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락비/피코] 해를 품은 달 04
그때 그때 상황에 맞추어 가면을 바꿔쓰는 것은 나를 지금까지 버티게 해 준 가장 쓸만한재주였다.
감정을 흘려버리면 따뜻하고 착한 눈을 한사람들이 포르르, 작고 예쁜파랑새를 타고 날아와 날 챙기려 들테니까, 그런 그들을 떨쳐내는 것은 지금보다 배로 힘들겠지.
˝근데 담배들이 다 쏟아졌네요. 어쩌다가…˝
˝뭐…그것도 내 운명이겠죠. 호흡곤란이 오지 않은게 어디에요.˝
˝네?˝
˝…신경쓰지 마세요, 헛소리니까. 이거, 6500원 입니다.˝
얼음, 겨울 이런 감각적인 차가운 것은 워낙 날씨나 온도에 민감한지라 극도로 꺼려지지만 혼자, 독방 이런 추상적인 차가운 것에는 금방 익숙해지곤 했다.
이외에도 외로움, 차가움, 어두움, 막막함, 불행, 먹구름 같이 회색빛을 띈 그것들….
그리고,
내가 하얗고 찬 운명을 품고 태어났다는 걸 받아들인 그 순간, 미치도록 외롭고 눈물나던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당연해지기 시작했다.
긴 방학이 끝나고 새학기가 시작되는 당일.
오늘부터 다시 학교에 나간다. 차라리 아침부터 밤까지 나 자신조차 돌아 볼 틈없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는게 나을거라는 생각을, 아주 잠깐 해봤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어냈다.
모두가 잠든 새벽 다섯시. 동네 우유배달을 끝내고 여느때처럼 멍한 정신으로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 길이, 오늘따라 길다.
도착하지 못할 것만 같았던 집 문을 앞에 두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몇십 분을 더 서있었다.
그 사이 쌀쌀한 칼바람에 잔뜩 언 손을 녹이 슬고 페인트가 덕지덕지 떨어진 대문 위에 올려놓았다가 내려놓았다가를 수십번 반복해었는데도, 도저히 문을 열고 들어 갈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냥, 자신이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자신.
지금 이 기분으로 집에 들어가면 형과 할머니의 품에 어린아이처럼 파고들어, 이렇게 나를 품어 줄 사람이 단 한명도 없는 그곳에 또다시 혼자가 되어 생활하기 두렵다고 엉엉 울어버릴지도 몰랐다.
그동안 속으로는 이미 수천번, 수만번 무너졌지만 겉으로는 단 한번도 내색한 적 없었다. 나보다 더 약하고 작은 나의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는 나마저 휘청거린다면, 그들은 정말 절벽 끝에 내몰리는거나 같으니까.
그럴 바에야 표현하지 않는 편이 낫다.
괜찮은 척.
버틸만한 척.
하나도 안 힘든 척.
한숨을 한번 푹 내쉬고 멍했던 눈에 얼른 새벽바람을 담았다.
앞으로 몇 시간은 이런 눈으로 있어야 할거야. 나른한 오후의 바람따위 들어찰 여유따위 없을테니까.
▒▒▒
2학년 2반…,
´드르륵-´
생각보다 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린 교실문에 흠칫, 몸을 움츠렸다. 새학기이기도하고 꽤 일찍 온 터라 아무도 없는 학교는 작은 소리마저 쓸데없이 크게 울려 내 어깨위에 얼얼하게 얹히게 했다.
텅 빈 교실의 뒷문을 제일 먼저 열며 듣게되는 이 소리는 나와 함께 자라나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무게를 더해만갔다. 그럼에도 나는 6년 가까이 새학기에 맨 처음으로 등교하는 이 일을 멈출 수 없었다.
위협적으로 퍼지는 소리를 온몸으로 받으면서까지 일찍 온 이유는 단 하나,ㅡ혼자있기 편한 자리에 앉기 위해서.
그 날 이후로 내 자리는 단 한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햇살이 잘 드는 운동장 창가 쪽 맨 끝자리.
수업시간엔 수업을 들으면 되고, 쉬는 시간엔 잠을 자면 되고, 그 외의 시간엔 멍하니 창 밖이나 구경하며 떼우면 시간은 제법 빠르게 흘러간다.
혼자라는 것조차 가끔 잊어버릴만큼, 학교 안에서 극도로 외로워지려는 순간마다 운동장은 늘 시끌시끌해.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어느 순간 마법처럼 기분이 나아져. 그거 하나 때문에 이 자리가 참 마음에 들었다.
교실을 두어 번 더 둘러본 후, 어김없이 그 쪽으로 가 책가방과 앞으로 학교생활하면서 필요할 양치도구, 담요 등이 담긴 종이가방을 동시에 내려놓았다.
