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얌마~! 아직도 삐져있는 거냐?”
자고로 신혼은 달달한 법이라는데. 우리는 하루가 멀다하고 이게 무슨 난리인건지. 아침에 일어나 암말 없이 밥만 묵묵히 먹는 녀석의 눈치를 살살 살핀다. 아.. 김종인! 그만 좀 해라? 어? 다그쳐도 보고. 내가 미안하다니까? 응? 도경진 마녀나 형들에게 엄청난 잘못을 했을 때나 급하게 튀어나가는 되도 않는 애교(?)도 부려보고. 미안. 응? 진심이야. 진지하게 사과도 해보지만 재대로 삐친 요 녀석은 요지부동이다.
“오늘도 학원가? 하루 빠지고 나랑 놀자? 어?”
“학원가야 돼. 경수씨 나 말고 놀 사람 많잖아. 안 그래?”
역시. 아직 안 풀렸어. 아... 저거 어떻게 풀어주지. 머리를 열심히 굴려본다. 어떻게 말을 하고 사과를 해야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하아... 결혼 전에는 내가 김종인 녀석을 휘두르면 휘둘렀지 내가 이렇게 쩔쩔 매고 휘둘릴 거라고 생각 못했는데 젠장. 나 사기 결혼 당한거 아냐 이거?
정략결혼.
05 “나 사기 결혼 당한거야?!”
“김종인. 내 눈 똑바로 보고 대답해.”
“...어.”
오래 달리기를 방금 끝낸 듯 숨 고르는 소리가 방안에 울린다. 온몸이 노곤해지고, 심장은 온몸을 울리듯 쿵쿵거린다. 얼마만이냐 눈 마주치고 제대로 말 걸어 보는게. 반갑다 김종인 나쁜 놈아. 처음으로 종인이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날 내려다 보고 있는 녀석의 볼을 엄지 손가락으로 살살 다독인다. 왜 종인이가 이상하게 행동했는지.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는 접수가 됐다. 나와 마찬가지로 내 볼에 닿은 종인이의 손을 입술에 가져와 가볍게 입을 맞춘다.
“나 비위 약하거든?”
“어?”
“싫어하는 놈이랑 이런거 못한다고. 무슨 뜻인지 알겠냐? 정말 너한테 티끌만큼도 아무 감정 없다면 먼저 결혼하자는 얘기도 안했어.”
녀석의 미간이 좁아진다. 살짝 아랫입술을 물고 질근 거리며 내 얼굴을 곁눈질 한다. 머리 굴리는 소리 여기 까지 굴린다 임마. 내가 옹알이를 해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척척 알아 맞추는 놈이. 이런 감정적인 부분에선 유독 약하다. 아니. 무서운 거겠지 착각 하는건 아닐까. 잘못 생각 하는건 아닐까. 괜한 기대를 하는건 아닐까. 녀석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선 내가 솔직하게 말해야겠지만, 애석하게도 난 그럴 만한 용기도 없고 그렇게 하는 방법도 모른다.
“그니까. 내 말은. 너 싫은거 아니라고. 내가 그랬지. 너랑 같은 속도로 널 받아줄 수 없다고. 반대로 말하면 난 내 나름대로 느릿느릿 널 받아주고 있는 거란 말도 되는 거 잖아.”
참 어렵게도 말하지. 그냥 너 만큼은 아니지만 너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해 라고 말하면 될 것 같지고. 솔직히 아직 내 감정에 확신은 없으니까. 한 가지 확실한건. 종인이 처럼 뜨거운 감정이 아닐지라도 확실히 나도 이 녀석에 대한 뜨뜻한 감정이 살짝 살짝 씩 생기고 있다는 거다. 아까 이 놈이 애먼 놈한테 되고 않는 수작을 걸 때 치밀어 오른 분노로 깨달았다.
“너무 나를 대할 때 자신 없어 하지마. 그거 보기 싫어. 그리고 마음에 안들고 서운한게 있으면 말로 해. 그래야 내가 알고 잘못한게 있으면 사과를 하지.”
“그치만 내 입으로 내가 먼저 좋아한 만큼 경수씨 쫒아올 때 까지 보채지 않고 기다려준다. 라고 말했잖아. 그래서”
아.. 그래서고 나발이고. 이 융통성 없는 새끼.
