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김여주!! 뭔데!!! 나는 그렇게 외치는 정수정을 놔두고 곧장 레스토랑을 뛰쳐나왔다. 든 거라고는 지갑과 파우치밖에 없는 가방을 어깨에 대충 걸치며 택시를 잡았다. 진짜 미안하다고,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흘리듯 말했는데 워낙 정신없이 나와서 정수정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중요한 건 민형이였다. 며칠 전 우연히 만났던 백화점 안 카페에 앉아있다고 해서 어디 가지말고 기다려라 두 번이나 말한 후 끊은 핸드폰을 꾹 쥐며 앞에서 멈춰 선 택시에 올라탔다.
칠천육백 원을 찍은 미터기를 확인한 후 오천 원 지폐 한 장, 천 원 지폐 세장을 기사 아저씨께 건네며 외쳤다. 잔돈은 필요 없어요! 평소였으면 말도 안 되는 드라마 대사였다. 택시에서 내린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눈 앞에 있는 카페를 향해 달리듯 발을 옮겼다. 혹시나 말을 안 듣고 그새 없어졌으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다행이도 카페 문을 열자마자 민형이가 보였다. 그와중에도 공부 중인.
“민형아!”
이름을 부르자 문제집만 보고있던 고개가 들린다. 열심히 움직이던 샤프가 일순 멈춤과 동시에 녀석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뒤로 넘기며 이민형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민형이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오셨어요? 라며 음료 한 잔을 내 쪽으로 밀 뿐이다. 뭐야. 집 나온 거 맞아? 왜이렇게 멀쩡해?(당황)
“이건 뭐야? 나 마시라고?”
“네. 미리 주문해놨어요.”
“..집 나왔다며!”
“네.”
(,,゚Д゚) 아마 나는 이 표정을 짓고 있을거다. 집 나왔다는 소리 듣자마자 놀래서 친구고 점심이고 다 제쳐두고 달려왔는데 이렇게 태평하면 내가 뭐가 돼. 잔뜩 당황한 나를 보며 민형이는 고개를 왼쪽으로 까딱였다. 그제서야 묵직하게 민형이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큰 가방이 보였다. 내가 다시 녀석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이민형이 말한다. 공부할 거랑 옷 같은 거 다 들고 나왔어요.
“저 돈도 많아요.”
연달아 하는 말이 꼭 저 작정하고 나왔어요, 로 들려서 순간 목이 탔다. 나는 민형이가 내밀었던 음료를 빨대로 한모금 들이켰다. (아쉽게도 초코만땅은 아니였다) 시원한게 식도를 타고 내려가니 정신이 확 사는 느낌이었다. 큼, 하고 목을 푼 후 일단 민형이 앞에 훤하게 펼쳐져있던 문제집을 조심히 덮었다. 공부보단 대화가 시급했다.
“민형아, 그래서.”
“..”
“집 왜 나왔어?”
내가 제 문제집을 덮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더니 질문이 끝났는데도 내 손만 내려다본다. 그래, 멀쩡해 보여도 속에서 뭐가 터졌으니까 집을 나왔겠지. 누구보다 열심히 수능을 준비하던 애가 제일 중요한 이 시점에 반항 아닌 반항을 시도한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거다. 나는 잠자코 민형이가 대답하길 기다렸다. 한참 말이 없던 이민형은 머리를 한 번 헝클이듯 넘기더니 곧 고개를 들었다.
“새로 오신 도우미 아주머니 음식 솜씨가 영 별로라서요.”
녀석이 말했다. ..뭐? 뒤를 이어 얼 빠진 내 목소리가 근방을 작게 울렸다.
“아, 사실 친구랑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이 집 나가기 했는데 제가 졌어요.”
나는 입술 새를 작게 벌린 채 이민형을 바라봤다. 어딘가 익숙한 상황이였다. 으음, 이거 완전 며칠 전 나잖아? 잠시 할 말을 잃었지만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음료를 마시는 것으로 다시 집중했다. 내가 구라파티 열었을 땐 끝까지 물어놓고 이런게 어딨어! 나는 두 눈에 힘을 주고 테이블 위에 올려둔 손을 주먹 쥐었다. 그리고 쾅, 약하게 내리치며 말했다. 너야말로 거짓말 하지마 이민형. 나름 선생님이라고 단호하게 말을 하자, 민형이가 짧게 한숨을 내쉰다.
