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ndless voice
'병명을 모르겠습니다. 우선 고통스러우신 것 같으니 진통제는 처방해 드리죠'
날고 기는 의사가 환자의 병명을 모른다. 큐브를 요리조리 돌려가며 맞추는 경종을 물끄러미 보던 하진은 간호사가 자신의 번호를 외치자 창구로 가서 계산을 했다. 직. 지직. 느릿느릿 나오는 영수증과 처방전을 받아든 하진이 로비 의자에 앉아 큐브에 열중하는 경종을 일으켜 세웠다. 칠칠맞긴. 코트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고 약국으로 이끌었다. 유리문을 연 순간 훅 끼쳐오는 각종 약들의 냄새가 지독했다. 처방전을 창구 약사에게 내고 대기석에 앉아 경종의 이름이 나올때까지 기다렸다. 손을 놀려가며 요령껏 큐브를 맞추던 경종이 짠!하고 하진의 앞에 색색의 큐브를 보여줬다. 장하다.내새끼, 하진이 경종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헤헤하고 웃었다.
"병명이 뭐래요? 형아, 나 어디 아프데요?"
"별 문제 없데. 진통제 며칠분 처방해줬어."
경종은 하진의 앞에서 헤헤 웃다가 배가 아려오는지 복부를 감싸안았다. 텅.터덩. 정사면체의 큐브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병원 로비의 대리석 바닥에 떨어졌다. 경종아! 하진이 놀라 소리치자 경종은 괜찮다며 억지 웃음을 지어보였다. 식은땀이 경종의 이마에 흥건했다. 배를 계속 움켜쥐며 경종은 아픔을 참으려 애쓰고있었다.
"업혀.
"아저씨. 전 괜찮,"
"빨리 업혀."
"…네."
하진의 넓은 등이 경종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종이 업히자 하진은 으차 하며 가볍게 일어섰다. 하진 특유의 체취가 경종의 코에 솔솔 일렁였다. 아저씨 냄새 좋다. 왼쪽 어깨에 고개를 묻고 경종이 흘러가듯 말했다. 병원을 나와 둘만의 집으로 걸어서 갔다. 지나가는 차들과 사람들. 바쁘게 돌아가는 이 순간, 하늘은 빌어먹게도 너무나 맑고 청아했다.
"경종아. 아저씨 아직도 사랑하지?"
"당연한걸 자꾸 물으시네? 자꾸 그러면 확 사라질꺼에요."
"못하는 말이 없네. 이 꼬맹이가."
"어어, 나 꼬맹이 아니라구요!"
하진의 어깨에 턱을 박은 경종은 품안에서 느껴져야 할 큐브의 느낌이 없어 아저씨.잠깐 이라고 말했다. 하진이 의아한 눈치로 멈춰서자 경종이 놀라 외쳤다.
"내 큐브! 아저씨가 사준건데!"
"다시 사줄께. 가자."
나름 의미 있었던건데. 경종이 고개를 숙이는 느낌이 들자 하진은 위로하며 발을 뗐다.
/
아저씨와 꼬맹이. 둘은 처음에 호기심으로 시작한 사이였다. 게이바에서 마주친 파릇한 20대 초반과 묵은 30대 초반. 하진은 꽤 동안페이스였다. 경종은 하진을 보고 궁금한 마음에 말을 붙였다가 원나잇을 했고, 뒷맛을 잊지 못해 서로는 서로를 찾았다. 그게 벌써 3년전 이야기였다. 그들의 친구인 현수는 하진과 경종을 이렇게 정의하곤 했다. 눈 먼 새끼들이라며, 진토닉을 마시며 중얼댔다.경종은 자고 하진은 현수의 말에 픽 웃으며 끝내는 수긍하는 항상 같은 패턴의 술자리. 현수는 그런걸 즐기는 듯했다.
"아저씨! 나 물!"
"손이 없냐. 발이 없냐. 니가 떠다 먹어."
