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어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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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닿은 쇠붙이와 나무의 촉감이 차갑다는 것을 느낄 새도 없었다. 흥수에 의해 밀쳐진 내가 힘없이 뒤로 밀려나 엉망으로 쌓여 있던 책상더미에 부딪쳤고,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책상들은 충격에 의해 밑으로 무너져 내렸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책상들 중 하나가 다리를 강타했고, 뼈가 부러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정신을 놓아버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팠다. 당황한 흥수의 표정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나의 의식 속은 온통 암흑이었다. 아니, 암흑도 아니었다. 그냥 무(無). 아무것도 없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넓고 어지러운 공간에 나 혼자만 있었다. 서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둥둥 부유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갑자기 구역질이 나왔다. 발을 땅에 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한 몫 한 것 같다. 터져 나오는 헛구역질을 간신히 참으며 생각했다. 박흥수. 박흥수.
박흥수는 고남순에게 무엇일까.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거꾸로 뒤집어서. 고남순은 박흥수에게 무엇일까. 다리를 으스러뜨려 꿈을 짓밟은 나쁜 새끼? 배신한 친구? 그것도 아니면 친구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무책임하게 되돌아 선, 세상에 둘도 없을 빌어먹을 놈? 여러 가지의 답이 튀어나왔다. 그 중에 어느 하나라고 꼭 집어 말 할 수 없었다. 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고남순은 배신자였고, 빌어먹을 놈이었으며, 겁쟁이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박흥수는 고남순에게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정답을 알 수 없었는데 어느 순간 한 단어가 암흑 속에서 생겨났다. 영원한 친구. 하지만 내 의식이 그 단어를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듯 금세 어둠에 가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또 한 단어가 생겨났다. 언제나 미안한 녀석. 이번에는 암흑이 그것을 가리는 시간이 조금 더 길었다. 그러나 결국 아까와 같이 사라졌다. 무엇일까, 고남순에게 박흥수란.
한참을 기다려도 단어가 생겨나지 않아 포기하고 눈을 감으려 했다. 바로 그 때, 한 단어가 기분 나쁘게 생겼다. 처음에는 내 주먹만해서 알아 볼 수 없던 글씨가 점점 커져 그 모습을 분명히 드러냈다. '내 것'. 숨이 탁 트이는 동시에, 목구멍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 단어 역시도 사라지겠지─ 하고 생각하며 기다렸지만 내 것이라는 글자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수가 늘어나 결국에는 내 숨통마저 조였다. 내 것. 고남순에게 박흥수란 '내 것' 이었다. 아무에게도 넘겨줄 수 없는, 오직 고남순만의 것. 그것을 인정하고 나자 기분 나쁠 만큼 머리가 개운해졌다. 앤드루 와일즈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한 순간 느낀 기분도 지금의 내 기분과는 견줄 수 없을 것이다. 어지럽던 것이 한 번에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모든 것은 명확해졌다.
고남순은, 박흥수에게, 집착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내가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하긴, 집착하고 있지 않다면 이런 일을 벌일 이유도 없었다. 사랑? 웃기지도 않는다. 동정이나 연민, 죄책감이라면 모를까 사랑이란 감정은 박흥수와 나 사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존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그 때를 추억할 여유따위는 내게 없었다. 아아, 그래서 그런 기분이 들었던 거였군. 한 번 인정을 하고 나자 일이 손쉽게 진행되었다. 고남순은 박흥수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집착한다. 고남순이 해야 할 일은? 정해진 답은 단 하나였다. 다른 답안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고남순은 박흥수를 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다. 설령 그것이 고남순과 박흥수를 다치게 만들더라도.
붙잡는 것이야 쉬웠다. 다리를 으스러뜨린 이전처럼, 이번엔 반대쪽 다리를 으스러뜨려도 괜찮았다. 그것이 아니라면 팔이나 손목도 괜찮을 것이다. 학교? 자퇴하면 된다. 어차피 지금까지도 알바를 전전하며 살아왔고, 성인이 된다면 막노동 쪽도 생각해 볼 만한 일이었다. 정말 할 일이 없다면 조직에 들어가 어깨가 되는 것도 괜찮았다. 미래가 어떻게 되든, 박흥수가 고남순 옆에만 있으면 완벽했다. 그리고 꼭 박흥수를 다치게 만들어서 붙잡을 필요는 없었다. 박흥수에 의해 고남순이 크게 다치게 된다면, 박흥수는 죄책감에 못 이겨 내 옆에 있을 것이 뻔했다. 박흥수가 얼굴에 가면을 쓰고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면, 그 가면을 부숴 버리면 된다. 본래의 약한 박흥수, 여린 박흥수가 드러나게. 여린 박흥수는 자신 때문에 고남순이 다쳤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절대로 고남순을 벗어나지 못 할 것이다. 절대로.
이것은 절호의 기회였다. 아직 깨닫고 있지 않은 머리를 위해 몸이 자동으로 움직인 것일지도 몰랐다. 기회는 왔고, 나는 기회를 붙잡았다. 이것으로 인해 박흥수는 고남순에게 묶이게 되었다. 박흥수는 고남순의 것이다. 고남순만의 것이다. 다른 그 어떤 예외도 용납할 수 없다. 영악한 내 머리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시뮬레이션 해 보았다. 박흥수는 지금 어떻게든 창고를 탈출해서 나를 업고 달리는 중이겠지. 아니면 수위가 박흥수와 나를 발견하고 문을 열어줄 지도 몰랐다. 어쨌든 박흥수는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난 꽤 오랫동안 누워 있겠지. 하루? 일주일? 한 달? 가늠할 수 없었다. 얼마나 잠들어 있을지는 상관 없었다. 길면 길수록 좋았다. 박흥수는 그 시간 동안 자신을 자책하며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질 테니까.
정 선생님과 강 선생님, 변기덕, 송하경을 비롯한 많은 아이들이 '고회장, 다쳤다며!' 를 외치며 병실로 몰려올 것이고, 박흥수는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밀려나겠지. 그리고 또다시 자신을 책망. 끝없는 자책, 자책, 자책! 그것은 아마 내가 깨어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깨어난 후에는 자연히 날 피할 것이다. 박흥수라면 그럴 것이라고 상상되었다. 날 밀어내고 피하는 박흥수를 내게 묶어두는 방법은 상처를 다시 후벼 파는 수밖에 없었다. 박흥수가 고통스러워 하면 할수록, 그는 나에게 더욱 강하게 묶이겠지. 완벽하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박흥수는 고남순만의 것이다. 그것은 나의 머리가 굵어지기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미래 역시도 같을 것이다.
박흥수. 넌 나를 벗어날 수 없어.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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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흥수남순은 좋은 거예요
여러분 집착집착은 좋은 거예요
집착하는 남순이 신선하고 좋지 않음? 전 좋음ㅇㅇㅇㅇ 그러니 누가 뭐래도 난 여러분께 크고 아름다운 흥수남순 남순이 집착물 빅똥을 안겨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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