“아.”
“..”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선생님 거짓말 그냥 눈 감아 줄 걸 그랬네요.”
이제와서..(울컥) 괘씸한 마음이 물씬 들어 입술을 씰룩 거리는데, 문제집 표지를 손으로 천천히 쓸어내린 녀석이 시선을 들어 나와 눈을 마주한다.
“담배 걸렸어요. 부모님한테.”
묵묵한 두 눈에 나는 힘을 풀었다. 저건,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였다. 민형이는 말을 끝낸 후에도 계속 나를 바라봤다. 몇 달을 모른척 하던 이민형의 흡연이 결국엔 걸려버렸다는 사실에 나는 잠시 눈을 굴렸다. 혼나는게 어쩌면 당연한 건데 왜이렇게 가슴이 철렁하는지 모르겠다. 엄마한테만 말하지 말아달라던 민형이가 떠올랐다. 어머님한테 많이 혼났나. 집을 나온게 아니라 쫓겨난 거 아니야? 내가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어어.. 민형아, 까지 불렀을 때, 민형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엄마가 많이 놀라셨나봐요. 우시더라고요.”
“..”
“근데 아빠가..,”
“..아버님이?”
“아빠가 엄마한테 화를 내길래.”
“..”
“잘못한 건 난데, 집에 있으면서 애 하나 관리 못 한다고. 그 사람이.”
일순 눈빛이 바뀌었다. 화를 참는 건지 주먹을 꾹 쥐며 냉담하게 말을 한다.
“아빠, 우리 엄마한테 그런 말 할 자격 없거든요.”
그래서 대판 하고 나왔죠. 홧김에. 그 말을 끝으로 민형이는 제 큼직한 손으로 눈가를 꾹 누르며 무겁게 숨을 내쉬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 애매한 상황에 일단 속상했겠다 말을 하며 테이블 위에 놓여진 녀석의 왼손 손가락 끝을 살살 쓰다듬었다. 차마 등까지는 팔이 닿지 않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다. 민형이는 내 손길 때문인지 한참 시선을 아래로 두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엄마가 걱정되는데.., 그래도 집에 가긴 싫어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는 뜻이였다. 내가 집으로 보낼까봐 걱정되나. 뭐 내가 보낸다고 순순히 들어갈 애도 아니지만.
“그래 일단.., 그럼 오늘은 어디서 자게?”
오늘은 말고, 잘 달래서 내일 쯤 집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그럴려면 오늘 하루 잘 곳이 필요할텐데, 나는 기껏해야 뭐, 친구네 집이요 정도로 나올 줄 알았지.
“찜질방 생각 중이에요.”
...저건 생각을 시도조차 하지 않은 답변인걸?^^ 순간 슈퍼 을의 위치를 잊고 미쳤냐고 물을 뻔 했다. 민형이가 너무 속상한 나머지 본인이 내일 학교에 가야하는 고삼이라는 걸 잊은 건가 싶었다. 너무 어이가 없는 바람에 입술만 벙긋거리고 있자, 민형이가 태평하게 묻는다. 왜요?
“..”
“...”
아, 구라파티에 이은 대환장파티였다. 나는 침착하게 마음을 달래며 물었다. 민형아, 친구네 집이 더 낫지 않을까?(미소) 그랬더니 자기는 친구가 이동혁밖에 없다며 고개를 젓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찜질방이 최선이라며.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답답한 마음에 음료 뚜껑을 열어 아직까지 차가운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래도 찜질방은 좀 심하잖아. 공부할 것도 다 들고 나왔다는 애가 거기서 공부를 어떻게 하려고. 학교는 어떻게 가려고..! 밥은! 잠은! 다 불편할텐데!
“찜질방은 아닌 것 같아 민형아.”
“그럼 어떡해요.”
“차라리 우리 집에서 자.”
