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음악 아이유 - 이런 엔딩
"거기 안서?!"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귓가를 찔를 듯이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눈을 뜬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무작정 달릴 뿐이었다.
신을 신지 않아 발바닥에 닿는 눈길이 그대로 느껴졌다.
언젠가 얼굴로 그리고 손바닥으로 느꼈던 눈송이와는 전혀 달랐다.
마냥 부드럽고 사르르 녹아내리던 눈은 부드러움 속의 날카로움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 마치 저 뒤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처럼.
퍽.
무언가에 부딪혔다. 바위인가? 나무? 기둥? 아무것도 아니었다.
부드러운 옷자락에 단단한 몸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정도의 덩치와 단단함의 소유자라면...
사내였다.
"아..."
"..."
"소, 송구하옵니다..."
"..."
"이게, 이게 아닌가..."
나와 사내의 첫 만남이었다.
달무리
獨坐幽篁裏 독좌유황리
彈琴復長嘯 탄금부장소
深林人不知 심림인부지
明月來相照 명월래상조
홀로 앉아 거문고를 뜯고 다시 휘파람을 분다.
깊은 숲 아무도 모르는 곳에
이윽고 달이 밝은 빛을 안고 찾아온다.
"... 내 잠시 그것을 잊고 있었구나."
"그렇습니까."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아래로 늘어뜨린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사내의 옷자락이 흩날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간간히 바람이 강물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도 들려왔다.
사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일어나는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아 자리를 비운 것은 아니었다.
사내가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은 볼 수 없기에 그의 속마음 역시도 알아챌 수 없었다.
허나 나는 묻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그 역시도 내게 숨기는 것이 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기녀가 되도록 나의 머리를 올려줬던 사람. 그러니까 나의 서방님은 바로 사내의 아버지였다.
-
"성균관에 들어가게 되면..."
"..."
"이리 만나는 것도 이제 쉽지 않겠지요."
"..."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네요."
"..."
사내는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굳이 들으려 하지 않아도 그의 명성은 이미 차고 넘치도록 들어왔던 나였다.
좌판 대감의 외동아들이자 어린 시절부터 수재라 불렸던, 모든 조정의 대신들이 기대와 관심, 시기와 질투를 가지고 바라보고 있는 사내.
그가 바로 김석진이었다.
아마 사내는 성균관에 들어가고 과거에 합격을 하게 되면 혼인을 맺을 것이다.
집안에서 정해준 어느 집안의 여식과 백년가약을 맺게 되겠지. 그리고 그 두 사람 사이에는 내가 들어갈 좁은 틈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기녀와 유생의 사랑이라는 것은.
게다가 나의 서방님은 좌판 대감이었다.
더더욱 인륜적으로도 맺어질 수 없는 인연이었다.
"내가 원망스럽지는 않느냐."
"원망스럽습니다."
"설화야."
"도련님 덕분에 설화라는 이름이 생겼지요."
"..."
"도련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그 날 산짐승의 밥이 되었을 것입니다."
"..."
"그것이 아니라면 눈에 파묻혀 얼어죽었을 지도 모르겠네요."
사내의 손이 내 어깨 위로 닿아왔다.
나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며 뒤로 슬쩍 물러났다. 다른 사내의 손길이 닿은 몸으로 그의 손길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제 아무리 창기(娼妓)가 아닐지라도 기녀는 기녀였다. 사내에게 말과 몸을 팔면서 생계를 꾸리는 기녀에게 정조는 무슨.
(娼妓 - 몸을 파는 기생)
"내가 무섭느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성균관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너를 잊지는 않을 것이다."
"잊으셔야 하옵니다."
"..."
"도련님을 기억하는 건 쇤네만으로 충분합니다."
"... 탄소야."
"..."
제 이름을 어찌 아셨습니까.
라고 물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 거칠어졌을 입술 위로 부드러운 것이 닿아왔다.
따듯했다. 부드러웠다. 그리고 물기를 살짝 머금고 있었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집문(接吻)이 처음은 아니었다. 머리를 처음 올렸던 날 했었으니까.
(接吻 - 키스의 옛말)
사내의 입술이 떨어졌다. 그동안 참아왔던 숨을 몰아 내쉬었다.
사내의 손은 어느새 내 허리를 감싸안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제 아무리 구흡(口吸)이 아닐지라도 부끄러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口吸 - 딥키스)
"나를 기억하겠다고 했느냐."
"그, 그렇습니다."
"어찌 나를 기억하겠느냐."