“세상 너무 딱딱하게 살지 말고 좀 말랑하게 살아라. 보채는건 제발 날 나만큼 좋아해도 때 쓰는거 잖아. 너 서운하고 나한테 속상한거 숨기는게 아니라. 넌 나에 대해 많은걸 알고 있지만 난 너에 대해 모르는게 너무 많아. 너보단 내가 너한테 많은 실수를 할거고, 널 서운하게 할거라고. 그때마다 꾹 참을 거냐?”
나보다 열 살은 더 어른처럼 굴지만. 알고 보면 한없이 여리고 어린 면이 존재한다. 그게 실망 스럽다기 보단. 아 이 놈도 허점 많은 인간이구나. 친근하고 안심이 된다. 살짝.. 아주 아주 아주 살짝 귀여운 느낌도 들고.
“그리고 그때 나도 기분 안 좋았어. 뭐? 그러던지. 내가 상관할 문제 아니잖아아아아? 네가 상관안하면 누가 상관해야 되는데? 그리고 넌 상관없을지 몰라도 난 아주 상관 많거든. 다시 한 번만 딴 남자든 여자든 개수작 부리기만 해봐.”
다다다 쏘아 붙이는 내 말을 입을 헤 벌리고 듣던 종인 녀석은 아방한 표정으로. 아니.. 난. 진지하게 경수씨가 그런 생각이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서.... 더듬 더듬 말한다. 아 답답한 새끼
“내가 진심으로 너한테 물어본 것 같이 보였냐? 그때 네가 그 새끼들이랑 히히락락 하면서 신경 안쓰길래 빡쳐서”
“...설마 경수씨...”
아.. 방금 한 말은 실수. 짧은 신음과 함께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회피한다. 그럼에도 보인다. 입이 귀까지 찢어진 종인 녀석의 모습이. 아.. 기분 풀어주려는건 맞은데 너무 멀리까지 나간 것 같다. 크흠. 아..니 뭐.. 좀 그랬다고. 명색이 어! 부부잖아! 근데! 그러니까. 아까까지 술술 나오던 말이 베베 꼬인다. 푸흐흐흐흐 웃음을 터트린 종인이는 쪽쪽쪽 마구잡이 내 입술위에 테러를 한다. 아 새끼 적당히 해라. 인상을 벅 쓴다.
“아무튼. 그러니까 자신감 갖고. 혼자 땅 파지 말고. 서운한거 있으면 재깍 재깍 말하라고 알겠냐?”
“응”
대답하며. 느끼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뭐냐? 방금 전까지 주인한테 버림 받은 강아지 마냥 불쌍한 눈이더니. 버터 마가린 식용유 참기름 쉐이크처럼 속 니글거리는 부담스러운 눈빛은? 어우... 눈빛만으로 오그라들다 못해 오징어 버터구이를 만들 기세다. 손끝까지 컨트롤 되는 듯한 세심한 손놀림으로 내 이마를 쓸어내리며 귓가에 땅굴을 뚫을 기세의 낮은 목소리로 경수씨 속삭인다.
“내 귀 아직 멀쩡하거든? 좀 떨어져서 말해라”
“보통 이런 상황에선 말이지.”
볼을 미끄러지듯 타고 내려온 손이 내 입술로 향한다.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 감칠맛 나게 아랫입술을 건드린다. 눈을 내리깔고 서서히 내려와 입술 두 개가 맞부딪치는 거리에서 속삭인다.
“말로 하는 대화도 중요하지만 몸으로 하는 대화도 중요하던데...”
“아~ 몸으로 하는 대화?”
“응 몸으로 하는 대화”
내쪽에서 먼저 녀석의 목덜미를 잡아당긴다. 녀석이 정신 못차리고 몰두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녀석의 배위에 앉는 다음. 떨어진다. 하아.. 깊은 숨을 내쉬는 녀석을 보며 활짝 웃는다. 녀석도 내 얼굴을 보며 방긋 웃는다.
“됐지?”
“....뭐? 돼다니 뭐가?”
“무려 세 번이나 내가 먼저 해줬잖아. 그럼 된거 아니냐?”
