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사 최승철X생계형 마법사 너봉_03
"기억을 지우자"
"뭐래, 인간 기억 지우는거 함부로 하다가 걸리면 징계먹는거 몰라?"
"아니, 그럼 어떡하냐고! 젠데르 일도 생각해보면 우리랑 영 관련 없는 인간은 아닌게 확실하니까 옆에 둬야 하는데, 애니를 본 이상 그냥 둘 수는 없잖아, 이건 진짜...진짜 유래없는 일이라고..."
"그렇긴 하지. 또 어떤 조심성 부족한 피큘리가 이런 짓을 벌여놓겠어."
당황함에 눈만 데구르 굴리는 승철을 덩쿨로 결박해둔 채 뜨거운 홍차에 각설탕 두어개를 넣고 꼬리를 꺼내 휘휘 젓는 원우다.
그래, 이런 상황일 수록 침착해야지. 침착. 침착....할 수가 없잖아. 안그래도 주변에 다른 피큘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 인간을 집에 들였고 그 인간이 피큘리의 정체를 알았다는 사실이 마법부에 전해지는건 시간문제다. 더욱이 이런 상황에서는 결코 '한달간 마법 사용 금지'같은 소소한 징계가 내려올 일은 없다고. 적어도 '정신분열' 이나 '세달간 갈증과 배고픔에 시달리다' 같은 징계일거라고!
속으로 몇번이고 소리치는 나와 다르게 무덤덤한 표정으로 차를 햘짝햘짝 마시는 원우에 속에선 천불이 났다.
"그래서 넌 생각이 있고?"
"네가 엎질러놓은 물에 대한 생각을 왜 내가 해야하지?"
그렇지. 맞아, 그래 정답. 아니 그래도 이건 같이 사는 동거인, 아니...동거묘로써 뭐라도 해줄 수 있는거 아니야? 아 물론 내가 이런 부탁하는게 되게 어이없을 거라는거 알지만
"그럼 한번 해봐. 기억 지우는거. 그 깐깐해보이는 앤녀석은 일단 내가 처리해볼테니까"
와, 역시 원우. 날 그렇게 쉽게 버리지 않을줄 알았어. 한껏 감동받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자니 꼬리를 공중에 휙휙 돌리더니 곧 각설탕 두개를 공중에 띄워 내 입으로 넣어버리는 원우다. 그 모습에 헉...하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신기한 듯 원우의 꼬리만 쳐다보고 있는 승철.
"나 이거 처음 해봐 진짜로"
"어. 나도 처음봐 니가 하는거"
도와달라는 소리는 자존심 상해 못하고, 빙빙 돌려 도와달라고 이야기하는 나에 알아들은건지 못 알아들은건지 그저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는 원우다.
그래, 너한테 뭘 기대한 내잘 못이지. 의자에 결계로 묶여 옴짝달싹 하지 못한 채 눈만 동그랗게 뜨고 나와 원우를 번갈아보는 승철에 이내 눈을 꼭 감고 손가락을 허공에 빙빙 돌려 빛덩어리 하나를 만들어낸다.
"어, 저기 혹시 언제부터 언제까지 기억을 지우시는거죠...? 제가 사실 다음주가 오디션이라 공부했던거는 까먹으면 좀 그렇거든요"
하며 머쓱하게 입을 떼는 승철에 집중력이 흐릿해졌다.
맥빠지게
한숨을 하, 쉬고 희미해진 빛에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빛덩어리를 뭉친다. 점점 더 크게, 빛이 이내 불어나더니 온 집안의 빛이 다 그 안에 모여들어 어두캄캄한 가운데 사람몸만한 덩어리만이 밝게 빛났다.
과자를 아삭아삭 부숴먹으며 쇼파 등받이에 기댄채로 내가 하는 냥을 바라보는 원우에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진짜로 오디션 보는 느낌이랄까. 덜덜 떨리는 손에 입술을 꽉 깨물고 빛 덩어리로 승철을 뒤덮는다. 한참동안 밝게 빛나던 빛이 이내 붉게 변하더니 어딘가로 빨려들어가듯 사라진다.
"에...?"
