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눈을 뜬 곳은 완전한 어둠 속이었다.
소년은 눈을 감으나, 뜨나 컴컴한 어둠 뿐인 이 공간에서 눈을 깜빡이는 스스로의 행동 자체가 과연 현실인 것인지 의이 되었다. 한참을 뒷걸음질 쳐도 딱딱하고 차가운 벽이 느껴지도 않는, 저의 몸에 흐르는 피소리 마저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고요한 이 공간에서 소년은 지레 겁을 먹고 말았다. 소년이 이 곳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평생의 첫 기억에서부터 두 눈으로 보고, 두 손으로 만졌던 소년이었다. 그런 소년에게 두 눈으로 볼 수도, 두 손으로 무언갈 잡을 수도 없는 이 곳은 알지도, 알아갈 수도 없는 세계였다.
무인도에 혼자 뚝 떨어져도 이것보단 나을까. 소년은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때 소년의 귀에서 무언가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 잔잔한 파도소리와도 같은 물소리가 귀에 가득 찼다. 양 귀에 소리가 가득 차오르면서부터였을까, 소년의 시야 역시 트였다. 소년의 시야에 희뿌옇게 배경이 뿌려졌다. 모래가루를 뿌리듯 위에서부터 내려앉는 풍경에 소년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온통 짙은 살색으로 가득한 둥그런 공간 속에서 멀어질수록 색이 짙어졌다. 방금 전 저가 있던 곳 마냥 검은 바깥쪽을 바라보던 소년은 고개를 내려버렸다. 어둠은 이제 지겨웠다.
소년은 귓가에서 들려오는 소리 탓에 자신이 바다에라도 빠진듯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귀를 툭툭 쳐보기도 하고, 입을 벌려 공기방울이 생기는지 살펴본 소년은 걸음을 떼었다. 몸이 깃털마냥 가벼웠다. 한발짝만 떼어도 열걸음은 넘게 걸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벽에는 닿지 않았다. 소년은 다시 두려워짐을 느끼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소년은 보고싶었다. 보고싶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라 이미 머릿속으로는 그 말을 수없이 내뱉은 듯한 착각이 일었다. 하지만, 누가? 누가 보고 싶은 것일까? 소년은 생각했다. 자신은 누가 보고싶은 것일까. 누구의 이름도,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무엇인가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그것의 향을 생각해내라면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이 근접한 기억인데도 소년은 기억해내지 못했다. 향이 아니라면 그것의 형체라도, 그것의 소리라도, 그것의 촉감이라도. 어떠한 것이든 떠올리고 싶었던 소년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한웅큼, 두웅큼. 손에 잡힐듯 잡히지 않는 기억 대신에 소년은 자신의 머리칼을 크게 움켜쥐었다. 기억이 없는데도 기억할 수 있다고 저 스스로는 한참을 믿었지만, 결국 떠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상 없는 그리움은 점점 더 소년의 뼛속까지 파고들었고, 소년은 결국 그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입을 벌렸다. 답답한 속을 풀어내고 싶었다. 분명 성대를 울려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도 소년의 귀에는 여전히 물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무엇인가가 가라앉았다 떠오르는 묵직한 물소리에 소년은 입을 뻐끔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울어대었을까, 눈물을 훔쳐낸 손을 떼어내자 저 멀리서 작은 형체가 보였다. 소년은 느꼈다. 저것이 내가 여태껏 그리워했던 것이구나.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고, 눈 앞에 있는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소년은 알 수가 있었다.
소년이 그것을 향해 달음박질 쳤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소년은 뜀을 멈추고 말았다. 한발짝씩 그것을 향해 뛰어갈 때 마다 무언가가 소년의 온 몸을 감아왔다. 부드럽고, 따스한. 기분 좋은 포근함마저 느껴지는 길다란 줄 같은 것이 소년을 옥죄어왔다. 숨이 막히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온 몸을 긁어냈던 그리움도 이것보단 덜했던 것 같았다. 소년은 점점 힘이 빠져가는 몸에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멀리서 보이는 형체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저의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손을 뻗어도 닿일리 만무했다. 소년은 다시 소리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이 곳에서 소년은 갓 태어난 아이마냥 울음이 잦았다.
