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두 살의 겨울이었다.
오랜만에 보게 된 음악방송 채널 속에서 수많은 팬들의 환호성을 받고 있는 그 아이는 분명히 변백현이었다.
나는 TV를 잘 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인터넷도 잘 하지 않아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문명과 단절된 상태로 오랫동안 살아왔던 것 같다.
그 사이에 아이가 데뷔를 했다. 연예인이 꿈이라는 얘기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듣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마지막으로 연락했던 동창 친구와의 대화에서도 변백현이 데뷔를 했다는 얘기는 없었었는데.
어쨌든 백현은 지금 연예인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백현은 나와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다. 같은 반도 두 번이나 했었다.
그리고 변백현은 나를 좋아했다.
**
백현은 내가 살던 동네에 살았다. 같은 아파트였다. 거기다 같은 동이기까지 했다. 어찌 보면 기막힌 우연이었다.
나는 5층 502호, 백현은 6층 601호였다.
그 애를 처음 봤던 것은 열두 살이 지나가고 열세 살이 되었던 해 겨울이었다.
전에 살던 사람의 이사로 비워졌던 501호에 나와 동갑인 남자아이 가족이 이사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날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 애를 마주쳤다.
갈색 머리에 피부가 하얗고 눈꼬리가 부드럽게 하향 곡선을 그리며 내려가 있던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백현이 꽤 잘생겼다고 생각했었다. 남자애 치고는 나름대로 예쁘기까지 했다. 매력적인 아이였다.
처음 만났던 날 이후로는 며칠 동안 그 아이를 보지 못했다.
사실 그 아이의 이름이 변백현이었다는 것을 안 것은 기나긴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기 위해 학교에 갔을 때였다.
학교에서 전에는 본 적 없던 얼굴이 우리 반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 이쪽은 서울에서 전학 온 변백현. 앞으로 1년 동안 같이 지내야 하니까 잘 대해주도록 해라. ˝
선생님은 그 아이를 변백현이라고 소개했다.
곱상하게 잘 생긴 데다 성격까지 서글서글했던 백현은 단번에 여자아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학교 내에서 잘 나간다고 소문이 났던 예쁜 여자아이들의 무리는 백현을 항상 옆에 두려고 했다. 백현도 꺼려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백현은 공부까지 잘 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연필을 들고 수학 문제를 정갈하게 풀어나가는 모습에 많은 여자아이들이 백현을 좋아했다.
사실 내가 봐도 조금 멋있기는 했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 백현은 인기가 굉장히 많았다.
백현은 타고난 천성 자체가 밝은 아이였다.
표정은 밝지 않았지만 항상 웃고 있다고 느껴졌고, 누구에게나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다. 장난을 치는 것도 좋아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에는 항상 장난스러운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백현의 장난을 당한 아이들은 아무도 기분나빠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 애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빛 같았던 아이였다.
하지만 반대로 변백현은 조용하고 붙임성이 없는 아이이기도 했다. 한 가지 문제라면 나에게만 그랬다는 것이었긴 하지만.
**
나는 꽤나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피아노를 좋아했다. 검은 건반과 흰 건반의 조화에서 이루어지는 화음이 가슴을 울리는 소리를 너무나도 좋아했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피아노를 배우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았다. 내가 조르고 졸라서 겨우 배우고 있는 것이긴 했지만.
학교 음악 시간에 피아노를 치는 것도 좋아했다.
학교 피아노는 음색이 굉장히 좋았다. 피아노가 좋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음악 시간이나 동아리 연습 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열쇠로 잠궈 두었기 때문에 칠 수 있는 기회는 많이 없었다. 그래서 음악 시간을 기다렸다.
반 친구들은 내가 피아노를 배운다는 사실을 다 알았다. 그 애들은 피아노를 쳐 보라고 항상 시켰고, 나 또한 꺼리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피아노를 쳐 주는 것 또한 좋아헀다.
가장 좋아했던 작곡가는 쇼팽, 가장 즐겨 연주했던 곡도 쇼팽의 곡이었다.
