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랬다. 차가운 인상에 누구도 쉬이 접근하지 못했던 나에게 방실거리며 인사를 건네오던 그 얼굴.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았고, 볼 때 마다 새롭던 그 곱상한 얼굴. 웃음기가 서려 있으면서도 툭 치면 울망울망 눈물을 떨굴 것 같았던 그의 밤색 눈동자가 좋았다. 말수가 적었던 내가 맘편히 입을 열 수 있도록 해주었던 깊은 눈동자가. 정말로 좋았다. 내가 이만큼이나 너를 소중히 생각하고 있어, 라고 말하고 있었기에. 굳이 입을 열어 말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기에.
그래서 더욱 배신감이 컸을는지도 모른다. 너 만큼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게 등을 돌려도 너만큼은…절대로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흥수 X 남순
눈 녹듯이
남순은 테이블 보에 떨어진 빵가루를 손에 담았다. 이렇게 소란스러운 교실에서 반나절, 떠들썩한 카페에서 반나절을 보내는 것도 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테이블을 닦던 손이 뚝 멈추었다. 문득 야자를 빼겠다고 호기롭게 말했을 때 저를 말없이 응시하던 세찬의 눈빛이 떠올랐다. 왜? 아르바이트 해야해서요. 그렇게까지 해야겠냐. 네. 세찬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남순은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다. 아무도 없는 차고 텅 빈 방은 언제나 절망만을 안겨주었으니까. 혼자 남겨졌다는 외로움이, 제 몸이 움직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적막한 공기가, 소름끼치도록 싫었으니까.
“ ㅅ…고남순! ”
퍼뜩 놀란 남순이 어깨를 떨었다. 네? 카운터에 서있던 미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뭘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 이리 와서 주문 받아. 남순은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손을 닦아내고 카운터에 섰다. 딸랑. 때맞춰 울리는 작은 종소리와 함께 남순이 고개를 숙였다.
“ 어서오세요. 따뜻한 카페베…ㄴ… ”
남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 끝을 흐리는 알바생에 고개를 들어올린 남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박흥수…. 맞닿은 둘의 시선에 왁자지껄한 카페 안이 싸하게 가라 앉는 것 같았다. 흥수는 고개를 돌려 남순의 시선을 피하고 천천히 카운터로 걸어왔다. 남순이 여전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입을 열었다.
“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
“ …… ”
카운터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 앉았다. 남순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흥수가 그를 훑어 보았다. 어느 것으로 드릴까요. 물음표가 아닌 마침표를 찍은 것 같은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흥수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걷고 말없이 그의 눈을 응시했다. …카페모카. 다시 서로의 시선이 끈질기게 얽혔다. 사이즈는. 레귤러. 먼저 시선을 돌린 남순이 손을 들어 포스를 찍었다. …4800원 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지폐를 받아든 그가 테이블 위로 동전과 무선 벨을 올려 놓으며 말했다. 흥수의 손이 무선 벨을 들어 올린다. 남순은 미련 없이 돌아선 뒷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 야. 고남순. ”
주위를 두리번대며 눈치를 보던 수정이 그에게 다가온다. 남순이 의아한 눈으로 수정을 내려보았다. 수정은 흥수와 남순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아는 사이야? 가만히 입술을 씹던 남순이 수정의 시선을 피했다. …아니. 수정이 의심스럽다는 듯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맞다, 참. 손뼉을 치는 소리에 남순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왜. 수정은 저만치 떨어져있는 테이블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 저기 저 아저씨들. 주의 줘야 되는 거 아니야? ”
수정의 시선 끝을 따라가자 인상이 썩 좋지 않은 두 남자가 소리 높여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태 넋을 놓고 있느라 눈치채지 못했던 듯 싶다. 남순의 눈이 찬찬히 카페를 훑었다. 여기저기서 남자들이 앉은 테이블을 흘기며 수군대고 있던 찰나,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커플이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수정이 허릿춤에 손을 올리며 씩씩댔다. 커피에 침이라도 뱉을걸 그랬나, 확. 남순이 한숨을 푹 내쉬고 발걸음을 뗐다. 헐. 고남순! 내가 할게! 내가 그냥 혼쭐을 내준다니까? 남순은 쫑알대는 수정을 돌아보며 픽 웃었다. 아서라. 그렇게 해가지고 어디 겁이나 먹겠냐. 길다란 다리가 성큼성큼 테이블로 다가섰다. 카페 내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린다. 테이블 옆에 길다란 그림자가 드리우자 서서히 큰 웃음소리가 멎었다.