아. 굉장히 충동적인 발언이었다.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는데 다시 주울 수도 없었다. 이민형의 눈이 이미 커졌기 때문이다. 나는 속으로 백 번 자책하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민형이가 손을 들어 뒷목을 쓸어넘기는게 보였다. 그러더니 그건 좀.., 중얼거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괜히 민망한 마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래도 찜질방보단 나았다. 어차피 엄마 아빠 안 계시고, 편하게 잠 자고 공부 할 방도 있고, 밥 내가 챙겨줄 수 있고, 안전하고, 공짜고.., 어? 괜찮은데? 걸리는 거라면 민형이가 받을 수도 있는 충격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제 방보다 훠얼씬 작은 내 방이라던지.. 내 초췌한 민낯... 뭐 그런거..(먼산)
“..일단 갈래?”
“어딜요?”
“우리 집.”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이민형을 바라봤다. 녀석은 말이 없었다. 고민 중인 것 같았다. 끝내 싫다고 해도 이번만큼은 절대 져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래도 찜질방보단 나았다. 어쨌든 찜질방보단 나았다. 아무튼 찜질방보단 나았다. 그러니까 말 나온 김에, 그냥 우리집으로 데려가는게 좋겠어.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이민형을 집으로 데려오는데 성공했다. ୧(๑•̀ᗝ•́)૭ !!!! 제딴에도 찜질방보단 우리 집이 나았나보다. 조심히 신발을 벗은 민형이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너네 집 보다 많이 작지?”
“네.”
..(코쓱) 그냥 한 번 물어본 건데 저렇게 바로 대답해주시니 머쓱해져 괜히 이마를 긁적였다.
“더 좋은데요.”
“어?”
“아늑해요. 사람 사는 집 같고.”
곧 다시 히히 웃긴 했지만. 나는 일단 쇼파에 앉으라고 말하며 민형이를 안내했다. 무슨 방을 쓰게 할지 고민이었다. 내 방이 딱 좋긴한데, 아무래도 민형이가 남자다보니 아무렇지 않게 내주기도 뭐했다. 음, 공부는 그냥 거실에 책상 하나 펴주고 잠은 안방에서 재울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민형이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쇼파에 앉은 채 나를 올려다보는 녀석이 보였다.
“저 쇼파에서 잘게요.”
또, 또 이상한 소리. 나는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쇼파에서 재울 거면 집에도 안 데려왔지. 나는 안방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너가 잘 곳은 저 방 침대야 민형아. 딱 잘라 말하는 내가 웃긴 건지 민형이가 작게 바람 빠진 웃음을 내보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있다 민형아, 불렀다. 나는 네? 하고 대답하는 이민형의 옆에 앉았다.
“이참에.. 담배 끊는 건 어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며 고개를 돌렸다. 꽤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한 민형이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다. 짧은 적막이 흘렀다.
“노력하고 있어요.”
“..”
“끊을게요.”
그 적막을 낮은 목소리가 흩뜨렸다. 진득히 나를 보는 시선에 나는 씩 웃으며 손을 들어 민형이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구 착해. 싫다는 말 없이 그러겠다고 하는 게 기특해서 나도 모르게 쓰다듬은 건데 손을 두 번 쯤 위아래로 움직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조금은 당황한 듯 표정을 짓는 얼굴을 보며 아차 싶었다. 나는 황급히 손을 뗌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는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정신 좀 차리자 김여주. 입술을 꽉 깨물며 괜히 시계가 걸려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벌써 네시였다.
“민형아, 배고프지 않아?”
후다닥 아무 말이나 뱉으며 화제를 돌렸다.
“조금요.”
“씻고 나와. 저녁 조금 일찍 먹자.”
비록 선생님이 요리는 잘 못하지만..! 뒷말은 삼켰다. 대신 안방 옆에 있는 화장실 불을 켜주며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 요리 할만한게 뭐가 있나 확인을 하는데, 곧 가방을 뒤적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더니 화장실 쪽으로 향하는 발걸음 소리, 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귓가를 찔렀다. 나는 고개를 돌려 민형이가 화장실에 들어간 걸 확인한 후에야 깊게 숨을 내쉬었다. 민형이 앞에서는 최대한 손을 가만히 놔둬야겠어.
