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죽였다.
-…일당이 이것밖에 안나왔다구요?
-불만 있으면, 때려치던가.
-말도 안돼요. 더 주세요.
-말이 많네, 얼른 가.
'앞에 좀 비켜!' 뒷통수에서 날이 선 목소리들이 날아왔다. 기우뚱하게 의자에 몸을 받쳐 나를 바라보던 그가 작은 웃음을 띄웠다. 이가 갈리듯 입을 다물었다. 눈물이 비집고 나오려고 했지만 그럴 여유도 내겐 존재하지 않았다. 재빨리 발걸음을 옮겨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이곳 사람들은 항상 날이 서있었다. 무엇이든지 빠르고 쫓기듯 행동했다. 밥을 먹을때도, 잠을 잘때도. 뜬 눈으로 하루를 지새우는 것도 아주 흔한 일상이었다. 당장 일분 일초가 내 인생을 끝낼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루를 살아 하루 살기 바빴고, 그것마저도 부족해 끼니를 거르고 버스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날은 유독이나 부당한 날이었다. 평소 하던 일보다 더 힘든 일들도 다른 사람에게 떠맡기지 않고 모두 일을 마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받던 일당보다 5시간이나 적게 받았다. 당장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하는 나에게는 턱없이나 부족한 시간이었다. 팔목에 새겨진 형광색의 시간을 바라보니 겨우 10시간 남짓 남아있었다.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다시금 공장 안으로 몸을 옮겼다.
늦은 밤, 모두들 일당을 받고서는 공장을 빠져나간 한참 후였다. 혼자 남아 공장 안에 있는 기계들을 점검하며 전원을 끄고 있을때, 어두운 복도 끝쪽에서 또각거리는 구두굽 소리가 울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고개만 슬쩍 내밀어 어두운 복도 끝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 불과 몇시간 전 나에게 일당을 준 그가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공장 안을 살피고 있었다. 빤히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눈동자가 진하게 닿았다. 말없이 서로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때 그가 낮게 깔린 정적을 깼다.
-일당을, 적게 받았지?
-…뭐요?
-더 챙겨줄까 하는데.
그가 벽으로 향해 공장안에 불을 켰다. 어두웠던 시야가 밝게 변하며 눈을 찌푸렸다. 그의 알 수 없는 말에 입을 열지 못하고 눈을 찌푸리고 있을때면 그는 다시금 또각거리는 구두굽 소리를 내며 저만치서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것도 잠시, 꽤나 가까운 거리까지 걸어온 그가 걸치고 있던 정장 자켓을 벗고는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졌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 작게 웃음을 띄운 그가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팔목에 새겨진 자신의 시간을 내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자, 내 시간이야.
-…
정확히 시간으로 읽기도 벅찬 숫자들이었다. 고개를 숙여 그의 팔목에 적힌 숫자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세고 있으면 그가 자신의 큰 손으로 내 얼굴을 잡아올렸다.
-80년 정도야. 내가 살 수 있는 시간.
-…이거 놔요.
-십년이면 되나?
-놓으라고!
그가 너덜하게 늘어난 나의 티셔츠를 멋대로 찢으려고 했다. 의지와는 다르게 덜덜 떨리는 나의 두 손으로 그의 손을 막으려고 했지만, 이내 그의 두꺼운 팔목에 짓눌렸다. 차가운 공장 바닥에 나와 그가 넘어졌다. 두 다리를 바둥거리며 움직여도 나의 몸 위로 넘어진 그는 꿈쩍을 하지 않았다. 눈물이 빨갛게 변한 볼을 타고 흘렀다. 당장이라도 토가 나올 것 같았다. 나의 티셔츠를 찢는 그의 팔목을 이가 부서지도록 세게 물었다. 얼핏 비린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내 몸 위에서 떨어져 나간 그를 뒤로하고 숨이 넘어가도록 뛰었다.
-이 씨발년이!