“ 뭐야? ”
“ 손님. 죄송하지만 목소리를 좀 낮춰주셨으면 합니다. ”
“ 내가 내 맘대로 떠들지도 못하나. 내 입 갖고 떠들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세요. ”
“ 다른 손님들에게 피해가… ”
“ 아니 근데 이 새끼가, ”
“ 야. 그만 해라 그만. ”
머리를 세운 남자가 사납게 생긴 제 일행의 어깨를 잡아 내렸다. 의외의 반응에 남순이 눈을 깜빡였다. 남자는 남순을 위아래로 훑으며 조소를 흘렸다. 조용히 있어 달라는데 뭐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고. 비아냥대는 남자의 말투에도 남순은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했다. 사나운 인상을 가진 남자와 시선을 주고받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주의 하겠습니다. 남자의 말에 남순은 허리를 숙였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이윽고 그가 카운터를 향해 몸을 돌린 찰나, 남자의 목소리가 카페를 울렸다.
“ 아 시발. 이거 뭐야! ”
다시 모든 시선이 테이블에 꽂혔다. 침묵이 맴돌았던 카페가 웅성이는 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커피를 받아 자신의 테이블에 앉은 흥수가 남순을 응시했다.
“ 에이 시발 내가 역겨우려니까. 야, 거기 기집애 같은 새끼야. ”
“ …… ”
“ 말 못 들어? 너 이리 와 보라고. ”
남순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예 손님. 저를 내려보는 무감흥한 얼굴에 남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쾅. 의자가 넘어가는 소리에 놀란 듯 다른 테이블에서 비명이 울렸다. 머리를 세운 남자는 한 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머리카락을 들어 올려 보였다.
“ 이거 보이냐? ”
“ 커피 내리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
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 미영이 놀라서 달려 나왔다. 남자는 픽 웃음을 흘린 뒤 머리카락을 남순에 얼굴에 가져다 댔다. 남순은 말 없이 눈을 감았다. 입술을 꾹 깨물며 주먹에 힘을 주었다. 남자는 머리카락으로 남순의 볼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남순의 눈가가 파들파들 떨렸다.
“ 어떠냐? 이게 니가 마시는 커피에 들어가 있었다고 생각을 해 보라고. 아~ 엿 같네 진짜. ”
“ 새로 가져다 드리겠… ”
“ 새로? 시발 더러워서 안 먹어. 니가 마셔볼래? 그럼 그냥 넘어가 줄게. ”
남자가 피실피실 웃으며 컵을 들었다. 남순의 유니폼에 뜨거운 커피가 끼얹어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흰 유니폼 와이셔츠가 갈색으로 물들어 살에 들러 붙었다. 화를 꾹 눌러 담고 있던 남순이 서서히 눈을 치켜 떴다.
“ 노려봐? 노려보면 니가 어쩔 건ㄷ…악! ”
일순간 남자의 고개가 팩 꺾였다. 카페 여기저기서 탄성이 튀어 나온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남순의 눈이 크게 뜨였다. 깊은 밤색 눈동자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흥수를 담았다. 이 새끼가! 맞은 편에 앉아있던 일행이 흥수에게 주먹을 뻗었다. 흥수는 남자의 팔을 잡아 꺾은 뒤 옆구리를 짓이겼다. 억! 사나운 인상이 의자 옆으로 쓰러지고, 머리를 세운 남자가 바닥으로 고꾸라진 몸뚱이를 일으키며 욕을 내뱉었다. 흥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남자의 배를 걷어 찼다. 차게 얼어붙은 흥수의 눈이 쓰러진 두 남자를 훑는다.