"도련님의 목소리와 자취를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허나 너는 내 용모를 모르지 않느냐."
"..."
"만져보거라."
"... 네?"
"머리로는 기억을 할 수 없으니 손끝으로라도 기억을 해야지."
사내가 내 손목을 그러쥐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볼에 가져다대었다.
다시금 몸이 흠칫 떨려왔다. 지금 내가 사내의 얼굴을 만지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손가락 끝에 닿아오는 그의 얼굴은 단정했다. 군더더기 없이 부드럽게 미끄러져 내려갔고 모난 곳 없이 단정히 끝이 났다.
한없이 차가운 내 손에 비해 눈물이 나리만큼 따스했고 은은한 향유의 향이 섞인 체취도 느껴졌다.
만지고 또 만져도 아쉬운 느낌만 남을 뿐이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금 사내의 볼을 쓸어내렸다.
내 두 볼 위로 눈물 자욱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래도 놓을 수가 없었다. 기억할 수 있을 때까지 사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기억하겠느냐."
"기억할 것입니다."
"나 역시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니라."
"잊으셔야 하옵니다."
"..."
"저 같이 천한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는 마세요."
"탄소야."
"도려, 아니. 서방님."
"..."
"부디 만수무강하시길 바랍니다."
손등 위로 눈물 방울이 떨어졌다. 사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손을 더듬거려 사내의 눈물을 손으로 훔쳐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사내는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감정과 상관없이 웃어라. 그러면 너를 보고 있는 사람은 네가 정말로 웃고 있는 줄 알 것이다.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려댔다.
웃고 있다. 지금 나는 웃고 있는 것이다. 사내가 보는 지금 내 모습은 웃고 있는 내 모습일 것이다.
사람을 대할 때는 웃는 낯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했었다.
지금 사내가 보고 있는 내 모습 역시 지금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이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들어갈 수 있겠느냐."
"늘 혼자 걷던 길입니다. 괜찮습니다."
"밤바람이 차구나."
"아침에 맞는 바람은 더욱 찰 것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았다.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애써 드러내지 않았다.
한 걸음씩 발걸음을 내딛다 잠시 자리에 멈춰서보았다. 아무런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사내가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시 발걸음을 내딛었다.
강물 위를 스치고 지나가던 바람이 내 볼에 닿아왔다.
나를 잊지 말거라.
쇤네를 잊으셔야 하옵니다.
그의 말대로 달이 매우 밝은, 달무리가 짙게 진 밤이었다.
내일이면 비가 내릴 것이다. 문 밖으로 나갈 수 없을 정도로 굵은 빗줄기가 흘러내릴 것이다.
지금 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줄기처럼. 그렇게 말이다.
-
(201n년)
"탄소야."
"어?"
"저기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좀 사올래?"
"아이스로?"
"응. 아이스로. 이놈의 짐은 정리해도 왜 끝이 안나니..."
엄마가 쥐어준 카드를 들고 길을 나섰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내가 보기에 아무런 포장없이 늘어진 흙길은 마냥 신기함 그 자체였다.
하늘이 맑았다. 어제 비가 내릴 것이라고 그렇게 일기예보에서 떠들어댔는데 모두 구라였나보다.
이렇게 파란 하늘은 얼마만이지? 만날 미세먼지네 뭐네 난리여서 파란 하늘을 되게 오랜만에 마주한 기분이었다.
역시 시골이 좋기는 좋구나.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멀지 않은 곳에 카페가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인테리어가 꽤나 아늑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이런 곳에도 카페가 있구나. 머리를 긁적이며 문을 열었다. 딸랑 하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은은한 커피 향과 잔잔한 음악소리가 어우러지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
한 남자가 카운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잘생겼다. 처음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주문하시겠어요?"
"아메리카노 아이스로 세 잔 주세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세 잔 맞으시죠?"
"네."
이런 시골에도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있구나. 나이도 많지 않아보이는데. 부모님이 귀농하신 건가?
아니면 건강 때문에 내려온 건가? 나처럼?
"이제는 앞이 잘 보이나봐요."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사오셨나봐요."
"네. 방금이요."
"음..."
"이사 온 선물로 그냥 드릴게요. 앞으로 잘 지내요."
"네?"
"이제 거의 매일 얼굴 볼텐데 미리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보고싶었어요. 많이."
참으로 이상한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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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을 장식하게 돼서 영광이에요. 앞으로 있을 2라운드 3라운드도 많이 사랑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