아.. 세 번째는 하지 말걸.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됐을 텐데. 너무 싸게 나갔나? 으차 자리에서 일어나 흐트러진 옷매무세를 다듬고 머리역시 정돈한다. 한창 작업하던 과제가 하늘에서 난데없이 내려친 벼락 때문에 컴퓨터가 꺼져 날아간 듯 공황상태에 빠졌던 녀석이 세기의 명작 뭉크의 절규를 연상 시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와.. 저 멀끔한 얼굴이 저렇게도 변하는 구나.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내가 전에도 말했지? 아직 졸업도 안한 시키가. 요즘 아청법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아냐? 난 잡혀가기 싫다.”
“에이! 아청법은 음란물관련 법이고 우리는 음란이 아니지. 진정한 사랑의 대화지”
따박따박 말대꾸 잘하는거 봐라. 진작 이러지 그랬냐? 임마. 하음 하품을 하며 몰라 졸려. 그리고 너 임마 너도 서운했겠지만 나도 서운해거든? 나도 맘고생 심했다고. 가운데 손가락을 척 들어올린다. 녀석은 헤헤 웃으며 내 손가락을 고이 접어 살포시 제 손으로 끌어 내린후. 미안해 응? 잘못했어? 우동면빨 미끌어지듯 매끄럽게 파고든다. 난 바로 손바닥을 펼쳐 방어 한다.
“난 형님로써 널 지켜주는 거란다.”
“헤헤 형님으로써 맘껏 가르쳐주고 맘껏 해쳐도 난 상관없는데. 경청할 자신 있고, 열정적으로 임할 자신 있어”
얼씨구. 됐고. 발 닦고 잠이나 자라. 내일 또 열심히 학원에 독서실을 왔다 갔다 해야 하지 않겠니? 자리에 누워 눈을 감는다. 초저녁인데 벌써 자? 응? 아 원래 신혼부부는 잠도 부족하고 그래야 하는 법이다? 사탕발림 하는 녀석에게 그런 기력 있으면 좀 더 열심히 학업에 정진하여 하루라도 빨리 합격 소식을 가져 오거라. 내친다. 씨... 장난감 안 사줘 삐진 아이마냥 불만 가득한 소리를 내뱉은 녀석은 쿵쿵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디가?”
“화장실! 왜! 따라오게?”
부루퉁한 얼굴을 보고 활짝 웃으며 잘 갔다와~ 얄밉게 인사해준다. 그후로 녀석의 눈물겨운 개수작 질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틈만 나면 느끼하게 쳐다보질 않나. 괜히 헛돈 들여 조명을 산다거나 와인을 사서 분위기를 잡으려 애를 쓴다거나. 지가 무슨 절벽위에 한 떨기 꽃이 된 것 마냥 우수에 찬 모습을 보여준다 거나 등등. 그럴 때 마다. 애~ 쓴다. 그럴 힘이랑 시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쓰는게 어떠냐? 면박을 줬다. 그런 개수작이 부담스럽거나 위협이 느껴지기 보단 귀엽게 넘길 수 있었기에 그럭저럭 하루에 한 번씩 가볍게 투닥 거리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여름 방학이 끝나고 나서는 덜해졌다. 학교 학원을 병행하느라 굉장히 피곤해했으니까 -그 와중에도 나 힘드니까 기력 보충 좀 해줘어어어어 틈새시장을 노리긴 했지- 됐어 임마. 면박 주고 너무해에 앓는 소리를 하며 마무리 되던 하루에 금이 간건. 나의 멍청한 실수 때문이었다. 녀석이 개학을 하고 나서 나도 개강이 찾아왔다. 오랜 만에 보는 동기들과 신나서 술 마시고 들어가는 것을 안 그래도 불만스러워 했었다. 그와중에 집들이에 놀러왔던 놈들과 수정이 누나와 술자리를 갖게 됐는데, 장소가 문제 였다.
“......나 여기서 잔거야?”
“응.”