“ 넌 뭐야, 이 새…윽! ”
“ 나? 이 새끼 형인데. ”
흥수의 말에 남순이 퍼뜩 고개를 치켜 들었다.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 애꿎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겹쳐 보였다. 그가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 쓴 저를 구하러 달려왔던 때가. '제가 형인데요.' 낮게 울리는 그 듬직한 목소리가, 눈물나게 그리웠던 뒷모습이. 겹쳐보였다.
* * * * *
“ …… ”
“ …… ”
“ 왜 그랬어. ”
오랜 침묵을 깨고 남순이 입을 열었다. 계단에 걸터 앉은 두 실루엣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흥수가 시선을 앞에 고정한 채 툭 내뱉었다. 뭘.
“ 신경 끄겠다면서. ”
“ …… ”
“ 다리 아작내놓고 도망간 비겁한 새끼. 다신 엮이기 싫다면서. ”
“ 그럼, ”
남순이 고개를 돌려 흥수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 그럼.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라고? ”
“ …… ”
흥수가 딱딱하게 굳은 커피 자국을 흘겨보며 작게 중얼댔다. …시발. 남순의 시선이 다시 앞을 향한다. 또 다시 짙은 침묵이 이어졌다. 하. 뽀얀 입김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 모양새가 마치 종잡을 수 없는 서로의 속마음 같아서, 괜시리 가슴이 시큰거렸다. 깊은 한숨을 내쉰 흥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남순이 입을 열었다.
“ …그래도 무시 했어야지. ”
흥수가 그대로 멈추어 섰다. 남순은 흥수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흥수의 낮은 목소리가 계단을 울린다.
“ 자꾸 신경이 쓰이는데 어떻게 하라고. ”
“ …… ”
“ 엮이기 싫네 어쩌네 했어도. 신경 끄겠다고 했어도. 자꾸만 신경 쓰이고, 자꾸만 생각나는 걸 나더러 어쩌라고!!! ”
작게 메아리치는 흥수의 목소리에 남순의 시선이 크게 흔들렸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씩씩 숨을 몰아쉬던 흥수도 남순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슬며시 눈을 감았다 뜬 그가 다시 입을 연다.
“ 네가 나한테서 아무 말 없이 도망쳤더라도, 난 그렇게 못 하겠으니까. ”
“ …… ”
“ 이번엔 내가 좀 물어보자. ”
내리 깔았던 남순의 시선이 다시 흥수의 날카로운 눈으로 옮겨 갔다. 흰 입김이 부옇게 흩어진다. 왜 도망갔어? 푹. 가슴께를 찌르는 고통에 남순이 작게 신음했다.
“ 내가 바란 건. 미안하다는 한 마디였어. ”
병원 창문으로 내려다 보던 네 모습이 이리저리 휘청였을 때. 나는 그 마저도 길가에 피어나 흔들리는 들꽃 같다는 생각을 했던 내 자신을 원망했다.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허둥대며 도망치는 네 뒷모습이 나를 더욱 나락으로 떨어트렸다는 사실을, 너는 알까.
“ 그 한 마디가 그렇게 어려워서? ”
남순은 계단 난간으로 시선을 옮겼다. 왜 그랬냐고 묻잖아. 남순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 …겁쟁이여서. ”
“ 뭐? ”
“ 겁쟁이였어, 내가. ”
“ …… ”
“ 네가 날 떠날 것 같아서…겁이 났어. ”
내 스스로가 역겨울 정도로. 건조한 남순의 음성에 흥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와서 이러는 거 얼마나 추한지 알아. 그래서 더 미안하다. 남순이 고개를 숙였다. 흥수는 난간에 기대어 선 채 팔짱을 꼈다. 고남순. 제 이름이 튀어나오자 남순이 재빨리 고개를 들어 올렸다.