얼마 안 가 나는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집에 먹을게 없어. 엄마 아빠가 여행을 가신 후로 인스턴트 아니면 배달 음식을 주로 먹다보니 냉장고에 있는 반찬이라곤...김치..(먼산) 아쉬운대로 김치볶음밥라도 할까 싶어 핸드폰을 가져왔다. 남들은 간단한 요리라고 뚝딱뚝딱 하던데 나는 레시피가 필요했다. 감으로 하면 망할 거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검색창에 김치볶음밥 황금레시피를 야무지게 검색했다.
“뭐야. 햄.. 파.. 양파... 이걸 다 넣어?”
메뉴를 소개한 후 간단하죠~?^^ 라고 적혀있는 블로그 포스팅을 보며 아아 앓는 소리를 냈다. 집에 파도 없고 양파도 없는데 어떡하지. 가히 암담한 상황에 눈가를 비볐다. 우리 민형이 꼭 황금레시피로 먹이고 싶은데요ヽ( TДT)ノ 그냥 햄이랑 김치만 넣어서 만들까 잠시 고민했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괜히 음식도 아닌 거 만들지 말고 그냥 시키자.. 그게 백배천배 나을 것 같았다. 방금까지 열심히 레시피를 검색하던 창을 끈 후 홀더키를 눌러 화면을 껐다. 이따가 민형이 나오면 뭐 먹을까 물어봐야겠다.
“결혼을 안 하는게 아니라 못 할 것 같은데.”
쯧. 그렇게 중얼거린 후 혀를 찼다. 기본 중에 기본이라는 김치볶음밥도 못 만드는데 시집을 어떻게 가. 입을 쩝 다셨다. 그러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생각했다. 아니지. 요리를 잘 하는 남자를 만나면 되지. 꼭 내가 요리를 해야하는 건 아니잖아?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게 어이가 없을 정도로 스스로를 애써 위로 했다. 그렇게 맞아, 맞아 하며 나를 다독이는데,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다.
“잘생겼을 것 같네.”
..몇 달 전 너랑 결혼 할 남자는 말이야, 하며 정재현이 했던 말. 왜 이 타이밍에 정재현이 떠오르고 난리야? 잔뜩 울상 지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정재현을 떠올리자 아까 정수정이 했던 말까지 생각나 미칠 지경이였다. 걔는 진짜 쓸데없는 말을 해서 사람 괜히 이상하게 만들어.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애써 다른 생각을 하려는데, 그 순간 도어락 비밀번호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근데 그 때 화장실 문이 열리더니 흰 티에 까만색 츄리닝 바지를 입은 이민형이 수건을 대충 머리 위에 얹인 채 나오는게 아닌가.
“김여주, 나 피자 시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건 정재현이었다. 나는 민형이를 보던 고개를 돌려 현관 쪽을 바라봤다. 무어라 말을 하며 들어오던 정재현이 말을 멈춘 건 분명 화장실에서 나오던 이민형 때문일 것이다. 나는 시선을 왼쪽 한 번, 오른쪽 한 번 돌리고는 일단 오른쪽으로 발을 옮겼다.
“민형아, 쇼파에 앉아있어!”
그러니까, 정재현을 향해 갔다. 신발을 대충 구겨신으며 현관 사이에 굳은 채 서있는 녀석을 문 밖으로 밀었다. 나까지 밖으로 나간 후 문을 닫자, 등 뒤로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정재현은 미간 새를 좁힌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거 아니야.”
나는 그런 녀석의 옷자락을 꾹 쥐고있던 손을 놓을 생각도 없이 대뜸 말했다.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래도 일단 아니야. 다 아니야.”
혹시나 이상한 오해라도 할까봐서. 정재현은 잠시간 조용하더니 곧 내 손을 제게서 떼어냈다. 문을 닫았을 때 켜졌던 복도 센서등이 다시 꺼졌다. 창문 하나 없는 복도엔 어둠이 내렸다. 정재현의 얼굴도 전보다 짙어져 나는 괜히 침을 꿀꺽 삼키며 녀석이 떼어낸 손을 허공에서 꼼지락 거릴 뿐이었다. 고요하던 공기가 정재현의 숨소리로 요동쳤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제 앞머리를 뒤로 한 번 앞으로 한 번 쓸어넘기더니 다시 나를 바라본다.
