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하루는 길었다. 구름이 자욱하게 낀 하늘이 습기의 무거움에 낮게 가라앉았다. 텁텁하기도 하고 축축하기도 한 주변 공기가 좁다란 목구멍을 알싸하게 파고 들었다.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여름철의 날씨는 좀처럼 종잡을 수 없었다. 내일은 구름 조금. 대체로 맑은 날씨를 유지할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라는 기상청의 예견은 언제나처럼 멋들어지게 빗나갔다. 그들이 당당히 오보를 발표한 덕에 학연은 내리는 비를 오롯이 한 몸에 받아내었다. 어느 한 여름 날의 버스 정류장이었다. 깨진 손톱 흠뻑 젖은 교복이 피부결에 달라붙었다. 끈적이는 느낌. 평소라면 질색을 하며 미간을 찌푸리고도 남았을 불쾌한 감각이었으나,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저 무감하기만 했다. 그래. 무기력함 그 자체. 눈을 찌르는 앞머리가 거슬렸다. 이마 부근을 작은 손바닥으로 훑어내자 고여있던 물방울들이 느릿한 속도로 허공에 흩어졌다. 우산에 가려져 제 옆을 스쳐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그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굳이 빗물에 젖은 얼굴 따위를 남들에게 비추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찰박, 발끝을 타고 흐르는 빗줄기가 어정쩡하게 마무리 된 바짓단을 적셨다. 흐릿하고 탁하게 물든 끝자락이 무겁게 내려 앉았다. 마치 구름이 자욱하게 낀 하늘처럼. 아주, 무겁게. 그래서 학연은 금방이라도 땅 밑으로 꺼질 것만 같았다. 파리하게 식은 제 입술은 이제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차고 시렸다. 걸음이 닿는 곳마다 웅덩이가 튀었다. 습한 공기가 더욱 짙어질 무렵, 까만 구두가 보였다. 그저 길만 보며 걷던 학연의 고개가 들렸다. 속눈썹에 매달려있는 물방울이 턱끝을 타고 흘렀다. 멍한 눈동자가 제 앞을 훑었다. 하릴없이 길을 걷던 여리한 다리가 숨을 멎었다. 남자는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다. 미약한 담배 냄새가 온몸을 쿡쿡 찔렀다. 담배 피지 마세요. ....... 냄새 싫어서. 그러자 남자는 가볍게 웃으며 축축한 바닥에 담뱃불을 짓이겨 껐다. 아니. 애초에 불이 붙었는지도 미지수였다. 그저 습기어린 하늘 아래, 뿌연 연기가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으니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발치에서 숨을 죽여가는 불씨는 이내 완연히 만개한 안개꽃처럼 끝자락을 훑어냈다. 한참을 미동없이 남자의 잘 뻗은 콧날을 바라보았다. 담배가 싫어? 네. 어리네. ……. 어리다. 너. 이름이 뭐야. 남자는 제 구두코를 바닥에 일정히 찍어대며 학연에게 말을 붙여왔다. 퍽 살가웠지만, 학연은 그저 대답없이 황갈색 머리를 가진 남자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바라 볼 뿐이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드리워지지 않아 억수같은 비가 쏟아져 내리는 제 머리맡과는 달리 남자는 진홍색의 처마 아래에 서 있었다. 손끝이 전율하듯 떨렸다. 그것이 추위 때문인지 오랜 수전증 때문인지 아니면 기타 이유인지 알 수가 없었다. 빗물을 머금어 눅눅해진 목덜미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비 맞고 있잖아요. ……. 옆으로 와서 비를 피하라고 말 안 해요? 남자는 그저 소리없는 웃음을 터뜨리고서 학연을 마주 보았다. 또다시, 그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놓여진 것은 다름 아닌 담배 한 가치였다. 이름이 뭐냐니까. 그것을 부러뜨릴 듯 그러쥔 남자의 입술이 갈라졌다. 쉬어가는 목소리가 신경 쓰여 목을 두어 번 다듬고는 작게나마 대답을 해보였다. 차학연. 알아서 뭐 하게요. 이제는 사물마저 제대로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눈꺼풀에 방울방울 매달린 빗방울들이 눈동자를 침범하고 들어 쓰리고, 아팠다. 이리 와. 남자의 길다란 팔이 학연의 앙상한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거짓말처럼 머리맡의 비가 멎었다. 커다란 손바닥이 학연의 머리 부근을 털어 냈다. 많이도 맞았네. 우산도 없이. 나지막한 음성은 간질거리는 먹구름이 되어 학연의 귓가를 떠다녔다. 이제 더는 숨길 수 없는 쉰 목소리를 간신히 짜내어 혀를 굴렸다. 그러는 아저씨 이름은 뭔데요.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남자가 다시 한 번 웃었다. 주먹을 쥔 손을 펴고 제 얼굴께로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에서 바스라진 담뱃가루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응, 내 이름 이재환. ……. 너 나 알지. ……. 난 너 알아. 