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수(海獸)
[ 바다의 괴물 ]
w. 시집
" 아아아아악!! "
손에서 반지를 뺀 한 처녀가 별안간 미친 듯 괴성을 질러댔고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숨쉬기 힘들 정도로 가쁜 울음을 뱉어내며 울컥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빗방울처럼 바닥에 떨어트렸다.
처녀는 누군가를 애타게 불러댔고 그 이름을 입에 담을수록 처녀는 무너져갔다.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을테니 말이다.
오늘은 처녀의 '두번째' 혼례날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고운 처녀와 마을에서 가장 잘난 사내의 혼례는 마을의 경사였다. 본인들의 혼례날인 것 마냥 들떠서는 둘의 조화를 입이 닳도록 칭찬했으며 둘의 앞으로를 축복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처녀의 텅빈 눈동자는 보지 못 했다. 그저 저들 좋을대로 지껄이면서 아무도 처녀의 공허함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았다.
혼례식이 끝난 직후 사내는 처녀에게 다가와 물었다.
' 대체 그 반지는 무엇이오. ' 자신이 주지 않은 예물이 처녀의 손가락에 끼워져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녀는 사내의 눈도 마주치지 않고 힘없이 대답했다.
' 저도 모릅니다. ' 처녀의 황당한 대답에 사내는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고 우악스럽게 그 반지를 멋대로 잡아빼버렸다.
" 아아아아악!! "
고작 반지를 하나 뺐을 뿐인데 처녀는 손가락이라도 잘린 것 마냥 괴로워했다. 아니, 손가락 하나 쯤 잘리는 편이 더 나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다.
사내는 그러면 안 됐다. 사내가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여인이었다면, 갖은 고생끝에 겨겨우 손에 넣게된 여인이었다면 사내는 더더욱 그러면 안 됐다.
여인을 겨우 지탱하고 있던 반지를, 버팀목을 무너뜨리면 안 됐다.
사내는 자신의 행동을 두고두고 후회할지니
결국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이킨 것은 본인이었다.
겨우 잡은 나비를 제 손으로 직접 풀어준 어리석은 사내였다.
**
그 날은 처녀의 '첫번째' 혼례를 치루기 전 날이었다.
처녀의 이름은 '홍단이'. 단이의 수려한 외모는 옆마을까지 소문이 자자했고 존재만으로도 마을 사내들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만드는 처녀였다.
돈이 되었든 명예가 되었든 내세울 것이 하나라도 있는 사내들은 그것을 믿고 단이에게 청혼했지만 번번히 걷어차이기 일쑤였다.
단 한명의 사내도 단이의 마음을 흔들만한 청혼을 하지 못했다. 하나같이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며 우쭐대었고 하나같이 단이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하대했다.
그런 자만심에 절은 청혼들은 오히려 단이에게 반감을 샀을 뿐이었다.
어느 날부터 마을에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마을 앞바다에 괴물이 산다고.
조그맣게 시작했던 소문은 어디서 제 몸집을 불려온 것인지 그것이 다시 단이의 귀에 들어올 때는
' 마을 앞바다에 뿔이 달리고 다리는 여섯개이며 몸집은 사내들의 몇십곱절은 되는 괴물이 젊은 처녀들을 잡아먹고 산다. '
그리고 그 괴물을 진정시키는 방법은
' 마을의 가장 아름다운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것. '
확실하지도 않은 소문들은 어느샌가 사람들에게 사실이 되어버렸고 사람들의 눈은 하나같이 단이에게로 향했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눈초리들은 누가봐도 재촉의 눈빛이었다. 어서 제물로 바쳐져서 우리를 안심시켜라-
괴물을 직접 봤다는 사람은 없는데 바쳐질 제물은 준비되어가고 있었다. 스스로 만들어낸 두려움에 스스로 빠진 꼴이니 애꿎은 처녀 하나만 희생당하게 되었다.
