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 24초의 불행.
더웠다. 작열하는 태양볕 아래에서, 여린 살결은 별 방도없이 타들어갔다. 장마의 끝은, 도리어 더욱 거센 열기를 유발시켰다. 한없이 늘어지는 어깨를 견딜 수 없어 한숨을 쉬었다. 하늘에 까맣게 드리워진 텁텁한 높새 구름이 꼬리를 길게 늘였다. 징조가 불길했다. 앳된 얼굴이 마구잡이로 구겨졌다. 학연은, 문이 닫힌 가게 앞에 서 있었다. 오늘은 쉽니다. 커다랗게 내걸어진 판자를 무시하고서, 이를 앙다물고 가게 앞을 지켰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5분, 24초. 마른 등이 점점 굽어갈 즈음, 가벼우나, 꽤 커다란 중압감을 가진 장막이 걷힌다. 그 벌어진 틈새 사이로 칼자국이 선명한 팔 하나가 쑥, 내밀어졌다. 불퉁한 손가락 끝에 걸린 회갈색의 가방이 학연의 발치에 힘없이 던져졌다. 그와 동시에, 문짝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까만 눈동자가 움직였다. 체념도 아니었고, 괴로움도 아니었고, 고통도 아니었다. 무의식 상태의 식물인간처럼, 학연이 천천히 비쩍 마른 팔을 뻗었다. 손에 잡히는 감각이 소름끼쳤다. 마치 시궁창 내부의 이물질을 그러쥔 것 같았다. 누가 볼 새라 감추듯 가방을 품 속에 안아들었다. 고개를 숙인 학연의 발치에는, 가방대신 그림자가 늘어졌다. 높새 구름의 꼬리가, 길게.
5분 24초 동안의 자유, 그 끝은 불행의 시작이었다.
Pieta
자비를 베푸소서
어린 아이들은 더러 이 바닥에서 이용되곤 했다. 일반적으로 몸집이 큰 인간들보다는 덜 눈에 띈다는 것이 이유였다. 보호받아야 마땅할 아주 어린 아이부터, 세상 물정을 알고도 남을 청소년까지. 학연은 후자에 속했다. 제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리 저리 바쁘게 몸을 움직이며 품 속에 안긴 백색가루를 운반하면 그만이었다. 예전처럼 좁은 골방에서 학대를 당하는 것보다는 이 편이 훨씬 더 나았다. 아주 옛날, 억센 폭력으로 인해 망가졌던 발목이 여전히 아리고, 시큰거렸다. 근 5년도 더 된 일이었지만, 상처는 아물지 않고 그대로 남아 학연을 옥죄였다. 버려진 삶 치고는 이렇게 할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했다. 아니, 만족해야했다. 이보다 더 추잡스럽게 굴려지는 다른 고아들의 케이스를 보면, 저도 모르게 구역질이 치솟곤 했으니까. 이 정도는, 이 정도는......
학연은, 길을 걸을때가 가장 두려웠다.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날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제 앞을 지나는 사람이 제 멱살을 붙들고 가방에 담겨진 마약덩이를 길바닥에 쏟아붓지는 않을까. 늘 환상에 지나지 않았지만, 항상 고비였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쪽을 택했다. 아무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이대로 길을 걸어 목적지까지. 그렇지 않으면, 더는 이곳에서 숨을 붙이고 살아갈 수 없다. 언젠가, 제 서투른 솜씨로 인해 마약 운반 과정에서 차질이 생겼던 적이 있었다. 남자는 저를 어두운 방으로 질질 끌고 들어가서는, 자비없는 발길질을 가했다. 끔찍하리만치 아파 비명을 지를 수도 없을 만큼 폭력의 강도는 거셌고, 또한 고통스러웠다. 호흡도 제대로 하지 못해 헐떡이는 학연의 목덜미를 쥔 남자가 입술을 열었다. 제대로 해. 살아야지, 응? 우리 다 같이, 다복하게 살아야지. 시야가 흐릿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것처럼, 흐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씨발, 다복한 소리하고 있네. 입꼬리가 제법 비릿한 동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잊고 싶었으나, 도무지 잊혀지지 않았다. 쇳덩이를 집어삼킨 듯, 속이 조악하게 수축했다. 그렇지만, 설사 잊을 수 없다해도 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하루하루가 이 꼴이었다. 따갑게 내리쬐는 햇빛이라도 좀 거두어주지. 이마 부근에 추적추적 내리는 땀줄기가 거슬렸다. 자비없는 세상에, 자비없는 하늘. 엿같지만 어쩔 도리는 없었다. 죄라면 버려진 자신이 죄이고, 하필이면 약쟁이들의 손에 거두어진 죄이지.