상스러운 욕을 뱉은 그가 나의 뒤를 따라 밟았다. 숨이 넘어가도록 뛰어가다가 발이 엉켜 큰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무릎이 바닥에 쓸린 것인지 무릎쪽에서 깊은 쓰라림이 느껴졌다. 엉덩이를 바닥에 질질 끌고서는 갖가지 공구들이 보관되어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문을 급하게 닫고서는 굳게 잠궜다. 벽을 손으로 짚고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다가 엉망이 된 책상 사이로 뾰족한 드라이버가 놓여있었다. 두 손으로 드라이버를 집어 들었다. 그제서야 다리가 떨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두려움이었다. 두려움이라는걸 느낄 여유조차 없었고, 이곳에서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줄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잠궈진 문이 들썩이며 큰 소리를 냈다. 낡아빠진 문은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손잡이를 뱉어냈다. 문손잡이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밝은 공장빛이 그를 비추었고, 그는 검게 그림자가 졌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나의 뺨을 미친듯이 때려댔고, 그로 인해 입 안 가득 피가 터져나왔다. 뺨을 때리는걸로도 자신의 분이 풀리지 않는지 자신의 발로 나의 몸 구석구석을 밟았다. 차가운 바닥에 웅크려 그의 발길질을 맞고 있다가, 두 손을 길게 빼내어 손에 감춰두었던 드라이버로 그의 발목 부근을 세게 찔렀다. 피가 터져나오듯 바닥을 적셨다. 외마디 비명을 지른 그가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나뒹굴었다. 여기저기 쑤신 몸을 억지로 일으켜 그의 발목에 꽂혀있는 드라이버를 빼내고서 어딘지도 모를 그의 신체 여러부위를 찔렀던 것 같다. 몇번이나 그랬을까, 이내 미동이 없어진 그의 몸을 바라보다가 들고있던 드라이버를 대충 바닥에 던졌다. 붉게 피가 튀긴 그의 와이셔츠 소매를 걷으니 아까전 보았던 시간과 비슷하게 새겨져 있었다. 물론,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그의 팔목을 붙잡아 시간을 가져왔다. 나의 팔목에 새겨진 80년의 남짓의 시간을 바라보다가 급히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이곳에서 가로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밤이되면 밤이 되는대로 도시는 깜깜하고 어두웠다.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었고, 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집 안을 환하게 밝히기 위해 불을 켰다. 밝아진 시야 덕분에 티셔츠 위로, 나의 살갗 위로 그의 피가 진하게 묻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욕실로 향해 급하게 몸을 씻었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 내가. 정신이 아득해지며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변했다. 나의 행동을 숨기지 못하는 듯, 두손이 자연스레 떨려오기 시작했다. 샤워를 끝내고 방 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몸을 눕혔다. 떠나야 했다. 그것만이 내가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두 눈을 감았다. 당장 내일이면 내가 한 모든 짓이 이 구역에 알려질텐데. 최대한 빠르게 이 곳을 떠나야 했다.
어언 저 일이 지난지 일주일이 된 것 같다. 일주일동안 내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주어진 80년이라는 시간을 이용해, 8구역에서 빠져나와 말로만 들었던 최상급의 1구역으로 향했고, 지금은 80년이 아닌 그에 두배에 달하는 160년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1구역에서는 하루를 벌고 하루를 사는 일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들 100년은 기본적으로 갖고 있었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은 500년. 그리고, 1구역에서도 이름을 떨칠만큼 부유한 사람들은 1000년이 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시간을 소비하기 위해서는, 다들 카지노를 방문하는 것을 취미로 삼았다. 한 판에 100년의 시간이 왔다 갔다 하는 큰 게임도 있었고, 10년, 20년의 시간이 왔다갔다 하는 작은 판의 게임도 많이 존재했다. 그곳에서 오로지 살겠다는 의지로 밤낮없이 게임에 임한 나는 카지노라면 머리가 아려올 정도로 징했지만, 또다시 발길을 옮기는 곳은 카지노였다. 이번도 여전히 살기 위해서였다.
죽음이 점점 멀어지니, 이제는 다가오는 게 너무나 큰 두려움이 되는 것 같았다.
자연스레 카지노 안으로 들어서서 2층으로 향했다. 조금 더 큰 게임을 여는 곳이었다. 이 곳에서는 1000년 이상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했고, 그에 비해 나는 아주 초라했지만 게임 실력만큼은 가장 볼만한 실력이었다. 비어있는 테이블 중 하나를 향했다. 의자에 앉으니,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게임은 단순하고, 어지럽지 않은 게 좋았다. 주변에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몰렸지만, 그 누구도 나의 앞에 앉아 게임 하기를 꺼렸다.
그때였다. 테이블 주변 사람들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진건.
![[워너원/강다니엘] In Time (1: 사람을 죽였다.) | 인스티즈](//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7/06/12/3/77642b0e231f5cc8a164412523f323d6.gif)
"자리가 남은건가."
검은색의 정장은 여기에 온 사람들과는 다르게 많이 심플했지만, 어쩌면 다른 옷들보다도 더 빛나는 것 같았다. 그의 등장에 테이블 주변 사람들이 얼어붙은듯 입을 닫았고, 무미건조하게 나를 바라보던 그가 나의 반대편 자리에 앉았다. 멀리서 바라만 보던 그와 게임을 함께 하는 건 당연시 한번쯤 상상해 보았지만, 이렇게나 빠르게 경험을 할 줄이야 몰랐다. 마른침이 목을 건조하게 만들었다.
그의 실력은, 이구역에서 가장 큰 이곳 카지노에서도 유명했다. 어쩌면, 모르는 게 더 이상할 정도로. 그는 항상 2층에 머물러 있었고, 그와 함께한 게임에서 죽는 사람이 꽤나 많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런 그와 단 둘이 게임을 해야하는 상황이라니, 목이 마르는 것은 물론. 타들어 가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와 그에게 닿았고, 그는 아무렇지 않은듯 딜러가 놓아준 양주 한잔을 조금 들이켰다. 목을 축인 그가 나와 눈을 느릿하게 맞췄다.
"이름이?"
"…전 성이름."
"…전 강다니엘이에요."