단이에게 청혼했던 사내들까지 그런 눈빛을 보내고 있었으니 단이를 더 이상 보호해줄 사람도 없었다.
딱 한 사람만 빼고.
" 단이야. "
" ...왜 또 오셨습니까. "
단이네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리는 이 사내는 단이에게 구애를 하던 많은 사내들 중 한명인 김석진이었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와 임금에게 이 마을 땅을 하사받아 이 마을의 실질적인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였다.
단이에게 청혼했던 사내들 중 가장 명예롭고 가장 부가 넘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단이를 그만큼 소유하고 싶어하는 자이기도 하다.
" 마을에 흉흉한 소문이 떠돌더구나. "
저잣거리 바닥에서나 떠돌던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그사이 석진의 귀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단이는 석진의 등장 전부터 하고 있던 빨래널기를 마저하며 석진의 말에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 예. '
석진은 단이가 높은 빨랫줄 위에 낑낑대며 널고 있는 흰 이불을 잡아채 대신 널어주며 단이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 그런데 그게 수령의 귀에도 들어간 것을 알고있느냐. "
바구니에서 다른 빨랫감을 집어들던 단이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런 소문이 수령의 귀에 들어갔다는 것은.
" 네가 정말 괴물에게 제물로 바쳐진다는 것을 뜻하지. "
마을 사람들이 그런 괴소문으로 불안해하고 있으니 마을의 분위기가 엉망이 되었고 그것을 다시 진정시키는 것은 수령의 몫이다.
사람들의 불안을 가라앉힐 방법은 단 하나뿐. 돌고 있는 소문대로 해주는 것. 가장 아름다운 처녀를 괴물에게 바치는 것. 그것이 바로 수령이 할 일이었다.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단이는 빨랫감을 내려놓고 뒤를 돌아 자신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석진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것을 저에게 말하러 온 이유가 무엇인가요- 단이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나에게 시집 온다면 괴물따위에게 바쳐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석진이 이 곳에 온 이유이자 석진의 표정이 의기양양한 이유였다. 그리고 그런 점이 단이가 석진을 계속 거부한 이유였다. 다정한 모습들 뒤에 가려진 야욕적인 면.
서글서글한 눈망울 안을 자세히 들어다보면 시커먼 욕망이 들어앉아있으니 석진이라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추접스런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석진의 모습을 아는 것은 오로지 단이뿐이었고 마을사람들에게 석진은 존경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다른 사내들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 않는 석진의 단이에 대한 소유욕 또한 반감을 키웠다.
자신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 아닌 자신을 소유하려고 하는 그런 사내들에게 신물이 난 단이였기에.
" 차라리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것이 낫습니다. "
석진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린 그 한마디에 석진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들어갔다. 그리곤 이내 자신이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거짓웃음을 얼굴에 띄웠다.
입은 웃는데 눈은 웃지 않는 그 미소는 참으로 괴기스러웠으며 석진의 본모습을 아주 잘 나타내주는 미소였다.
그 미소에 살짝 겁을 집어먹은 단이는 석진에게서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고 그 모습을 본 석진은 단이가 귀엽다는 듯 피식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 하하. 누가 보면 내가 괴물인 줄 알겠구나. "
실로 그랬다. 지금 단이에게 석진은 괴물과 다를 바 없는 자였다.
이렇게 자신을 옭아매는 사람에게 시집을 갈 바에는 자신을 자유롭게 해줄 괴물에게 시집을 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순간이었다. 단이의 그런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은. 아마 그간 억눌려온 것이 홧김에 표출된 것은 아닐까.
" 가겠습니다. 시집. "
" 참말이냐? "
한결같이 무표정하던 단이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띄워졌고 그 미소 뒤 나온 말은 처음으로 석진을 이기게 해주었다.
" 괴물에게 시집 가겠습니다. 제물로 바쳐지겠습니다. "
**
단이의 첫번째 혼례날이었다.
위선적인 사람들은 단이에게 너무나 장하다며, 마을을 위해 희생해주어서 고맙다며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던졌다.
