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의 사정
written by 18학번
하암. 지민의 입에서 연달아 의미없는 하품이 나왔다. 의자 아래서 엇갈려 꼬여있는 다리도 슬슬 저려오고 있었다. 한없이 무거워지는 탓에 감겨오던 눈을 간신히 정신을 붙잡아 지탱하고 있는 지민이었다.
지민 씨, 이번 드라마 너무 재밌게 봤어. 역시 멋있더라. 다음에는 나랑 영화 한 편이라도 좀 찍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나?
씨발.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매니저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여기에 데려다 놓은 거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여배우의 말에 잔뜩 화가 난 지민이었다. 욕짓거리로 가득한 머릿속은 금방이라도 과부하가 걸릴 것만 같았다. 연기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싶어한다는 선배 여배우ㅡ선배 여배우라고 해봤자 나이는 지민보다 어렸다ㅡ가 있다기에 예의 상 자리에 나왔건만. 이것도 선배라고. 매너도 예의도 좆도 없네. 지민이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넘겨댔다. 그런 지민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아직도 조잘대는 여자의 입술이 참으로 가식적이었다.
이 의미없는 대화를 하기를 두어 시간. 아직도 할 말이 뭐가 그리 많은지 저 혼자 하하호호 웃어대며 대화를 이어가는 여배우의 하이톤의 콧소리는 지민의 성질을 더 긁어대고 있었다. 더군다나 약속장소를 방송국 내 카페로 잡아버린 탓에 우연히 카페에서 만난 스탭들에게 인사를 하느라 억지로 올린 입꼬리는 경련이 나 그대로 굳어버릴 지경이었다. 저의 앞에 앉은 여배우는 자리를 뜰 생각이 없는 건지 이내 카운터에 가서는 아이스티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언제 자리를 떠야하나 계속해서 타이밍을 노리고 있던 지민이었다.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서는 지루하다는 표정을 한껏 지은 채 여자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호응을 유도하는 여자의 말에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리다가도 저도 모르게 나오는 하품을 하기도 했다. 난 항상 지민 씨가 느와르물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었어. 나랑 그런 거 하나 찍자니까. 난 위기에 처한 여주인공이고 지민 씨가 날 구하러 오는 거야. 어때? 그야말로 기가 찼다. 여자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네요, 하고 대답하는 지민이었다. 그리고 점점 떨어지는 흥미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땐 카페의 통유리를 통해 보이는 건 끙끙대며 짐덩이를 옮기는 탄소의 모습이었다. 어, 김탄소다.
" 저, 선배. 오늘은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
" 응? 지민 씨, 오늘 스케줄 하나도 없다며. 매니저한테 다 듣고 왔는데? "
" 아, 그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요. 먼저 좀 가볼게요. "
" ... "
" 아, 그리고 선배가 말씀하신 느와르물은 제가 은퇴하기 전까지 한 번이야 찍기는 하겠죠? 그 때 같이 작품해요. 지금은 좀 곤란하고. 그럼 다음에 봬요. "
시선을 탄소에게서 거두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가는 지민이었다. 지민은 탄소에게 정신이 팔려 보지 못했겠지만 그 순간 여배우의 표정이 매우 보기좋게 일그러졌었다. 지민은 뒤에서 자신을 소리쳐 부르는 여배우의 말을 그대로 무시한 채 탄소를 향해 곧장 향했다. 지민의 발걸음이 빨라졌다고 느낀 건 분명 착각이 아니었다.
탄소는 왼 손엔 서류봉투를 가득, 한 손엔 엄청나게 부피가 큰 쇼핑백 여러개를 끼고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다. 며칠 후 있을 개그맨 편 '스타페스타' 촬영을 위해 온갖 분장재료와 서류들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고된 일은 무조건 막내의 몫인 터라 이제 이런 허드렛일도 익숙해진 참이었다. 다만, 힘든 점이 있다면 탄소의 체력이 그만큼 따라주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계단 하나하나를 오르며 숨을 헉헉 쉬어대던 탄소였다. 지민은 어느새 탄소 몰래 탄소의 뒤까지 와서는 탄소의 손에 걸린 쇼핑백을 자신이 집어들었다. 그에 놀란 탄소가 몸을 지민 쪽으로 휙 돌리자 탄소의 왼 손에 있던 서류봉투도 재빠르게 가져가는 지민이었다.
