차맛콜라 / 늉글레
ㄷ 달래 / 달력 / 달리 / 달콤한마음 / 됼됼
ㄹ, ㅁ 란 / 룰루랄라 / 마리몬드 / 모찌한찌민
ㅂ 박스 / 박지민 / 밤툰 / 베네핏
ㅅ 사랑해 / 삼월 / 샷건 / 서영
ㅇ 아보카도맛 / 아조트 / 아침햇살 / 어른꾹꾹
ㅈ
ㅊ/ㅋ/ㅌ 체리소녀 / 침구 / 침자몽 / 침치미/ 캡짱 / 큄
영어, 숫자 CGV / lunatic / 99.9 / 777 /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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