누나네 집은 고기집을 운영중인데, 누나네 어머니가 나를 잘 아는 데다가 -수정이 누나가 마녀 도경진의 친구니까...- 친구 놈들과 고등학교 때부터 자주 찾아가서 방학 때 알바도 하고 그래서 조카들 마냥 예뻐해 주셨다. 그날은 고기와 술이 공짜라며 영업시간이 끝난 후에 가게를 내어 주셨고. 신난 우리들은 내일 주말이라 학교도 가지 않겠다. 신이 나서 앞뒤 안가리고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익숙한 우리 집 천창 대신 보이는 누나내 집 천장. 그리고 주변에 널부러진 친구 놈들.
“으이그 인간들아. 니들 보면 대학가기 무섭다니까. 내가 너네 옮기느라 얼마나 고생한줄 알아?”
종인이와 동갑인 누나의 동생이 투덜거리며 친구 놈들 다리를 툭툭 찬다. 이런 젠장. 종인이가 신경 쓸 것 같아서 누나네 집에서 먹는다는 소리 없이 그냥 친구들이랑 놀거라고... 만 얘기 했는데. 누나가 공황상태에 빠져 있는 나에게 핸드폰을 내민다. 너 종인이랑 엄청 친한가 보더라? 어제 3시 부턴가? 계속 전화왔어. 누구한테.....뭐가....왔어....? 불길한 예감에 등골이 서늘해 졌다.
“...저 누...나. 혹시 전화...?”
“받아서 여기서 자고 갈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 해줬어. 종인이가 너 걱정 많이 하더라”
순간 육성으로 시바아아알. 하고.. 튀어나갈뻔 했다. 으아... 으아아아 도경수 너. 누나네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은 언제나 맛있었는데. 평소에 그렇게 달던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상태로 꾸역 꾸역 집어 삼켰다. 종인이와 마주칠 걱정으로 돌돌 말려 단단히 얹혀 속이 거북한 상태로 어기적 어기적 집으로 향한다. 지하철을 타면 빨리 갈수 있는 거리를 굳이 버스를 기다려 최대한 천천히 간다. 그 동안 어떻게 사과를 할지. 이 상황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도저히 해결 방법도 답도 없다. 그냥 나 죽었어 엎어져서 싹싹 비는 수 밖에.
현관에 도착해 도어락을 누른다. 열리지 않는다. ...이 새끼 단단히 삐졌구나. 삑삑삑삑. 속시 내가 잘못 누른건가 싶어서 다시 해보지만. 묵묵 부답. 똑똑 문을 두드리며 종인이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도 안받는거 아냐? 걱정했는데 다행히 전화는 받는다.
“여보세요?”
배안에 똥글 똥글 맺힌 아침 밥이 뒤틀리는걸 느끼며 조심히 입을 연다. 전화기 너머에서 시베리아 벌판의 찬란한 냉바람이 불어오는 듯 하다. 꿀꺽 침을 삼키며 허허허 어색하게 웃는다.
“종인아? 나.. 문.. 열어 주면 안될까? 내가 어떻게 된 건지... 안에 들어가서 얘기해줄게. 응?”
매끄럽게 문이 열린다. 분명 멀끔한 외관의 현관문이 것만. 공포영화에 나오는 귀신의 집 마냥 끼이이이이익 소리와 휘어어어어엉하는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현관 문 앞에 종인이가 서있다. 생글 생글 잘도 웃던 놈이 표정하나 없이. 집안 풍경이 황량한 겨울 산에 가시나무 하나가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색하게 허허허 웃으며 슬금 슬금 안으로 들어간다. 살 떨려. 공포영화가 따로 없구만. 슬슬 눈치를 살피는 나에게 김종인은 낮은 목소리로 나 서운해하고 경수씨한테 맘껏 화내도 돼는 거지? 묻는다.
“...어”
“내가 왜 화났는지 알아?”
그야.. 당연히. 밤 늦게 안 들어왔고. 네가 전화 했을 때 누나가 받았고.. 누나네 집에서 자기 까지 했으니.. 내가 잘못한 것을 말한 뒤 뒤이어 구구절절 구차하게 그렇게 된 이유를 덧붙여 설명한다. 그게... 수정이 누나가 도경진 그 마녀.. 아니. 누나랑 친구라서 그 집 어른들하고도 잘 알거든. 어제는 친구들이랑 재밌게 놀라고 고기를 마음껏 배풀어 주셔서.. 미안. 다음부턴 꼭꼭 연락할게. 많이 걱정했냐? 쩔쩔 매는 데도 요지부동 무표정을 고수한다.