항상 비가 올 때마다 우산 없이 정류장 쪽으로부터 길을 걸었잖아. 네 발자국 소리가 하도 요란해서 너를 매번 알아 봤어. 학연의 시선은 변함이 없었다. 내리는 빗줄기는 쉬이 접어들지 않을 듯했다. 장마기에 접어든 열대 우림. 그 속에서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목적지도, 도착지도 존재하지 않는 애매하기 짝이 없는 길을 걷고 있었다. 나도 실은 아저씨를 알아요. 길을 걸을 때마다, 담배를 피고 있었잖아요. 꼭, 비오는 날에 담배를. 재환의 머리칼이 비바람에 흩날렸다. 깊은 눈에 오롯이 담긴 먹구름 그림자가 연 날리듯 길게 멀어졌다. 춥지 않냐며 물어 온다. 그에 학연은 옅은 숨을 내쉬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단 한 번도 제 얼굴을 바라보는 법이 없다. 어떻게, 한 치의, 일말의 찌꺼기도 없어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목구멍 깊숙히 삼키어 내고 눈을 감았다. 차디 찬 웅덩이 튀는 소리만이 학연의 복사뼈를 타고 올랐다. 손톱이 깨졌어, 아파. 당신 손톱이 왜 깨졌는지 알아요. 담배도 끊어야겠다. ……. 비 오는 날엔 불도 잘 붙지 않아. 실은, 왜 당신이 비 오는 날에만 담배를 피우는 지도 알아요. 감기 걸리지 마라. 재환은 등을 돌려 멀어졌다. 변함없이 눈을 감고 있었지만 옆을 따스히 채우는 열기가 사라짐에 쉬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학연은 생각했다.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이 내리는 절망을 헤치고 당신의 등을 붙잡아 세우고 싶다고. 얼굴을 마주보고, 마주보게 하며, 그렇게. 그제서야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무겁게 내려앉은 속눈썹이 어미 잃은 쥐새끼마냥 파들파들 떨렸다. 굳이 돌아 선 등을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알은 돌려졌다. 그리고는 힘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도, 우산 없이 바보처럼 비를 맞으면서. 재환을 처음 본 것은, 그러니까 봄 비가 한창 내리던 날. 희미하지만 더 할 나위 없이 또렷했다. 우산을 가지고 나오지 않아 비를 맞으며 정신없이 길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 여느 이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일상 속의 자그마한 변화가 생겼다. 젖어들어가는 교복, 그 이외 하나 더. 문을 닫은 꽃가게, 그 앞 진홍색 처마 밑에서 한 남자가 환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회갈색의 비구름에 젖은 눅눅한 공기 속에서도 그것은 확연히 밝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학연은 저도 모르게 급히 떼어내던 발길을 멈추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듯한 그 미소가 발목을 잡아 비틀었다. 비가 그쳤다. 학연은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재환은 항상 그 시간에 진홍색 처마 밑에 존재했다. 변함없이 행복한 미소를 띠며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겠지.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지 어언 2달이 지났을 무렵 간만의 비가 내렸다. 우산을 챙겨 나오지 않아 비를 맞아야 했지만, 학연은 주저하지 않고 또다시 그 길을 걸었다. 처마 저 편에서 걸음을 멈추어 섰다. 숨을 고르며 재환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그 자리에 있음이 맞는데 재환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염없이 울며 꽃가게의 벽을 내리쳤다. 손에서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비를 맞은 까만 동공 두 개가 재환의 손을 비추어냈다. 손톱이 깨졌어. 많이 아플텐데. 깨진, 손톱이. 꽃을 한 아름 그러쥐고 우는구나. 동네에 하나뿐인 진홍색 처마 꽃가게의 여자가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람이 재환의 연인이었다는 것을 알게된 건 나중의 일이었다. 손등으로 눈 부근을 훔쳐냈다. 주저앉을 것 같은 다리를 움켜쥐고 작게나마 걸음을 떼었다. 고개를 돌리고서 이제 아무도 없는 제 옆을 힐끗 바라보았다. 무의식적이었다. 젖은 앞머리가 미끌거리며 다시금 눈을 찔렀다. 그러나 학연은 그 자리에서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우산. 까만 우산이었다. 주워 들었다. 진동하는 손을 숨기려 악착같이 입술을 깨물었다. 우산에는 자그마한 포스트잇이 붙여져 있었다. 습기에 젖어 들러붙기 일보직전의 그 위태한 종잇조각을 떼어 내었다. 비 맞지 마. 깨진, 손톱이……. 꽃을 한 아름 그러쥐고 우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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