“믿을게. 믿어야지.”
그런 말을 하더니 눈을 꾹 감는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게 보였다. 그 정도로 가깝게 서있다는 걸 알아버린 내가 뒤로 한 반짝 물러나려 했지만 발을 들자마자 닿는 건 굳게 닫힌 문이였다. 아아, 안돼. 또 떨리기 전에 왼손을 가슴께에 얹었다.
“근데 설명은 좀 해주라.”
정재현이 눈을 떴다. 덕분에 무방비 상태로 눈이 마주쳐버렸다. 그 순간 손을 얹어놓은 곳이 쿵쿵 울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바싹 마른 입술을 꾹 깨물다 시선을 밑으로 조금 내렸다. 눈을 계속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코. 정재현의 코 끝을 보며 작게 소리를 냈다.
“민형이가 집을 나와서..”
“뭐?”
“개인적인 사정으로. 근데 찜질방을 간다는 거야.”
어떡해. 데리고 왔지. 나는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잠자코 듣던 정재현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제 목을 만지작 거리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지금 쟤를 너네 집에서 재우겠다고?”
“오늘 하루만.”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상황에서도 할 말은 다 했다. 장하다 김여주. 속으로 셀프칭찬을 날려주며 다시 정재현의 눈을 바라봤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교차했다. 눈을 찡그리고 있는 걸 봐서는 마음에 안 든다는 건데, 잔소리가 떨어지기 전에 말을 돌려야했다.
“근데 너는 왜 왔어? 연락도 없이.”
그 말에 정재현이 꽤 퉁명스러운 말투로 답한다. 우리가 뭐 언제는 연락하고 만났냐. ..그건 그래(머쓱). 딱히 부정 할 수 없어서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더니 녀석이 그런 나를 보며 제 입술을 혀로 한 번 축인다.
“정수정이,”
그리고 그 입술 새로 나오는 이름. 나는 끄덕이던 고개를 일순 멈췄다. 왜 갑자기 정수정이 나와? 설마 낮에 있었던 그 일을 다 턴 거야? 눈동자가 갈피를 못잡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는 다시 정재현의 티셔츠 자락을 잡았다. 두 손으로 꾸욱 잡으며 급하게 물었다. 정수정이 뭐. 정수정이 왜. 너한테 뭐라고 했어? 그러자 정재현이 당황하며 몸을 뒤로 뺐다.
“..왜이래?”
그에 나는 큼, 소리를 내며 티셔츠를 쥐고있던 손을 내렸다. 반듯했던 옷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남았다. 웁스..(먼산) 나는 슬쩍 녀석의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 도대체 정수정한테 뭘 듣고 온 건지 불안한 마음에 숨을 죽이며 대답을 기다리는데, 정재현이 제 큼직한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잔뜩 헝클인다.
“점심 안 먹었다며.”
“..아?”
“일단 들어가자. 피자 시켰어.”
벙찐 내 옆으로 손을 뻗은 정재현은 익숙하게 도어락을 풀었다. 기계음이 삑삑 복도를 메우더니 곧 문이 열렸다고 안내했다. 아 뭐야, 괜히 쫄았네. 나도 모르게 힘이 잔뜩 들어간 몸을 풀며 깊게 숨을 뱉었다. 정재현이 먼저 들어갔고, 내가 그 뒤를 따른 후 문을 닫았다. 자연스럽게 신발을 벗은 정재현은 망설임 하나 없이 거실을 향해 걸어갔다. 민형이 있을텐데. 내가 잠시 잡기도 전에 이미 저만치 걸어가버린 정재현이 보조개가 들어가도록 웃는게 보였다.
“안녕. 너가 이민형이라며. 김여주 과외 학생.”