'드디어 살았다'라며 안심하고 있다는 것은 입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입가에 묘하게 띄워진 미소가 이미 단이에게 그 마음을 읽히게 만들었다.
자신에게 위로와 감사를 계속해서 던지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음으로써 소심하게나마 불만을 표했다.
평소에는 입어본 적도 없는 좋은 천으로 지어진 옷을 입고 곱게 분을 얼굴에 찍어바르고 잘게 빻은 꽃잎을 물에 개어 입술을 물들였다.
화려하게 꾸민 단이는 아름답다는 말을 백번 늘어놓아도 모자랄 정도로 눈부셨다. 괴물따위에게 주기 아까울 정도로 빛이 나고 또 빛이 났다.
모든 단장을 마친 단이가 꽃가마에 오르기 전, 어디선가 석진이 갑자기 나타났다.
석진을 무시하고 가마에 오르려는 단이를 붙잡은 뒤 석진은 단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 아직도 마음이 바뀌지 않은게냐? "
단이는 대꾸가 없었다.
" 왜 그런 멍청한 선택을 한 것이냐. 지금이라도 나에게 시집을 오겠다고 한다면... "
" 대감. "
석진의 말을 끊고 단이는 석진을 바라보았다.
석진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단이의 눈을 마주쳤지만
" 지랄하지 마십시오. "
단이는 그렇게 만만한 여인이 아니었다.
*[단이]*
가마꾼들이 가마를 처음 보는 곳에 두고 도망쳐버렸다. 괴물이 무서웠나보지, 한심한 사내들.
가마에서 나오니 어느새 이미 해가 어둑어둑하게 지고 땅거미가 깔릴 즈음이었다. 날씨가 흐렸던 탓에 바람이 거칠게 불어와 나풀거리는 치마와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휘날렸다.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고정시키고 어두워지기 전에 이 곳이 어디인지 파악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을의 앞바다를 꽤 헤집고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이 낯선 것을 보면 꽤나 멀리까지 나온 모양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들과 바다 위로 드문드문 솟아있는 험한 바위들. 절벽과 바위를 향해 거세게 몸을 들이박는 파도들. 모래사장이 펼쳐져있는 앞바다와 전혀 다른 풍경들.
그제서야 느껴졌다. 난 정말 마을에서 버림받았구나.
마음만 먹으면 다시 마을로 돌아갈 수는 있겠지만 누가 나를 반길까. 마을에 부정이 탔다며 나를 더 먼 곳으로 쫓아내지만 않는다면 다행이겠지.
위선적인 인간들. 곱다며 내게 구애를 해댈때는 언제고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하니 얼굴 한번 비치러 오지 않은 옹졸한 사내들.
다 역겹다. 역겨워.
아니, 어쩌면 차라리 잘 됐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그 지긋지긋한 사내들을 보지 않아도 되며 계집애란 이유만으로 차별받지 않아도 된다.
적어도 '계집애란 자고로', '감히 계집애가-' 라는 소리는 듣지않고 살 수 있지 않은가.
빨래와 설거지만으로 가득 찬 하루가 아닌 새로운 것에 대한 배움과 깨달음으로 가득 찬 하루를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내가 원하던 자유로운 삶이 내게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하다.
그나저나 괴물은 무슨. 역시나 다 헛소문들이었을 뿐이다. 한참이나 주위를 의식하며 두리번거렸으나 여기에 살아있는 거라곤 나와 바위에 붙어있는 따개비와 해초들.
괴물에게 잡아먹히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으나 막상 아무것도 없다고 하니 김이 팍 새면서 시시해져버렸다.
됐고, 우선 오늘은 해가 져버렸으니 저기 있는 동굴에서 하룻밤 묵었다가 아침이 되면 길을 찾아 나서자.
저 멀리 절벽이 깎여만들어진 거대한 동굴이 눈에 띄었고 차가운 바닷바람을 피하기 위해 저 곳에서 하룻밤 묵으려 한다.