한 번은 혼자 음악실 청소를 하다 피아노가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의자에 앉았다. 조심스럽게 건반을 눌렀다. 도- 레- 하고 소리나는 건반의 울림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조율을 한 지 얼마 안 된 듯한 건반이 폭 하고 매끄러운 건반에 구덩이를 만들어냈다.
복도로 나갔다. 조심스레 주변을 살펴 선생님이 안 계신 것을 확인했다. 다시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건반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연주를 시작했다.
혼자 있는 음악실에서의 연주도 나쁘지 않았다. 나와 피아노, 단 둘만 있는 작은 공간에서 울려퍼지는 소리가 퍽 좋았다. 그날따라 손가락이 뜻대로 잘 움직여 주었다. 신이 나서 평소보다 감정을 실어서 연주했다. 내가 피아노와 혼연일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주 없는 일인데. 오늘따라 운이 좋다.
하지만 다시 청소를 하려고 일어섰을 때, 음악실 문 밖에 서 있던 누군가가 급하게 뛰어가는 것을 보았다.
복도로 나가 뒷모습을 확인했다. 남자 아이였다. 빠르게 뛰어감으로써 주변 공기와 마찰을 일으키던 머리카락이 살짝 날렸다.
햇빛에 반사된 부드러운 머리는 갈색이었던 것 같다. 왠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
그러던 어느 날,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서 백현을 보았다.
백현은 아파트 복도를 지나치다 몇 번 마주쳐서 익숙했던 얼굴을 한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다. 학원 복도로 들어선 백현은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다시 백현을 쳐다보았다. 왜 여기 있는 거지. 묻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안 친했다.
˝ 선생님 잠시만 나갔다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
피아노 선생님은 내 레슨을 해 주다가 백현의 상담을 해 주기 위해 나갔다.
그리고 백현은 그 주부터 피아노를 다니기로 한 모양이었다.
백현은 꾸준히 학원에 나왔다.
처음에 백현이 피아노를 잘 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일까. 솔직히 잘 생긴 데다가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는데 피아노까지 잘 친다면 세상은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백현은 예상과는 다르게 피아노를 꽤 잘 쳤다.
하얗고 고운 손, 내 손보다도 더 예뻤던 손이 건반을 쉴새없이 오가는 모습과 피아노에 잔뜩 집중을 한 백현을 보면서 처음으로 백현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백현이 연주하던 곡은 쇼팽의 왈츠 7번이었다. 백현의 손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피아노에 잔뜩 집중을 한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백현의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곡이었다.
그리고 그 날은 집에 가던 길에 백현을 마주쳤다.
엘리베이터가 고장났던 날이었다. 어쩔 수 없이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다. 계단 위쪽에서 내려오던 백현과 집에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던 내가 마주쳤다.
이런 식으로 마주치는 건 처음이라 당황했다. 잠시 멈췄다.
남자아이에게 낯을 꽤나 많이 가리는 편이었다. 여자들과는 서먹서먹함 없이 잘 지냈으면서도 이상하게 남자만 오면 소극적이 되었다.
백현에게도 그 습성은 똑같이 적용되었고, 성격이 밝고 쾌활하다고 생각했던 백현도 이상하게 내게는 말을 잘 붙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반에 학원까지 같이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대화는 물론이고 아는 척, 심지어는 인사조차 잘 하지 않았다. 밖에서 마주치면 눈을 한 번 맞추고, 누군가가 먼저 시선을 피한다. 그리고 지나친다. 그게 다였다.
그 때문인지 백현의 얼굴을 정면으로 봤던 것은 거의 처음이었던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어색함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 백현의 맑은 눈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백현의 눈은 참 까맸다. 나랑 같은 색의 눈인데 왜 저 눈은 예쁘고, 내 눈은 저렇지 않은 거지. 하고 잠시 생각했다.
그 눈의 주인인 백현이 내 눈을 잠시 마주하다가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백현이 도망치듯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백현의 윤곽은 드러났다. 언뜻 보인 백현의 귀가 살짝 붉어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 첫사랑 01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 ![[EXO/백현] 첫사랑 01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0/7/7/077b81f3c7a03e45c50c92c2cd2d49b7.png)
신입이 출근때마다 아메리카노 손에 들고 출근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