" 깜짝이야! "
" 안녕. "
" 뭐에요. 말이라도 좀 하던가. "
" 많이 놀랐어? "
웃으며 눈을 맞춰오는 지민이었다. 그에 괜히 얼굴이 빨개진 탄소였다. 불쑥불쑥 나타나서 사람 놀래키는 게 취미인가.
" 네, 엄청요. 애 떨어지는 줄 알았네. "
" 네가 애가 어딨어. 나 몰래 숨겨놓기라도 했어? "
"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리고 제가 숨겨도 왜 박지민 씨 몰래 숨겨요? "
지민은 탄소의 뾰루퉁한 입술을 보며 저도 모르게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입가에 부드러운 호선을 띈 지민이었다.
을의 사정
written by 18학번
" 갑자기 왜 찾아왔어요? "
" 앞으로는 더 자주 보러 올 거야. "
" 누가 보러 오게 해준대요? "
" 네 의사는 별로 안 중요한데. 내가 보고싶어서 오는 거지. "
" 스케줄은 어쩌고요. "
" 드라마 촬영 다 끝났어. 인터뷰나 촬영도 잡아놓은 거 없고 당분간은 쉴 거야. 그리고 그 시간을 너한테 쓸 거고. "
" 참나. 맨날 말만 잘 하지. 그 말빨로 여자 여럿 꼬셨겠어요? "
일더미가 산처럼 쌓여서 만나줄 시간이 없다는 탄소를 겨우겨우 설득해 카페에 앉힌 지민이었다. 처음에 이어서 또 다시 한 번 느끼지만, 말 한 번 나누기 존나게 힘드네. 둘의 첫만남 때와 똑같이 지민의 앞에는 딸기 스무디가 놓여져 있었고 탄소의 앞에는 아메리카노가 놓여져 있었다. 카페 사장은 '빅키즈'의 지민임을 알아차린 건지 카페 내에서는 의도적으로 틀어놓은 듯한 빅키즈 메가히트곡 메들리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온갖 칭찬에 설득을 해서 겨우 저의 앞에 앉혀놨더니만 고작 하는 소리가 '그 말빨로 여자 여럿 꼬셨겠어요?' 란다. 이건 뭐, 쪽팔리게 제대로 된 연애경험 한 번 없는 연애고자라고 말 할 수도 없고, 씨발. 그렇다고 존나게 선수인 척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고개를 숙이며 손으로 저의 얼굴을 쓸어내리는 지민이었다. 그런 지민을 탄소는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기 바빴다.
" 왜. 뭘 봐. "
" 혼자 뭘 그렇게 안절부절 못해요? 진짜 여자 여럿 꼬신 게 맞나보다. "
" 그런 거 아니야. "
" 그럼 뭔데요. "
" 아니, 아니라니까. 걍, 아니라면 좀 가만히 있어. "
괜히 민망함에 얼굴을 훔치는 지민이었다. 그런 지민을 탄소는 계속 추궁하기 바빴고. 지민은 탄소의 앞에 놓여져있는 아메리카노 뚜껑을 열더니 이내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서는 제 몫의 딸기스무디를 탄소에게 건네며 네가 이거 마셔. 하고는 빨대를 꽂아 탄소의 앞에 갖다 놓았다. 민망함과 당혹감이 한 번에 밀려왔다.
" 주말에 시간 없어? "
" 작가가 시간이 어디 있어요. 따지고 보면 프리랜서 직업인데. 나오라고 하면 나와야 되고 밤새라고 하면 새야 돼요. 월급은 쥐꼬리만하면서. "
" 그럼 우리 데이트는 어떻게 해. "
" 무슨 데이트요? "
" 너랑 나말이야. "
" ... 우리가 데이트를 왜 해요? "
퍽이나 자존심이 상한 지민이었다. 아니, 이 정도면 진짜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일부러 모른 척 하는 거 아니야? 지민이 당황스러움에 그저 눈을 깜빡거리기만 했다. 자신은 분명히 탄소에게 표현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자신만의 생각이었던 건가. 지민은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을 그만 놓칠 뻔 했다. 탄소의 스무디 컵에는 어느새 물기가 서려 테이블 위를 적시고 있었다.