저 곳까지 가는 가장 평탄한 길을 눈으로 탐색한 뒤 발을 내딛으려는 바로 그 순간. 내 뒤에서 물장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도 소리가 아닌 사람이 들어가서 첨벙거리는 소리 말이다.
내가 착각했나 보다. 여기에 살아있는 것은 나 말고도 따개비와 해초 말고도 하나 더 있었나 보다. 그리고 그것이 과연 사람일까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바로 그 괴물일까.
용기를 내서 여기까지 왔건만 왜 선뜻 뒤를 돌아보기가 두려우냔 말이다.
석진에게 시집가느니 차라리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것이 낫다고 큰소리 뻥뻥치던 홍단이는 어디가고 몸을 벌벌 떨며 제발 괴물을 아니기를 바라는 홍단이가 있는가.
물살을 가르며 바다를 걷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물젖은 발자국 소리가 찰박찰박 점점 크게 들려온다. 괴물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 괴물이라 한다해도 말이 통하는 괴물일수도 있지 않은가. 내가 왜 이 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내 사정을 잘 설명하면 적어도 살려는 주지 않겠는가.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큰 마음을 먹고 훽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뿔이 달리지도 않고 다리가 여섯개이지도 않고 몸집이 나의 수십곱절도 아닌.
" 너 누구야. "
물에 젖은 아주 예쁘장한 사내 하나가 바다 한 가운데 서있었다.
괴물이 아니라는 생각에 온 몸에서 긴장이 확 풀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런 나를 그 사내는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본다.
" 다...당신은 누구십니까? "
"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너 누구야. "
톡톡 쏘는 말투가 하얀 피부와 나를 내려다보는 차가운 눈빛에 아주 잘 어울렸다.
" 괴물...입니까? "
내가 누구냐는 물음에 답하지 않고 무작정 이리 물으니 사내의 표정이 아주 볼만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내뱉고도 깜짝 놀라긴 했다. 처음 보자마자 다짜고짜 괴물이라니. 누가 봐도 멀쩡한 사람인데 말이다.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서 우선 자리에서 일어나고 사과의 말을 건네려는 순간.
" 맞아. "
전혀 예상치도 못한 사내의 대답이 돌아왔다.
" 나 괴물 맞아. "
이 사람이 실성한 것인지 아니면 나에게 장난을 치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실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멀쩡해보였고 장난이라고 하기엔 너무 심각해보였다.
뭐라고 대꾸해야할지 몰라 황당한 표정으로 사내를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사내 또한 아무말없이 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눈빛은 너무나 차가운데 눈동자는 너무나도 반짝이는 것이 꼭 밤하늘을 가져다가 박아놓은 듯 아름다웠다. 내 평생 이렇게 고운 사내는 또 처음이었다.
묘하게 사람을 홀리는게 혹시 백년묵은 여우가 아닌가 싶었다.
나를 쳐다보며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하는 듯 했던 사내는 갑자기 내 손목을 잡아채더니 바다로 나를 끌고갔다.
" 잠시만!! 잠시만!!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
예쁘장하게 생긴 사내가 무슨 힘이 이렇게 센건지. 저항하려 해도 발을 모래사장에 깊숙히 박아넣어도 비어있는 포대자루마냥 힘없이 질질 끌려가는데 참으로 큰일났다 싶었다.
대체 이 사내는 무슨 꿍꿍이인지. 괴물이냐는 그 한마디가 나를 바다에 빠트릴 정도로 기분이 나빴던 것인가. 정말 나를 이렇게 익사시킬 참인가.
사내에게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고 당장 놓아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사내는 들은체도 않고 계속해서 나를 질질 끌고가더니 마침내 차가운 바닷물이 발끝에 닿아왔다.
하지만 거기서도 사내는 멈추지 않았다. 더 깊은 곳으로, 더욱 더 깊은 곳으로 나를 잡아끌더니 무릎, 허리, 가슴, 목 결국은 얼굴까지 모두 잠겨버릴 정도로 깊은 곳에 도착하니
아- 이제 정말 죽는구나 싶었다.