녀석이 인사했다. 때문에 당황한 건 나였다. 뭐 저렇게 거침없이 첫인사를 해? 급히 그쪽으로 걸어가 정재현 옆에 서자, 쇼파에서 일어나는 민형이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민형이는 딱히 웃지 않았다. 그저 덤덤히 목소리를 내며 상체를 조금 숙였다가 다시 드는 걸로 인사를 끝냈다. 그 타이밍에 내가 입을 열었다. 민형아, 얘는 내 친구야. 정재현. 옆에 놓인 팔을 잡아끌며 그렇게 소개했다. 그러자 이민형이 정재현에게 눈을 두는게 시야에 잡혔다.
“알아요.”
“..”
“선생님 친구.”
씨익, 곧 한 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것도.
“민형아. 콜라 줄까 사이다 줄까?”
“사이다요.”
피자 괜찮아? 묻자 괜찮다며 대충 고개를 끄덕이던 민형이를 보자마자 피자 한 판을 더 주문했고, 방금 도착했다. 거실에 큰 상을 펴 저녁상을 차렸다. 차린 거라고 해봤자 피자, 콜라, 사이다, 피클. 그게 다였지만. 민형이에게 내심 미안했다. 밥 챙겨줄 거라고 떵떵 큰소리 치고 데려왔는데..T^T
“아, 정재현. 나 이거 좀 접어줘.”
정재현과 이민형. 너무 요상하고 황당한 조합이였지만 깊게 생각 할 힘도 없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 점심도 못 먹어서 윤기가 좔좔 흐르는 피자를 보니 눈이 뒤집히더라. 그래도 이민형을 먼저 챙겼다. 제일 먹음직스럽게 생긴 조각을 떼어내 민형이의 접시 위에 내려놨다. 먹어 민형아. 그 후 바로 내가 먹을 한 조각을 들었는데 긴 소매가 뒤늦게 걸리적거렸다. 양 손엔 이미 기름이 잔뜩 묻어 나는 하는 수 없이 정재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투명한 컵에 콜라부터 따르던 정재현은 적당한 양을 채운 후 으이그, 핀잔을 주며 내 소매를 접어줬다.
“천천히 먹어.”
“알았엉.”
세 번씩 반듯하게 소매를 접어준 정재현은 콜라를 한모금 마신 후 피자로 손을 뻗었다. 나는 허기진 배를 의식하며 페퍼로니가 자잘하게 올려진 피자를 크게 한 입 베어물었다. 짭짤한 맛에 기분이 좋아져 열심히 피자를 씹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느릿하게 입을 움직이며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 민형이가 보였다.
“민형아, 뭐해?”
“학교 몇 번 버스 타고 가야하나 검색 중이에요.”
아 맞다. 피자에 정신이 팔려서 깜빡 잊고 있었다. 나는 내용물을 꾹 삼키며 몇 시에 나가야 하냐고 물었다. 민형이는 내 물음에 핸드폰을 책상 위에 올려두더니 짧게 대답했다. 일곱시 사십오분 정도요. 그 말에 피자를 먹던 정재현이 허억, 소리를 내며 눈을 크게 뜬다. 나 고등학교 어떻게 다녔지? 중얼거리는 말에 조용히 공감했다.
“정재현.”
“왜.”
“너네 집에 양파랑 파 있냐?”
먼 길 달려서 학교 가는 민형이, 내일 아침은 꼭 챙겨줄 생각이었다. 김치볶음밥 황금레시피, 그거 내가 한 번 도전해본다. 그럴려면 일곱시에는 일어나 아침 준비를 해야하는데..(말잇못) 아냐. 그래도 해야지. 아침이라도 먹이고 보내야 어머님께 조금이라도 편한 마음으로 전화 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있을껄? 왜?”
정재현의 물음에 이따가 가지러 가겠다고만 말을 던졌다. 그랬더니 별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이고 만다. 나는 조금 남은 피자 조각을 몽땅 입에 넣으며 또 열심히 입을 우물거렸다. 티는 안 내지만 그래도 민형이가 불편해 할 것 같아 얼른 먹고 정재현을 보낼 생각이었다. 두 조각 쯤 해치우니 느끼한 맛이 감돌아 콜라를 찾았다. 아, 근데 컵을 습관적으로 두잔만 갖고왔던 건지 내가 쓸 잔이 없었다. 때문에 그냥 정재현이 마시던 컵으로 손을 뻗는데, 그런 내 손 앞으로 민형이가 제 컵을 놓았다.