옅은 웃음을 지으며 턱을 괴던 그가 자신의 하얀 와이셔츠 소매 단추를 풀어 걷고 책상 밑으로 손목을 넣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진 화면에 150년이 띄워졌다. 남자가 나를 바라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나의 차례라는 무언의 이야기였다. 손목을 책상 밑으로 넣어, 은색의 기계 밑에 가져다댔다. 그와 같은 150년을 넣었다. 팔목에 10년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이겨야 한다, 이겨야 했다.
게임은 지체없이 시작했다. 테이블 주변에는 아까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붙어 바라보고 있었고, 모두들 한손에는 양주와 와인등을 들고있었다. 여러 사람의 향수냄새 덕에 머리가 어질거리는 것 같았다. 긴장되는 탓에 옆에 놓여진 양주를 꽤나 자주 홀짝거린 게 탓이었을까. 게임 중반부터 정신이 조금씩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붉게 달아오른 것 같은 볼을 진정시키려 손으로 만질수록 따듯한 몸의 체온때문인지 몸이 나른해졌다. 눈꺼풀에 힘이 풀려서인지 눈이 감기는 속도가 느릿해졌다.
그의 눈을 슬쩍 바라보고 있을때, 그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워너원/강다니엘] In Time (1: 사람을 죽였다.)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7/05/23/21/4bfc14d6db02b750bb13d99f74e705d2.gif)
"…다이."
그가 자신의 손에 쥐어져있던 카드를 던졌다. 흩어진 카드는 누가 보아도 완벽하기 짝이 없었다. 당황스러움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면, 딜러가 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시간 가져가세요."
어영부영 손목을 기계밑에 넣으니, 팔목에 새겨진 10년 남짓한 시간이 310년으로 올랐다. 주변에 서서 게임을 바라보던 사람들도 꽤나 놀란 눈치였다. 살얼음판을 걷듯, 조용해졌다. 그도 그럴듯 싶었다. 단 한번도 게임에서 진적이 없던 사람이, 저렇게나 좋은 카드를 두고 게임 포기를 외치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살았다는 안도감도 들었지만, 약간의 반항심이 생긴 것 같았다. 내가 우스워서 게임 포기를 외친건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빤히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와이셔츠 소매를 정리하던 그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췄다.
"이름이 이름씨라고 했던가."
"…."
"게임 재밌었고,…다시는 안봤으면 좋겠네요."
옅은 웃음을 지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을 지나쳐 시야에서 사라졌다. 분했다. 이겼지만 진 기분이 너무나 강하게 밀려왔다. 멍하니 앉아있으면 테이블 주위로 몰려있던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흩어졌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불편한 구두를 벗어 손에 들고서 카지노를 빠져나왔다. 분했다. 분하다는 표현으로는 표현이 안될만큼이나, 분했다. 그를 찾아야했다. 찾아서 뺨을 세게 때리던지, 동정의 의미로 받았던 시간을 다시 돌려주던지. 무언가 하나는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카지노를 빠져나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그를 찾았다. 이내 건물 밖 분수대를 지나치는 그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술기운은 깬지 오래였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쳐지나가며 붉어졌던 볼을 죽이는데에 가담했다. 맨발로 거리를 뛰어다니니, 약간의 생채기가 생긴듯 따가웠지만 그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고 그를 따라잡았다. 그의 정장 소매를 잡고 당기자, 그의 몸이 반쯤 나에게로 돌아갔다. 약간 놀란듯한 그가 나의 얼굴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뭐하는 거죠?"
"…뭘요?"
"다이 외친 거 왜그런거에요?"
"…아."
"제가, 불쌍해서 그랬어요?"
그는 나의 말에 집중하지 않는듯, 나를 위아래로 느릿하게 훑었다. 나를 무시하는 게 분명했다. 눈물이 비집고 나오는 것 같았다. 동정을 받으려고 온 게 아닌데. 그들의 눈에는 여전히 내가 불쌍하고, 약해보이는 것 같았다. 나를 이렇게나 한없이 나약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에 강한 화가 치밀었다.
"대답해!"
"발에 상처났을 것 같은데."
"…뭐?"
"불쌍해서, 싫어서 그런 거 아닌데. 그쪽 실력이지."
"…."
![[워너원/강다니엘] In Time (1: 사람을 죽였다.)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7/06/04/11/c52a55d8a1be489fbbea0cdd8b1a84ad.gif)
"…상대방을 유혹하는 것도 하나의 실력이라고 생각해서."
술기운이 다시 올라온건가, 볼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영화 인타임 아시나요? 소재가 너무 좋아서 가져와서 글 좀 써봤어요..
여기서는 시간=돈=목숨 이에요.
1000년을 살았던 5000년을 살았던 모든 사람은 외향적으로 25살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요!
(갓난애기~24살까지는 팔목에 시간이 없지만 25살이 되면 그때부터 팔목에 시간이 새겨지며 시간으로 목숨을 부지해요!)
각각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간이 다하면 그자리에서 바로 죽습니다 T^T...
그리고 여기서는 보수적인 사회 느낌보다는 조금 개방적인 사회 느낌이라고 바라봐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혹시라도 중간에 오타가 있으면 넓은 아량으로 넘어가주세욧.....!
-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