진통제 먹어야 된단 말이에요. 경종의 입이 뾰루퉁해져 태블릿 PC를 만지작거리는 하진을 째려봤다. 간다, 가. 어쩔수없이 물을 떠온 하진은 꿀꺽꿀꺽 잘도 먹는 경종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사귄지 1년이 다 되가던 때에 하진이 경종을 찾아왔었다. 이게 뭐냐는 경종의 말에 하진은 경종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열어보라고 했었다. 둘이서 넉넉히 살수 있는 집문서. 경종은 방방뛰며 하진의 입에 키스를 했었다. 기분좋고 행복한 기억.
"아저씨. 베란다 화분에 물 안줬어요?"
"귀찮아."
"에엑? 안주면 어떡해요!"
"뭘."
이아저씨가 진짜. 경종이 서둘러 일어나 물뿌리개를 들고 호들갑을 떨며 베란다로 나갔다. 온도계를 얼핏 보니 영하의 날씨였다. 하진은 태블릿PC를 소파에 두고 목도리를 들며 베란다로 따라 나섰다. 열심히 물을 주는 경종은 사람의 온기에 흠칫 놀랬다. 감기걸릴라. 하진이 웃으며 경종의 목에 목도리를 단단히 둘러주었다.
"따뜻하다. 고마워요."
"긴팔좀 입고다녀, 이게 뭐야."
하진이 경종의 반팔소매를 잡고 흔들자 됬다며 몸을 튼다. 어쭈, 꼬맹이 많이 컸네? 물뿌리개에 물이 빈 걸 확인한 하진이 경종을 공주님 안기로 안아들려 들자 경종이 내려 놓으라며 발을 동동 구르자 귓가에 후 하고 바람을 넣는다. 추울테니까 베란다 문을 꼭꼭 잠그고, 안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꼭꼭 잠그고-가끔 섹스중에 하진의 친구들. 지혁. 도일.현수가 들이 닥칠때가 있다.-하진은 들고있던 경종을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탔다. 후우, 하진의 옅은 한숨. 경종이 하진의 옷소매를 툭툭 잡는다. 서로의 뜨거운 시선이 오가고, 방 안은 금새 더운 공기로 후끈해졌다. 밭은 숨소리와 서로를 떠안는 쾌락. 하진이 나지막이 사랑해 라고 속삭이며 둘의 정사는 끝났다.
"경종아, 살아. 꼭."
"아저씨, 무슨 일 있어요?"
"꼭...꼭...살아..."
경종이 가쁜 숨을 옅게 쉬며 자신의 위에 엎어져있는 하진의 등을 토닥였다.
/
'상태가 더 안좋아지셨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네요.'
눈 하나 깜박 안하고 토씨하나 틀리지 않게 말하는 의사를 보며 하진은 절망감을 느꼈다. 꼬맹이가, 죽는다고. 의사가 먼저 나가고 나서 하진은 굳은 채로 더 앉아 있었다. 병명을 알 수 없는 병에다가 죽기까지 한다니. 마른 세수를 하며 다음 진료가 있다고 나가라는 눈치를 주며 말하는 간호사에 못이겨 진료실을 나왔다. 다각다각. 경종이 하진을 기다리며 큐브를 맞추고 있었다.
"아저씨! 저 어떻데요?"
"그냥 그렇데. 진통제만 처방해줬어. 가자."
간호사가 큐브를 찾아준 모양이다. 싱글벙글 웃으며 제 뒤를 따라오는 경종을 제 옆에 낀 하진은 창구로 가 계산을 하고 처방전을 받아 약국으로 향했다. 유리문을 열자 저번보다는 덜 나는 갖은 약이 섞인 냄새들. 처방전을 내고 정신없이 큐브를 맞추는 경종의 곁으로 갔다.
"경종아. 아저씨랑 눈보러갈래?"
"눈이요? 네! 네!"
눈이라는 말에 웃으며 꼭 가겠다고 말하는 경종을 하진은 슬픈 눈을 하며 물끄러미 머리만 쓰다듬어 줄 뿐이였다.