![[EXO/레첸]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것은 1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0/6/d/06d518cd66c2bee655a2d83a4c7f0af0.jpg)
품에 소년을 안은 그는 이제 더이상 움직임이 없는 소년에게 입김을 불어주고 있었다. 그에게서 뿜어져나오는 따뜻한 입김은 희뿌옇게 흐려지며 소년의 얼굴을 감쌌다. 붉게 물든 소년의 두 뺨을 양 손으로 어루만지던 그는 방금 전 보았던 소년의 붉은 눈이 떠올라 두 눈을 감았다.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두 눈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눈에서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아니, 흘릴 수가 없었다.
그는 뺨을 어루만지던 손을 들어올려 저의 뜨거운 눈가를 꾹꾹 눌러대었다. 엄지손가락에 눌려진 눈가는 한껏 가득 담고 있던 눈물을 흘려내는 대신에 그의 머릿 속 가운데 자리한 소년의 기억을 흘려내었다. 산 속 골짜기에서 흘러나오는 샘물마냥 얇은 줄기로 소년과의 기억을 흘려낸 그는 다시 눈을 뜨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새하얗다 못해 창백한 소년의 얼굴이 그 날의 기억을 선명히 만들었다. 소년은 그 날, 그러니까 소년이 그를 처음 만났던 그 날에도 이렇게 창백한 얼굴빛을 띄고 있었다.
그가 소년을 발견했을 때, 소년은 영 어울리지 않는 행색을 하고 있었다. 반듯하게 다려진 교복을 입은 채 골목길에 쪼그려 앉아있던 소년은 등을 잔뜩 굽힌채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옆에서 바람이 불건 말건 손으로 불을 가리지도 않고 담배와 라이터를 제 몸에서 저만치 떨어뜨려놓은 채 불을 붙이고 있던 소년이었다. 검은색으로 차분하게 내려앉은 곱슬머리 아래로 눈물이 고인 두 눈은 그를 발견하지 못한 채 울렁거리는 라이터의 불꽃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란빛이 도는 불꽃을 따라 일렁이던 두 눈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했다.
그는 천천히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걸어가는 동안에도 소년은 손을 덜덜 떨며 라이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소년과의 거리가 겨우 한걸음 남짓 남았을 때 소년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 키가 크지 않는 그가 소년에게는 거인과도 같이 느껴졌다. 소년은 두 눈을 꼭 감고는 뒤로 나자빠졌다. 덕분에 담배와 라이터는 소년의 손을 떠나 그대로 물웅덩이에 빠졌다. 잔잔하게 퍼지는 웅덩이를 향해 잠시 시선을 둔 그는 소년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소년은 창백한 얼굴빛을 한 채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 들을 꾸중 탓에 그렇게 겁을 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힘 있게 뜬 눈과는 반대로 벌벌 떨고 있는 소년에게는 그의 존재 자체가 두려움인 듯 했다.
" 기다렸지? "
소년은 저에게 손을 내민 그의 말소리에 입만 벙긋거렸다. 그는 소년의 열려진 입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말소리를 끌어내려는 듯 소년의 눈만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리 무서운지 눈물까지 매단 소년의 눈에는 당혹스러움이 잔뜩 담겨있었다. 그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는가 싶더니 저 혼자 미소를 띈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힘 있는 두 눈과는 달리 저 몸이 달달 떨리는 이유도, 저의 가벼운 인삿말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그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다리를 접어 소년과 눈높이를 마주했다. 뒤를 짚고 있던 소년의 손이 벌벌 떨리면서 뒤로 떼어졌다. 하지만, 소년의 몸은 그 손을 따라기지 못하고 가만히 그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는 소년과 눈을 맞추고 앉아서는 푹 파인 보조개를 보이며 한번 더 웃었다.
