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w. Ru |
특정한 무언가를 잊어버리기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종대는 피식 소리가 나는 바람 빠진 웃음을 지으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지금 그에게는 많지는 않지만 괜찮은 선택지들이 있었다. 수면 유도제를 먹은 뒤 다음 날까지 잠자기. 하지만 굳이 이런 식으로 황금과도 같은 주말을 소비하기는 싫었다. 분명히 다음날까지도 온몸이 물 먹은 솜마냥 뻐근해질 것이 분명했다. 한쪽 벽면에 빼곡히 꽂힌 책들 중 하나라도 읽기. 하지만 그 책이 제아무리 재미있고 흥미롭다고 해도 곧 손에서 멀어질 것이 뻔했다. 세세한 그림을 그려보자면 자신은 아마 침대 위에 앉아 폭신한 베개를 덧댄 헤드에 기대어 캄캄한 칠흑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방안을 붉게 물들인 빛이 점점 종대를 불안함으로 몰고 가기 시작했다. 종대는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만 했다. 이 불안감은 크리스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그가 떠났어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스스로에게 되뇌고 세뇌하며 성취감이나 행복감에 파묻힌 순간에만 사라졌다. 종대는 다른 사람에게로 관심을 돌리기로 했다. 이씽에게 전화 걸기. 그는 이것만이 자신의 관심을 온전히 돌릴 수 있는 선택이라고 자부했다. 통화대기신호가 들리는 동안 그는 얼굴을 온전히 수화기에 기대었다. 매끈하게 코팅되어 있는 플라스틱 재질이 볼에 기분 나쁘게 끈적거리며 들러붙었다. 여보세요- 귀를 찢을 듯한 수화음 뒤에 들린 이씽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있는 듯 웅웅거렸다. 언제나 몽롱한 느낌의 이씽이었지만 그제서야 종대는 다소 시간이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야.” “아- 잘 있었어?” 이씽이 여전히 웅웅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는 혼잣말을 하듯 예상되는 종대의 대답을 대신 해버렸다. “지금 시간에 전화할 정도면 잘 있는 건 아니려나…” “못 있지는 않아.”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따뜻한 이씽의 목소리에 종대의 눈이 얼핏 일렁이며 반짝였다. “그냥 한 잔 하고 싶어서… 자고 있었어?” “아니, 나도 마침 뭐 좀 마시려던 참이었어. 금방 나갈게. 기다리고 있어.” 이씽의 통보와 같은 말을 뒤로 하고 종대는 그저 뚜뚜- 거리는 수화기의 음을 뒤로 한 채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붉게 물든 눈두덩과 거칠게 일어난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초췌한 몰골을 한 자신을 확인하자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마음이 거칠게 휩쓸려갔다. 그저 음침한 방에 혼자 남아있고 싶어졌다. 크리스도 없는 방에서 그저 그가 남기고 간 것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그것이 미련이든 그리움이든 크리스와 연관된 것과 함께 하고 싶었다. 자신의 한 몸을 그저 그것들에 맡기고 있는다면 조금은 더 빨리 편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대는 자신을 몇 달 동안이나 괴롭힌 그것을 증오하기에 이르렀다. 언제나 피하려 했었지만 피할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피하기만 했던 자신의 본능마저도 증오스러웠다. 피하기만 하지 말고 그저 인정하고 맞부딪혀갔다면 지금의 자신이 이렇게 보잘것없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조금 더 괴로우면 어떤가? 곧이어, 종대는 그것 또한 소용없을 것이라 자조했다. 불행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큼이나 소용없을 것이다. 그렇게 또 쉽게 자신을 합리화해 버렸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현관에서 들렸다. 종대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문을 열어젖히고 이씽의 앞을 지나친 채로 층계를 내려갔다. 이씽은 묵묵히 종대의 뒤를 따랐다. 눈발이 살랑거리며 가라앉는 듯한 고요함만이 맴돌았다. 종대는 이 산뜻한 침묵이 썩 마음에 들었다. 문득, 장난끼가 들어 이씽을 향해 상반신과 고개를 돌리고 눈을 마주쳤다. 씩- 웃는 종대에 이씽은 우스꽝스럽게 웃어보였다. 놀란 듯 당황한 기색을 비친 이씽은 자신을 보며 박장대소해버리는 종대가 싫지는 않은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건물을 나왔다. ‘아, 크리스와 사귀기 전에 이씽과 무언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그 시절에 대해서는 기억이 별로 나지 않았다. 가장 풋풋하고 싱그럽고 좋았을 나이인 이십대 초반의 자신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 모든 게 크리스 때문일지도 몰랐다. 크리스와 만난 이후로는 종대의 모든 것이 베를린 장벽과도 같이 무너졌다.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이 크리스만을 쫓아다녔었다.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던 그는 한껏 찌푸린 얼굴로 크리스의 생각을 지워버렸다. 자신은 더 이상 크리스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가 돌아오길 바라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유쾌한 듯 웃어 젖히던 종대의 얼굴이 검게 가려지자, 이씽이 그의 얼굴에 내려앉은 머리칼을 헝클리며 쓸어올렸다. “왜 그래?” 동글동글한 이씽의 눈이 종대의 것과 마주쳤을 때, 종대는 이씽의 눈망울을 응시했다. 어둡고 그늘진 얼굴이 비쳤다. 일자로 그어진 입술이 흉했다. 힘 빠진 흐리멍덩한 눈이 추하기 그지없었다. 그 시절의 자신은 시원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쾌활하게 여러 곳을 누비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종대는 그저 그 시절의 자신이 그리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명하며 환하고 충만했던 자신의 추억 속에서. “그 시절의 내가 그리워.” 잔 속에서 거처 없이 빙글빙글 춤추는 술을 바라보던 종대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 어떤 너도 너야. 그 어떤 너라도 좋아.” “고백 같아.” “그럼 고백 할까? 난 널 좋아해. 아마 열렬하게 사랑하는 걸지도 모르지.” 종대는 그의 말에 웃었고, 이씽도 그에 동참했다. 종대는 그 말에서 이씽의 진심을 느꼈다. 바 안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이씽이 종대의 목덜미를 쓸었고, 그는 당연한 듯 이씽에게 기대었다. 이씽의 어깨에 볼을 맞댄 종대는 바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조용한 노래의 울림에 기댄 채 외로움을 달래는 사람들, 온 세상의 고민을 다 떠안은 듯 서로에게 한탄을 하는 사람들, 고민에 휩싸여 술에 의지하는 사람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을 그려놓은 눈 앞의 그림을 보았다. “…크리스 생각해?” 침묵을 깬 이씽의 질문에 종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입술을 적셨다. “크리스랑은 내가 사랑할 여러 사랑들 중 하나였을 뿐이야. 소중한 것도, 특별한 것도, 거대한 것도 아니었어. 그저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야. 흘러가는 인생 중 일부분이었을 뿐인거야.” “인생은 흘러가고, 다행히도 넌 여기에 남았어. 나와 함께.” 이씽의 말은 마치 잠결에 듣는 자장가와도 같이 나른하고 사뿐하게 종대의 귀에 앉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묵직하게 다가왔다. 잔을 비우고 눈꺼풀을 닫은 종대의 곁으로 이씽의 체온이 다가와 그를 어루만졌다. |
이 시리즈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현재글 [EXO/레첸] 목소리 2
11년 전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
헐 유지태 못알아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