괴물에게 잡아먹혀 죽는 것이 아니라 괴물이 나를 물에 빠트려 죽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두눈을 질끈 감고 물을 먹지 않기 위해 최대한 숨을 참았다.
위로 떠오르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내 손목을 잡은 사내의 손에서는 아직도 힘이 빠지지 않아 꼼짝없이 이 안에서 숨막혀 죽게 생겼다.
이 사내는 정말 괴물이 맞는건가. 함께 물에 잠긴 상태일텐데 어떻게 손아귀에선 힘 하나 풀리지 않고 발버둥치는 기척조차 없단 말인가.
서서히 숨을 참는 것이 힘겨워지고 손끝에서부터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누가 가슴에 돌덩어리를 얹어놓은 듯 숨이 콱 막혀와 더 이상 숨을 참는 것은 불가능 했다.
서서히 머리가 하얘지고 생각이란 것이 멎어갔다. 내 앞에 있는 사내가 더 이상 중요치 않게 되고 오로지 숨, 숨, 숨을 쉬었으면 했다.
결국 꾹 다물었던 입은 벌어지고 짠 바닷물이 내 입으로 마구 쑤셔들어오려는 찰나
갑자기 내 입술에 닿아오는 부드러운 무언가.
사내의 입술이었다.
바닷물 대신 내 입 안을 가득 채우는 사내의 숨.
낯선 사내와 입맞춤을 했다는 사실보다 한 모금이라도 더 숨을 쉬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숨 한모금 무슨 소용이랴. 다시 나는 숨이 막혀올테고 결국은 이렇게 죽게 되겠지. 참으로 허무하단 생각이 들며 삶의 미련을 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사내의 입맞춤을 받고 나니 더 이상 숨이 막히지 않았다. 놀랍게도 물 속에서도 숨이 쉬어지는 것이었다.
마치 뭍에 있는 것 마냥 자연스레 쉬어지는 숨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떠보니 그 고운 사내가 바로 내 눈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칠흙같이 어두운 색의 머리카락이 물속에서 춤추며 그 아름다운 눈동자로 나를 바라봐주는데 다른 의미로 숨이 막혀왔다.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듯, 정말 괴물이라도 되는 듯 치명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숨이 쉬어지고 나니 그가 하는 말들도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 속에서 숨이 쉬어지는 것도 모자라 말을 하고 그 말을 들을 수가 있다니.
하지만 그것들은 그가 해주는 말을 들으면서 납득할 수 있었다.
" 나와 입을 맞추면 며칠간은 물 속에서 숨을 쉴 수 있어. "
다리가 있어야할 곳에 눈부신 비늘이 덮힌 꼬리를 발견함으로써 그의 말을 완전히 납득할 수 있었다.
" 나는 인어야. 네가 말한대로 괴물이지. "
**
사내를 따라 사내의 보금자리인 동굴 안으로 향했다. 그 안은 사람들의 보금자리처럼 잘 꾸며져 있었고 그 안에서 꽤나 오랜 시간을 살아온 흔적이 보였다.
인어라면 물 속에서 살아야하는 것이 아닌가. 사내는 왜 가족도 집도 없이 이런 곳에서 혼자 지내고 있는 것인가.
사내는 그 사이 벌써 몸에 물기가 완전히 마른 상태가 되었고 그 모습이 저 자가 인어라는 사실에 더 힘을 실어 주었다.
사내는 잠시 장농을 뒤적거리다 기다란 천을 하나 내게 던져주었다. 몸을 닦으라고 준 것 같았지만 수건과는 많이 거리가 먼 모양새였다.
" 난 수건 없어. 대충 닦아. "
이거라도 감사히 여기며 머리와 몸의 물기를 닦아냈다. 그리고 사내가 권하는 자리에 앉아있으니 사내가 이내 따뜻한 차를 한잔 내어왔다.
