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꽤 쌀쌀해졌다.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일 교시는 길지만 한 달은 빠르고, 일 년도 참 빠르다.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내 머리도 많이 길었다.
작년에 엄마한테 된통 혼나고 머리를 단발로 확 잘랐던 적이 있었다. 항상 긴 머리를 선망했었다. 그래서 단발로 잘랐을 때 많이 속상했다.
그래도 나는 머리가 빨리 기는 편이었다. 그나마 그걸로 위안을 삼았지만 이상하게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머리가 더 안 자라는 것 같았다.
이제 머리가 많이 길었다.
아침에 기분 좋게 눈을 떴다. 오늘따라 머리를 말리고 머리 손질이 예쁘게 잘 된 것 같다. 기분이 좋았다.
염색이나 파마도 일체 해 본 적 없어 결이 좋고, 까맣고 나름대로 긴 머리가 가슴께까지 흘러내려 넘실거린다.
역시 여자는 머리빨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머리를 다시 정리하고 외출 준비를 했다.
**
학교에 갔다.
내 짝은 남자아이였다. 워낙 이성에게 말을 잘 못 붙이는 편이라 짝과는 전혀 친하지 않았다.
짝은 교실에 먼저 와서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아침의 교실은 조용했다. 사람이 몇 명 없었다. 오늘따라 눈이 일찍 떠진 탓인지 등교 시간도 평소보다 약간 빨랐다.
교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 아이가 나를 향해 살짝 눈을 돌렸다.
조용히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의도하지 않게 의자 끄는 소리가 나서 살짝 당황했다. 교실에 있던 아이들이 전부 날 쳐다보는 것 같았다.
“안녕.”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당황했다. 목소리는 옆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눈동자만 살짝 굴려 왼쪽 옆에 앉은 짝을 바라봤다.
“어? 안녕.”
“머리 고데기 했어?”
“아니. 왜?”
“그냥, 오늘 왠지 좀 달라 보여서. 예쁘네.”
대화를 하다가 살짝 고개를 움직였다. 창가 쪽에 앉은 누군가가 나와 짝의 대화를 보고 있는 듯 싶었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별 거 아닌 말을 던지고 짝은 다시 책상에 엎드린다. 예쁘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괜히 기분이 좋았다.
어제 밤에 다 못 마친 숙제를 하기 위해 책상 위에 책을 올렸다. 연필이 종이 위에서 사각사각 움직이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숙제를 했다. 문득 앞이 밝아졌다. 구름에 가려 있던 해가 다시 움직인 모양이었다.
눈썹을 찡그리고 창문 쪽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백현과 눈이 마주쳤다.
**
학교를 마치고 들어선 피아노 학원에는 오늘따라 사람이 많이 없었다. 선생님과 이름 모르는 초등학생 여자아이 두 명. 그리고 원장실에 계시는 피아노 선생님 옆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는 변백현. 무의식적으로 백현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까만 눈이 나를 빤히 쳐다보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금방 고개를 숙인다.
아는 척은 안 한다. 인사도 마찬가지다. 항상 그랬듯이.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왔던 일은 이제 꿈처럼 느껴진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남들이 보기에는 사실 거의 모르는 사이에 가까웠다.
“선생님, 저 머리 많이 길었죠?”
벽에 걸린 거울을 보며 뛰어오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했다. 문득 선생님에게 머리를 자랑하고 싶었다.
선생님의 눈길이 내게로 향한다. 무심코 시선을 돌리다 백현의 눈과 또 마주친다. 기분이 이상하다.
“어머, 머리 진짜 많이 길었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진짜 짧았던 거 같은데. 백현아, 그렇지?”
고개를 숙였던 백현의 시선이 다시 나를 쳐다본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다. 대답은 하지 않는다.
백현이 침묵했다. 괜히 어색하고 무거워진 듯한 공기가 싫었다. 때마침 화장실도 가고 싶었다.
“저 화장실 잠깐만 갔다올게요!”
딱히 선생님의 대답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미소와 함께 짧은 한 마디를 던지고 문을 열고 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이상하게 떨렸다. 백현이 나를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봤을까, 하는 생각만 계속 들었다. 왜 그랬을까.
화장실에서 나와서 손을 씻으면서 벽면에 붙은 거울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침과 다름없다. 오늘 머리 참 예쁘게 잘 된 것 같은데.
백현은 왜 그렇게 쳐다봤을까. 혹시 내가 보기에만 예쁜 게 아닌가, 싶어 난데없는 걱정이 들었다.
다시 보니까 너무 길어서 좀 덥수룩해 보이기도 하고, 아침에 봤을 때는 들지 않던 생각이 들었다.
걱정을 머릿속에서 털어내려고 애쓰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학원 복도로 들어섰을 때 학원은 조용했다.
아까 피아노를 치며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누던 여자아이 둘은 집에 가고 없는 모양이었다. 왠지 발소리를 크게 내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뒤꿈치를 들고 사뿐사뿐 조심히 걸었다. 어렸을 때 배우던 발레가 생각난다.
“아 참. 백현아, 너는 저 애 머리 긴 게 예쁜 거 같아? 아니면 짧은 게 더 낫나?”
학원은 조용했다. 그리고 선생님이 백현에게 질문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원래라면 들리지 않았어야 할 대화 소리이지만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는 어떤 소리든 크게 들린다.
내가 들어가면 대화가 왠지 끊어질 것 같았다. 백현의 답이 듣고 싶었다. 왜였을까?
원장실 복도 벽 쪽에 난 작은 창문으로 선생님과 백현이 보였다.
선생님은 창문을 등지고 앉아 계셨다. 하지만 백현의 얼굴은 정면으로 아주 잘 보였다.
백현은 나를 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숨을 죽여 대답을 기다렸다.
백현이 잠시 고민했다. 그러더니 손을 뒤통수로 올렸다. 애꿎은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백현이 웃는다.
백현의 갈색 빛이 도는 머리카락에 부드럽게 파동이 일었다.
백현은 웃는 게 참 예뻤다. 오늘따라 위로 화사하게 올라간 입꼬리와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가 더 인상적이다. 곰곰이 생각하는 듯 살짝 정지해 있다.
별 거 아닌 질문인데도 백현은 생각을 정말 깊게 했다.
“어… 둘 다요.”
“백현이 뭐라고? 잘 못 들었어. 다시 말해줄래?”
“걔는 둘 다 예쁜 것 같아요. 항상.”
백현이 질문에 대한 답을 작게 읊조렸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왠지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들어가려던 발길을 멈추고 다시 되돌아 나왔다.
연습실로 들어갔다. 피아노 건반을 빤히 쳐다봤다. 왠지 모르게 두근거렸다. 하얗고 까만 건반 위로 손을 조심스럽게 올렸다.
딱히 칠 만한 게 생각나지 않았다. 쇼팽의 야상곡을 연주했다. 학원은 조용했다. 분명 백현과 선생님이 듣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멜로디를 그리는 내 손이 살짝 떨렸다.
이내 원장실 문이 살짝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이 날 봐주시러 오는 거겠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연습실 옆쪽에 난 창문을 살짝 곁눈질했다.
밖에 서 있던 사람은 백현이었다.
- 첫사랑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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