" 말했잖아. "
" ... "
" 좋아한다고. "
사실 탄소의 속내는 그랬다. 부끄럽고, 또 부끄럽고 그냥 부끄러워서. 사실 탄소도 연애에 능숙한 편이 아니라 따지고 보면 쑥맥 쪽에 가까운 편이 맞았다. 그래서 저 자신도 지민에게 느끼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고. 지민에게 좋아한다는 소리를 들은 그 날에도 심장이 하루종일 쿵쾅쿵쾅 뛰어서 하는 일마다 실수를 한 탓에 선배들에게 꾸지람만 엄청 들어댔다. 탄소가 하룻밤을 꼬박 새며 나온 결론은 그것이었다. 지민을 볼 때마다 느끼는 이 감정을 '사랑'이라고 정의내렸다. 그야말로 지민과 다를 바가 없었다.
탄소의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며 말해오는 지민이 어딘가 귀엽게 느껴지는 탄소였다. 처음엔 날카로워 보이기만 했던 그 눈매도 부드러운 솜사탕 마냥 포근했고 사나운 말만 하던 지민의 입도 어딘가 귀엽게만 느껴졌다. 누군가가 이런 탄소의 생각을 알기라도 한다면 하루종일 탄소는 놀림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이거야 말로 쌍방삽질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서로의 감정을 앞다투어 사랑이라고 치부하기엔 둘 다 서로에 대해 아는 점이 그닥 없었다.
지민은 생각해보니 그랬다. 내가 김탄소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지. 김탄소는 스타페스타 막내작가고, 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스물여덟이고. 아메리카노를 좋아하고. 그 외에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좋고, 좋고, 좋다는 것 외에는 생각할 것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탄소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물론, 박지민은 세상에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매우 잘 알려진 연예인이다보니 정보를 찾는 것 쯤이야 쉬웠겠지만 박지민은 연예인들 중에서도 유독 알려져있는 정보가 없는 연예인이었기 때문에.
" 또, 또. 자꾸 그렇게 쳐다볼래? "
" 내가 뭘 했다고 그래요. "
" 그냥 가만히 좀 있어. 니가 그렇게 쳐다볼 때 마다 존나 신경쓰여. "
" 참나. 남의 시선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사람이 연예인은 어떻게 됐대. "
삐진 것 같은 탄소의 입술이 오리마냥 부풀어올라 있었다.
" 입술은 좀 집어넣지? 삐졌다고 티내는 것도 아니고. "
" 전혀요. 삐지긴 개뿔. 나 이제 가봐야 돼요. 너무 늦었어. "
" 주말에 또 보러 올게. 너 바쁘면 바쁜대로 있어. 나만 너 보고 가든가 할게. "
" 보러오게 안 해준다니까. "
" 내 맘이야. 얼른 들어가. 또 혼날라. "
" 응. 갈게요. "
총총 뛰어가는 탄소의 뒷모습이 토끼같았다. 항상 같은 방향, 동일한 시간대에 맞춰서 돌아가는 시곗바늘 마냥. 빙글빙글 돌아가는 챗바퀴마냥 무료하던 지민의 일상에 메아리가 쳤다. 평온하고 잔잔하고 평화롭던 지민의 넓디 넓은 호수에 누군가가 돌을 던진 탓에 호수가 격하게도 일렁인다. 그것도 돌이 한 두개가 아니여서. 무지막지한 크기의 돌맹이들로 지민의 호수를 툭툭 건드리다 못해 내리치는 바람에 지민의 호수가 파도를 만들어냈다. 그 파도에 휩쓸리는 건 물론 탄소였다.
18학번 |
흐어 ㅠㅅㅠ 너무 급하게 쓰는 바람에 암호닉 정ㄹ리를 또 못해가지구 와써여 ... ㅠㅅㅠ 죄송해요... ! 진짜 글이 쓰면 쓸수록 망작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이러다가는 연재중지하고 글을 삭제하게 될지도 모르게써여 ... 으앙 ... 일단 여기까지 읽어주신 독자님들 감사하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D편으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오타 피드백은 달게받습니다 ^ㅁ^ |
암호닉은 가장 최근 화에서 신청받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