퉁명스러운 말투와는 어울리지 않는 섬세한 행동들이었다. 내게 차를 건네준 사내는 찻상을 가운데 두고 내 반대편에 앉은 뒤 내가 차를 홀짝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묘한 분위기에 사내였다. 눈빛, 몸짓 그리고 목소리까지 자신을 향해 끌어당기는 느낌이었다.
내가 차를 한모금 마시고 몸이 풀어짐을 느낀 뒤 받침 위에 찻잔을 올려놓자 사내는 그제서야 내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왔다.
" 세번째 묻는 거야. 넌 누구야. "
사내의 물음에 나는 내 이름부터 지금까지 일어난 억울한 일들을 모두 설명해주자 무표정하게 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사내는 시큰둥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 나도. "
무작정 '나도' 라니. 그게 대체 무슨 의미지.
" 무슨 말씀이신지... "
" 나도야. 나도 버림받았어. "
그 말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필요해 한참을 아무말도 못 했고 그 말을 이해하고 나서도 뭐라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어서 아무말을 못 했다.
첫만남부터 너무 큰 치부를 알아버린 것 같아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 하고 있자 사내가 처음으로 피식 웃음 지었다.
완전한 웃음이 아닌 반쪽짜리 웃음이었지만 그것마저도 황홀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인어가 사람을 홀리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니 정말인 모양이었다.
사내에게 관심 하나 없던 내가 이 정도로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을 보니. 아니 어쩌면 인간 사내들에게 신물이 난 나의 반동이었을지도.
왜 버림받았는지 궁금했으나 '왜'라고 묻는 것이 너무 상처일까 싶어 궁금증을 꾹 참고 있었는데 인어의 신기로 내 마음을 읽어낸 것인지 내가 표정을 숨기지 못한 것인지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챈 사내는 본인이 알아서 자신의 상처를 읊어주기 시작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그에게는 무뎌져버려 더 이상 상처가 아닐지도 모르나 그 흉터마저 사라졌을리는 없을텐데 말이다.
" 이유는 간단해. 난 물 속에서 오랫동안 숨을 못 쉬어. "
" ... "
" 난 길면 반나절 짧으면 세시진(6시간) 마다 한번씩은 수면 위로 올라와야 돼. 다른 인어들은 평생을 바닷속에서만 살아도 멀쩡한데. "
덤덤하게 말하는 것이 어쩐지 더 슬프게 느껴졌다.
" 자신들과 다른 꼴은 곱게 못 보는 건 인간이나 인어나 똑같아. 나더러 인간의 피가 섞인 잡종이 아니냐고 하면서 그 때부터 무리에서 따돌림을 당했지.
그걸 견디다 못해 내가 내 발로 뛰쳐나온 거지만 그들이 나를 어서 나가라고 떠밀었던거야. 그러니깐 난 버림 받은거지.
인간도 아니고 인어도 아닌 내가 괴물이 아니면 뭐겠어. 그래. 네 말대로 난 괴물이야. "
" ... "
" 인간을 딱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넌 괜찮은 것 같아. 너도 버림받았고 나도 버림받았어. "
" ... "
" 그럼 너와 내가 서로를 채워주면 되는거야. "
차갑고 날카로운 줄만 알았던 사내의 모습은 전부 거짓이었고 포장이었다.
만난지 얼마되지도 않은 이 사내는, 어릴 적부터 애정이 모자랐던 이 사내는 처음 만난 나에게 바로 마음을 열어버렸다.
따뜻한 관심이 필요했던 사내는 어쩌면 나의 등장을 처음부터 반겼을지도 모른다. 내가 어떤 자인지 알지도 못 하면서 새끼강아지 마냥 아무런 경계심없이 꼬리를 흔들었다.
" 그럼 둘 다 외롭지 않을테니까. "
이 이상한 사내는 나에게 급하게 애정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동안 이 날만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내일 오후 10시에 下편이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