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선 프롤로그가 있습니다.
#남사친 박우진
01. 박우진은 뭐랄까, 이상하게 사람 설레게 만드는 행동들을 참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할 때가 많았다. 나는 그게 의도적인 것도 아니고 그냥, 그냥 박우진 특유의 분위기와 말투가 섞여 나오는 거라는 걸 진작에 초등학교 때 알았지만. 솔직히 내가 박우진을 좋아하게 된 이유 중 팔 할은 이것 때문일 거다. 박우진은 쓸데없이 다정하고, 또 쓸데없이 까칠했다. 초등학교 때였다. 유일하게 박우진과 같은 반이 아닌 학년이었던 4학년. 한창 두 발 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한 나는 진작에 두 발 자전거를 뗀 박우진과 함께 주말 운동장에 나갔다. 아, 물론 박우진은 반강제적으로 이모에게 등쌀이 밀려 한참 재미있던 게임을 끊고 나온 터라 귀찮음과 짜증이 잔뜩 묻어나 나는 그저 그 옆에서 조용히 내 몸집만 한 자전거를 탈탈 끌고 있었다. 한참을 뱅뱅 걷기만 하다 같은 반이었던 남자애들 무리와 눈이 마주쳤다. 왜, 그 있지 않는가. 그 나이대 애들은 뭐든 이름 가지고 꼬투리를 잡고 놀려대는 걸 즐기고..., 뭐 나도 그 대상들 중 하나였을 뿐이고. 아니나 다를까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것들은 간헐적으로 웃음을 터뜨려가며 크게 놀려대기 시작했다. 아주 야무지게. 옆에 박우진도 있는데... 괜히 쪽팔림이 몰려와 입술을 꽉 깨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조용히 지나가자며 박우진의 소매 끝을 잡아당기려는 찰나 박우진은 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놀라서 고개를 들어 확인한 박우진의 얼굴은 무서우리만치 날카로웠다. 그리고 나를 뒤로하고서 그 애들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잔뜩 화가 난 말투로, 이제 서서히 고쳐지기 시작한 사투리를 마구 내뱉으며, 자기보다도 족히 커 보이는 애들에게 이리저리 화를 냈다. 벌써 7년이 지난 얘기라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니들이 뭔데 애 이름 가지고 장난을 치냐,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남자애들이 조용히 물러가고, 박우진은 얼이 빠진 채로 서 있는 내게로 와서 자전거를 향해 턱짓했다. " 타라. " " 응? " " 배운다며, 자전거. " 여전히 굳은 표정의 박우진에게 살짝 쫀 채로 주섬주섬 자전거 위로 올라타자 박우진은 자전거 꼬리를 잡더니 훈수를 두듯이 타박했다. " 바보같이 놀리는 걸 듣고만 있... 뭐 하나, 니. " " 야..., 무서워 이거. " " 페달을 빨리빨리 돌리라고. 진짜 바보가. " 결국 구박으로 끝나긴 했지만. 그 뒤로도 박우진은 땀이 줄줄 날 정도로 내 자전거 뒤를 쫓았다. 그리고 아마 이 날이, 처음으로 박우진이 화난 걸 본 날일거다. 이렇게 기억에 남는 걸 보면. #남사친 박우진 중학생이 돼서야 박우진은 남들보다 조금 작던 키를 넘어 평균 이상의 키로 자랐다. 도토리를 문 것처럼 토실하던 양 볼도 젖살이 빠져 날렵한 턱 선을 드러냈다. 박우진이 볼 때의 나는 어땠는지 몰라도, 나도 이맘때 다이어트고 화장이고 많은 걸 알아가면서 나름의 변화를 거쳤다. 그래봤자 호박에 줄 하나 직 긋는 셈이었겠지만. 박우진은 아침마다 늘 자신보다 조금 느린 내 등교 준비를 지켜봤다. 어느 날은 느긋하게 우리 집으로 건너와 우리 엄마와 아침을 같이 먹기도 했고, 어느 날은 그날처럼 덜 말린 머리를 하고 허겁지겁 달려와서는 아직 기를 쓰고 화장대 앞에 바짝 붙어있는 나를 보고서는 허탈하게 웃고는 내 드라이기를 빌려 머리를 말리며 그런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냐. " " 야, 말 걸지 마. 나 지금 아라... " " 그려도 못생긴 게. " " 죽어, 진짜. " 어느새 보송보송 해진 머리를 두어 번 털며 화장대 옆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턱을 괴고 이쪽을 보는 박우진에 통 집중이 되질 않아, 나가 있으라며 손을 휘휘 내저어도 그저 눈썹을 한 번 꿈틀, 해 보일 뿐 요지부동이었다. " 아침부터 뭔 지랄이가. " " 나댄다 또. 내가 하겠다는데. " " 그니까 그걸 왜 하는데. " " ...어? " 머리를 쓱쓱 빗고 나서야 시계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조금의 여유가 있었다. 화장대 의자에 앉은 채로 박우진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게, 내가 왜 아침마다..., " ...남자친구 생기면 좋잖아. " " 뭐? " 쭈뼛쭈뼛 내뱉은 말에 박우진은 잠시 황당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허리까지 접어가며 크게도 웃어댔다. 괜히 얼굴이 벌게진 나는 박우진의 팔 언저리를 따갑게 때리며 성질을 냈다. " 뭘 웃어, 진짜. 짜증 나게... " " 아, 아, 가스나 손만 더럽게 맵다, 암튼. " " ........ " " 야, 김여주. " " ........ " " ...남자친구 생기면 뭐가 그렇게 하고 싶은데. " 그때의 난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라 말을 좀 더듬었던 것도 같다. 눈을 굴려가며 조금 고민을 하다, 띄엄띄엄 내뱉었다. 어..., 그냥 학교도 같이 가고... 영화도 보고, 밥도... 시험기간에는 도서관도 같이 갔다가, 카페도 같이 가보고. 말하다 보니 괜히 설레서 멍청한 웃음을 지으며 생각나는 것들을 하나둘씩 다 내뱉다 흐름을 깨는 박우진의 코웃음에 입을 다물었다. 박우진은 어느새 상체를 삐딱하게 뒤로 기운 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웃기네. " " ...어? " " 같이 등하교 하고, 영화 보고, 밥 먹고, 카페 가고, 도서관 가고. " " ........... " " 지금 내랑 하는 거랑 다를 것도 없네. " 나와라, 학교 늦겠네. 박우진은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제 가방을 챙겨 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양 한참을 붙박이처럼 화장대 의자에 앉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가 아마, 박우진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낀 시발점이었을 테니까.더보기 |
다음 화 부터는 18살, 현재의 우진이가 나옵니다! 읽어주신 분들 전부 감사드립니다❤ 댓글이 큰 힘이 됐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