학연의 발걸음이 멎었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또다시 기다린다. 죄라는 것을 인식하고는 있는지, 하나같이 문을 걸어잠그고 꽁꽁 숨었다. 콩밥 먹는 게 두렵기는 한가보지. 비식 코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정확히 5분 24초가 흐르자, 썩은 나무 못으로 동여진 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뻗어진 손은 아까 그 사람과는 다르게 빈 손이다. 팔뚝 부근에 촘촘히 박힌 주사 흉터 자국이 괴기스러웠다. 가방을 건네자, 낚아채듯 가지고서 사라져버린다. 다시 문이 닫힌 그곳에서, 미약한 술냄새와 약내음이 퍼졌다. 고약한 냄새가 서서히 번지고 들어, 저에게까지 당도했을 때 학연은 코를 틀어 막았다. 미친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미친 자신.
다시 학연에게 건네어진 가방은, 무게감이 더해져 꽤나 묵직했다. 많이도 처넣었네. 단속이 약화된 시기라서 그런 것인지, 요즘 들어 물량이 계속 증가되곤 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한 번 천국을 맛보게 되면, 한도 끝도 없이 손을 더듬어 그를 찾아 헤매인다. 언제였는지 잘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가물가물한 기억이 학연의 뇌리에 여태 남아있다. 너도, 주사 한 번 해볼래? 침이 질질 흐르는 입가를 여미지도 못한 여자가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학연에게 가방을 건네며 물었던 적이 있었다. 벌겋게 뜨인 그 눈을 바라보며, 학연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떴다. 문 속의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다들, 그렇게, 벌겋게 뜨인 눈을 하고 있겠지.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아마, 그 여자는, 죽었을 것이다. 어디선가 스치듯 들었다. 정신 나간 년이 이리저리 설치고 다닌다며, 남자가 전화기에 대고 주소를 읊었다. 번지 수까지 정확하게, 그것은, 여자의 거처가 맞았다.
골목을 빠져나왔다. 묵직해진 무게에, 뙤약볕까지. 최악이었다. 잠시 자리에서 숨을 골랐다. 사람 한 명 없는 길 한복판의 제 존재가 이질적이었다.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듯한 묘한 기분. 옆의 담을 넘으면, 이곳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아름다운 낙원이 펼쳐질까.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다시금 걸었다. 걷고, 걷고, 또 걸었을 때, 길 저 편에서 희미한 인영이 어른거렸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발소리를 죽이고,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기 위해. 학연은 슬쩍 고개를 들어 제 앞을 확인했다.
'......!'
저와 똑같이, 가방을 안아 들고서 길을 걷는 남자아이. 입술을 꾹 다물고, 저를 바라보는 학연을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정면을 응시하며 걷는다. 저와 똑같은 가방, 저와 똑같은 눈. 진득한 시선에, 그제서야 남자의 눈동자가 학연에게로 들러붙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찰나의 순간이, 영원처럼 길다랬다. 커다랗고 깊은 눈이 빈틈없이 학연의 곳곳을 옭아매었다. 미미한 약냄새가 배여있는 가방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가했다.
"피에타."
"......"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말이야."
자비없는 이 세상에서, 피에타, 피에타.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는 남자아이.
학연과 재환은, 서로를 지나칠 수 없었다.
-
마약 돌리기에 이용되는 어린 아이들의 이야기에요.
중편으로 쓸 글이었는데, 단편으로 올려봤어요. (부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