내가 뭘 잘못한건가? 다시 빛을 모아내 승철을 뒤덮었으나 이번에도 붉은 빛을 내며 어디론가 빨려들어가는 빛이다.
당황감에 원우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그도 어딘가 당황스러운 모습이다. 과자를 집던 손이 그대로 굳더니 입을 에 벌린채로 승철을 바라보는 원우에 나 또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가만히 우리를 올려다보는 승철에 분위기가 꽤나 어색해졌다.
이내 정신을 차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티슈에 닦고는 승철을 향해 한 손을 뻗는 원우다. 내가 만들었던 빛과는 차원이 다른 밝기와 크기의 빛 덩어리가 쉴새없이 그 크기를 불려나갔다. 집 밖의 가로등이 하나 둘 빛을 잃었고 이내 동네 전체가 어둠에 휩싸였다. 그 넓은 거실을 꽉 채울 정도의 빛 덩어리가 승철을 휘감았다.
빛이 붉은 색으로 바뀌고 그 주변에서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우는 손을 거두지 않고 계속해서 승철을 향해 빛덩어리를 쏟아냈다.
"앗 뜨...!"
하는 승철의 목소리와 함께 팔을 내린 원우에, 그제서야 붉은 빛을 내던 그 덩어리가 사라졌다.
"어, 끝이예요...?"
말도안돼. 진짜 이건...진짜 말도 안되는 일이 방금 눈 앞에 벌어진거라고.
한낱 인간이 피큘리 중에서도 마법부 위원들에 버금가는 몇 안되는 피큘리 중 하나인 원우의 마나를 모두 흡수해버렸다는게,
어딘가 언짢은 듯한 표정으로 홱 뒤를 돌더니 곧 고양이의 형상을 하곤 쇼파 아래로 몸을 숨기는 원우에 무언가 잘못된걸 느꼈다. 이게 이럴리가 없는데.
여전히 어리둥절하게 앉아있는 승철을 향해 곧장 걸어가 한손으로 목을 휘감았다.
"뭐야 너"
"네? 전 그냥...아니 근데 그것보다 기억이 안지워졌는데요...? 가만있자. 어제가 목요일이고 아까는 말하는 장미를 봤고. 네 안지워졌네요"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는 승철에 기가 찼다.
"결계를 풀었네?"
하고 물으니
"아까 빛 뻔쩍할때 픽 풀리던데요? 혹시 잘못 걸거나 하신건...아닌것 같습니다. 네"
이글거리는 내 눈을 본건지 곧 아니, 아닙니다. 하고 말을 돌리는 그다. 미치겠네 진짜 근200년 생동안 진짜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적잖이 당황스럽네.
"일단, 일단 좀 들어가서 쉬어요"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손으로 감싸쥐고 멀뚱멀뚱 서있는 승철에게 손짓했다.
"어...네"
승철까지 방 안으로 돌려보낸 뒤 다리에 힘이풀려 쓰러질뻔하는 정신을 겨우 붙잡고 방안에 들어가 문을 잠근다.
"오프보레테 자 바타타"
하고 낮게 속삭이자 양쪽으로 벌어지는 책장, 그리고 그 사이에 나타난 계단을 타고 걸어내려간다. 어두운 지하실, 차가운 공기가 나를 반기고 여기저기 오래 슬은 곰팡이 향이 여전히 변하지 않은 공간을 보여준다.
공중에 손가락을 휙 휘두르자 촛불에 불이 붙어 금방 방 안이 환해지고 붉은 철판과 그 위에 금제 두꺼비 장식이 화려하게 붙은 문에 자바타타- 하고 옅게 속삭이자 이내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문 하나를 경계로 완전히 다른 공간이 펼쳐진다.
따뜻한 공기, 붉게 타오르는 벽난로와 달콤한 페스츄리향, 벽의 세면을 가득 채운 책꽂이와 형형색색의 마법 서적들. 크리스마스의 오두막에 들어온 듯 금새 마음이 편안해진다. 푹신한 안락의자에 푸욱 누워 책꽃이를 향해 두어번 손짓하자 붕 떠서 날아와 손에 잡히는 두꺼운 책 두권.
"내일까진 다 읽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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