/
병원에 다녀오고 나서 며칠 후에 경종은 하얀 낮빛으로 픽 쓰러졌다. 하진의 태블릿 PC를 만지작 거리다가 하진이 오자 달려 나가다 세상이 핑 도는걸 느끼고 그대로 어둠속에 같혀버렸다. 경종아, 서경종! 하진이 애타게 외치는 자신의 이름을 듣지 못하고. 하진은 119를 눌러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이 꼬맹이는 꼭 살려야 한다고. 어떻게든. 반드시 살려야 한다고. 현수가 달려와 정신을 못잡는 하진을 경종이 싣려간 병원까지 간신히 데려갔다. 산소호흡기를 달고 온 몸에 기계를 달고 있는 경종을 응급실에서 대면한 하진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굵은 눈물만을 몇방울 흘려 내릴뿐.
"더이상 달리 할 방법이 없습니다. 보호자 분께서는 마음의 준비르,"
"당신이 그러고도 의사야? 그러고도?"
"이것, 좀. 놓으시고."
"살려내. 방법 있잖아. 21세기 현대 의학이 못하는게 뭐가 있는데!"
"보호자분! 이러시면 안돼요!"
"김하진! 정신차려! 그거 안놔?"
경종을 보며 준비하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 하진은 그 의사의 멱살을 잡았다. 의사는 당황해 컥컥대고, 현수와 간호사들은 놀라 두 사람을 떼언호기에 바빴다. 죄송합니다. 현수가 하진 대신 사과를 하자 의사는 언짢아하며 중환자실 입구를 지나쳤다. 하진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와르르, 무너지다 못해 잘게 부수어져 사라지는 기분.
"현수야. 이거...꿈이지? 맞지?"
"새끼야. 정신차려. 경종이가 깨서 이런 니모습 보면 좋겠냐?"
하진은 정신 분열이 올것만 같았다. 잠시후에 중환자실 면회 시간 1시간이 주어지자 하진은 말없이 들어가 경종을 찾았다. 삑.삑.삑.삑. 일정하게 울리는 기계음과 고오고오 들리는 산소호흡기 안의 경종의 숨소리. 하진이 걱정되어 따라 들어온 명수는 멀찍이 서서 그런 둘을 바라보았다.
"경종아. 일어나서 아저씨랑 눈보러가자. 가서 맛있는것도 많이 먹고. 예쁜것도 많이 보고 그러자. 그러니까 제발 일어나. 경종아, 경종아, 흐으..."
링겔이 꽃혀있는 경종의 작은 손을 쥐며 하진은 고개를 묻었다. 금방이라도 일어나서 아저씨! 하고 제게 폭 안길것만 같던 경종이 식어 누워있다. 중환자실 안은 적막이 맴돌았다.
/
더이상의 치료를 경종은 거부했다. 병명도 없는 불치병에 왜 치료를 해요, 돈아깝게. 털털한 모습으로 하진의 등에 업혀 경종은 제 연인과의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하진은 걱정을 했다. 정말 괜찮겠어? 경종을 애처롭게 보자 자신의 이마를 툭 치며 걱정 말라고 한 경종은 그동안 관리를 소홀히 한 식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안방에 있던 채송화 화분을 옮기던 경종은 손이 미끄러져 화분을 놓쳐버렸다.
챙그랑-
거실 바닥으로 화분이 낙하해 깨저버렸다. 여기저기 흩어진 도자기 조각들과 흩어진 흙들. 분리된 산세베리아들과 앙상하게 드러난 뿌리들까지. 경종아! 하진이 급하게 청소도구를 들고 달려와 경종의 안색을 살핀다. 아저씨... 경종의 안색이 파리해져 하진을 바라봤다.
"불안해요. 뭔가 일어날것만 같아요..."
"떨지마. 불안해 하지마. 안심해."
경종을 폭 안아 안심시켜 주는 하진도 불안했다. 신이시여. 제발, 우리 꼬맹이를 데려가지 말아주세요.
/
강원도에 눈이 제법 쌓였다는 뉴스에 둘은 짐을 챙겨 강원도로 떠났다. 현수가 마중을 나와주었다. 경종은 눈에 띄게 허약해져 있었다. 현수형. 안녕, 하세요. 힘든 웃음을 지어보이며 웃는 경종을 보던 현수는 속으로 낙심했다. 하진아, 올때는 같이 못올것 같다. 행복해 보이는 저 둘에게 이런 말은 어울리지 않아 속에 묻어두기로 한 현수다.
