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준비물 없고 전달 사항도 없다. 다들 집에 가. 아 참. 백현아, 너는 신청했던 특기적성 접수 됐고 다섯 시까지 음악실로 가면 된다~”
익숙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에 올리는 소리와 함께 책상 위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들어올렸다. 오늘따라 길었던 수업이 모두 끝났다.
여느 때처럼 평범한 하루였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그런데 그날따라 머리가 살살 아팠다. 다행히 선생님은 짧은 인삿말과 함께 우리를 교실 밖으로 쉬이 내보내 주셨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항상 같이 가던 친구가 오늘은 학교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픈데 혼자 있다는 게 더 외로웠다.
집에 가면 엄마도 안 계실 텐데, 하고 터벅터벅 걸었다. 우리 집은 학교에서 가까웠다. 멍하게 걷다 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아파트 입구를 따라 들어갔다.
고장.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다 엘리베이터 문 앞에 붙은 종이와 짧게 적힌 문구를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뭔 놈의 엘리베이터가 저렇게 자주 고장이 나는 건지.
그날따라 안 그래도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엘리베이터마저 나를 돕지 않는구나 싶었다.
안 그래도 가방이 무거운데 어떻게 올라가지 싶어 막막했다. 난간에 기대 힘 없이 서 있다 위에서 들리는 인기척을 듣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사람이 내려왔다. 그런데 아는 얼굴.
역시나 백현이었다.
요즘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쓸 경황이 없었다.
원래 아는 척도 잘 하지 않는 사이였다. 백현을 한번 쳐다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백현도 그냥 지나치는 듯 했다. 그런데 내 팔을 건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렸다.
“야.”
이런 식으로 먼저 말을 걸어오는 건 처음이었다.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백현의 눈을 마주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눈이 참 예뻤다. 끝이 살짝 내려간 눈꼬리도. 그리고 그 속의 까만 눈도.
“너 어디 아파?”
백현이 작은 소리로 묻는다. 의외였다. 그냥 지나갈 줄 알았는데.
평소에는 인사도 하지 않고 지나치던 검은 눈동자가 내 얼굴을 가득 담았다. 걱정 어린 눈빛. 피아노 건반 위에서 춤을 추던 예쁜 손은 내 팔을 어색하게 붙잡고 있었다.
이성과 이런 식으로 가까이 있어보는 게 생소해서 얼굴이 발개졌다. 하지만 이미 열로 인해 얼굴은 충분히 달아올라 있어 티가 나지 않았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괜찮아. 나 집에 갈게. 안녕.”
짧게 한 마디를 내뱉고는 백현을 지나쳐 계단 위로 사라지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몸이 무거웠다. 백현이 나를 붙잡았다. 붙잡더니 한참을 망설였다.
슬슬 짜증이 나려고 했다. 백현이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살짝 달싹거렸다.
“데려다 줄까?”
백현이 망설이다 내뱉은 말은 굉장히 뜻밖이었다.
당황했다. 어떻게 하지, 뭐라고 해야 하지. 생각하며 잠깐 멈춰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를 쳐다보던 백현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갑자기 손에 들려 있던 가방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가벼워진 것뿐만 아니라 아예 사라진 듯했다. 손을 쳐다봤다. 비어 있다.
가방은 어디로 간 거지, 하고 생각하며 백현을 쳐다보았다.
백현은 이미 네 칸 위 계단에 서 있었다. 백현의 손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얀 손과 대비되는 무채색의 무거운 내 가방.
“뭐 하냐. 가자. 가방 들어 줄게.”
한 마디를 내뱉고는 자기가 먼저 성큼성큼 앞장선다. 머리가 아파 제대로 따라갈 수 없어 천천히 걸었다. 백현이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뛰어내려와 나와 발걸음 속도를 맞춰 왔다. 말 없이 함께 올라갓다.
계단의 무거운 공기를 닮아가는 듯 우리의 침묵도 무겁게 흘렀다.
5층, 우리 집 앞에 다 왔다. 백현이 가방을 건네준다. 한 손을 내밀어 가방을 받았다.
“들어가.”
문을 열려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백현은 아직 가지 않았다. 손이 나를 향해 어색하게 뻗어 있다. 저 손은 뭐지, 하는 생각을 담아 백현을 빤히 응시했다.
나를 쳐다보던 백현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갈게, 하는 소리와 함께 백현의 뒷모습이 계단 아래로 천천히 사라졌다.
집에 들어왔다. 머리가 아파 아무 것도 하기 싫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방 안을 이리저리 살폈다. 피곤했다. 자고 싶었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 눈을 감으려는 순간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짧은 바늘 하나와 긴 바늘 하나가 표시하고 있는 시간은 5시 26분.