˝오, 일빠!˝
그리고 그와 동시에 거짓말처럼 드르륵- 빠르게 교실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화들짝 놀라 돌아본 곳엔 싱글싱글 웃으며 들어오는 낯익은 녀석이 있었다.
처음이다. 이 이른 시간, 텅 빈 학교에 누군가와 둘이 있는 것은. 그것도 같은 교실에.
나를 보지 못한건지 녀석은 씩씩한 걸음으로 성큼성큼 교실에 들어왔고, 생전 들어보지 못한 이상한 노래로 휘파람을 부르며 내 쪽으로 다가오다 이내 벼락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으악!!!!!!!˝˝…˝
˝아오, 심장!!!!!!!!!!˝
˝…˝
˝아…아 미안, 아…아오, 깜짝아… …에이 씨, 간만에 일찍 눈떠지길래 좋다고 달려왔는데 일빠가 아니네.˝
˝…˝
˝…엇! 내가 앉으려던 자리!…아쉽지만, 이 앞에라도 앉아야지….˝
많이 놀랐는지 가슴께를 잔뜩 부여잡고 거칠게 숨을 고르던 녀석이 내 앞자리의 책상에 쿵, 쿵, 하는 소리가 나게 제 책가방과 짐을 아무렇게나 던지더니 끙차, 하는 앓는 소리와 함께 의자에 주저 앉았다.
의자에 옆으로 돌아앉아 2초 정도 멍하니 교실을 둘러보던 녀석이 아무래도 처음 보는 내가 어색했는지ㅡ워낙 학교에서 유명한 녀석이라, 나는 녀석의 얼굴과 이름정도는 알고 있다.ㅡ큼큼, 하는 헛기침을 내더니 꾸물꾸물 몸을 앞으로 돌렸다.
덕분에 녀석의 등이 내 눈 한 가득 들어찼다. 나 때문인지 잔뜩 긴장해서는 등이 꼿꼿하다.
이름은, 표지훈이였던가.
1학년 때 같은 반은 아니였지만, 특유의 낮은 저음, 준수한 외모와 키, 그리고 밝고 털털한 성격 때문인지 남녀 할 것 없이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은 편이였다. 여자애들이 저 녀석에 대해 종알대는 걸 의도치 않게 엿들었던 적이 있는데 공부도 잘하고 집안도 좋다고 했던 것 같다.
흠이라면, 아직 철이 조금 덜들어 노는걸 좋아해 일진이니 뭐니하는 질 낮은 애들과 어울리며 싸움소동에 가끔 연루되곤 한다는거 정도.
부럽다고 생각하긴 싫다. 그냥, 자존심 때문에.
벌써부터, 이렇게 시작부터 내가 작아지면 안 되니까.
어색한 공기가 가만히 내려앉는 교실 안엔 사뿐사뿐 시계의 초침이 흘러가는 소리, 녀석이 톡톡톡 두드려대는 핸드폰소리, 그리고 나와 녀석의 색색 하는 숨소리만이 가만가만 퍼졌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녀석의 등에 두고 있던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저기 멀리 교문 쪽으로 하나 둘, 학생들이 걸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오랫만에 입어보는 교복의 느낌이 아직 이상한건지, 아니면 그 사이에 교복을 줄인건지 어딘가 영 엉성한 폼으로 교문에 들어서는 모습들을 멍하니 보다가 다시 교실로 고개를 돌렸을 땐,
˝…앗!˝
어느 새 내 쪽으로 돌아앉아 의자등받이에 올린 팔에 턱을 얹고 날 빤히 보고있던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화들짝 놀라버렸다. 예상치 못한 녀석의 시선 때문에도 있지만, 녀석의 눈과 마주친 순간 ´팟´, 하고 작은 ´불꽃´이 튄 것처럼 빨간 도깨비불 같은 빛이 눈 앞에 나타났다가 감쪽같이 사라진 탓이 더 컸다.
녀석도 그걸 느낀건지 아주 잠깐 인상을 찌푸렸는데, 크게 상관하지 않는 듯 이내 내 놀란 얼굴에 킥, 개구지게 웃어보이더니 눈을 데록데록 굴려가며 나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내가 워낙에 역마살 낀 것 마냥 발발거리면서 돌아다녀서 웬만하면 모르는 애가 없는데…아무리 생각해도 처음보는 얼굴이야.˝˝…˝
˝이름이 뭐야?˝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귀찮게 또 다가오려해.
짜증나게.
…마음 아프게.
누군가 다가오는 것도 오랫만이고, 내치는 것도 오랫만이라 녀석이 던지던 책가방과 짐처럼 가슴이 쿵, 하고 떨어져 울렁울렁 요동을 친다.
내 반응에 녀석이 얹고있던 턱을 떼고 갸웃거리며 내 옆얼굴을 쳐다보는게 느껴졌지만, 모른척 계속 창 밖만 내다봤다.