“이거 마시세요. 입 안 댔어요.”
“응? 괜찮아 민형아. 너 마셔!”
투명한 컵이라 기포가 보글보글 맺힌 사이다가 작게 요동치는게 보였다. 나는 양 손에 얼굴까지 흔들며 괜찮다고 거부했다. 그렇게 열심히 흔들고 있는 손을 누군가 멈추더니 콜라가 담긴 컵을 쥐어준다.
“김여주 사이다 별로 안 좋아해.”
정재현이였다. 컵은, 내가 원래 가져가려 했던 컵.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사이다를 별로 안 좋아해, 하하. 사실이었다. 나는 정재현이 쥐어준 컵을 입으로 가져간 후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톡 쏘는 탄산에 절로 크으 소리가 날 뻔 하는 걸 참았다. 내가 빈 컵을 내려놓자, 이번엔 민형이가 컵을 들었다. 내게 넘기려고 했던 사이다를 쉼 없이 원샷한다. 문득 바라본 정재현은 그런 민형이를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민형아.”
“..”
“너 형 집 가서 잘래?”
그런 정재현이 컵을 비운 민형이를 보며 말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나는 귀를 의심하며 정재현을 바라봤다.
“뭐래는 거야.”
미간을 좁혔다. 녀석은 내게 잠시 시선을 뒀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올곧은 시선이 민형이를 향한다. 나는 그냥 무시하라고 말했지만, 민형이는 대답이 없었다. 이민형 역시 정재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더니 곧 바람 빠진 웃음을 내뱉는다. 이 어이없는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는 건 나뿐인 것 같았다.
“좋아요.”
이민형이 저런 대답을 하는 걸 보면, 그랬다.
진짜 가? 진짜 간다고? 믿을 수 없어서 묻고 묻고 또 물었는데 민형이는 그때마다 네, 네, 네.., 답했다. 그렇게 피자를 다 먹자마자 제대로 풀지도 않은 가방을 다시 싸더니 정재현과 함께 집을 나갔다. 분명 오늘 처음 정식으로 인사한 사이인데 저렇게 홀라당 따라가버리니 괜히 허무했다. 나는.. 몇 십분을 설득해서 데려온 이민형인데..(울컥)
계획에 변수가 생겼다. 민형이가 정재현네 집으로 가버렸으니 아침밥을 해주려면 아침 댓바람부터 정재현네 집에 갈 수밖에 없잖아. 집 밖으로 나가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데. 나는 뒷머리를 헝클이며 으윽 소리를 냈다. 정재현도 참 웃기는 놈이었다. 문태일에 이어서 이민형까지 굳이 제 집에서 재우는 이유가 뭐냐고. 가잔다고 가는 이민형은 뭐고..! 뒷정리를 하다 쇼파에 벌렁 누웠다. 나 몰래 둘이 눈 맞은 거야 뭐야.
“아 맞다.”
그러던 중 갑자기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정수정..(입틀막) 나는 헐레벌떡 핸드폰을 가져와 전화를 걸었다. 컬러링으로 흐르는 잔잔한 팝송이 오늘따라 더 길게 느껴졌다. 설마 안 받을까 싶어 조마조마 하는 와중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정수저엉..”
-끊어.
“아 야 진짜 미안해! 사랑해!!”
한마디 내뱉자마자 냉담하게 반응하는 정수정을 애타게 잡았다. 눈 깜짝 할 새에 혼자 남겨졌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어. 맞아. 완전 내 잘못이야. 나는 두 손으로 핸드폰을 잡았다. 그리고 마치 정수정이 앞에 있는 것처럼 울상을 지으며 용서를 빌었다. 정수정은 그런 내 말에 앙칼진 목소리로 죽을래? 부터 시작해서 한 번만 더 그래봐 아주! 로 끝내더니 곧 무슨 일이였냐고 물었다. 화를 낸 후 전화를 끊어버리면 어떡하나 생각했었는데, 다행이었다.
“아니 나 과외하는 학생이 집을 나왔다고 해서..”