문득 방금 전에 집 앞까지 나를 데려다 준 백현이 생각났다. 학교에서 나오기 전에 들은 선생님의 목소리도 생각났다.
백현은 5시까지 음악실로 가야 했다.
**
이튿날은 날씨가 맑았다. 왠지 알 수 없게 우중충한 내 마음과는 다르게 햇빛이 잘 드는 어느 화창한 날의 수업 시간이었다.
자리를 바꿔서 내 짝이었던 백현은 1분단 첫째 줄에 앉아 있었다. 내 자리는 3분단 넷째 줄. 아쉽게도 백현과 자리가 꽤 멀었다. 아니, 왜 아쉬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필기를 하려고 공책을 들여다봤다. 하얀 종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문득 이 종이 위에서 손을 슥슥 움직이는 나를 보던 백현이 손이 가만히 있지를 못하네, 라고 했던 게 생각났다. 왜 자꾸 변백현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친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멍하게 수업을 듣다 창 밖을 응시했다. 그러다 백현의 자리 쪽으로 눈길이 갔다. 우연이었다.
백현은 책상 위의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움직임에 미동이 없었다.그러다가 백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걸리적거리는지 앞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띤다. 수학 문제를 푸는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답을 찾았는지 표정이 밝아진다. 백현이 종이 위에 뭔가를 써내려간다.
그러고 보니 백현이 제일 잘 하는 과목이 수학이었다. 나는 수학 잘 하는 남자가 그렇게 좋더라, 하던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몰랐었는데 저렇게 보니까 좀 멋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 모르겠다.
창틀 사이로 햇볕이 반짝였다. 책상으로 고개를 숙인 채 종이 위에서 손을 놀리는 백현의 작은 뒤통수에서도 빛이 내린다. 백현은 정갈하게 앉아 문제를 풀고 있었고, 나는 그런 백현을 쳐다보다 멍하게 공상에 잠기기도 하고, 계속 그러고 있었다. 수업에는 집중이 되지 않았다. 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백현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백현의 시선이 계속 내 쪽으로 향했다. 눈이 마주쳤다. 백현은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지 상태로 눈을 맞췄다. 어색했다. 창밖을 보는 척하며 시선을 살짝 돌렸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백현과 눈을 마주친다는 건 생각보다 어색한 일이었다. 원래 남자 아이에게는 낯을 많이 가리는 탓도 있고, 백현을 보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해지는 탓도 있었다.
이제쯤이면 그 애가 날 쳐다보고 있지 않겠지, 하는 마음에서 창가를 보고 있던 눈을 백현이 앉아 있는 자리로 살짝 옮겼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도 백현은 그대로였다.
그날 밤 꿈에는 남자 아이 하나가 나왔다.
원래 꿈을 잘 꾸지 않기 때문에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어쩌다 한 번 있을 법한. 게다가 사람이 나온다는 건 더더욱 없는 일이었다.
누군지 궁금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하얗고, 눈이 맑았다. 속눈썹도 무척 길었다. 콧대도 은근히 날이 서 있었다. 익숙한 얼굴, 익숙한 느낌. 분명 내가 아는 아이였다.
그런데 누구지.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아이가 어딘가에 앉았다. 손을 올린다. 뭘 하나 싶어서 가만히 지켜봤다.
아이의 손이 익숙한 곡선을 그려낸다. 이내 소리가 들렸다.
그 애는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역시 아는 곡이었다. 내가 아는 누군가가 자주 연주하던 쇼팽의 왈츠. 부드러운 선율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뒤에서 바라본 머리가 갈색이었다. 때마침 뒤에서 햇빛이 내리쬔다. 머리 한 구석이 빛을 받아 밝게 빛난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장면, 데자뷰.
움직이던 아이의 손이 멎었다. 아이가 건반 위에서 손을 내렸다. 무릎 위에 손을 얹어서 꼼지락거린다. 뒤를 보고 싶은 듯 고개를 움찔움찔한다.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을 느꼈다.
이내 망설이던 아이가 뒤를 돌았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새카만 어둠과 그 속에서 반짝이는 빛을 동시에 담은 눈동자가 나를 또렷이 응시한다. 눈이 마주쳤다.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눈이 나를 응시하다가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휘어진다. 안 그래도 처진 눈꼬리가 더 내려갔다. 그 애는 눈웃음이 예뻤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일어서서 다가오려고 한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듯 아이의 귀가 발갛다.
백현아, 너는 그 날 왜 내 꿈에 나왔을까?
- 첫사랑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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