교문에 들어서는 아이들의 수가 그새 늘어났다. 아직 염색이나 파마를 한 머리를 채 푸르지 못한 아이들도 몇 눈에 띈다.
˝…어? 너 지금 내 말 쌩까는거야?˝˝…˝
˝으…어…뭐야.˝
˝…˝
˝…저기?˝
˝…˝
˝님아, 대답 좀.˝
쿡.
오른쪽 볼에 따뜻한 것이 와닿았다. … …손가락. 손가락이다.
쿵, 하고 떨어져 요동을 치던 가슴이 순식간에 딱딱히 굳는게 느껴진다.
이상하다.
이 타이밍에 버럭 화를 내며 녀석의 얼굴을 주먹으로 갈기는게 맞는데. 후에 녀석에게 밟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는게 맞는데.
어릴 적 버스를 처음 탔던 그 날처럼 흐르는 시간속에 나와 아저씨가 탄 버스만 멈춘 것마냥, 나혼자…아니, 어쩌면 녀석도 멈춘걸까. 나처럼 멈춰있는걸까.
그 때랑 때도, 장소도 다르지만 분위기만큼은 정말 똑같은데.
너무 똑같아서,
그 때의 어린 나로 되돌아가버려 지금껏 수년간 꽁꽁 묶어두었던 온갖 감정들을 채 막아내지 못하고 엉엉 울어버릴 것 같은데.
˝…어.˝
˝…˝
˝너…그…˝
˝…˝
˝볼…되게 하얗고 차갑다. 모, 모찌같아.˝
˝…˝
˝…˝
˝…손 치워.˝
˝…어, 어!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무언가 크게 충격을 받은 얼굴로 허둥지둥 앞으로 돌아앉는 녀석의 등이 또다시 눈에 들어찬다.
녀석의 뒷모습에 아른아른, 잔잔한 오렌지색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어디서 햇살이 드나. 아직 이른 아침이라 이렇게까지 햇살이 들지는 않을텐데.
밝고 따뜻한 그 빛을 가만히 보고있자니 문득 궁금해진다. 왜 네 손가락과 닿은 내 볼이 이렇게 화끈거리는지. 시간은 흘러가는데 왜 우리 둘만 멈춰있던건지. 아니, 너도 멈춰있었는지.
그러니까, 내 말은-
너…
…누구야…?
˝난 표지훈이야.˝
순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불안하게 내뱉던 호흡마저 멈췄다.
…내 생각을…들은거야…?
… …설마.
˝니 이름은…너 말하고 싶을 때 말해줘!˝˝…˝
˝아 씨, 간만에 일찍 일어났더니 졸려 뒤지겠네. 애새끼들 오기 전까지 난 좀 자야겠다.˝
녀석이 책상 위에 올려둔 제 책가방에 풀썩 엎어졌다.
그리고, 멈췄던 호흡이 운동장을 전속력으로 질주한 것처럼 가빠오기 시작했다.
▒▒▒
정말 피곤했는지 금세 잠에 빠져들어 색색 거리던 녀석의 숨소리가 조금 더 짙어졌을 무렵이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는 녀석의 숙인 등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한참이나 지난 녀석의 질문에 불쑥, 대답을 해버렸다.
˝…우지호…˝˝…zZ˝
˝…내 이름. 우지호.˝
내가 해놓고도 화들짝 놀라 손으로 얼른 입을 막았다.
다행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가슴이 쿵 쿵 쿵 쿵 정신없이 뛰어온다.
▒▒▒
아저씨, 이상한 녀석을 만났어요.
그냥 바라만 봤을 뿐인데 내가 솜사탕처럼 녹아 내리는 기분이에요.
아저씨가 다가오지 말라고 해주세요. 버스정류장 의자에 하염없이 앉아있던 날 혼내시던 것처럼, 다가오지 말라고 호통쳐주세요.
아저씨…아저씨…
무서워요.
따뜻해서, 볼에 닿은 손가락이 너무 따뜻해서, 나 너무 무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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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신작알림 신청하신 분 다시해주세요! gloomy2 로 필명을 정했어요!★
으그ㅜㄱㄷ주ㅏㅓ ㅠㅠㅠㅠ 여러분 오랫만이ㅔ여유ㅝㅠㅏㅓ유ㅏㅏ |
흐아...여러분....! 아는 칭구가....초대번호를 줘서...............다시 글을 연재할 수 있게 되었어요! 흐윽...흐그극....허고구굳구ㅏㅈ더ㅏ거ㅏㅈ듀ㅓ가ㅠㅈ더ㅏ규ㅏㄷ 감덩!!! ㅠㅠㅠ 근데 글은 여전히 똥글....하..... |
* 암호닉 :)
쵸코/이불/달/솜사탕/낙서/루팡/오이/쌀알/나의 왕자님/현기증/달토끼/쨔응/새주/꿀/용구리/우샤론/쿠우 님 감사합니다 !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