“내가 제일 기분 나빴던건. 경수씨 말대로 친구들이랑 즐거운 자리를 수정이 누나네 집에서 한게 아니라. 그랬다는걸 나한테 얘기 하지 않았다는 거야. 정말 아무 감정 없다면 그냥 말할수 있는 거잖아.”
아...뿔..사 사과 포인트를 잘못 잡았구나. 아니. 그게. 그러니까. 그런데 솔직하게 수정이 누나네에서 한다고 말했으면 신경 썼을 거잖아? 안 그래? 따져 묻고 싶은걸 후우.. 후우.. 내리 누른다. 거기까진 생각 못했어. 미안. 너 신경 안쓰이게 한다는게.. 내 생각이 짧았어. 고개를 푹 숙인다. 어떻게 할까?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기분이 풀릴 것 같냐? 그래? 말해봐 뭐든 할 테니까. 응?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알아서 찾아. 제대로 찾기 전까지 나 계속 삐져 있을 거야.”
부르퉁 하게 말하고 돌아선다. 그나마 다행인건 제대로 정황 설명을 해서 오해 같은건 풀린 것 같다는거. 그게 어디냐. 처음에는 찔러도 피한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랭한 모습이었는데. 조금 견디면 봄이 찾아올 온도로 올라왔다. 후우.. 녀석 몰래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열심히 머리를 굴린다. 아.. 어떻게 하면 저놈 삐진거 풀어 줄 수 있을까? 그날부터 내 눈물겨운 사투가 시작됐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도 해먹이고. 간식도 바리바리 챙겨주고. 학교 가까운 곳에 살던 버릇해서 9시 수업 시작 20분전 일어나 대충 준비하고 어기적 어기적 나가던 내가 빌어먹을 0교시 보충 수업 때문에 6시 30분이면 학교로 향하는 - 우리 학교 근처로 집을 잡아서 종인이의 학교는 더 멀어졌다.- 종인이를 졸졸 쫒아 가기 위해 6시에 꼬박꼬박 일어나고. 학원 끝나고 데리러 가기도 하고. 결혼 전 데이트를 하며 지나가듯 좋아한다고 했던 목록을 쭉 작성해 해다 받치고.... 하아. 눈물겨운 노력에 풀릴 듯 말 듯 하긴 한데. 그래도 아직이다. 이 새끼 이거 이참에 내 버릇 잡겠다 뭐 이런 심보 아냐? 단단히 잘못걸렸구나 도경수. 우리 둘 다 결혼을 했다곤 해도 둘이 내버려 두는건 불안하다고 한 달에 한번은 꼭 각자 집에 들러서 문안 인사를 하라고 하셨고, 오늘이 그날이라 아직 찬바람이 부는 종인이와 함께 우리 집으로 왔다. 종인이의 태도에서 뭔가 이상한걸 느낀 도경진이 노골적으로 날 비웃는 얼굴을 하고 얼쩡 거린다.
“속 시끄러워 좀 가만히 있어.”
“부부는 부부구나. 사랑싸움 한거야?”
“사랑싸움은 개뿔”
사랑싸움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거지 이건 일방적인 김종인의 식민지 대학살이라고. 그 자식한테 퍼주느라 내가 요즘 얼마나 힘든지 알아? 라고 말해봐야 날 놀리는 재미로 사는 도경신의 흥미만 자극하는 꼴이겠지.
“나한테 풀 방법 있는데”
저게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것도 알고. 날 낚기 위한 미끼라는 걸 알면서도 혹해서 눈이 돌아간다. 무섭게 내 태도 변화를 느낀 도경진의 미소가 짙어진다. 젠장 나 사기 결혼 당한거 맞다니까. 종인이 녀석한테 뜯기는 것만으로 허리가 휘는데.. 도경진 한테 이번엔 또 뭘 털리려나.
“...뭐 할 말 있어?”