눈이 소복히 쌓인 설원을 보고 경종은 하진의 등에 업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저씨. 눈이에요. 금방이라도 넘어갈듯 숨을 가쁘게 할딱이며 하진이 꽁꽁 싸매줘서 따뜻하게 업힌 경종이 헤실헤실 웃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아저씨. 하진의 등을 톡톡치며 내려달라고 한 경종은 눈 위에 제 발자국이 남는게 즐거워보였는지 설원위를 연신 걸어다녔다. 뽀드득. 뽀드득. 발의 무개감에 눌려 뭉쳐지는 눈의 소리.공기가 맑으니까 먹어도 되겠죠. 경종이 고개를 들고 혀를 살짝 내밀었다. 차가워. 뜨뜻한 혀에 닿아 녹은 눈송이를 느끼며 경종은 하진을 바라보았다.
"경종아! 어디가!"
"아저씨 거기 서있어요! 오지마요!"
경종이 갑자기 설원의 끝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진은 가뜩이나 약한 경종이 걱정되는지 쫓아가려 했으나 그냥 이 자리에 서있기로 했다.
"나. 꼭 이거 해보고 싶었어요!"
하진은 웃으며 저 끝에 있는 경종을 바라봤다. 하얀 꼬맹이가 눈이랑 있으니까 구분이 안간다. 함박눈은 조금 잦아들었지만 눈은 더 소복이 쌓여갔다. 하진은 경종이 또 뭘 하려나 기다렸다.
"오겡끼데스까!!!"
잘 지내시나요. 경종은 하얀 설원에서 하진에게 안부 인사를 했다. 아저씨 나도 이쪽에선 아저씨가 안보여요. 근데요. 아저씨가 날 너무 사랑하는건 너무 잘보여요. 마치 여길 다 녹여 버릴것 같아요. 경종이 배시시 웃으며 다시 하진에게 달려왔다. 뽀드득. 뽀드득. 경쾌한 발자국 소리가 설원을 채웠다. 하진은 발을 살짝식 구르며 얼른 들어가고 싶어 했다. 초저녁인데도 별이 몇개 보였다.
"경종아. 빨리와."
"……"
"경종아?"
"ㅇ…저…ㅆ…"
경종의 떨리는 목소리에 하진은 미친듯이 뛰었다. 경종아! 서경종! 눈밭위에 조급히 찍힌 발자국들이 보였다. 경종이 눈밭위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본 하진은 서둘러 다가가 경종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자신의 무릎에 베어 주었다. 경종아. 일어나. 응? 하진은 차게 식어가는 손을 잡으며 경종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저...씨... 경종이 힘없이 내려가는 팔을 하진의 목에 둘러 자신의 얼굴로 다가오게 만들었다.
촉-
헤헤. 경종이 실없이 웃었다. 눈에선 눈물이 흘렀지만 둘은 웃고있었다. 경종아. 여기서 자면 입돌아가. 들어가서 자자. 응? 하진이 경종을 공주님 안기로 들으려 하자 그것을 거부한다.
"아저씨...그동안...너무...고맙고...미안하고..."
"경종아..."
"ㅅ,사랑했어요..."
하진의 눈에서 흐른 눈물을 닦아주려던 경종의 손이 눈밭위로 힘없이 떨구어졌다. 경종아. 하진이 느즈막이 경종의 이름을 불렀다. 하얀 눈밭 위에서 잠든 아이가 너무 슬퍼보여서, 하진은 축 늘어진 경종을 안아들었다. 이런데서… 자지 말라니깐. 자꾸 나오는 눈물을 숨키며 하진은 설원을 천천히 걸었다. 함박눈이 다시 내렸지만 둘의 발자국은 여전히 남아 두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저씨. 사랑해요
경종아. 사랑해.
fin-
카가미네 린렌의 생명시리즈를 따다 만들었습니다
어떠시련지 흡흡
이 시리즈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현재글 [닥꽃밴/하종] Soundless voice 9
13년 전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