“ 한 대만 때려도 되냐. ”
흥수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남순은 직감했다. 오래 전부터 쌓여온 탓에 딱딱하게 얼어버린 가슴 속의 응어리가, 눈 녹듯 녹아내리고 있다는 것을. 남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박자박 가까이 다가온 흥수가 남순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남순의 고개가 저항 없이 홱 돌아간다. 휘청대는 몸을 단단히 고정한 남순이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손등에 붉은 피가 묻어 나왔다. 입 안이 터진 모양이다.
“ 새끼, 아직도 세네…. ”
남순이 얼얼한 볼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됐다, 이제. 꾹 닫힌 남순의 입술 새로 웃음이 삐져 나왔다. 나 참…맞아놓고 좋다고 웃는 놈은 처음 본다. 흥수가 시큰둥하게 내뱉자 남순이 고개를 푹 숙였다. 강아지 같은 남순의 머리통 위로 누그러진 흥수의 음성이 쏟아진다.
“ 이건 아까 그 새끼들 때린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거든. ”
“ 응. ”
“ 나 아직 너 용서한 거 아니다. ”
“ 응. ”
흥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의무적으로 대답하는 남순을 내려보았다. …나도 참 병신이지.
“ 그때는 네가 한없이 밉고, 미치도록 증오스러웠는데. ”
“ …응. ”
“ 지금은, ”
“ 응. ”
“ 너무 좋다. 네가. ”
…응? 남순이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뭐라고? 그는 계단을 밟는 흥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흥수가 건물을 나서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남순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리곤 후들대는 다리로 재빨리 계단을 밟기 시작했다. 난간을 짚어가며 건물 밖으로 뛰쳐나온 남순이 고개를 두리번 댔다. 저만치 길다란 실루엣이 보였다. 쿵, 쿵.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 박흥수!! ”
우뚝.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허억, 헉. 남순은 숨을 몰아 쉬며 천천히 허리를 폈다. 쿵. 쿵. 그가 떨리는 손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 고맙다!!! ”
“ ……. ”
“ 그리고!! ”
나, 나도…! 발갛게 상기된 두 뺨이 절로 눈 앞에 생생했다. …븅신새끼. 흥수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걸음을 옮겼다. 내리쬐는 겨울볕이 따뜻하다고, 남순은 생각했다.
야 박흥수.
말 시키지 마. 10권 정독하시는 거 안보이냐 임마.
아 들어봐. 형님께서 엄청난 글귀를 소개해줄게.
뻘소리 하지 말고 읽던거나 마저 읽으세요 좀.
눈이 녹으면 어떻게 되게.
물 되겠지.
와 진짜 무드 없는 새끼.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뭐.
눈이 녹으면…
그래. 눈이 녹으면.
봄이 오는 거야. 등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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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죠 이 용두사미의 전형은..^.^! 호그와트가 아니라 실망하셨나요ㅜㅜ헙. 뜬금 없이 똥망글 들고 찾아와서 죄송함니다ㅜㅜS2 호그와트 쓰려구 창 열었다가 하루 빨리 흥남이들이 화해했으면 하는 마음에 손 가는 대로 쓰게 되었어요☞☜ 흥남★파워로 응어리를 모두 녹여버린 아련아련한 흥남이들은 결국 이러케 봄을 맞이해따고 한다..☆★ 이제 어서 밝은 흥남이들 들구 올게요ㅎㅎ 읽어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
♥암호닉 여신님들♥ |
변기덕♥ 뿌루뿌뿌♥ 초코푸딩♥ 뿌꾸뿌꾸♥ 백남순♥ 깡주♥ 남수니♥ 눈물점♥ 모두모두 정말정말 감사드립니다ㅜ,ㅜ 사랑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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