도경진에게 해결 방법을 들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다. 손톱 뜯는 버릇 어렵게 고쳤는데 다시 튀어나오려고 하잖아. 이게 뭐라고 이렇게 살 떨리냐? 도경진... 내가 이렇게 까지 하는데 안 풀리기만 해봐라 그냥 내가 10배로 아니 100배로 돌려 받고야 만다. 이를 벅벅 갈며 맨 정신으론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맨주 한 캔을 원샷한다. 후우.. 후우 진정하고. 녀석의 눈을 보다 바닥으로 시선을 돌린다. 머릿속에 떠올린 것만으로 얼굴이 화끈거린다. 올 여름 100년 만에 폭염 어쩌고 하던데..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와 그것이 합쳐서 맨반석 오징어 마냥 노릿 노릿 해져버릴 것 같은 느낌이다.
“...저기”
“..말해. 뭔데? 어디 아ㅍ...”
하고 뻗는 손을 양팔을 x자로 만들어 막아낸다.
“그게 아니고”
“....그럼..뭔데?”
하아.... 후우. 그게.. 그러니까.‘
“자기야. 미안해.”
했다. 으엉어엉아아아어으아어아아어어앙어아 했어. 미치겠다. 내 살. 실시간으로 오스스스스 닭살이 돋아다는 느낌이 생생히 느껴진다. 으아. 오징어가 아니라 닭 꼬치가 된 것 같은 느낌. 뜨겁다 못해 매운 소스를 온몸에 바른 듯 화끈 화끈 따끔하다. 종인이는 내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멍한 눈으로 어? 되묻는다. 이를 앙 물고 다시 한 번. 말한다.
“...자기야.. 미안하다고 한..번만 봐주면 안될까?”
..단어를 떠올리는 것 만으로 오글거리는 그것을 덧 붙여서 사과한다고 난 절대 지금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지 않은데. 도경진은 종인이 성격이라면 해결되고도 남는다고 나를 부추겼다. 아오. 내 손. 내 발 빤히 날 바라보는 종인이의 시선이 느껴진다. 하아...?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풉.. 하고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 웃기지? 네가 생각해도 웃겨 죽겠지.
“내가 그 마녀 말 듣는게 아니였은데. 아오.”
쪽팔려. 얼굴이 터질 것 같다. 셔츠의 목 부근을 잡아당기며 손 부채질 한다. 무슨 둑에 구멍이 뚫린 것 마냥 웃음보가 터진 녀석은 아예 배를 움켜쥐고 침대 위를 데구르르 구르고 있다. 이씨! 야! 너 임마! 형님이 이렇게 까지 했...
“뭐라고 자기야?”
“...어?”
저 놈.. 지금 뭐라냐?
“나 안들렸는데 다시 한 번 말해봐. 그럼 풀릴 것 같은데.”
눈물까지 보이며 미친 듯 웃던 놈이 눈을 반짝이며 다가온다. 뭐..뭔데? 술 마신건 난데 왜 저 놈이 더 취한 것 같냐? 부담스런 시선을 피하며 말한다.
“미안해?”
“아니 그거 말고 앞에 꺼”
앞에...?아 설마. 녀석의 의도를 파악한 내가 입을 꾹 다물자 기분 나쁘게 실실 거리며 나에게 다가온다. 난 부담스러운 미소와 눈빛을 피하며 뒤로 슬슬 물러나고. 좁은 원룸에서 뒷걸음질 쳐봤자지. 오래지 않아 내 등이 벽에 닿는다. 응? 나 풀릴지도 모른다니까? 악마의 속삭임이.. 들린다. 시바아아알 사기 결혼 맞잖아. 신사의 탈을 쓴 악마새끼와의 결혼이었어 이건. 난 팔린거라고! 그렇게 원한다면야. 한번 참는다. 나중에 두고 보자. 이를 으득 갈면 꾹꾹 내리 밟듯 말한다.
“미.안.해. 자.기.야. 한.번.만. 봐.주.라.”
실실 쪼개면서 눈으로 감상하고 귀로 듣던 녀석이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쪼르르 달려와 숨막히게 안는다. 이 이게 미쳤나 진짜. 야 안놔? 안놔? 버둥거리는 내 정수리에 무차별적인 폭격이 이어진다. 나 머리 안 감았거든? 에퉤퉤 에비에비 그만 못하냐? 종인가 그거 지지야 지지하다고 내 정수리! 입을 맞춘 녀석이 마지막으로 입에 맞추려고 하길래 내 입을 손으로 막아 방어한다. 그래도 좋다고 내 손등에 쪽 입을 맞추고 흐트러진 머리 매무새를 만져준다.