-뭐? 야 걔 뭐 공부밖에 안 하는 애라며.
“엉.. 근데 집에 일이 좀 있었대.”
아무튼 진짜 미안하다 야. 내가 나중에 더 맛있는 거 사줄게. 무의식 중에 배게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밥은 됐고, 생각이나 잘 해봐.
“무슨 생각?”
-뭐긴. 정재현이지.
핸드폰을 쥐고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또 저 소리. 나는 앉아있던 몸을 서서히 기울여 아예 누워버렸다. 진짜 아니라니까? 괜히 발을 휘적이며 말했다. 한 손으로는 애꿎은 배게만 퍽퍽 내리쳤다. 이런 식으로 얘기가 새버리니 곤란 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부정하는 내 말에 정수정이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긴. 끊어~ 나랑 통화할 시간에 정재현 더 생각 해. 그리고 뚝. 정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통화가 종료됐다.
“야 정수정. 야. 야 진짜 끊었냐? 야..!”
다급하게 불러봤지만 통화종료음만 귓가를 찌를 뿐이었다. 와, 얘 봐라. 그새 까맣게 물든 핸드폰 화면을 보며 허, 하는 소리를 내보냈다. 정재현 생각 뭐. 무슨 생각을 더 하라고. 이를 바득 갈다가 핸드폰을 던지듯 쇼파 저 끝으로 밀어버렸다.
눈을 꾹 감으며 팔로 그 위를 덮었다. 친구가 아닌 정재현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단 말이야. 절로 한숨이 나왔다. 누군가 남녀 사이에 친구가 가능할까 물었을 때, 나는 항상 정재현을 떠올리며 자신있게 가능하다고 답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붙어 지내면서 한 번도 이 지극히 당연한 관계를 의심한 적 없었다. 그냥 나랑 정재현은 친구다, 이게 내 암묵적인 인생 공식 중 하나였다고. 근데 이제와서 정재현이 친구가 아니면 어떡해. 내가 정재현을 남자로 좋아한다고?
..아니야. 안 좋아한다. 나는 정재현을 안 좋아해. 안 좋아해!!!!!(T0T)
“너가 내 방 써. 책상 있으니까 공부도 하고.”
그 시각, 민형은 재현의 집에 도착했다. 코앞이라더니 정말 바로 앞 동이 재현의 집이였다. 집의 구조도 여주의 집과 비슷했다. 가구도 같이 산 건지 여주의 집에 있던 것과 똑같은 게 하나씩 보였다. 집안끼리 친한 사인가보네. 민형은 그런 생각을 하며 무겁게 들고온 가방을 내려놨다. 그런 민형을 뒤로 하고, 재현은 불부터 키며 집 안을 밝혔다. 어느새 해가 져 날이 어두웠다.
환해진 주위를 둘러보던 민형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은 건 바로 거실 벽 한 쪽에 붙혀진 수 많은 사진들이었다. 민형은 말 없이 시선을 고정시켰다. 재현이 성장하는 모습들이 사진 한 장 한 장에 담겨있었다. 하지만 민형이 눈을 둔 사람은 재현이 아닌 그 옆에서 웃고 있는 여주였다. 재현이 성장하는 사진 속엔 여주의 성장도 있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애기 시절의 여주가 사랑스러웠다. 웃는 얼굴이 그대로였다.
“선생님 친구 맞아요?”
민형이 물었다.
“무슨 뜻이야?”
“친구 아닌 것 같아서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저를 보고있던 재현과 시선이 맞물렸다. 민형의 물음에 재현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 새를 굳게 닫은 채 가만히 민형을 바라봤다. 아, 저 고딩. 저럴 줄 알았지. 그런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어쩐지 여주를 보던 눈이 퍽 걸리더라니.
“맞아.”
“..”
“김여주 나한테 친구 아니야.”
어떻게 알았어? 다 알면서도 재현은 말을 던졌다. 민형도 다 알고 물어본 것일테니.
“저도 좋아해서요, 선생님.”
별안간 바람 빠진 웃음 소리가 바닥에 가라앉았다. 시선과 시선. 둘 다 진심이 가득해서, 스파크가,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