"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다 잊었구나, 종대. "
" …누구…누구예요. "
" 니가 보고 싶어했던 사람이야. 종대. "
소년, 그러니까 종대는 제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더듬거리며 찾았다. 하지만, 종대의 가슴에 달려있어야했던 명찰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종대는 이번엔 목 주위를 양 손으로 어루만졌다. 땀이 잔뜩 베여나오는 목에는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았다. 학생증도, 명찰도 가지고 있지 않는 종대의 이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종대는 입술을 꼭 깨물며 힘들게 말을 내뱉었다. 이리저리 음을 빗겨나가는 종대의 목소리에도 그저 미소를 짓고 있던 그는 미안하다며 종대에게 한번 더 손을 내밀었다. 종대는 쉽게 그 손을 잡지 못했다. 그는 손을 거두어가고는 양 손바닥을 맞붙였다. 기도하는 모양이 된 그의 손을 가만히 바라본 종대는 눈을 굴려 다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선한 눈동자는 여전히 종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이렇게- 종대가 기도했잖아. "
" 내, 내가 언제……. "
" 어젯밤…아, 그러니까 여기선 종대가 어릴 때. "
" ……. "
" 종대가 빌었어. 제발 내가 존재한다면, 정말로 내가 존재한다면 종대를 도와달라고. 종대의 앞에 내려와서 자기를 데려가라고. "
" …당신이 오기를? "
" 응. 그래서 이렇게 종대 앞에 내가 온거야. "
꽉 진 양 손을 바라보랴, 저를 바라보는 동그란 눈을 바라보랴 정신이 없는 종대는 그가 하는 말에 마른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울렁거리는 것을 살핀 그는 마치 기도하던 종대를 따라하는 듯 두 눈을 꼭 감고는 손을 바들바들 떨어댔다. 둘 사이에 고요한 적막만이 흘렀다.
종대의 머릿속에는 제 눈 앞에 있는 그를 찾은 기억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맹세컨대 종대는 어젯밤, 그러니까 자신이 어릴 적에 그를 찾은 적이 없었다. 아니, 없어야만 했다. 지금 종대의 눈 앞에서 계속 웃는 그의 얼굴을 종대는 오늘 처음 본 것이었으니까. 그 목소리도, 얼굴도 종대에게는 낯설기만 했다.
" 기억 안 나나 보구나. "
" 이름이… 뭔데요. 난 당신 몰라요. 정말로… 모른단 말이야. "
" 겁 먹지마. 종대는 날 잘 알잖아. "
" 그러니까, 난 당신을 모른다니, "
그는 종대의 앞에 선 이후로 처음으로 짙은 눈썹을 기울였다. 갈색의 눈썹이 내려가는 모습에 종대는 이제 울렁거리는 목소리로 호소하다시피 그에게 물었다. 그는 울먹이는 종대의 뺨에다 손을 가져다대며 종대를 달랬다. 마치, 구구단을 외지 못해 우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부모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종대는 그런 그에게 몸을 흠칫 떨면서도 고개를 뒤로 내빼지 않았다. 그의 손짓에 얼굴을 맡긴 종대는 가만히 저를 어루만지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종대는 기억해냈다. 10년 전의 기억을.
그 어린 날에 종대는 양 손을 모았었다. 이 끔찍한 자신을 제발 데려가달라고. 스스로도 이런 자신이 싫다고 울어대는 겨우 여덟살짜리의 꼬마였던 종대는 막 태어났을 때의 울음보다 더 큰 울음소리를 내며 울었었다. 그리고 다시 외쳤다. 천사가 있다면, 하늘에 저를 내려다보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런 저를 데려가 달라고.
그 날은 끔찍했던 저의 탄생에 대해 엿들은 날이었다.
" 기억-났구나. 종대. "
그는 아무 말 없이 종대를 제 품 안에 끌어안았다. 종대는 그 품 안에서 목 놓아 울었다.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것은 |
쓰기는 한참 전부터 썼는데 올리는건 오늘이네요 ㅜㅜ 제 글을 기다린 분이 계실지는 모르지만 열심히 써보았습니다ㅜ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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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유지태 못알아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