“아 나 어쩌냐”
“뭘?”
“점점 더 경수씨가 좋아지는 것 같...”
거기까지 너 말하기만 해봐. 너 오늘 정말 나 제대로 닭 만들려는 거냐? 아 또 소름 돋았어. 녀석의 입을 막은 손바닥에 녀석의 소리 없는 웃음소리가 가득 묻는다. 정말 그 마녀 말대로 이 말도 안돼는 방법이 먹혔다. 겨우 이런걸로... 하긴 겨우.. 라고 치부하기엔 많은 용기가 필요했어. 아무튼. 이런 방법이 먹힐 줄이야. 김종이 이 야심 없는 녀석.
이날 이후 틈만 나면 감히 나에게 ‘...야’라는 호칭을 요구 하며 찡찡거리기 시작했다. 자 김종인 너 이것보다 훨씬 인간미 넘친다나 뭐라나. 인간미는 개뿔. 난 네 버터기름에 물들생각이 없다 이거지. 난 빵으로 치면 퍽퍽한 스콘이야. 넌 달다 못해 속 느글거리는 티라미스고. 스콘할 때 바랄걸 바래야지. 이러니 저러니 해도 계절이 바뀌듯 나에게 다시 봄이 찾아왔고. ‘그 녀석’이 나타나기 전까지 둘이 작은 일로 간지러울 정도로 투닥 거리는 일상이 계속 되었다.
그날은 여느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오전 수업이 하나 밖에 없어 일찍 수업이 끝나고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 평소 같으면 저녁을 준비하고 과제를 했겠지. 양손에 바리바리 식재료를 사들고 들고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조금 다른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상하게 집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 뭐지? 무슨 일 났나? 터덜 터덜 걸어 도착한 내 눈에 갓 3~4살 정도로 밖에 보지 않는 작은 아이가 보였다.
“꼬마야 왜 여기 있니? 부모님은?”
“무슨 일이야?”
“그게 꼬마가 한시간 전부터 이러고 있다네.”
사람들의 수근거림으로 어렵지 않게 상황파악을 마칠수 있었다. 쯧쯧 어느 정신 나간 부모길래... 저렇게 어린데.. 사촌 동생들은 이름이나 주소가 적힌 명찰을 가지고 다니던 것 같은데 그런 것도 없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었다면 내가 직접 나서 도와줬겠지만. 5~6사람이 옹기 종기 모여 있는 폼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어떻게든 돼겠다 싶어 바로 우리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아빠!”
그때 갑자기 꼬맹이의 목소리가 들렸고. 도도도 하는 소리와 함께 조그마한 손이 내 바짓자락을 잡았다. 응? 꼬맹아 그게.. 무슨 소리니. 아빠...? 내가? 하하하하... 내가 자랑은 아니지만 첫키스도 올해 처음 했거든?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 너 만한 아이가 나오겠니? 안 그러니? 하하하 닮은 사람으로 착각했나보다. 어색하게 웃으며 옷자락을 뺏어내는 나를 보고 아이는 고집스런 표정을 지으며 뭔가를 꺼낸다.
“아빠!”
.....세상에........왜 이 꼬마가 내.. 사진을 갖고 있는 거지? 사람들의 시선이 내 얼굴과 사진을 오간다. 표정가득. 한심한 놈 애를 버리려고 한 거야? 책임을 져야지. 이렇게 말
하는 마음에 소리가 비친다. 아..아니에요! 진짜 뭐라도 했(?)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손 사래를 치며 꼬마야 나.. 아니잖아 그치 나 아빠 아니 잖아! 말하는 나를 보며 꼬마는 사진 속 내 옆에 있는... 종인이를 가리키며 말한다.
“아빠!”
“.......뭐?”
꼬...마야... 너 지금... 너 뭐라고.. 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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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이네요 즐겁고 알차게 보내셨으면 좋겠네요 ㅠㅠ
부족한 글인데 재밌게 봐주시고 댓글 주시는 분들 ㅠㅠ 너무 감사합니다!!
이번 편도 즐겁게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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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유지태 못알아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